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인 캠페인 – 편 】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친구. 어른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학교에서 왕따가 왜 심각한 문제인가를 짚어보면 보다 잘 알 수 있다. 학교에 아이들을 공부하라고 보내지만 친구를 못 사귀거나 친구와의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면 곧 어른 문제가 되어버린다. 이처럼 아이들에게 친구를 만들어 주거나 아이들에게 친구가 생긴다는 것은 공부 이상으로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학교 가서 공부 잘 하면 됐지 뭐 다른 중요한 것이 있냐 라고 하지만, 막상 아이에게 친구가 없거나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게 되면 아이는 금새 학업부진으로 그 상황을 드러내는 것 같다. 친구가 없다거나 친구들이 자신을 외면한다는 것은 바로 공부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는 것 같다. 친구들이 자신을 미워하더라도 자신의 꿈을 위해서 학업정진하면 될 텐데, 이상하게도 아이들은 자신의 꿈을 알아주거나 나눌 동년배가 없다는 것이 커다란 좌절이 되어 꿈꾸는 것을 이내 멈추어 버리는 것 같다. 문득 ‘진정한 친구’는 어떤 친구를 말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빵셔틀(빵+shuttle의 합성어로 학교 매점에서 빵을 사다주는 학생, 즉 심부름꾼을 말한다.)이란 단어가 백과사전에도 나온다. 내용에는 심부름꾼이란 뜻만 보이지만, 실제는 빵셔틀에게 비용도 주지 않고 빵을 사오라고 하는, 정말은 학교폭력의 한 유형인 것이다. 현금을 빼앗지 않는 듯, 그렇지만 위협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행동이니 문제행동이라 할 수 있겠다. 빵셔틀 역할을 하는 아이에게 누가 너의 친구이냐 라고 물어본다면, 과연 아이는 누구를 자신의 친구라 칭할까? 아니, 빵셔틀 역할을 하는 아이에게 있어 “진정한 친구”는 누구라고 우리에게 말해줄까? 답을 듣기에는 조금 걱정이나 두려움이 앞서는 것 같다. 혹 우리 어른이 알려준 ‘친구’라는 것과 많은 차이가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나의 친구가 위기에 처했을 때, 친구라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내 친구한테 왜 그래요?” 라며 큰 목청으로 말하며 으름장을 놓는 사람은, 보나마나 찔끔찔끔 울고 있는 초라한 모습을 한 사람의 ‘친구’일 것이다. 초라하게 되어버린 그 친구 옆에서 용기를 내어 커다란 목청으로 따져주는 사람이 친구라 본다면, 요즘 우리 아이들이 말하는 친구란 것이, 바로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친구라는 것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빵셔틀에게 친구가 분명 있을 것이다. 같은 관심사를 가지고 같이 보내는 시간이 있으며, 같은 공간에서 오래도록 시간을 보내는 동년배 아이 말이다. 과연 이러한 범주에 들어오는 동년배 아이를 친구라 칭해도 정말 되는 것일까? 같이 시간을 보내지 않거나 같은 관심사가 형성이 안 되면 친구라 칭할 수는 없는 것일까? 혹 위기에서 자신을 구해주는 동년배를 친구라 해야 하는 것일까? 하나로 규정지을 수는 없으나, 필자가 느끼기에 요즘 아이들에게 친구란 시시 때때로 편리함에 따라 관계가 형성되어 친한 친구가 쉬 바뀌는, 오프라인 세상만이 아닌 온라인상에도 친구를 만들 수 있어서 그런지, 딱히 연락을 안 하면 그 관계가 해체되는 사이가 친구인 것 같다. “편”을 들어줄 만큼 또는 “편”을 들어주지 않으면 이는 연인보다도 정말 못한 사이인 것 같다. 연인들도 헤어지면 그만이라지만, 연락이 소원해지면 그새 “나와 상관없어”라는 태도가 형성되어 “편”을 들어주지 않는 관계가 요즘 아이들의 친구 모습인 것 같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형상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지만, 한 번의 실수로 그 그룹에서 이탈자가 되어버리면 소속을 잃어버린 아이가 되어 따아닌 따가 되어 버리는 것 같다. 다른 친구를 사귀기엔 이미 늦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현실인가!
‘초록은 동색이요. 가재는 게편이라.’는 말이 춘향전에서 나왔다. 물론 춘향이가 변사또에게 수모를 당했는데 새로 왔다는 신관 사또에게 또 수모를 당하는 상황에서 한 말이나, ‘끼리끼리’라는 말이 떠올라 ‘친구’도 역시 그 맥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끼리끼리 모여 잘 지내며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니 편, 네 편이라는 ‘편 가르기’ 형상이 아이들에게서 보이다 보니, 문득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편”이 되어주고 있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희생이 앞세워지고 강요와 원망이 넘실대며 서로 다른 부분에 서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부모의 반대, 아이의 반항은 부모와 자식관계에서 당연히 볼 수 있는 것이다라고 보기보다는 부모가 아이의 편이 되어준다면, 혹 우리의 아이들이 우리 쪽에 서서 우리가 보는 세상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것이 밀고 당기기 즉, 밀당이라고 한다면, 무조건적인 반대, 또는 무조건 적인 배척이 없이, 아이들이 상대방의 편(입장)이 되어 보는 연습이 되지 않을까? 우리가 어른이니까, 우리가 아이들에게 먼저 그렇게 해보면 어떨까? 이를 통해서 아이들에게 ‘입장’이라는 것을 가르쳤으면 좋겠다. 요즘 아이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의견’을 내놓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쉬워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입장’을 가지고 다른 이의 ‘입장’을 헤아려 본다는 것은 더욱 기대하기 어려운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빵셔틀 같은 대상자가 우후죽순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부당하다고 한 번 소리쳐 볼만도 하지만, 그 아이 “편”을 들어줄 친구도 안 보일 것이고, 더 나아가 그 아이의 상황을 이해해 주려는 아이도 없을 것이고, 더군다나 빵을 사오라고 시킨 아이는 그 아이 ‘입장’을 헤아려 줄 ‘입장’ 자체가 없을테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인가.
아이들에게 친구를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또래를 대상으로 그냥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니, 우리 어른들이 충분히 연습을 시켜서 친구 앞에서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른을 상대로 평소에 자신의 모습을 가다듬고 그렇게 예를 배우고 나서 또래 아이를 만났을 땐, 먼저 예를 충분히 갖춘 뒤 시간이 흘렀을 때, 우리 조금 편하게 대해보자 라는 서로의 합의하에 친근감이 뒤따라오는 것이라고 본다. 이런 경험이 유쾌하게 기억에 남아 또 다른 친구를 만들어 가야되는 것인데, 예를 갖추지 못하고 서로의 합의가 없이 무질서하게 힘으로 형성해 버린 관계 속에, 아이들은 ‘친구’의 진정성을 못 배우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친구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 이것이 농담이 아닌 시대를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부모는 네 평생을 함께하지 못함을 알게 하고, 형제 자매의 소중함을 가르쳐주고, 의논할 수 있는 어른들과 연결시켜주고, 그리고 같은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봐 줄 친구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세상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행가래로 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