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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3월 15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성경 : 에베소서 5장 1-14절(신약 315)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빛을 찾습니다. 밤이 되면 불을 켜고, 길을 걸을 때도 빛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갑니다. 빛이 있어야 사물을 분명히 볼 수 있고, 안전하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는 방향을 잃기 쉽고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무엇이 앞에 있는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은 불안해지고 조심하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설명할 때 빛과 어둠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를 기록할 당시, 에베소는 아데미(디아나) 여신 숭배의 중심지로서, 성적 타락과 우상숭배, 물질주의가 만연한 도시였습니다.
복음을 받아 들이기 전에는 어둠으로 가득 차 있던 도시였는데 복음이 전해지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인해서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8절 말씀을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이 말씀은 단순히 환경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신분과 존재 자체가 바뀌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어둠 가운데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진리를 알지 못했고, 죄 가운데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너희가 어둠 속에 있었다.”라고 말하지 않으시고 “너희가 어둠이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삶이 얼마나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단순히 빛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아니라 빛이 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분을 바꾸셨습니다. 어둠의 사람을 빛의 사람으로 바꾸셨고, 죄의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로 바꾸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노력해서 만들어 낸 변화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놀라운 변화입니다.
하나은 바울 사도를 통해서 우리가 어둠이 아니라 빛이 되었다면 빛이 된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빛이 된 사람이 여전히 어둠 속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빛이 된 사람이 어둠과 같은 삶을 계속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어둠이 아닌 빛이 되었으니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빛이 된 사람은 빛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선포처럼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더 이상 어둠의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빛이 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바울 사도를 통해서 우리가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살아감에 있어서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고 하신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1. 사랑을 받은 자녀 같이 살자
너희가 이제는 빛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먼저 우리가 이 빛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이기에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면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씀했습니다. 1절을 보면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본받는 자’ 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미메테스(μιμητής)’입니다. 이 단어에서 영어 ‘mimic(흉내내다)’과 ‘mime(무언극)’가 파생되었습니다. 원래 의미는 단순한 외적 모방이 아니라, 내면에서부터 닮아가는 깊은 차원의 동화를 의미합니다.
또한 ‘자녀’로 번역된 헬라어 ‘테크나(τέκνα)’는 태어난 자녀를 의미하는데, 이 말은 성품을 물려받은 존재임을 강조합니다. 부모님의 DNA를 물려 받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기에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한 아이가 아버지와 함께 걷다가 아버지의 걸음걸이를 그대로 흉내 내는 것을 흔히 보게 됩니다. 아이는 아버지처럼 팔을 흔들고, 아버지처럼 발을 내딛습니다. 이것이 자녀가 부모를 본받는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사랑, 거룩함, 용서, 겸손을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닮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율법적 의무가 아니라, 아버지와 자녀 사이의 아름다운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의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모든 관계 속에서 ‘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다.’라고 고백하며, 그분의 성품을 드러내는 하루하루가 되어야 합니다. 누군가 나를 힘들게 할 때, ‘하나님 아버지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을 받은 자녀 같이 사랑 가운데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2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본받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자기를 버리시면서 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행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페리파테이테(περιπατεῖτε)’로, ‘걷다’라는 뜻의 동사 ‘페리파테오(περιπατέω)’의 명령형입니다. 헬라 문화에서 이 단어는 철학자들이 제자들과 걸으며 가르치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사랑은 추상적 감정이 아니라, 일상의 걸음걸이처럼 구체적이고 지속적인 삶의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향기로운 제물(ὀσμὴν εὐωδίας)’은 구약의 번제 용어로, 그리스도의 희생이 하나님께 온전히 열납된 완전한 제사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의 기준은 내 감정이나 조건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이었고, 희생적인 사랑이었으며, 자신을 내어드린 사랑이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아무 가치 없을 때, 오히려 원수였을 때 그분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을 드리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걸어야 할 사랑의 기준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얼굴을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봅니다.’ 어느 날 그녀는 길거리에서 온몸이 썩어가는 노인을 발견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피하고 싶었을 그 순간, 테레사 수녀는 그를 품에 안고 씻겨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따라 걷는 모습입니다. 사랑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이처럼 구체적이고, 때로는 희생을 요구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행하는 삶을 실천하기 위해서 내가 사랑하기 가장 어려운 사람을 떠올려 보고 그 사람을 위해 구체적으로 한 가지라도 사랑의 행동을 실천해 봅시다. 전화 한 통, 짧은 문자 메시지, 밥 한 끼 대접, 그 작은 걸음이 ‘사랑 가운데 행하는’ 삶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시험하라고 말씀합니다. 10절을 보면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여기서 ‘시험하여 보라’의 헬라어 ‘도키마존테스(δοκιμάζοντες)’는 금속을 불에 달구어 순도를 검사하는 행위에서 온 단어입니다.
금 세공인이 합금에서 불순물을 태워 순금을 가려내듯, 우리는 매 순간의 선택과 행동이 과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를 분별하고 검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번의 결단이 아니라, ‘현재 분사형’으로 기록되어 있어 지속적이고 습관적인 분별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는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선한지, 무엇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지를 끊임없이 점검해야 합니다. 로마서 12:2을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 말씀합니다. 분별력은 기도와 말씀 안에서 키워지며, 성령님의 조명하심을 통해 발전합니다.
매일 아침 하루를 시작하기 전, 혹은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봅시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 이 단순한 질문 하나가 우리의 하루를, 우리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2.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라
우리가 이제 빛이라면 그리고 빛의 자녀로 살아간다면 과거의 습관인 어둠의 일을 철저히 버려야 됩니다. 과거 어둠의 영역에 머물던 시절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주 안에서 빛이 된 성도의 삶이 아닙니다. 어둠의 일을 버리고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성도가 마땅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3절을 보면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바울은 세 가지를 열거합니다. ‘음행(πορνεία, 포르네이아)’은 모든 종류의 성적 부도덕을, ‘더러운 것(ἀκαθαρσία, 아카타르시아)’은 부정(不淨)한 모든 행위를, ‘탐욕(πλεονεξία, 플레오넥시아)’은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으로 하나님과 이웃보다 자신의 욕망을 우선시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구별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위와 같은 악들은 생각지도 말고 이야기하지도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것들은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고 강한 명령어로 기록했습니다. 당시 에베소 문화에서는 아데미 신전의 음란한 종교 의식이 일상화되어 있었고, 죄가 죄로 인식되지 않는 문화적 분위기가 만연했습니다.
바울은 그런 문화적 동화에 철저히 맞서기를 요구합니다. 성도(聖徒, 하기오스)는 ‘구별된 자’, ‘거룩하게 된 자’입니다. 거룩함은 세상과의 구별을 전제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솝 우화에 ‘개구리를 삶는 법’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끓는 물에 개구리를 넣으면 즉시 뛰어나오지만, 찬물에 넣고 서서히 가열하면 개구리는 온도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 안에서 죽고 맙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는 처음에는 작은 타협으로 시작합니다. ‘이 정도는 괜찮아’, ‘한 번만’이라는 생각이 우리를 서서히 어둠 속으로 끌어당깁니다. 성도는 처음부터 분명한 경계선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어서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권면합니다. 4절을 보면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12절을 보면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여기서 사용된 ‘누추함(αἰσχρότης, 아이스크로테스)’은 ‘부끄러운 언행을’, ‘어리석은 말(μωρολογία, 모롤로기아)’은 ‘바보 같은 말’을, ‘희롱(εὐτραπελία, 유트라펠리아)’은 ‘음란하거나 저속한 농담’을 의미합니다.
반면 ‘감사(εὐχαριστία, 유카리스티아)’는 ‘좋은(εὐ) + 은혜(χάρις)’의 합성어로, ‘은혜에 대한 인식과 고백’을 의미합니다. 입술의 언어는 그 사람의 영적 상태를 드러냅니다. 감사하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식하는 성숙한 신앙의 표현입니다.
12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어둠의 문화는 말의 타락을 통해 전파됩니다. 음담패설, 험담, 거짓말은 단순히 말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오염의 통로입니다. 성도의 입에서는 생명과 감사와 축복의 말이 흘러야 합니다.
일본의 과학자 에모토 마사루는 물에게 긍정적인 말과 부정적인 말을 들려준 후 물을 얼려 결정을 관찰하는 실험을 했습니다. ‘사랑해’, ‘감사해’라는 말을 들은 물은 아름다운 결정을 이루었지만, ‘미워’, ‘짜증나’라는 말을 들은 물은 불규칙하고 불완전한 결정을 이루었습니다. 우리의 말이 주변 환경에, 그리고 서로의 영혼에 얼마나 깊은 영향을 미치는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가능하면 ‘감사 일기’를 써보세요.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 그날 감사한 것 세 가지를 적어보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이 훈련될 때, 우리의 말도 자연스럽게 변화됩니다. 또한 습관적으로 불평하거나 험담하는 자리에서는 의도적으로 자리를 피하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지 못한다. 고 선포했습니다. 5절을 보면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바울은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라고 시작합니다.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어둠의 삶을 지속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와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기업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상속권의 박탈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집을 떠난 아들이 아버지의 풍성함을 누릴 수 없었던 것처럼, 어둠을 선택하는 자는 빛의 왕국의 축복에서 스스로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심판의 메시지가 아니라 사랑의 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둠 속에서 잃어버리는 것들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빛 안에서 풍성한 기업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우리의 삶에서 어둠을 향해 기울어진 부분이 있다면, 어둠의 일을 버리고 빛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빛과 어둠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죄와 타협하면서 동시에 성령의 능력을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안에 숨겨진 어둠의 찌꺼기들이 있다면 예수 보혈로 깨끗이 씻어내야 합니다.
3.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바울은 과거 어둠에 머물렀던 우리의 정체성이 빛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이제는 주 안에서 빛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선포하면서 우리가 주 안에서 빛이기에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8절을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바울은 ‘어둠 안에 있었다.’가 아니라 ‘어둠이었다.(ἦτε σκότος)’고 말하고, ‘빛 안에 있다’가 아니라 ‘빛이다(ἐστε φῶς)’라고 말합니다. 이는 존재의 변화를 선언한 것입니다. 우리의 본질 자체가 바뀐 것입니다! 또한 ‘주 안에서(ἐν Κυρίῳ)’라는 표현은 빛이 되는 근거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빛이라.’ 이것은 도덕적 향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근본적인 존재의 변화입니다. 구원이란 어둠에서 빛으로의 변화된 삶입니다.
빛은 스스로 빛을 만들어 낼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빛이기 때문에 빛을 발하게 되듯 우리도 영적으로 빛이 되었으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의 ‘반사체’가 아니라 주 안에서 빛의 ‘발광체’가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빛이란 헬라어는 ‘포스(φῶς)’인데 이 단어는 물리적인 빛을 넘어 생명과 진리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세상이 어둡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 있는 가정, 직장, 사회에서 바로 내가 참빛교회의 이름처럼 ‘참 빛’이 되어 영적 어둠을 몰아내야 합니다.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성도에게 빛의 열매를 맺으라고 말씀합니다. 9절을 보면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빛의 열매로 세 가지를 언급했습니다.
‘착함(ἀγαθωσύνη, 아가토쉬네)’타인을 향한 적극적인 선행과 관용입니다.
‘의로움(δικαιοσύνη, 디카이오쉬네)’하나님 앞에서의 올바른 관계와 정직입니다.
‘진실함(ἀλήθεια, 알레테이아)’거짓이 없는 순수함과 투명함입니다.
착함, 의로움, 진실함—이 세 가지는 삶의 모든 영역을 포괄합니다. 착함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격적 선함이고, 의로움은 사람 앞에서의 공정함과 정직함이며, 진실함은 말과 행동의 일치입니다.
예수님은 마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라고 말씀하시면서 마 5:16에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고 하셨습니다. 빛의 열매는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14절을 보면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이 구절은 초대 교회에서 불리던 찬송시 혹은 세례 선언문의 일부로 여겨집니다. ‘잠자는 자여(ὁ καθεύδων)’는 영적 무감각 상태를, ‘깨어서(ἔγειρε)’는 명령형으로 즉각적인 각성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ἀνάστα ἐκ τῶν νεκρῶν)’는 부활을 연상시키는 강력한 이미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추이시리라(ἐπιφαύσει σοι ὁ Χριστός)’여기서 ‘비추다(ἐπιφαύσει)’는 ‘아침 해가 떠오르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잠에서 깨어날 때 아침 햇살이 방 안을 가득 채우듯, 영적으로 깨어날 때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 삶을 가득 채웁니다.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사람, 어둠에 익숙해진 사람, 영적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 함께 누워있는 사람들을 향해 ‘깨어나라! 일어나라!’ 그러면‘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일어나는 것은 사람들의 몫이지만, 빛을 비추는 것은 그리스도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일어나는 결단을 할 때, 그리스도의 빛이 반드시 임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세 가지 말씀을 들었습니다.
첫째, 사랑받은 자녀로서 하나님을 본받고, 사랑 가운데 행하며,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라.
둘째,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감사하는 말을 하며,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소중히 여기라.
셋째, 이제는 주 안에서 빛으로서, 빛의 열매를 맺고, 영적 잠에서 깨어나라.
빛은 어둠과 공존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작은 촛불 하나라도 어둠을 밀어냅니다. 빛이 오면 어둠은 저절로 물러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빛이 될 때, 우리 주변의 어둠은 반드시 물러갑니다. 가정의 어둠이, 직장의 어둠이, 이 사회의 어둠이 물러갈 것입니다.
우리는 어둠의 자녀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주 안에서 빛입니다.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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