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밥 한 그릇
오랜만에 내린 가을비는 대지를 촉촉이 적셨다. 가지에 매달린 몇 잎의 단풍이 가늘게 떤다. 배추는 소금 세례를 맞은 듯 생기가 없고, 호기롭게 뻗던 무도 푸리 팅팅해지면서 제 모습을 잃었다. 농부의 손이 미치지 않은 벼는 갈대 빛을 닮아간다.
옛날, 추수 때는 온 들판이 시끌시끌하다. 땀으로 얼룩진 촌부의 모습은 어디 가고 매연을 뿜어대는 농기계의 엔진 소리만 황량함을 더해준다. 이삭줍기 같은 낭만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를 마치면 들판에서 참새를 쫓는 일과 메뚜기 잡는 일이었다. 다 지은 농사, 벼 한 톨이라도 지키고자 허름한 옷을 걸친 허수아비를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연결된 새끼줄로 그놈을 흔드는 것이 방과 후 일이었다. 비바람을 무릅쓰고 줄기차게 보초를 서고 있지만 영악한 참새는 도리어 그를 놀린다. 꽹과리나 양푼으로 두들겨도 잠시뿐, 연방 날아와 약을 올린다.
메뚜기도 예외는 아니다. 펄벅의 '대지'에 그려진 풍년의 터부처럼 행여나 그들이 습격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풍년이 들었어도 그놈들이 들을까 봐 말조차 조심한다. 성서 구약에는 모세가 메뚜기의 재앙을 예언하였으니 무서운 곤충임은 분명하다. 벼가 누렇게 익을 때 메뚜기는 지천으로 뛰어논다. 암컷은 수컷을 등에 업고 폴폴 난다.
“누부야 메뚜기 어불랑 붙은 모양이제?”라는 말에 누나의 얼굴은 발그레 물이 든다. 사랑을 나누는 그들을 생포하여 주머니에 가뒀으니 많이 미워했을 거다. 벼에 폐해를 주지만, 반찬으론 일품이라 참새만큼 얄밉지는 않았다.
풍년이 들기보다는 흉년이 드는 횟수가 더 잦았다. 대부분 천수답이라, 오랜 가뭄으로 논바닥이 갈라지고 벼 잎이 타들면 농부의 속도 가맣게 탄다. 도열병에 걸리기라도 하면 이삭을 피우지도 못한 채 바싹 말라버린다.
'서직장읍불배 두태앙천대소<黍稷長揖不拜 豆太仰天大笑 벼와 기장은 길게 읍하여 절하지 아니하고, 팥과 콩은 하늘을 향해 크게 웃고 있다>'라는 흉년의 아픔을 담은 해학 성 상소가 빗발쳤다. 갈아엎은 벼 대신에 메밀꽃이 온 들판을 하얗게 수놓을 때, 농민의 탄식 소리는 끊일 날이 없었으리라.
먹을 양식은 항상 부족했다. 벼가 채 익기도 전에 찐 쌀로 밥을 해먹기 일쑤였다. 상당수 농가는 곡식을 꿔다 먹었다. 한 가마를 빌리면 다음 추수 때는 반 가마니를 얹어서 돌려줘야 하고, 심지어는 곱절로 갚아야 했다. 이 같은 악순환으로 쌀독은 연방 빈다. 이듬해 봄, 보리가 날 때까지 허리끈을 졸라매어야 했으니……. 비록 가난은 하였지만, 담장 너머로 먹을 것이 넘어간다. 중참을 나눠 먹는 훈훈한 풍습은 들판에 질펀하였다.
하얀 쌀밥, 듣기만 하여도 부러운 존재였다. 한 톨의 쌀을 생산하기 위해서 우리의 농부는 무더운 더위를 마다치 않았다. 떨어지는 땀방울로 적삼을 적시면서 수백 번 허리를 굽힌 정성의 결실이 한 톨의 쌀이다. 아버지와 나의 밥그릇에만 몇 톨의 쌀이 섞이고 어머니와 누나들 그릇에는 구경할 수 없었다. 보리밥도 배불리 못 먹은 누나 둘은 일찍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내 몫을 후딱 해치우고 누나의 밥그릇을 넘보면 먹던 밥그릇을 슬며시 밀어놓지 않았던가. 지금도 먹을 것이 있으면 손부터 먼저 나간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라는 말은 나를 두고 이르는 모양이다.
내 배만 채우려던 철없던 행동을 따뜻하게 감싸준 누나의 손길이 그립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쌀밥 한 그릇을 누나의 묘소 앞에 갖다 놓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