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말의 작용과 의미
─ 발견과 표현
│ 김석준(시인·평론가)
시란 언어놀음이다. 시란 언어와의 싸움이다. 시란 낯선 말을 친숙한 말로 혹은 친숙한 말을 낯선 말로 치환시키는 과정 중에 생성된다. 허나 시말은 그리 쉽게 시인에게 현시되지 않는다. 시말은 언제나 발견과 표현이라는 이중의 제의를 통과할 때라야만 온전한 의미의 시적 언어를 이 세계에 현시하게 된다. 왜냐하면 원래 시말은 인간에게 속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말은 분명 인간의 말일 수 없다. 시말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인간의 한계 능력 밖에서 작동하는 초월적 기호의 운동이다. 하여 시말의 궁극적 목적은 새로운 의미-지시 관계를 통해서 이 세계를 새롭게 정의 내리는데 있다.
물론 이러한 시적 경지는 새로운 시적 정전正典의 출현을 예고하는 시말운동의 정점이지만, 누구나 다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거의 대부분의 시인은 표현이 주는 저 지고한 황홀의 순간에 도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시적 발견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다시 말해서 시말운동은 발견의 영역에서 표현의 영역으로 이행할 때, 가장 완벽한 시말혁명을 이룩하는데, 시말운동의 시발점은 항상 발견에 있다. 발견은 신세계에 이르는 문이다. 하여 발견은 전일한 의식의 집중 속에서 대상 가능성의 의미론적 층위를 읽거나 새로운 의미관계가 생성되는 순간이다. 허나 발견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거나 진짜 우연이다. 발견은 시에게로 가는 길 사이사이에 숨어 있던 의미가 던져지는 순간이다.
찰싹 붙어 앵앵거리고 징징거리고 떼쓰고 조르고 보채고 비비적댄다 10초에 한 번씩 나 사랑해? 진짜 사랑해? 얼마큼 사랑해? 묻는다. 집 앞까지 바래다주지 않거나 촌스러운 머리핀을 사주거나 맛없는 밥집에 가자고 하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목 놓아 운다
- 조영순, 「詩」 『서정과 상상』 봄호
아름다운 한 구절의 어휘를 만난다는 것은 진짜 행운이다. 한 줄의 시가 시적 혁명의 주체일 수도 있다. 허나 그 행운을 누리는 영광은 아무한테나 주어지지 않는다. 조영순 시인의 말처럼 시말은 그렇게 쉽게 시인의 품에 안기는 것 같지는 않다. 시란 랭보처럼 지옥에서 한 철을 보내거나 천상병처럼 죽음의 근방을 헤맬 때만 아름다운 시말을 현시하는 것 같다. 시말은 본성상 에고이스트다. 시말은 진짜 자기만을 사랑하라고 강요하는 요부 양귀비이다. 시말은 전제자이다. 시말은 올인이다. 시말은 삶의 에너지 총량이 투여될 때만, 혹은 의식이 시적 대상에 완전히 몰입한 순간에만 새롭게 현시된다.
조영순의 「詩」는 그러한 시말의 본성을 정확하게 알아채고 있는 것 같다. 끊임없이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연인처럼 시는 항상 시인의 마음과 의식을 혼란시키면서 시말 속에 시인의 영혼이 얹히기를 소망한다. 따라서 젊음을 얻기 위해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저당 잡힌 파우스트처럼, 시말은 운명을 건 자에게만 현시된다. 이때 이 시말은 발견된 시말이 아니라, 표현된 시말이다. 표현은 시말을 이중으로 매개시키는데, 한편으로는 발견된 시말, 즉 이 세계의 세계성을 정확하게 인지 포착하여 그 시말을 유일성으로 고양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 유일한 시적 사태를 보편성으로 승화시킨다. 따라서 표현은 미적 개별성의 극한 값을 끊임없이 미분해도 남는 그 어떤 절대 값이다.
도봉산 회룡사 건너
깊은 산길에 들어서니
나무다리 입구에
‘근양 간다’란 낙서가 휘갈겨 있다
‘그냥 간다’를 ‘근양 간다’라 잘못 쓴 걸까
세심교나 해탈교를 건널 때 보던
화두처럼 번쩍 눈에 뜨인다
세상만사 무엇에도 끄달리지 않겠다는
‘근양 간다’는 말
근양이 어디일까?
뿌리 根, 볕 陽!
‘빛의 뿌리’의 나라에 간다는 걸까
까마귀 꽉꽉 울어쌓는
포대능선을 천천히 걷다보니
‘근양 간다’는 말이
서늘하다
벼랑 끝에 앉아 허공을 내다보는
황조롱이 한 마리 햇볕 속에 찬란하다
근양이 이곳이구나
아무 까닭 없이 까탈 없이
그냥, 근양 간다
- 나병춘, 「근양 간다」 『우리시』 4월호
발견은 관심이다. 발견은 의식이 가닿는 지점에서 생기하는 시말 - 사태인데, 그것은 무심히 지나치다가 말의 배후 혹은 사태의 심연에 이르는 전일한 의식이다. 발견은 마음이 시의 눈을 틔워 새로운 의미관계를 읽는 순간인데, 나병춘의 「근양 간다」는 시적 발견자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발견은 의심이다. 발견은 통념의 전도이다. 발견은 새로운 의미읽기이다. 발견은 시가 발원하는 지점이다. 발견은 기존의 대상관계를 해체시키면서 새로운 대상관계를 명명하는 순간이다.
허나 발견은 표현의 심연에 이르기 위한 초석인데, 시인 나병춘은 ‘그냥’과 ‘근양’ 사이에서 의미 표현의 지점으로 이입해 들어가고 있다. 분명 ‘근양’은 ‘그냥’의 잘못된 표기일지도 모른다. 허나 나병춘은 시말의 심연 속을 응시하면서 인간의 삶에 관한 양태를 정의하기에 이른다. 양태부사 ‘그냥’을 공간을 지칭하는 고유명사 ‘근양’으로 전도시킬 때, 시말은 새로운 의미를 분출하게 된다. 근양은 별세계이다. 근양은 인간이 가보지 못했거나 갈 수 없는 곳이다. 근양은 시인이 창조한 의식의 공간이다. 근양은 시인 나병춘만이 볼 수 있는 공간이다.
허나 나병춘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조금 더 나아가 ‘근양 간다’를 하나의 화두 삼아 화엄적 깨달음의 지점을 응시하고 있는 것 같다. 빛 뿌리의 지점을 몽상하다가 그가 이내 말의 서늘함을 느꼈을 때, 혹은 근양이 황조롱이 나는 바로 이 공간임을 감지했을 때, ‘근양’은 다시 ‘그냥’으로 의미론적 전도를 일으킨다. 깨달음은 늘 그렇다. 깨달음은 언제나 전도의 전도를 준비하면서 전도된 전도를 다시 전도시킨다. 따라서 시인 나병춘은 “근양이 이곳이구나”라고 정의 내리게 된다. 나병춘의 ‘그냥→ 근양→ 그냥’으로의 의식의 이행과정은 화엄의 원리와 정확하게 대응된다.
장례식장 구석구석 화분이 즐비하다
햇빛 한 점 들지 않았는데
식물의 잎사귀는 제 스스로 짙고 푸르다
도무지 시들 줄 모르는
벤자민 나무를 보고
“실내에서도 잘 자랐네” 내가 말하자
“조화잖아” 누가 대꾸한다
내 팔목에 채워진 에르메스 시계가
짝퉁인 것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듯
진짜와 가짜의 차이는 그저
박음질 한 땀 차이일 수도 있겠다
생화일까, 조화일까, 서로 말을 섞다가
누가 꽃송이를 똑 분질러 본다
이런 생화구나
죽어서야 겨우 자신을 증명했던
망자처럼 제 모가지를 분질러서야
진짜는 가짜가 아님을 증명하는 것일까?
여전히 내 손목시계는 자정을 무사히 지나가고
거짓말처럼 산사람은 살아있다
- 손현숙, 「짝퉁」 『현대시학』 3월호
시가 발견하고 표현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시는 시말 속에 어떤 말 - 사태를 기술하고 또 의미를 내파시키는가. 시란 그 자체로 허구가 아닌가. 시란 그 자체로 단순한 말놀이 아닌가. 만약에 시가 진실을 겨냥할 때, 시말은 진실 그 자체를 지시 언표할 수 있는가.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시말은 실재에의 대응이라는 진리성을 담보하고 있는가. 윌리엄 제임스나 존 듀이의 화용론적 실용주의처럼 시적 진술이 진리(실)가 아니라 단지 믿어서 좋은 것이거나 일종에 픽션담론일 뿐이라면, 시는 무엇을 표상해야만 하는가. 손현숙의 「짝퉁」은 프래그마티즘과 진리실재론 사이에서 우리가 느껴 아는 그 진실(진리)이 진짜인가 아닌가를 묻게 만든다.
도대체 진짜는 뭐고 가짜는 무엇이지. 또 짝퉁은 뭐고 명품은 무엇이지. 시인 손현숙이 조화와 생화 사이 혹은 명품 에르메스 시계와 짝퉁 에르메스 시계 사이를 주파해 갈 때, 그는 이러한 시적 사태를 통해서 진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만약에 박음질 한 땀 차이가 진짜와 가짜의 차이라면, 혹은 진짜와 가짜의 차이 구분은 꽃송이를 똑 분질러 본 후에 알 수 있다면, 더 나아가 죽음을 통해서만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있다면, 우리 인간에게 진실(리)은 아무런 효용가치가 없는 것은 아닌가. 손현숙의 「짝퉁」은 이 세계를 채우고 있는 그 모든 사태가 착종된 가치체계 위에서 기술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만든다. 비록 인간이 진실과 허구 사이에서 진짜를 구분하기 위해 안간힘 쓰지만, 우리는 어쩌면 진짜를 모르고 죽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진짜를 증명하는 방식은 언제나 “죽어서야 겨우 자신을 증명”하는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손현숙이 “여전히 내 손목시계는 자정을 무사히 지나가고 / 거짓말처럼 산사람은 살아있다”라고 시적 결론을 맺었을 때,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생 전체가 거짓말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승인하게 만든다. 어쩌면 생은 그 자체로 짝퉁이거나 진실(리)이라는 기만의 덫에 걸려 죽어갈 운명과 같은 그 무엇인지도 모른다. 아니 진짜와 가짜 사이에 진짜도 아니고 가짜도 아닌 짝퉁, 즉 진짜인 체하는 가짜의 형상이 생 전체를 기만시키고 있다.
백양사 요사채의 팻말, <스님 수련 중 출입금지> 사립문 밀다 멈칫거린다
데리다 -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길을 잘못 들어 차를 세우고 들녘에 앉다 마음이 편하다
몇 생의 하늘을 지나온 새 두어 마리 전신줄에 착한 음표로 연주되면서 떠나간다
겨울 하늘 남빛, 마른 가지 하나만 허용하는 그 텅빔
장자 - 텍스트는 없다
- 이성희, 「겨울 행려」 『시에』 봄호
데리다와 장자 사이에 말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데리다와 장자 사이에 의미가 있기도 하고 의미를 말소시키도 한다. 하여 데리다와 장자는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문자의 즉자 - 대자운동만을 신뢰했던 데리다, 말했던 말조차 적멸시키고 싶었던 장자. 허나 둘 다 진짜 많은 말을 남기는 아이러니를 연출했다. 해체와 부정성. 전도의 전도. 말놀이적 유희. 현대와 고대의 해체론자는 늘 텍스트와 논쟁 중이다. 텍스트 밖에 아무것도 없건, 텍스트 자체가 없건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진짜 중요한 것은 잘못 들어선 길과 텅빔의 인간학적 사태이다.
데리다의 해체론적 문자의 차연운동이건, 장자의 부정적 상승에의 의지가 하강적 현실 긍정으로 이행하건 상관없이, 문제는 이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론적 양태에 있다. 이성희의 「겨울 행려」는 장자와 데리다의 말에 속아서는 안 된다. 문제는 인간학적인 삶에의 길이 진짜 문제다. 어쩌면 우리가 잘 살아간다고 생각 판단하는 그 길이 언구렁청에 빠져 헤매는 것이고, 잘못 들어섰다고 생각한 그 곳이 진짜 평화가 존재하는 공간인지도 모른다. 생은 그렇다. 생은 늘 그렇게 역전된다. 생은 늘 그렇게 역전 전도되어 새로운 생의 길을 만든다. 채우고, 비우고, 잘못 들어서고 하는 그 수많은 생의 흔적들 속에서 이 세계 전체는 그 자체로 하나의 텍스트가 된다. 허나 텅 비운다. 텍스트를 지운다. 그것이 생이다. 다 비우고 다 지워서 겨울을 유랑하여 끝내는 소멸하는, 저 적멸에의 의지가 바로 생이다. 따라서 장자도 없고 나도 없다. 하여 텍스트는 텅 비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