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말 흥행 성적이 신통치 않은 데다가 대종상 후보 선정 문제로 잡음이 많아 상영 12일 만에 막을 내려야 했던 장나라 주연의 비운의 영화가 있었습니다. 〈하늘과 바다〉라는 제목의 영화였는데, 이 영화에서 장나라는 정신연령은 6살에서 멈춰버렸지만 천재적인 음악 실력으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24살 여성을 연기합니다.
이렇듯 전체적 지능이 낮거나 자폐 성향 때문에 정상적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부적응자이면서도, 특정 분야에서 설명하기 힘든 천재적 재능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자연히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과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하려면 뭐니 뭐니 해도 더스틴 호프만과 톰 크루즈가 주연한 1988년 영화 〈레인 맨(Rain Man)〉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자폐증으로 평생을 정신병원에서 살아온 레이먼드(더스틴 호프만 분)는 한번 보거나 들은 것을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으며, 바닥에 떨어진 성냥개비 한 뭉치의 개수를 순간적으로 셀 수 있는 놀라운 수학 실력을 발휘합니다.
영화 〈레인 맨〉의 주인공 레이먼드는 실제 인물인 킴 픽(Kim Peek)을 모델로 했습니다. 픽은 FG 증후군이라는 희귀한 유전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소뇌의 발달 이상과 함께, 선천적으로 좌우뇌를 이어주는 뇌교가 생기지 않은 심각한 뇌기형 환자입니다. 그런데 그는 불과 생후 20개월 무렵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으며, 한번 읽은 것은 죄다 기억했다고 합니다. 수많은 쇼 프로그램에서 그를 초청했고 다수의 학자들이 그를 연구했는데, 그는 죽기 전까지 무려 12,000권의 책의 내용을 언제 어느 때나 힘들이지 않고 기억해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책뿐 아니라 한번 들은 곡조 역시 평생 잊지 않았으며, 장애가 있어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으로 피아노를 멋들어지게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IQ는 87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유명인으로 자폐증의 한 종류인 아스퍼거 병 환자이자 작가로 활동하는 대니얼 타멧(Daniel Tammet)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베스트셀러 작가일 뿐 아니라 세계 기억 선수권 대회 우승자이며, 5시간 9분에 걸쳐 원주율을 22,514 자리까지 암기한 신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영어를 제외한 9개 언어를 자유롭게 말하며,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일주일 만에 아이슬랜드어를 습득하는 묘기(?)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취미로 맨티(Manti)라는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고 있다고 전해집니다.
이러한 사례들을 ‘백치 천재 증후군’ 혹은 ‘서번트 신드롬(Savant syndrome)’이라고 칭합니다. 백치 천재 증후군을 보이는 사례의 절반 이상은 타멧과 같은 자폐증 환자이며, 나머지 절반은 픽과 같은 뇌 손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론 자폐아나 뇌손상 환자 중 이런 능력을 보이는 사례는 극소수일 뿐입니다. 따라서 이 분야의 전문가인 대럴드 트레퍼트(Darold Treffert)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뇌 손상이 천재성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뇌 손상을 통해 정상인이 진화 과정에서 잃어버렸던 능력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그들이 천재인 게 아니라 우리가 바보인 것이지요.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이론이 제시되었으나,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럽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개중 가장 유력한 설명은 좌뇌와 우뇌의 기능 차이에 근거한 설명입니다.
아시다시피 좌뇌는 분석적 능력 및 추상적 개념을 도출하는 능력이 탁월한 반면, 우뇌는 좀 더 종합적이고 예술적인 시각, 분석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순간적 통찰을 담당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우리가 감각 자극을 받아들일 때 우뇌는 자극 자체의 세부사항에 주의를 좀 더 기울이는 반면, 좌뇌는 세부사항을 하나의 개념으로 뭉뚱그리는 데 능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만약 좌뇌가 방해하지만 않으면, 우뇌는 날 것 그대로의 감각 자극을 마치 사진을 찍는 것처럼 그대로 기억 속에 저장시킬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이러한 이론은 좌뇌와 우뇌가 분리되어버린 픽의 뇌가 가공할 만한 기억력을 보이는 현상이나, 좌뇌 발달에 문제가 있는 자폐증 환자들이 놀라운 기억력과 함께 예술적 재능을 보이는 현상을 잘 설명해줄 수 있습니다.
이 이론을 내세운 학자들은 인간의 진화 과정이 좀 더 고위 인지 기능을 발달시키기 위해서, 백치 천재가 보이는 능력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정상 성인의 좌뇌는 우뇌보다 우위에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나가기 위해선 좌뇌의 분석적, 추상적 사고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 예술가들이 생활 능력이 부족해 경제적으로 많은 곤궁에 처했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좌뇌의 기능이 우뇌에 비해 열등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어쩌면 추상적 사고란 개개 사실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이를 개념으로 바꾸어놓는 과정일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타멧은 1부터 10,000까지의 숫자에 각기 다른 색깔과 모양, 질감의 도형을 결부시켜 기억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9는 높은 탑, 25는 기운찬 모습, 그리고 289는 못생긴 얼굴이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숫자를 이렇게 기억하지 않습니다. 양 손가락을 이용해서 1부터 10까지를 셀 수 있게 되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히 10 다음에는 11이 있고 그다음에는 12가 있음을 깨닫게 되며, 얼마 지나지 않아 “숫자의 끝이 어디까지일까?”라는 질문과 함께 무한의 신비에 매료됩니다. 각 숫자의 색깔과 모양을 잊어버리는 대신 ‘일반 법칙’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백치 천재들의 일반 지능이 오히려 정상인보다 매우 낮게 나오는 것은, 이렇듯 ‘기억을 상실하는’ 능력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한때는 천재가 되는 꿈을 꾸어봅니다. 하루 8시간씩 책과 씨름하지 않아도, 외워지지 않는 영어 단어를 수없이 써가며 외우지 않아도, 마치 공기를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레 지식이 머릿속에 쌓여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백치 천재 증후군의 존재는 학습에 대한 우리의 단순한 선입관을 무너뜨립니다. 수억 년의 진화 과정을 통해 인간이 어렵게 획득한 것은 외우는 능력이 아니라, 개념을 추상화하고 이로부터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내는 능력입니다. 12,000권의 책 내용을 그대로 암기하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그로부터 얻은 삶의 지혜가 아닐까 싶습니다. 설령 책 내용을 모두 잊어버렸다 하더라도, 골똘히 책을 읽으면서 얻게 된 새로운 통찰과 가슴속 깊이 흘렸던 눈물은 여러분 속에 깊이 남아 삶의 진로를 바꾸고, 새로운 문을 열어줄 것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백치 천재 증후군 [Idiot Savant] - 평범 속의 비범? 비범 속의 평범? (사람을 움직이는 100가지 심리법칙, 2011. 10. 20., 케이엔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