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지루하고 갑갑할 때, 희망도 절망도 없는 어쩌면 우리의 ‘오늘’일지도 모르는 순간들에 설렘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두 군데의 가게를 찾아가보려고 한다. 어쩐지 1950년대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거리에 자리한 가장 작고 볼품없는 ‘히다리 포목점’과 왼쪽 눈 아래 작은 점, 작은 입술, 늘 쪽진 머리를 한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야마모토 귀 파주는 가게’이다. 단지 고운 포목만 판다거나, 귀만 파주는 곳이 아니다. 이 두 곳은 콤플렉스로 똘똘 뭉친 사람, 무기력에 빠진 사람, 마음이 답답한 모든 사람들을 평온하고 행복하게 한다. 두 아주머니의 ‘위로’인지도 모르고 지나치는 특별한 위로의 순간들, 소소하다 못해 사소한 것들을 통해 자신감을 얻게 된다. 마법 같은 힘을 가진 이 두 곳을 방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마음을 다독일 ‘힐링 노하우’를 배워보자.
"스스로의 상처를 보듬을 수 있는, 마음의 위로를 얻게 되는 곳 히다리 포목점과 야마모토 귀 파주는 가게에 가다 "
'히다리 포목점' 오기가미 나오코 지음 / 민경욱 옮김 / 푸른숲 펴냄
'야마모토 귀 파주는 가게' 아베 야로 지음 / 한나리 옮김 / 미우 펴냄
Healing knowhow 01 행복했던 순간 떠올려보기
누구나 어릴 적 추억의 장소와 물건이 하나쯤은 있다. 이유 없이 집착하고 까닭 없이 좋아하는. 나는 엄마방 옷장을 참 좋아했다. 철지난 옷들의 쾌쾌한 냄새와 바지런히 넣어둔 좀약냄새가 섞인 특유의 냄새. 걸어놓은 옷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앉아 노래도 부르고, 구구단도 외고, 스르르 잠이 들기도 했다. 그곳은 내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추억의 장소다.
[히다리 포목점] 첫번째 이야기의 주인공 모리오에겐 어머니의 발판 재봉틀이 그런 존재다. 앞뒤로 흔들리는 페달, 가죽벨트와 함께 도는 철제바퀴, 아련하게 풍기는 기름냄새, 어머니 발로 발판을 구를 때마다 울리는 ‘다다다다’ 발판소리. 모리오에게 어머니의 재봉틀은 깊은 추억이자 어린 시절의 상징이다. 돌아가신 어머니 유품을 정리하다 낡은 재봉틀을 발견한 모리오는 자신의 집으로 가져가 무언가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어린 시절 좋아했던 꽃무늬를 찾아 포목점들이 늘어서 있는 거리로 나서지만, 그때 그 느낌의 포목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발견한 ‘히다리 포목점!’ 그곳에서 모리오는 추억의 꽃무늬를 발견하고 따듯한 봄 향기가 날 것 같은 천을 골라 치마를 만든다. 어린 시절 엄마가 재봉틀을 돌릴 적마다 입었던 그 치마를, 자신을 위해 재현한다.
남자가 치마라니 좀 우스꽝스럽지만, 어쩐지 팔자 눈썹을 가져, 늘 슬픈 표정을 한 모리오에겐 어울릴 법도 하다. 그가 치마를 완성하고 나서는 왠지 눈썹을 보기 좋게 움직이며 환한 미소를 지을 것만 같다. 무기력하고 무미건조한 일상을 싹 다 잊은 표정으로 말이다. 추억의 물건은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
Healing knowhow 02 지금 이 순간을 집중하기
모리오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소녀 카트린느는 늘 머리가 아프다. 비가 오는 날이면 머리가 깨지는 것처럼 아픈 그녀에게 매년 장마철은 공포에 가깝다. 잠도 잘 수 없고, 무언가를 먹을 수도 없다. 그런데 어느날 윗집에서 들리는 ‘다다다다’ 소리에 소녀는 스르르 잠이 든다. 장마철의 달콤한 잠. 재봉틀 소리가 카트린느에겐 아스피린보다 더 강력한 진통제였던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위로는 몰래온 손님처럼 당황스러웠지만, 소녀는 이내 반갑게 맞이한다. 한숨이 뱃속 깊은 곳부터 올라오는 날, 혹은 누군가가 원망스럽고 미운 날, 늘 습관처럼 꽂고 다니는 이어폰을 빼고, 버릇처럼 집에 도착하면 켜는 텔레비전을 잠시 끄고 일상의 소리에 집중해보면 어떨까? 어쩌면 그동안 쭉 놓치고 살았는지도 모르는 나만의 ‘힐링 사운드’ ‘힐링모먼트’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늘 소중한 건 잘 보이지 않는 법이니까.
Healing knowhow 03 자신감 회복하기
‘에우’라는 청년은 고양이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 때문인지, 하루 10시간 이상은 자야만 몸을 겨우 움직일 수 있을 만큼 독특한 체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파트타임 일자리를 겨우 구하지만, 그마저 얼마 지나지 않아 해고되는 생활의 연속이다. 에우의 삶이란 무기력 그 자체다. 할 수 있는 것도 딱히 없어 보인다. 그가 안쓰러워지기 시작할 쯤, ‘히다리 포목점’ 아주머니와 그녀의 고양이 ‘사부로씨’는 에우를 발견하고, 아주 특별한 그만의 재주를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고양이를 상대하는 일’ (절대 돌봐주는 일이 아니라 상대하는 일!) 주인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양이의 비밀을 알아내고, 그들이 원하는 걸 주인에게 알려준다. 비록 사람에겐 늘 외면당했던 에우지만 고양이를 상대하는 일에서는 아주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다. 누구나 숨은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일생 동안 그 재능을 찾아서 발휘하는 사람들은 겨우 2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운이 좋아 우리도 알아봐주는 이들을 만나 숨은 재능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그러니 우리 스스로가 히다리 포목점 아주머니, 혹은 사부로씨가 되어보자. 실내 야구장에서 공을 기막히게 때려내는 재능, 전화번호를 외는 재능, 눈감고도 천원짜리와만원짜리를 구분하는 재능, 그 무엇이든 말이다. 무언가를 잘한다는 건 사소한 것일지라도 참 기분 좋은 일이니까.
Healing knowhow 04 누군가에게 기대보기
귀이개로 귀를 팔 때의 쾌감. 느껴본 사람은 다 알 것이다. 할머니 무릎에 누워 느끼던 조심스런 손놀림을 나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커다란 귓밥이 나오면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한 후, 시키지 않아도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그러다 따듯한 할머니의 숨소리와 손길 때문인지 이내 새근새근 잠이 들곤 했다. 어쩌면 내가 좋아했던 건, 귀를 파는 일이 아니라 할머니의 포근한 손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야마모토 귀 파주는 가게를 읽는 내내 귀가 간질간질했다. 야마모토 아주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눈을 꼭 감고 몸을 맡기는 상상을 해보니, 어릴 적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운 것처럼 편안해진다. 야마모토 귀 파주는 가게에는 제각각 다른 직업과 성격을 가진 이들이 찾아온다. 아주머니가 주는 별다른 솔루션은 없다. 사람들은 그저 아주머니 볼에 찍힌 점을 빤히 응시하며 귓속이 시원해지길 기다리는 것. 사실, 고민의 대부분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혼자 끙끙거리지만 말고 야마모토 아주머니에게 귀를 맡기듯, 내 마음을 누군가에게 진솔하게 털어놓으면 어떨까? 누가 아는가, 바로 그 사람이 나의 야마모토 아주머니일지, 그녀처럼 ‘후우’ 하고 내 걱정들을 날려줄지.
Healing knowhow 05 나도 ‘소중한’ 존재라는 걸 기억하기
야마모토 아주머니도 한때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도서관 한쪽 구석에서 늘 잠을 청하던 하얀 피부의 단정한 매력을 가진 소녀였다. 하지만 어른이 된 그녀는, 걱정을 한가득 안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자신의 무릎을 내어주고 아주 조심스레, 정성껏 사람들의 귀를 파준다. ‘무슨 일이 있으세요?’ ‘다 괜찮아질 거예요’ 같은 빤한 안부나 위로의 말을 건네지도 않는다. 그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고 막힌 귀를 뚫어줄 뿐이다. 자신의 키보다도 더 길게 머리를 길렀던 세이지씨가어느날 삭발을 하고 나타나도, 당장이라도 아이가 나올 것 같은 만삭의 나오미가 찾아왔을 때도 야마모토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물론 그녀에게도 다른 이들처럼 인생의 크고 작은 걱정거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작 자신은 누구에게서 위로 받았을까?
‘그녀를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위로 받는 건 아닐까’ 나는 조심스럽게 짐작해본다. 따듯한 마음은 일방적이지 않으니까 말이다. 누군가 나를 믿어준다는 것(예민한 귀를 맡긴다는 건 보통 믿어서는 될 일이 아니다), 나를 통해 한결 밝은 표정이 된다는 건 더없이 기분 좋은 일이다. 스스로 한심하게 느껴질 때, 이유 없이 자신이 원망스러울 때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귀를 맡겨야 하지만, 그런 내가 동시에 (귀를 맡김으로써) 위로를 주고 있는 사람임을 기억하자. 누군가의 소중한 자녀이고, 좋은 친구임을, 때로는 다정한 연인임을 힘든 순간마다 기억하자. 그리고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면, 그건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확실한 증거라는 것도 잊지 말자.
발행2013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