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몽돌 해수욕장에서
아침에 창을 여니 언뜻언뜻 푸른 하늘이 보인다. 일찍 찾아온 장마로 직원연수에 차질이 없을까 염려하여 며칠 동안 신경을 쓴 때문일까 푸른 하늘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간혹 다른 학교는 물 건너로 연수를 떠난다지만 거제도 지방에서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조상의 숨결을 느끼는 1박 2일 코스 국내연수로 만족해야 한다. 그러나 거제도 또한 물건너기는 마친가지이고 보면 오히려 훌륭한 선택을 한 것 같기도 하다.
떠남은 누구에게나 즐거운 것, 중부. 경부. 대진고속도로를 거치며 죽암휴게소와 산청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어린 아이마냥 들뜬 마음으로 허이허이 달려 오후 8시 학동 몽돌해수욕장에 도착하였다. 경상남도 거제시 동부면 학동리, 지형이 비상하는 학과 같다고 하여 학동이라고 한다. 바로 앞에 길이 1.2K, 폭50m, 면적3만Km² 작고 반들반들하고 새까만 몽돌(오랫동안 닳아서 둥글둥글해진 돌)이 지천으로 널려있는 국내 최고의 몽돌해수욕장이다. 아직 성수기가 아니라서인가 파라솔만 날개를 접은 채 좌우로 열을 맞춰 서 있을 뿐 사람은 없다.
티파니리조텔에 여장을 풀고 저녁 식사 시간이다. 뭐니뭐니 해도 여행은 먹거리 여행이 제격인데 한발 앞서 다른 학교가 식사를 하고 갔다. 그 바람에 무엇 하나 푸짐한 것 없이 흡족하지 못한 탓일까 모두들 심드렁한 표정이다. 그럭저럭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들려고 하지만 이별여행이라서일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뒤척이다보니 자정이 지났지만 모래톱이 아닌 몽돌해변에 삼삼오오 짝을 지어 왁짜지껄하다. 해방감이 저런 것인가. 간간이 들리는 익숙한 동료들의 목소리가 잠을 쫓는다. 연인들은 밤바다를 즐긴다는데 나야 문외한이니 밤바다보다 아침바다가 내 수준에 맞는다고나 할까. 불면으로 인한 환청일까 어둠 속에 부서지는 파도소리가 유난히 경쾌하다. 어서 빨리 찬란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영혼을 뒤흔드는 전율을 맛보고 싶다.
새벽 5시 30분 기상, 해변에 나가니 부지런한 어촌 사람들이 간밤 여행객들이 버린 쓰레기도 줍고 파도에 밀려온 부유물을 치우느라 바삐 움직인다. 못다한 이야기의 끈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두어 팀 젊은이들이 눕기도 하고 앉기도 한 채로 이야기가 한창이다. 음료수와 빈술병이 쌓여 있는 것으로 보아 밤을 샌 모양인데 눌러앉은 자리에서 일어설 줄 모른다.
해변을 걷는 재미는 파도가 깨끗하게 쓸어버린 모래톱에 발자국을 남기며 파도에 젖을 듯 말 듯 촉촉한 바지가랭이에 바닷모래가 묻어나는 거기에 있다. 그러나 몽돌해수욕장은 그런 낭만보다는 발바닥이 허약한 현대인이 지압체험에 딱 좋은 초현대식 웰빙 코스이다. 나는 신발을 벗은 채 지압을 즐기며 바닷물에 젖은 새까만 몽돌을 손에 쥐어 본다. 기분이 그런 건가 지압으로 발바닥이 아프긴 하지만 차츰차츰 발끝에서 머리까지 전이되는 부드러운 느낌이 그야말로 묘하다.
둥글둥글 탐스런 오석이 너무 예뻐 손에 들고 있기도 아까운데 이 예쁘고 아름다운 몽돌이 만들어 내는 소리가 한국의 아름다운 소리 100선에 올라 있단다. ‘쏴, 자갈자갈’ ‘쏴, 자갈자갈’ 파도가 밀려오고 빠져나가는 소리가 아름다운 속삭임을 반복한다.
오랜 세월 이리저리 부딪치며 다듬어진 몽돌을 보며 사람도 크고 작은 일로 토라지고 남을 미워하기보다는 몽돌처럼 모나지 않게 둥글둥글 살아갈 수는 없을까 생각한다. 모난 돌은 세차게 흐르는 물속에서 수난을 겪으며 주먹 같은 몽돌이 되고, 몽돌은 물흐름을 거슬리지 않고 약간은 부딪치며 아름답고 청아한 소리를 낸다. 들쭉날쭉한 돌멩이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이 아름다운 소리를 내듯이 크고 작은 고통이 있은 후에야 우리 인생도 빛난다. 우리 사람도 부부간에 부모 자식간에 이웃간에 부딪치며 다듬어진 생활 속에서 미담을 남기지 않을까.
다른 사람은 그만두고 나는 어떤가. 자질구레한 것은 잊고 대범하게 살려고 하지만 분별없이 제멋대로 살던 젊은 시절과는 달리 행동거지 하나, 말 한마디까지도 다시 곱씹어 보게 된다. 아직도 다듬어지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로 상대방을 아프게 하기도 하고 내 스스로의 상처를 만들며 살고 있으니 언제쯤 제대로 된 반듯한 내 모습을 찾을 수 있을까. 비우고 또 비우고 텅 빈 가운데 채워져 오는 무게를 원숙미라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나이가 차야 어른이 된다는 말이 설득력이 있는가 보다.
그런데 한 템포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세월, 지난날이 급행 수준이었다면 이제 남은 계절들은 고속철 보다 더 빨리 살과 같이 지나가겠지. 수많은 지난 날 울며불며 얼마나 팽팽한 긴장이 되풀이 되었던가. 긴장의 끈을 잠시도 늦출 수 없었던 생활 속에서 순리대로 산다고 하면서도 너무나 많은 겉치레와 너무나 많은 제약 속에서 진정한 나를 잃어버리고 살아온 지난날들이 아닌가, 늦었지만 이제라도 부질없는 욕망의 끈을 뚝뚝 끊어버리고 자연상태로 돌아가 살기를 소망하지만 세속에 길들여진 내 쓸데없는 긴장의 끈을 쉬 끊어버리지 못하는 걸 어찌하랴.
나는 인생을 다시 살 수만 있다면 부질없는 욕망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롭고 싶다. 나를 쏘아보며 구속하는 세상의 두려운 눈초리를 벗어나 마음껏 자유롭고 싶다. 평화롭고 한가로운 평원에도 생존경쟁의 피비린내 나는 밤이 지나면 눈부신 아침이 찾아오듯 내 인생에 있어 새로운 행복의 아침은 찾아오리라. 그러면 나에게 다가온 아름다운 순간들을 기꺼이 누리며 살아가리라.
바람이 불어온다. 행복을 싣고 바람이 불어온다. (생각하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