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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농(神農) 신농은 중국의 고대 전설상의 존재로 복희·여와와 더불어 삼황(三皇)이라 불린다. 이들은 어떤 개인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복희의 뒤를 이어 여와 시대가 있었고, 그 다음에 염제(炎帝) 신농씨의 천하가 8대 530년간 지속되다가 첫째 황제(皇帝)인 황제(黃帝)에게로 넘어갔다고 알려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농은 농업의 발명자이며 의약을 창시했다고 한다. 「회남자(淮南子)」에서는 '신농이 백성들에게 오곡을 파종하는 방법을 가르쳤으며, … 백 가지 약물의 맛을 보았다. … 이 때에 하루에 70가지씩 맛을 보았다.'라고 했다. 「사기(史記)」에서도 '신농씨가 백 가지 약초를 맛보아 비로소 의학이 시작되었다.'라고 했다. 후세에 와서 「신농본초경」이라는 책이 나타났는데, 이 책은 신농씨가 직접 쓴 것이 아니며, 대략 동한(東漢)시기에 쓰여진 작자 미상이다. 그 내용을 보면 365종의 약물을 독성의 차이에 따라 상약(上藥), 중약(中藥), 하약(下藥)으로 나누었다. 상약은 독이 없고 기(氣)를 보태주므로 오래도록 복용할 수 있는 것이고, 중약은 독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으로 주로 질병을 치료하면서도 몸을 이롭게 하는 데 쓰이고, 하약은 독이 많아서 주로 병을 치료하는 데 쓰이며 오래 복용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각 약물의 맛과 성질을 밝혀놓아 이론과 임상을 결부시켰으며, 응용 범위에 대해서도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다. 예를 들어서 임산부의 금기약을 76종으로 명확히 구별하여, 실제로 사용함에 있어서 주의를 기울일 수 있도록 하였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본초학의 시조로 인정받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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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작(扁鵲)
편작은 중국 전국시대의 뛰어난 의사로서 기원전 5세기 전후에 살았다. 발해군 사람으로서 성은 진씨(秦氏), 이름은 월인(越人)이다. 그는 젊었을 때 객사장(客舍長)으로 있었는데, 손님 가운데 장상군이라는 사람이 편작의 가능성을 보고 의술과 비방을 그에게 전해 주었다. 편작은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전심전력으로 대중을 위해 질병 치료에 임했으며 명예나 지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사마천은 「사기(史記)」를 저술할 때 특별히 편작의 입전(立傳)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편작은 정사(正史) 중에 처음으로 기록된 의학자가 되었다. 사마천의 「편작열전」에 보면, 진월인은 일찌기 부인과 의사, 소아과 의사, 오관과 의사 등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진 신분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다른 나라에 들어가서는 각지의 부인, 소아, 노인 등의 질병을 치료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한번은 그가 괵나라에 들렀을 때, 태자가 갑자기 죽었다 하여 온 나라 사람들이 슬픔에 잠겨 있었다. 편작은 그 소식을 듣고 왕궁에 들어가 환자를 살펴보고 난 후 태자는 죽은 것이 아니니 치료를 해보겠다고 했다. 편작이 제자 자양에게 명하여 태자의 삼양오회혈에 침과 뜸을 놓게 하자 태자가 서서히 깨어나서, 다른 제자인 자표에게 명하여 약물을 써서 열찜질을 하라고 하여 태자의 양측 가슴과 옆구리를 문질러주었더니 태자가 일어나 앉자, 또 다른 여러 제자들로 하여금 안마를 해주고 탕약을 들게 하였다. 이렇게 20여일간 약물 복용과 안마 치료를 진행하여 음양 기혈을 조리하니 태자가 건강을 회복하였다. 이 소식이 퍼져나가면서 사람들은 편작에게는 기사 회생의 능력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편작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그 어떤 기사 회생의 기술을 갖고 있지 않다. 태자는 진짜 죽은 것이 아니었기에 마땅히 살아난 것이었고, 나는 그를 도와 건강을 회복하도록 했을 뿐이다.'라고 겸허하게 말했다. 또한 편작이 제나라 환후의 병을 살펴보고서 그 질병이 발전할 것을 미리 알고 일찌감치 치료받을 것을 권하였으나 환후가 그렇게 하지 않다가 끝내 시기를 놓쳐버려 병을 안은 채 죽고 말았다고 한다. 이것은 편작의 진단 기술이 뛰어났음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런데, 편작을 시기한 진나라 태의령 이함이 사람을 보내 그를 살해하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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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타
화타는 태어난 해가 확실치 않으며 208년 이전에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름은 부, 자(字)는 원화로서 지금의 안휘성 사람이다. 그는 동한 말기의 외과 의사로서 내과, 외과, 부인과, 소아과, 침구 등에 통달하였으며, 특히 외과, 침구, 의료 체육 등에 정통하였다. 그는 치료 수단이 다양하면서도 간결하여 처방이 몇 가지를 넘지 않았고 침 치료 시에도 취혈이 몇 군데에 지나지 않았다. 화타는 성격이 활달하고 굳세며 명리(名利)를 싫어하여 여러 번 천거를 받았음에도 끝내 응하지 않았다. 한번은 당시의 실력자인 조조가 두풍현을 앓아서 화타를 불러 침구 치료로 속효를 보자, 그를 신임하여 시의(侍醫)를 삼고자 하였으나, 그는 조조 한 사람만을 위한 의사이기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위한 의사가 되기를 원하여 아내의 병환을 핑계대고 집으로 돌아가 있다가, 거짓임이 발각되어 옥에 갇힌 후 마침내 조조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akom.org%2Finfo%2Fimages%2Fpopup_img64.gif) [화타의 치료 장면] |
그는 외과 방면에 있어서 마비산(麻沸散)을 사용하여 환자를 전신 마취시킨 후 복강에 있는 덩어리를 절제하고 위장 절제 문합 수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마비산의 약물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수술 실력이 뛰어나 수술 봉합구가 4∼5일이면 나았다고 하는데, 이는 현대 의술과 맞먹는 것이다. 그리하여 후세에 그를 일러 외과(外科)의 비조(鼻祖)라고 부른다. 의료 체육 방면에서는 체육 단련을 통하여 체질을 증강함으로써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할 수 있게 하였다. 그는 고대의 기공 도인술을 계승하여 다섯 가지 동물의 활동 모습을 모방한 오금희(五禽戱)를 창제하였으며, 스스로 양생술에 통달하여 몸소 실행함으로써 백 세가 되도록 건강하였다고 한다.
또한 진단에 뛰어나고 방약과 침구에 정통하여 '화타협척혈'이라는 침법이 지금까지 사용되며, 기생충 병을 치료한 경험도 있고, 심리 치료도 실시했다. 그의 저작은 그가 박해를 받는 과정에서 일실되었을 가능성이 많으며, 후세에 그의 이름을 가탁한 저서들이 많이 있는 것은 그의 명성을 말해 준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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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許浚)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akom.org%2Finfo%2Fimages%2Fpopup_img40.gif) [의성 허준의 초상화] |
우리나라의 한의학을 대표하는 의성(醫聖)으로, 자(字)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岩)이다. 1539년 경기도 양천(지금의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서 태어나 1615년 8월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허준의 묘소는 현재 비무장지대 내(경기도 파주군 진동면 하포리)에 있다. 그의 집안은 지체 높은 양반 집안이었으나, 서자(庶子) 출신이었기에 의학을 공부하여 의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의 일생에 관해서는 문학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의, 두 가지 설(說)이 전해지고 있다. 문학적인 설에 의하면 그는 경상도 산음의 유의태 문하에서 의술을 연마한 다음 과거(잡과)에 합격하여 주로 혜민서에서 활동하다가 훗날 선조·광해군 연간에 어의가 되어 왕실에 봉사하면서 말년에 동의보감을 저술한 것으로 되어 있다. 양반이 아닌 서얼 출신으로서 신분 차별을 극복하고, 사후에 정일품(正一品)에 까지 추증(追贈) 되었다는 점에서 입지전적인 인물로 숭앙받게 되었다.
한편 역사적인 설에 의거해보면, 허준은 유의태 문하에서 배운 적이 없고, 1575년(선조 7)에 내의원 취재시(取才試)에 장원 급제하여 종 8품 봉사 의관으로 봉직하는 것을 시작으로 내의원 의관과 당상관 등을 거쳐, 선조 39년에 의관 출신으로 가장 높은 숭록대부에 봉해졌다. 그 밖의 역사적 기록은 그가 서얼 출신이었던 까닭에 매우 적다. 그러나 그가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호종(扈從)하는 등의 공을 인정받아 의관 출신으로는 가장 높은 숭록대부에 봉해졌고, 사후에 정1품(正一品) 보국숭록대부에 추증됨으로써 조선조 역사상 최고위직에 오른 의관이었다는 점과, 여러 의관들과 함께 왕의 명을 받아 「동의보감」을 편찬하였다는 점 등이 알려져 있다. 1592 년부터 1595년까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국토는 황폐해지고 백성들은 기아와 질병에 허덕였으며, 나라에는 많은 약초들이 생산되는데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약초를 민간에서 부르는 이름으로 분류하고 글로 써서 백성들로 하여금 알기 쉽게 하라는 왕의 명령에 의해 허준은 선조 29년(1596년) 양예수, 이명원, 정작, 김응택 등과 함께 의학서적 편집에 착수하였다. 정유재란으로 의서 편찬이 중단되자 선조는 허준에게 단독으로 편찬하도록 명을 내렸다. 그는 당대 최고 명의로서의 경륜과 궁중 의서 500여 권을 참고하여 14년만인 광해군 2년(1610년)에 25권 25책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완성하였다.
「동의보감」은 그 학술적 가치 뿐만 아니라 실용적 가치와 역사적 의의도 지니고 있으며,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증적 자세와 뛰어난 관찰력으로 지금도 그 가치가 임상적으로 높다.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위인 중의 한 분으로, 허준선생을 높이 받들기로 한 것이 문학적인 상상력에서 탄생하여 온 국민이 사실과는 관계없이 믿게 되었을지언정, 그 영향력이 현재에 끼치고 있는 바람직한 효과는 한의학의 가치와 존재 의의를 확인하는 데 있어 커다란 도움이 되며, 교육상으로도 적지 않은 효과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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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마(李濟馬) 이제마는 조선 후기 의학자로, 수천 년 동안 내려오는 동양의학을 사상의학(四象醫學)으로 재구성하고, 의학과 철학을 관련지어 실증적인 학문인 한의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이제마(1837~1900)의 호는 동무(東武)이며, 함경남도 함흥에서 전주 이씨 가문의 서자로 태어나 64세에 생을 마쳤다. 1837년(헌종 3년) 출생시 조부의 꿈에 제주도 말이 집안에 들어와서 제마(濟馬)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그의 집안은 함흥 지방에서는 세도(勢道)가 있었으나 조정에서는 인물이 뛰어나도 함흥 사람들을 등용치 않았고, 서자에게는 인사상의 불이익이 주어졌다. 그는 어릴 적부터 글을 배웠으나 말타기와 활쏘기에 더 재미를 붙였다. 그의 신분으로 문관이 되기에는 너무 제약이 많았으므로 비교적 제약이 덜한 무관으로 출세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말타기와 활쏘기도 팽개친 채 열다섯의 나이에 표연(飄然)히 고향을 등졌다. 그리고 이곳 저곳을 떠돌며 방랑 생활을 하였다. 그는 이 기간에 민중들이 굶주림과 병에 시달리고 있는 비참한 현실을 목격하였고, 만주로 건너가 떠돌다가 의주의 부호 홍씨 집에 기거했다. 홍씨는 많은 책을 쌓아놓고 누구나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는데, 이제마는 이 집 서고에 들어 앉아 독서에 열중했다. 그는 홍씨 집에서 많은 지식을 쌓은 후, 다시 방랑의 길을 떠났다. 어느 날, 그는 정평으로 가는 길에 어느 집에서 아무렇게나 발라놓은 벽지에 눈길을 주게 되었다. 벽지의 글을 읽어본 그는 깜짝 놀라 주인을 깨워 벽지로 사용한 종이가 어디서 난 것이냐고 물었다. 주인은 돌아가신 아버지 한석지(韓錫地)가 지은 「명선록(明善錄)」인데 쓸모가 없어 벽지로 발랐다고 하였다. 이제마는 이 벽지를 한장 한장 뜯어내서 책으로 묶고 정독하였다. 그 내용은 고루한 성리학을 매도하고 유교적 관념 세계를 신랄하게 비평한 것이었다. 이제마는 이 책에 푹 빠져버렸다. 그리고 한석지를 마음 속 스승으로 받들며 그의 제자 노릇을 하였다. 비록 살았을 적에 얼굴을 맞대보지는 않았으나 그의 눈을 뜨게 한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akom.org%2Finfo%2Fimages%2Fpopup_img41.gif) [이제마의 초상화] |
이어서 그의 발길은 멀리 장성에까지 닿았다. 장성에서 당시 독창적인 성리학 이론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던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을 만나 학문을 익히기도 하였다. 그에게 스승이 있다면 먼저 세상을 떠난 한석지가 있고, 그 다음으로 노사가 있을 뿐이었다. 이것은 당시 그의 사고 체계를 바꾸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쉰 살에 무위장(武衛將) 벼슬을 얻었고, 곧 이어 진해현감, 병마절제사 등의 벼슬자리에 앉았다. 어릴 적부터 꿈꾸었던 무관이 되었지만 그의 꿈을 실현시키기에 현실은 너무나 암담하였다. 그에게는 아무런 실권이 없었다. 마침내 당시의 어지러운 시대 상황에 실망을 하고 벼슬을 던져버린 후 의학 연구에 골몰하였다.
1882 년에는 「독행편(獨行編)」, 1890년 「유략(儒略)」, 1893년 「반성잠(反省箴)」, 1897년 「제중신편(濟衆新編)」, 1900년에는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을 집필하였다. 그 중 「동의수세보원」은 우연한 기회에 보게 된 「명선록(明善錄)」에 감동한 후, 진해(鎭海) 현감으로 부임한 다음 해, 즉 1893년부터 2년간 저술에 몰두한 저작이다. 「동의수세보원」의 주요 내용은 각각의 사람에게 맞는 약이 있는 것 등을 알리는 의학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지켜야 할 덕목과 마음가짐 등을 말하고 있어, 한의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최근 「동의수세보원」의 여러 판본 중 갑오판(甲午版)이 발견되어 그의 철학적 배경을 연구하는 데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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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丁若鏞) 다산 정약용은 1762년 경기도 광주에서 사대부의 자손으로 태어나 정조 연간에 고급 관리로 활약하다가 중년기에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목민심서」를 비롯한 저서를 남겼으며 1836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의관과는 관련이 없는 선비였지만, 당시 한문을 알던 선비들이 그랬던 것처럼 개인적으로 의학을 공부하여 「마과회통(麻科會通)」이라는 저술을 남겼다. 이는 홍역을 치료하는 처방을 모아놓은 것으로서, 선생의 아들이 연이어 홍역으로 요절하였으므로 이를 애통히 여겨, 처방을 수집하여 12권의 책을 완성한 것이다. 특히 '종두심법요지'는 인두종법(人痘種法)을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소개했다는 데 의의가 있는 의서다. 인두종법은 고대 인도, 아라비아, 페르샤, 터어키 등에서 행해지던 것으로 중국에는 명나라 때에 전해져 청나라 초에 그 법이 더욱 발전했는데, 정약용이 이를 처음으로 저술한 것이다. 주로 천연두를 앓을 때 생긴 고름딱지를 가루 내어 물로 알을 빚어 콧속에 접종시키는 종두법이었다. 그러나 '인두종법'에는 결점이 많았다. 바로 이 결점을 제거한 것이 영국 의사 에드워드 제너가 발견한 '우두종법(牛痘種法)'이다. 이것을 우리 나라에 최초로 소개한 분은 '인두종법'을 최초로 소개한 바 있었던 다산 정약용이다. 그의 저서 '종두기법(種痘奇法)'에는 제너의 우두종법이 그림과 함께 도설되어 있다. 지석영이 우두종법을 처음 실시했다고 하지만, 이 책에 그 실행하는 순서가 매우 정확하게 기술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정약용이 그 당시에 이미 우두법까지 실용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밖에 당시 민간에 유행하던 온역(瘟疫)의 치료법 등을 문헌에 의거하여 소개하기도 하였다. 또한, 단방신편(單方新編)은 신만(申曼)과 같이 지은 「경험약방문(經驗藥方文)」을 이의경(李義絅)이 국역(國譯)하여 1908년에 간행한 것이다. 각 부문에 걸친 400여 병명을 열거하고, 그 치료의 예를 들었으며, 책 끝에 구급법과 육축병(六畜病)으로 소, 돼지, 말, 양, 개, 닭 등의 병까지 논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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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임(許任) 조선 전기의 의관(醫官)으로 출생년도와 사망년도가 미상이며,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상민 출신으로 침구(鍼灸)에 뛰어나 선조 때 임금을 치료한 공으로 동반(東班)의 위계(位階)를 받았다. 광해군 4년(1612)에 허준(許浚)과 함께 의관록(醫官錄)에 기록되고, 광해군 8년(1616) 영평현령(永平縣令)에 임명되었으며, 다음해 양주목사(楊州牧使), 부평부사(富平府使)를 거쳐 광해군 14년(1622) 남양부사(南陽府使)가 되었다. 조선에서 으뜸가는 침의(鍼醫)라는 평을 받았다. 저서로는 「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 「동의문견방(東醫聞見方)」 등이 있다. 발문에 의하면, 이경석이 당시의 호남관찰사(湖南觀察使)인 목내선(睦來善)에게 부탁하여 간행하였다고 한다. 의약에 관한 단어 약간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침구학의 기초 이론과 자신의 경험을 종합하여 여러 가지 침구혈(鍼灸穴)과 증세에 따른 침구법, 그리고 침구를 위한 택일(擇日) 등을 총론과 각론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특히 각론에서는 신체 부위별, 내과·외과·전염병·부인병·어린이병 등을 계통별로 나누어 분석·정리하였다. 침구의 보사법(補瀉法)에 있어 독자적 분야를 개척한 침구 전문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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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현(白光炫) 백광현은 숙종 때 어의였으며, 임천 (林川, 충남 부여)사람으로 자(字)는 숙미(叔微)이다. 침을 사용하여 종기(腫氣)를 치료하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말(馬)을 전문적으로 치료하였는데, 세월이 흘러 기술이 노련해지면서 사람 치료를 전문으로 하게 되었다. 그는 뿌리가 깊은 종기를 대침(大鍼)을 써서 환부를 찢어 독을 제거하고 뿌리를 뽑아 치료해내어 당시 사람들이 신의(神醫)라고 불렀다. 그는 이러한 능력으로 현종 때에는 치종교수(治腫敎授)와 태의(太醫)를 겸임하게 되었다. 숙종 초에는 어의(御醫)로 뽑혀 공이 있을 때마다 품계(品階)가 더해져 숭록(崇祿, 종1품)에까지 이르렀으며, 현감(縣監) 등의 여러 벼슬을 거쳤다.
백광현은 효종비(孝宗妃) 인선왕후(仁宣王后)가 항후발제창(項後髮際瘡)을 앓았을 때 대침(大鍼)을 이용해 천자형(川字形)으로 4촌(寸)씩을 째서 치료하였고, 숙종의 후종(喉腫)과 제종(臍腫) 등을 침(鍼)이나 구(灸)로 치료하였다. 이 때 사용한 치료술에 대한 기록이 정확하게 남아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침으로 종창(腫瘡)을 수술해낸 요법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치료법이 백광현 자신의 창안에 의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명종 때 활동한 치종의(治腫醫) 임언국(任彦國)의 치종술을 어느 정도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의 절제술은 궁중 안에서 대대로 전수되어 치종술의 맥을 잇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아들 흥령(興齡)도 아버지의 의업을 계승하여 치종의로 활동하여 이름을 떨쳤고, 그의 제자 가운데 박순(朴淳)이라는 사람도 치종의로 이름이 높았다. 1862년에 유재건(劉在健)에 의해 편찬된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서 '요즘 종기를 절개해 치료하는 방법은 백광현으로부터 시작된 것인데, 후학들이 경험방으로 전해오고 있다.' 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의 치료술은 조선말기까지 경험방으로 전해져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서양의학의 수술요법이 들어오면서 그 명맥이 끊어지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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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영(趙憲泳) 1900 년에 태어나 1988년에 사망한 민족운동가이며 한의학자로,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응문(應文), 호는 해산(海山)이다. 경상북도 영양 출생으로 인석(寅錫)의 둘째 아들이며,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아버지이다. 어릴 때 의병대장이었던 할아버지 승기(承基)와 아버지로부터 사서삼경 등의 한학을 익히고 대구고등보통학교에 다닌 뒤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와세다대학 재학중인 1927년 민족협동전선으로 결성된 신간회(新幹會)의 동경(東京) 지회장에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귀국하여 1929년 신간회 중앙검사위원회 상무위원을 맡았으며, 1931년 신간회가 해체된 뒤에는 한의학 연구에 몰두하여 동양의약사(東洋醫藥社)를 개설하였다. 이때의 연구로 근대 한의학을 개척하여 오늘날 우리나라 한의학의 기초를 수립하였다.
1950 년 5·30 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당선되어 김동성(金東成)과 함께 무소속구락부를 이끌었다.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는데, 북한에서는 주로 한의학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많은 업적을 쌓았다.
1988 년 5월 23일 평양에서 사망했다. 근대 한의학 개척자로서, 1930년대 「신동아(新東亞)」에 한의학의 학술 논문을 연재하였고, 1934년부터는 「한의학원론(漢醫學原論)」에 이어서 「폐병치료법」, 「신경쇠약치료법」, 「위장병치료법」, 「부인병치료법」등을 간행하였다.
최근 국내에서 발간된 「한의학의 비판과 해설」은 조헌영의 1930년대 활동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지금도 개론서로 읽히고 있는 「통속 한의학원론(通俗 漢醫學原論)」은 유명한 저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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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훈(金永勳) 김영훈(1882-1974)은 호가 청강(晴崗)으로 1882년 강화도 강화읍 관청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였으나 15세에 눈병을 앓은 것이 계기가 되어 당시 인천의 명의 서도순(徐道淳)의 제자가 되어 의학을 공부하였다.
1904 년 최초의 근대식 한의과대학인 동제의학교가 설립되고 교수를 뽑자 이에 응시하여 수석으로 합격하였고 도교수(都敎授)가 되었다. 이후 이 학교의 실제적인 후원자인 고종황제가 강제 퇴위 당하고 동제의학교가 문을 닫자 전의(典醫)출신이며 한의계의 원로였던 홍철보, 장용준, 최규헌등과 함께 팔가일지회(八家一志會)를 만들어 한의학의 부흥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1915년에는 전국의생대회를 개최하여 전국규모의 한의사 단체를 결성하였고 한의학 전문지인 '동의보감'을 창간하였다. 1924년에는 학술단체인 동서의학연구회를 조직하여 학술진흥에 힘을 기울였고 1937년에는 경기도립의생강습소를 열어 한의학의 후진양성에 앞장섰다.
행방이후에는 구왕궁 영예전의, 대한한의사협회 명예회장, 서울한의과대학 (경희 한의대의 전신) 명예학장으로 추대되었다. 1963년에는 대한민국건국국민훈장을 수여 받았다. 저서로는 수세현서(壽世玄書)와 제자 이종형이 그의 유고를 모아 편한 '청강의감(晴岡醫鑑)'이 있다. 그는 학문적으로 '의학입문(醫學入門)'에 정통하여 현재까지도 '의학입문' 연구자로 이름이 높으며 노년에 이르기까지 황제내경, 의학입문, 동의보감등을 주석까지 암송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60년간의 임상진료기록을 빠짐없이 보존하고 서신, 신문, 잡지등을 보관하여 후학들의 연구에 도움이 되도록 한 것은 한의학계에 대한 큰 공이 아닐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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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풍 한의학자(韓醫學者), 한의학교육자(韓醫學敎育者)이며 출생은 서울이고, 호는 남천(楠秦)이다.? 1916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1년 경성공업전문학교를 졸업. 졸업한 그 해부터 한의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여 1941년부터 구왕실(舊王室)의 전의(典醫)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46 년에는 동양의학전문학교설립기성회(東洋醫學專門學校設立期成會)에 경기도 의생(醫生-일제시대에 사용된 한의사의 호칭)들을 대표해서 경기도의생회관을 기부하였으며 교육계에 헌신하였다. 1948 년 한의학교육기관인 동양대학관(東洋大學館-경희대 한의대의 전신)을 설립하는데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고, 이 때 초대 학관장(學館長)을 맡았다. 1951년에는 동양대학관(東洋大學館)을 서울한의과대학으로 승격시키고 초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평생동안 상한론(傷寒論)을 중심으로 의학연구에 헌신하면서 「상한론강의(傷寒論講義)」, 「의경학강의(醫經學講義)」, 「급성열성병(急性熱性病)」(Acute Febrile Disease라는 이름으로 영역) 등 여러개의 저술을 남겼다. 특히 사후에 그의 유고를 모아 발간한 「남천의학대전(楠秦醫學大全)」은 유명하다. 1956년 한국학술원회원으로 등록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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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언국(任彦國) 조선시대에는 외과술이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조선초기인 세종 때에 벌써 외과 전문의가 제도화되어 외과질환들을 전문적으로 치료한 예가 그것이다. 이들 외과의들 가운데 한국의 외과학의 수준을 한단계 높여 놓은 의인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명종 때 활동한 치종의(治腫醫) 임언국이다. 임언국은 전라도 정읍사람으로 치종술에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그의 명성을 듣고 불러들여 치료한 환자만도 수만명에 달한다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공으로 예빈사(禮賓寺) 주부(主簿)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는 명종 14년(1559)에 『治腫秘方』이라는 서적을 간행하는데, 여기에서 사용된 치료방법들은 침구에 의한 종양의 절개술에 그친 이전의 방법을 뛰어넘어 현대의 외과술에 필적할 과감한 수술요법으로 볼 수 있다.
임언국의 저술로 예상되는 『治腫指南』도 당시 외과술의 수준을 가늠하게 하는 서적이며. 『치종지남』에는 임언국의 독창적인 농양침파법과 결열법 및 절개수술법 등이 그림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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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택규(具宅奎) 살인사건은 옛부터 준엄하게 다루어 왔다. 그것은 몇 개의 법밖에는 없었다는 고조선 때도 살인자를 사형시키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까닭에 형벌이 무거운 만큼 신중하고 냉철하며 과학적으로 살인사건의 실마리를 풀지 않으면, 죄 없는 또 다른 생명을 살인하는 불행을 낳게 된다. 조선 세종 때 중국 원나라의 법의학 서적인 '무원록(無寃錄)'에 주를 달아 '신주 무원록'을 간행하여, 이를 근거로 모든 법의학적 문제를 해결토록 하였으며, 이때 시체가 있는 현장을 검증하고 이를 격식에 맞추어 검안서를 작성, 첨부하여야 비로소 재판할 수 있도록 하는 매우 획기적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이것은 범죄 혐의자 또는 증인들을 고문하거나 심문하여 얻은 논증만으로는 그 판결을 좌우할 수 없다는 매우 물증주의적이요, 실증적이고, 공정성 있는 인도주의적 판결을 위한 형사법제상 진일보한 조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법의학의 근본이 될 '신주 무원록'이 중국 원나라의 형법에 따라 작성된 중국판? 무원록을 그대로 복사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 실정에 잘 맞지 않아 불편하거나 부족한 점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신주 무원록'은 원나라 왕여의 저서인 '무원록'을 세종 20년에 주석과 음훈을 부치고, 유의손이 서문을 쓰고, 최만리가 발문을 붙여 세종 22년(1440년)에 발간한 것에 불과하니, 명실공히 우리 나라 조선시대의 법의학과 형법학상 상전이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영조 24년에 우리 실정에 맞추어 여러 항목을 삭제도 하고, 목차도 바꾸고, 혹은 중국의 기타 법의학 서적인 '세원록', '평원록' 등을 참작하여 내용을 보충하여, '증수무원록(增修無寃錄)'을 간행하게 되었다.
이 책은 중국 법의학 서적을 그대로 모방, 수용한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을 완전히 소화 흡수시켜 우리 실정에 맞춘 우리의 독자적인 법의학을 개척했다는 데 의사학적, 서지학적 의의가 큰 책이다. 이두(吏讀)로써 구결(口訣)을 붙여 알기 쉽게 저술한 이 '증수무원록'의 저자는 바로 구택규이다. 그가 이 책을 저술한 것은 그의 나이 47살 때이다. 이때 그는 법률 경전인 '속대전'을 찬술하고 있었는데, 영조대왕은 나라의 기존 법전을 개수하여 속대전을 편찬하는 과정을 살피다가, 기존 법의학 서적인 '신주 무원록'에 수록된 원나라의 많은 판례문들이 실지 검증을 행하는 형관들에게 참고 자료는 될 망정 우리의 습관과 규례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 많고 저술 편집상 중첩된 부분이 많고, 일목요연한 감이 적어 형관들에게 불편을 주는 까닭에 신속하고도 정확한 검안과 판결에 지장을 줄 소지가 허다하다는 생각에서 이왕 법전마저 개수하는 마당에 법의학 서적도 개수할 것을 작정한 것이다. 그리하여 구택규에게 어명이 내렸던 것이다.
구택규는 어명을 받자 곧 이를 개수, 저술하는 작업에 들어갔는데, 소년 급제할 정도의 영특함이 있는 그는 중국의 여느 법의학 서적마저 통달, 소화, 흡수하고 또 오랜 동안 지방행정관으로 있으면서 닦고 터득한 형사법상 여러 지식을 포함해서 결국 우리 나라 독자적인 법의학 서적을 저술하게 된 것이다. 그후 그의 아들 구윤명은 아버지 저서인 '증수무원록'을 언해(諺解)하여 정조 16년에 출간함으로써 알기 어려운 한자 때문에 초래될 오판을 막고, 지식과 응용의 보편화를 꾀하였으며, 이어 정조 20년에 '증수무원록'의 내용을 좀더 정확히 이해, 활용할 수 있도록 재편집하고 문자와 방언에 주해를 첨가하여 간행했었다. 이를 '증수무원록대전'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구택규와 그의 아들 구윤명에 의하여 다듬어진 이 책은 개간된 후 형관들의 유일한 텍스트 북으로서 널리 실용화되었을 뿐 아니라, 갑오경장 이후 서구식 제도의 재판이 필요로 하는 서의학적 법의학 지식이 정착되기까지 광무 11년에 이르는 오랜 기간 이 책은 계속 채용되어 왔고, 검안과 판결에 근간을 맡아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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