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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일시: 2021. 10. 26.(화) - 음력(9. 21.), 일출 06:48~일몰 17:38
●산행지: 도솔지맥 2구간 졸업(배후령-소양2교)
●산행코스: 배후령-688.4m봉-745.3m봉-763.6m봉-용화산갈림길-휴양림갈림길-672m봉-수리북봉-529.3m봉-수리봉-양통고개-527.3m봉-새밀고개-545.8m봉-403번도로-지내교차로-양지노인마을입구-121.9m봉-123m봉-구리고개-방고개-163.4m봉-여우고개-우일마을-우두산-한국폴리텍대학-70번도로-충렬로-우두강뚝길-소양초교-강변길-소양2교
●먹거리: 생수1.5리터, 콜라, 빵3, 자유시간, 양갱, 단백질초크바, 사탕5
●준비물: 춘추잠바, 스틱, 헤드랜턴, 마스크, 충전지, 충전짹, 손수건2, 면수건, 장갑, 버프, 휴지, 물티슈, 스패츠, 말방울, 세라컵, 안대, 귀마개, 양말, 띠지10
●거리: 약 25.5Km
●소요시간: 08.10h
●누구랑: 나홀로
●경비: ITX8,600, 뒤풀이38,000, ITX8,300
●날씨: 9~19, 안개 많고 조망 좋지 않음.
●산행경과:
- 07:55 : 배후령(600m)
- 09:04 : 용화산갈림길
- 09:53 : 수리북봉(652.1m)
- 10:53 : 수리봉(656.7m)
- 11:36 : 527.3m봉/ 수풀산
- 11:56 : 545.8m봉/ 꼭지봉/ 헬기장
- 12:33 : 403번도로
- 12:40 : 지내교차로
- 12:51 : 양지노인마을입구삼거리
- 13:02 : 선교랑 남양홍공묘
- 13:21 : 121.9m봉/ 삼각점봉
- 13:47 : 구리고개
- 14:11 : 방고개
- 14:34 : 164고지전적비
- 14:55 : 여우고개
- 15:14 : 도로
- 15:17 : 우두산(134m)
- 16:06 : 소양1교
- 16:15 : 소양2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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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솔지맥 세부 구간거리
배후령-1.9km-743봉-1km-용화산갈림길(764.3m)-2.3km-652.1봉-2.4km-수리봉(655m)-2.7km-546봉-1.2km-13번도로-3.9km-403번도로-2.6km-여우고개-0.9km-우두산-3.1km-소양2교
* 구간거리
- 배후령-소양2교 22.7km
-.배후령-수리봉 8.4km
-.수리봉-우두산 11.3km
-.우두산-소양2교 3.1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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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수 공급지 및 산행 정보
- 양지노인정삼거리: 인가에서 식수 보충 가능
- 전원주택: 수도, 식수보충 가능
- 우두산 충렬탑 앞: 수도 시설
- 우두택지개발사거리: GS편의점
- 소양초교앞: 마트, 편의점
* 서울에서 배후령 가는 방법
- ITX청량리~춘천: 06:17, 0.58h, 8,600
- 동서울~춘천: 06:15, 06:45, 1.10h, 7,700
* 춘천에서 서울 올라오는 방법
- 춘천~동서울: 20시, 20:20, 20:35, 20:40, 21시, 21:30, 22:10, 1.30h, 7,700
- ITX남춘천~청량리: 19:04, 19:38, 20:34, 21:19, 21:52, 22:17, 1h, 8,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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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도움준 친구와 함께 했습니다.
청량리에서 ITX 첫차로 춘천역에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던 친구가 배후령으로 데려다 줘 07:55분 산행을 시작하였습니다. 역시 호반의 도시 춘천답게 물안개에 폭 파묻혀 있었고, 개스가 가득해 멀리 바라보는 조망은 기대난망이었습니다. 그리고 수리봉 직전에 오르는 암봉이 있습니다. 우회했음 싶더군요. 좌측으로 내려서는 부분이 절벽위를 아슬아슬하게 내려서게 되어 있는데 안전이 확보되지 않아 만일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큰 부상이 우려되었습니다.
마지막 단계 꼭지봉에서 급좌틀하여 403번 도로로 내려서는 부분입니다.
꼭지봉에서 감시카메라가 서있는 방향으로 직진하면 407번 도로로 내려서게 되는 거대한 알바입니다.
직전 헬기장에서 들입구가 잘 보이지 않는 좌측으로 90도 꺽어져 내려서야 합니다. 처음에는 마루금 능선이 선명합니다만 이후 조경농원입구로 내려서서 403번 도로에 안착하기까지 띠지와 길흔적을 찾아 따라야 합니다.
403번 도로에 내려서면 군부대 정문입니다. 앞에 보이는 지내교차로를 지나 도로를 따라 화학부대를 지나면 양지노인마을 안내판을 만납니다. 거기서 곧바로 우측으로 오르지말고 10m정도 진행하여 우측 인가 앞으로 진입하시면 능선으로 힘들이지 않고 쉽게 오를 수 있습니다. 이후 선교랑묘지까지 진행하고 선교랑묘지에서 우측에 보이는 전원주택으로 내려서면 됩니다.
전원주택단지를 지나면 양회임도가 지나는 고개를 하나 건넙니다. 양회임도를 건너서 오솔길이 우곡각하는 지점에서 좌측으로 121.9m봉 삼각점이 있으니 잠깐 들르셔야 합니다. 길에서 좌측으로 80m쯤 벗어나 있습니다.
우두산에서 실질적인 도솔지맥은 끝이 납니다만 여기까지 왔는데 합수점을 찍지 않으면 안되겠죠.
소슬묘와 조양루 터를 확인하고, 조양루터 정자(우두정)에서 우측길로 내려서는게 좋겠습니다. 좌측으로 내려서야 우두산을 끝까지 타는게 되지만 어차피 폴리텍대학을 우측으로 감싸고 돌아 70번도로와 만나는 우두택지개발사거리로 나와야 하기 때문이죠. 이후 소양1교 동부아파트까지 계속 충렬로를 따르면 됩니다.
거리도 짧고, 처음 시작하는 단계이고, 배낭도 가벼워 평속 2.7이 나왔습니다. 예정보다 합수점 도착시간이 빨라 북한강과 소양강이 합수하는 소양2교에서 도솔을 졸업하고, 소양2교를 건너 선정비 들머리에서 봉의산에 올를 수 있었답니다. 정상에는 '동이와둥이' 띠지가 걸려져 있네요. 저도 옆에 띠지 하나 걸어 두었습니다. 띠지는 열장을 가져갔는데 한장 남겨왔네요. 대신 바닥에 떨어져 있는 세르파님 띠지를 표나게 걸어두고, 또 부뜰이부부운영자님, 최상배운영자님 띠지도 부실한 것은 단단하게 고쳐 잡으며 걸었습니다.
봉의산 정상에서 조망은 없었습니다. 옥산포와 소양1교 그리고 샘물마을을 조망할렸는데 웃자란 나무로 시야가 제한되더군요. 정상에서 서남쪽으로 내려서며 참호 흔적을 발견하고, 사단 연대본부가 위치한 감제고지를 짐작해 볼 수는 있었습니다. 충원사에서 정상으로 올라가는 지점에 있었습니다. 이후 다시 소양강처녀상으로 가 인증하고, 의암호 강변도로를 따라 평화공원에서 전쟁기념탑 등을 찾아보고 춘천역에 도착하여 장애인 화장실에 문 닫아놓고 머리 감고 간단하게 씻을 수 있었습니다.(청소하는 아주머니 눈총 맞지 않도록 최대한 깨끗하게 그리고 신속하게 끝내야 합니다.^^)
이후 도움 준 친구와 조우하여 석사동 시민닭갈비를 찾아 막걸리 시병으로 뒤풀하였습니다. 배가 불렀지만 입가심으로 막국시까지 찾아 먹느라 배가 봉긋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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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솔지맥이 지나는 동네
* 화천군
군의 대부분 지역이 산지로 되어 있다. 동쪽에는 적근지맥과 도솔지맥이 뻗어 있어 일산(日山, 1,150m)·재안산(在安山, 1,060m)·사명산(四明山, 1,198m)·수리봉(922m) 등이 솟아 있다. 서쪽에는 경기도 포천시와의 경계에 광덕산(廣德山, 1,046m)·백운산(白雲山, 904m)이 있다. 남쪽에는 오봉산(五峰山, 779m)·용화산(龍華山, 878m)·화악산(華岳山, 1,468m)·매봉(1,436m) 등이 있다. 북쪽에는 대성산(大成山, 1,175m)·적근산(赤根山, 1,073m)·백암산(白巖山, 1,179m) 등을 연결하는 한북정맥이 연봉을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대체로 북동쪽은 높고 남서쪽으로 갈수록 점차 낮아진다. 하천으로는 군의 동부지역을 남류하여 흐르는 북한강이 있다. 그 지류인 마현천(馬峴川)은 적근산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남류하면서 마현리·산양리·신읍리를 지나 상리에 이른다. 대성산과 복계산(福桂山, 1,057m)의 동쪽 수피령(水皮嶺)에서 발원한 봉오천(峰吾川)이 동류하면서 상리에서 마현천과 합쳐져 하리에서 북한강으로 흘러든다. 북한강에 건설된 화천댐으로 형성된 파로호(破虜湖)에 의해 많은 지역이 수몰되어 평야는 거의 없다. 마현천·봉오천이 중남부에 약간의 곡저(谷低) 지대를 이룬다. 남서부의 사내면과 간동면에 작은 산간분지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간동면의 간척리·오음리·용호리 일대의 산록 완사면 지형은 중요한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다. 구석기시대의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된 적은 없으나 인접한 홍천군의 홍천강유역에서 5만∼10만 년 전의 중기 구석기시대 유물이 출토된 점으로 보아 이 지역에서도 일찍부터 인류가 거주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 초에도 낭천군이라 불렸으며, 춘주(春州)의 속군(屬郡)으로 되었다가 1106년(예종 1)에 비로소 감무(監務)가 파견되기 시작하였다. 세조의 왕위찬탈이 있은 뒤에는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이 세조의 그릇된 처사에 분개하여 사내면 삼일리에 내려와 정자를 짓고 지냈다. 1644년(인조 22)에 폐현(廢縣)되어 김화현(金化縣)에 합쳐졌으며, 1653년(효종 4)에 다시 낭천현으로 복구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춘천부(春川府)의 관할로 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강원도에 소속되면서 화천군으로 개칭되었다. 1910년 3월에는 동면(東面)과 간척면(看尺面)이 병합되어 간동면으로 되고, 남면(南面)과 하동면이 병합되어 하남면(下南面)이 되었다. 1945년 광복과 더불어 공산치하에 들게 되었다. 6·25전쟁 때 국군의 북진으로 수복되었다. 1951년 5월에 있었던 중공군의 제2차 공세로 소양강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소양강전투는 특히 치열한 것이었다. 이 때 중공군이 2개 군단 병력을 투입하여 대공세를 취해왔으나, 결사적으로 항전하여 화천수력발전소를 탈환하였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전선에 와서 장병들을 격려하고 친필로 써준 ‘破虜湖(파로호)’라는 제자(題字)가 간동면 구만리의 기념비에 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후 수복되어 군정(軍政)이 실시되었다. 1954년 10월 21일에는 춘성군 사내면이 편입되었고 면 사이에 일부 관할구역 개편이 있었다. 1964년화천면의 동촌출장소와 간동면 구만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79년 5월 1일 화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1년 5월 1일에 화천읍 동촌출장소가 없어지고 하남면 강남출장소가 개소되었다. 1998년 강남출장소와 구만출장소가 폐지되었다. 교통은 산간내륙지방이지만 화천읍을 중심으로 국도와 지방도 및 군도 등이 연결되고 있어 편리한 편이다. 즉 5번 국도가 상서면에서 화천읍∼춘천으로 이어지고, 56번 국도가 철원에서 상서·사내·사북면을 지나 춘천∼홍천으로 이어진다. 46번 국도가 춘천∼간동∼양구로 이어져 있다. 지방도로는 407번이 춘천∼화천읍, 460번이 화천∼평화의 댐∼양구, 461번이 화천∼양구 등을 연결한다. 시·군도는 15개 노선이 있어 각 읍·면지역과의 교통이 이루어진다. [포탈에서 발췌정리]
* 춘천시
대한민국 강원도 중서부에 있는 시로 1949년 시로 승격했으며 1995년 실시된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춘천군과 합쳐 도농통합시를 이루었다. 강원도 도청소재지로, 강원도의 행정·경제·교육·문화의 중심지이며 교통의 요지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호반도시이다. 백두대간의 지맥이 북북동-남남서 방향으로 뻗어내려 대부분 산지를 이루고 있으며, 소규모 산간곡저평야를 제외하면 평야가 거의 없다. 그러나 중심시가지인 춘천분지에는 후평천과 소양강이 합류하는 후평동·신동·우두동 일대에 충적평야가 발달했다. 시의 동부에는 가리산(加里山, 1,051m)·매봉(800m)·바위산(858m)·계명산(763m)·죽엽산(竹葉山, 859m) 등이 있으며, 북서부에는 촛대봉[燭臺峰, 1,125m]·화악산(華岳山, 1,468m)의 연봉인 응봉(鷹峰, 1,436m)·가덕산(加德山, 858m)·북배산(北培山, 867m)·토보산(589m) 등 비교적 높은 산들이 솟아 있다. 남쪽으로는 대룡산(大龍山, 899m)·수리봉(水利峰, 645m)·구절산(九節山, 750m)·금병산(錦屛山, 652m)·꼬깔봉(421m)·좌방산(座防山, 502m) 등이 솟아 있으며, 남서쪽으로 지세가 낮아지면서 경기도와 만난다. 인제군에서 시의 북동쪽으로 흘러들어온 소양강이 중심시가지에서 화천군에서 흘러들어온 북한강과 합류하여 시를 남서방향으로 흐른다. 또한 홍천강은 홍천군과의 경계를 이루며 시의 남동부를 서류하고 있다. 시 전체에 걸친 풍부한 수계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이루어진 경인지방의 산업발전을 위해 신북읍 용산리에 춘천 댐, 천전리에 소양강 댐, 신동면 의암리에 의암댐이 건설되면서 크게 변모했다. 특히 북산면의 경우는 경지면적의 절반 이상이 수몰되었고, 높은 산들은 저수지 가운데의 섬이 되기도 했다. 의암호 가운데에는 중도가 있다. 응봉(應峰, 759m)과 금병산에서 발원한 공지천이 북서쪽으로 흘러 의암호에 유입하며, 대룡산에서 발원한 후평천도 북서류하여 소양강에 흘러든다. 삼국시대에는 먼저 고구려의 영역에 들었다가 뒤에 신라의 세력권에 들었다. 신라는 637년(선덕여왕 6)에 우수주 또는 우두주를 두고 군주를 파견했다. 통일신라시대인 673년(문무왕 13)에 수약주 또는 오근내·수차약으로 개칭했으며, 757년(경덕왕 16)에 삭주로 바꾸었다가 뒤에 다시 광해주로 고쳤다. 고려초인 940년(태조 23)에 춘주로 개칭되었으며, 995년(성종 14)에는 단련사가 설치되고 안변부에 예속되었다. 1018년에 춘주군이 되어 가평군 등 2개군을 속군으로, 기린현 등 9개현을 속현으로 관할했다. 안변부로 통하는 길이 험난하다 하여 1203년(신종 6)에 안양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뒤에 춘주군으로 바뀌었다. 조선초의 군현제 개편에 의해 1413년(태종 13)에 춘천군으로 개칭되었다가 1415년(태종 15)에 춘천도호부로 승격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춘천의 별호(別號)는 수춘·봉산이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에 춘천부 춘천군이 되었다. 1896년에는 13도제 실시로 강원도에 속하게 되었으며, 원주에 있던 강원도 관찰부가 춘천으로 이전되어 이후 강원도의 행정중심지가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20개면이 12개면으로 통합되었다. 이때 부내면·동내면이 통합된 부내면이 1917년에 춘천면으로 개칭되고, 1931년에 춘천면이 읍으로 승격했으며, 1946년에 춘천읍이 춘천부로 승격되었다가 1949년에 시로 승격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농촌지역이던 춘천군과 중심도시기능을 담당해왔던 춘천시가 하나로 통합되어 도농통합시라는 새로운 형태의 춘천시를 이루었다. 1998년 상걸·덕두원·용산·조교출장소가 폐지되었다. 춘천시는 전국 최대의 수력발전지역으로 춘천·의암·소양강 수력발전소가 있다. 경춘선과 경춘국도로 알려진 서울-인제를 잇는 국도를 통해 서울과의 통행이 원활하다. 그밖에 화천-원주, 철원-홍천을 잇는 국도가 지나고, 중앙고속도로가 건설중에 있어 교통이 더욱 편리해질 것으로 보인다. 소양호·춘천호·의암호 등 3개의 인공호수가 생기면서 내륙수운이 활기를 띠고 있다. 특히 소양강 댐에서 양구를 거쳐 인제까지 이르는 소양강 수운은 청평사와 동면의 품안리, 북산면의 여러 내륙지역을 연결했다. [포탈에서 발췌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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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이후 남과 북이 갈라지면서 한국전쟁 전까지는 이곳이 남한과 북한의 경계가 되었던 곳입니다.
♤ 배후령(背後嶺, 600m)
배후령은 강원도 춘천시 신북읍 유포리와 화천군 간동면 간척리를 잇는 고개다. 국도 제46호선이 통과하였으나 자동차의 사상사고가 잦아 2004년 착공하여 2012년 3월 30일 배후령터널을 개통했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 전까지는 이곳이 남한과 북한의 경계가 되었던 곳으로 "38선 표지석"이 있다. 배후령은 그 너머 간동분지에 과거 월남파병훈련장을 설치했을 만큼 넘나들기가 힘든 고개다. 배후령은 한많은 애환(哀歡)의 고개이기도 하다. 배후령을 벗어나 첫번째로 만나는 곳이 화천군 간척면 오음리였다. 오음리에는 60년 중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파월장병 훈련소가 있던 곳이다. 지금은 베트남이라 불리는 월남에 파병(派兵)된 거의 모든 용사들은 이곳 오음리 훈련소에서 한달간 전장(戰場) 적응훈련을 받았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약 32만명의 병사가 이곳 파월훈련소를 거쳐 갔다. 월남전 지원 혹은 차출된 병사들은 물론 군인정신과 조국에 대한 충성심이 우선이었겠지만 대부분 돈 때문이었다. 월남참전 이전에 우리나라 GNP는 북한보다 많이 낮았다. 그런 척박한 삶에서 벗어나 가족을 부자로 만들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던 참전, 훈련소에 입소한 장병들에게는 일년 치의 월급이 주어졌다. 돈 있고 사내 있는 곳에 가난한 여인들이 모여들었다. 그 여인들은 급히 합판으로 만들어진 (춘천옥), (부산옥), (화천옥) 등 200여개 이상의 술집에서 일을 했다. 조그만 산골에 전국에서 모여든 그들이 약 5백명이나 되었다니 참전용사들 만큼 그녀들의 애환도 깊었을 것이다. 춘천역에는 마지막으로 떠나는 파월장병들을 보려고 전국 각지에서 온 면회객들이 300만명이 넘었다는 기록도 있다. 마지막 보게 될지도 모르는 자식.형제.조카.손자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더 보려고 그 많은 사람들이 배후령을 넘었다. 훈련을 마친 파병용사들에게 출발선은 이 배후령이었다. 살아 돌아오길 바라는 염원은 이 배후령을 넘으면서 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배후령을 넘은 그들은 춘천역에서 첫번째로 시민들의 환송을 받고 서울 대전 등지를 거치면서 태극기 깃발 사이로 행여 아는 얼굴이 있을지 몰라 안타까워 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부산에서 배를 타고간 이역만리 타국에서 꽃처럼 산화하거나 월남참전용사로 조국의 땅을 밟았을 것이다.
- 들머리는 날머리 도로 건너편 사자상 입구와 화천군 방향 아래에 '38선 표지석'' 도로 건너편 용화산등산로 임도 입구 두군데이지만 곧 합쳐진다. 배후령에서 구간을 끊고 탈출하려면 간척사거리까지 5.1km이고, 빠른 걸음으로 1시간 소요된다.
♤ 배후령터널(背後嶺터널)
배후령터널은 춘천시 신북읍과 화천군 간동면을 잇는 국도 제46호선 상의 터널로, 배후령과 오봉산을 관통한다. 2004년 착공하여 2012년 3월 30일 개통하였으며, 개통 시부터 2016년 6월 30일 양북1터널 개통 이전까지 국내 최장 도로 터널이었다. 왕복 2차로의 터널 1개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길이는 5,1km에 폭은 11.5m, 높이는 10.2m이다.
♤ 688.4m봉/ 직전 좌측에 조망바위/ 소슬봉?
조망바위에서 춘천시내가 바라보이고, 좌측으로 수리봉과 진행할 마루금이 펼쳐져 있고 그 뒤로 화악산 응봉-몽덕산-가덕산-북배산-계관산으로 이어지는 화악지맥과 명지산-연인산까지 보인다.
- 폐헬기장에 벤치가 있고 준.희선생님 산패가 있다.
♤ 745.3m봉
로프를 잡고 기묘하게 서있는 바위도 지나 4단 콤보로 올라선다. 봉우리 정상 직전에 이정표가 있고, 정상에는 가지가 다 잘리고 기둥만 남은 고목이 하나 있다. 우측은 국립숲속야영장으로 내려서는 등로이다.
♤ 763.6m봉
용화산 분기점은 120m 앞쪽에 있다.
- 준.희선생님 산패, 3등삼각점(양구 313/ 2007 재설)이 있다.
♤ 용화산갈림길/ 삼면봉(춘천시 신북읍, 화천군 간동면 → 춘천시 사북면)
오른쪽은 사여령-고탄령을 지나 용화산으로 이어지는 일반 등산로이다. 지맥은 좌틀하여 내려서면서 여기서부터 화천군 간동면 간척리와 헤어지고 춘천시로 온전히 진입하여 신북읍 발산리와 사북면 고성리의 면계를 따라 수리봉 방향으로 좌틀하여 남서향으로 진행한다.
- 조금 더 진행하면 글자가 지워진 오래된 이정목이 서있다. 위에 산패는 용화산과의 경계이고, 아래 산패는 행정구역상 경계이다.
♤ 용화산(龍華山, 877.8m)
용화산은 강원도 화천군과 춘천시의 경계에 있으며 주봉은 만장봉이다. 화천군민의 정신적 영산이며 해마다 용화축전 시산신제를 지낸다. 전설에 의하면 이 산의 지네와 뱀이 서로 싸우다 이긴 쪽이 용이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하여 용화산이라 이름지어졌다. 주위에는 유불무산(693m)·매봉산(615m)·장군봉(315m) 등이 있으며, 화천에서 남쪽으로 약 8㎞, 춘천에서 북쪽으로 약 20㎞ 지점에 위치하고, 동남쪽으로는 고탄령(古灘嶺)과 사야령(四夜嶺)을 지나 소양강에 이른다. 산 정상에서 3갈래의 능선이 이어진다. 동남쪽으로 고탄령·서야령에 이르는 능선이 주 능선이고, 그밖에는 북쪽으로 성불령에 이르는 능선과 서남쪽으로 큰고개·부다리고개에 이르는 능선이 있다. 용화산은 암벽등반을 하지 않고도 암벽등반로를 누비는 재미를 맛볼 수 있다. 득남바위, 층계바위, 하늘벽, 만장봉, 주전자바위, 작은 비선대 등 숱한 기암괴석과 백운대 코스, 깔딱고개까지 있어 온종일 바위 등산로를 오르내리는 진수를 만끽할 수 있다. 굴곡이 많은 2Km의 등산로를 따라 만장봉 정상에 오르면 저 멀리 화천댐 파로호가 조망되고 주변의 주전자바위, 마귀할멈바위, 장수바위등 각가지의 전설을 간직한 기기묘묘한 바위가 이어진다. 성불사터가 있으며 광바위, 주전자바위, 바둑바위 등 갖가지 전설을 간직한 실물을 닮은 바위가 유명하다. 사면은 대부분 급경사로 기암절벽을 이룬다. 하천은 정상부에서 발원하여 남쪽 사면과 북동쪽 사면으로 흐르는데, 남쪽 사면을 흘러내리는 양통개울은 사북면 고성리에서 남서쪽으로 사행한 뒤 사북면 고탄리에서 춘천호로 유입하며, 북동쪽 사면을 흐르는 계류들은 간동면 유촌리·용호리에서 파로호로 유입한다.
♤ 휴양림갈림길 삼거리
가파른 비탈을 내려가면 거리표시 없는 이정표가 나오고 수리봉 방향으로 진행한다. 오래된 이정표 지점에서 약 12분 거리이다.
잠깐 올라서는 672m봉엔 산패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 672m봉(개념도상 661m봉)
휴양림갈림길삼거리에서 5분여 내려서니 짤록한 안부인데 이곳에서 한참을 오르면 바위로 이루어진 661m봉으로 소나무에 표지판이 걸려있다. 661m봉에서 몇 발자국 되돌아 내려와서 진행방향인 오른쪽으로 향하면 버섯 모양의 바위가 오른쪽으로 보이는데 남근석이다. 남근석을 지나 왼쪽인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진행한다.
♤ 수리북봉(652.1m)/ 푯말
무덤이 있는 널찍한 공터봉으로 잡목에 둘러쌓여 조망은 없다. 푯말이 3개나 매달려 있다.
무명봉 지나 Y갈림길이 나오고, Y갈림길에서 우측은 암봉을 우회하는 길이고 직진방향으로 진행해 암봉으로 올라섭니다.
♤ 529.3m봉/ 전망대(조망바위)
우측으로 용화산이 보이고 이어서 그 아래 춘천시 사북면 고성리 양통마을이 보이는데 용화산을 오르는 큰고개로 이어진다. 6.25때 화천 북한강을 도하하여 용화산을 넘어 춘천으로 밀고 내려왔을 5번국도와....
- 조망바위를 내려와 수리봉으로 향하는 오르막이 시작된다.
2군단에서 사격 훈련 중인지... 총소리가 계속 들립니다. 역시 호국의 도시 춘천!!
♤ 수리봉(水利峰, 656.7m)
수리봉은 춘천시 신북읍 발산리에 소재한 도솔지맥상의 산이다. 강원도 춘천시에는 수리봉이 네개 있다. 그중에서 춘천시 신북읍 발산리의 수리봉과 강원도 춘천시 동산면 원창리 수리봉(644.9m)이 대표적이다. 발산리 뒷산 봉우리인 수리봉은 물이 이롭게 쓰인다는 수리(水利)란 한자 표기를 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수리봉은 그 산의 형세가 매나 수리를 닮았다고 해서 유래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곳은 물수(水)를 써서 水利峰이라 부르는데 아마 호반의 도시와 연관이 됨직하다. 그 외 춘천시 동면 신이리와 춘천시 동내면 사암리에도 수리봉이 있다. 검은 오석 수리봉 정상석이 있는 평평하고 넓은 공터 폐헬기장이 수리봉 정상이다. 잡목으로 조망은 없다.
- 날개없는 이정표 기둥이 서있으며 삼각점은 찾아볼 수 없다. 급우틀로 내려서서 서향한다.
♤ 양통고개/ 안부삼거리
수리봉에서 약 770m 고도를 낮추면 만나는신북의 바라미마을과 사북의 양통마을을 이어주던 고개이다. 이정표(수리봉 0.8km/ 세밀고개 2.6km/ 발산3리 2.1km)가 있었는데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고개를 이용하는 사람이 없으니... 그러나 좌측에서 올라오는 고개 흔적은 뚜렷하다.
수리봉 이후 꼭지봉까지 한참 동안 등로 좌측으로 산불 흔적이 이어집니다. 2020. 1. 5.일 헬기 다섯대가 동원되는 대형 산불이 났었다네요.
♤ 527.3m봉/ 수풀산 푯말
양통고개를 지나 노송들이 어우러진 봉우리를 거쳐서 무명봉을 지나서니 오른쪽으로 용화산 정상부의 암릉의 위용을 조망할 수 있다. 완만한 능선을 잔파도를 타듯 올라서니 억새가 무성한 527.3m봉이다. 삼각점이 박혀있는 527.3봉은 주위의 소나무로 조망은 불가하다. 넓은 공터에 삼각점만 덩그런하다.
옛고개는 사용하지 않아 이름으로만 전해진 실전된 고개가 많습니다. 어느 곳은 얼토당토않게 봉우리를 고개라 부르는 곳도 있습니다. 고개는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통로인 교통 수단으로 가장 편리하고 접근성이 뛰어나야 합니다. 고로 우선 조건은 고개가 낮고, 가파르지 않게 넘나들기에 수월해야 합니다.
♤ 새밀고개/ 세미고개
개념도에 고개표시는 되어 있는데 그냥 지나가는 능선이고 고갯길 흔적은 없다. 수리봉에서 3.4km 지점이다.
수풀산에서 20분 정도 거리이며 전망이 좋습니다. 알바주의 지점입니다.
♤ 545.8m봉/ 꼭지봉 푯말/ 삼리봉(신북읍 발산리, 사북면 고성리 → 신북읍 지내리)/ 직진 알바주의...
헬기장으로 조성된 봉우리이며 남북방향으로 조망이 좋아 남으로는 신북들판과 북한강과 소양강이 만나는 합수점이 춘천대첩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봉의산 뒤로 대룡산-금병산-삼악산에 둘러 쌓인 춘천시내와 용화산과 그 아래 고성리마을이 한눈에 보인다. 그리고 춘천지맥과 화악지맥을 두루두루 감상할 수 있다. 마루금은 올라온 방향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직좌틀로 꺽이며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급경사로 내려선다. 사북면과의 면계에서 온전히 신북읍으로 들어선다.
- 풍향계, 무인산불카메라가 있다. 무인산불카메라가 있는 주 등산로로 직진하면 부다리고개로 향하는 407번 도로로 떨어지는 알바...
♤ 403번도로/ 조경농원 입구
좌틀해서 묘지를 따라 조경농원 입구로 내려가 세미고개에서 내려오는 403번 도로를 따라 진행한다.
♤ 지내교차로
미제 군삼각점이 박혀있는 군부대 정문을 지나고 5번국도 위를 지나는 지내IC육교를 건너 신북로 2차선 도로를 따라 진행한다.
♤ 양지노인마을입구 삼거리
신북로 화학부대를 지나 이동통신 시설물(중계기)이 설치된 곳에서 들머리가 보이지 않으나 능선으로 올라선다. 지내교차로에서 약 1km 도로를 따르다가, 양지노인마을 입구삼거리에서 우측 절개지를 올라 능선길로 오르기도 한다.
♤ 선교랑 남양홍공(宣敎郞南陽洪公)묘
선교랑(조선 시대 문관 종6품 상(上)의 품계명) 묘에서 우측으로 전원주택 마당으로 내려선다. 새로 조성된 전원주택단지가 나오고, 주택단지를 관통하여 전원주택단지 끝에서 좌측 야산으로 진행한다. 야산을 하나 넘어서면 주택 옆 비포장임도로 내려서고, 비포장 임도를 가로질러 다시 잡목을 뚫고 올라간다. 밋밋한 봉우리 하나를 넘어 내려서면 고갯길인 양회임에 내려서고, 양회임도를 가로질러 반대편에 보이는 전봇대옆 산길로 올라간다. 묘지의 사성(莎城)을 지나는데 잘 닦여진 고속도로 수준의 넓고 푹신한 산책로를 따라 진행한다.
♤ 121.9m봉/ 삼각점봉
묘지에서 좌틀하면 이내 마루금은 순해지고, 우곡각 Y자 갈림길에서 지맥은 우측이지만 좌측으로 약 100m 떨어진 곳에 121.9m봉 삼각점이 있어 그것을 확인하려 잠시 잡목 숲을 헤치고 들어간다.
♤ 123m봉/ 훌라후프/ 간이쉼터
좌측에 잘 관리된 가족묘역을 지나 완만히 올라서면 커다란 훌라후프가 있는 간이 쉼터봉이 나온다.
다시 우측에 청주한씨 중종묘역을 지나면 절개지 상단에 서고 우틀해 수로 따라 구리고개로 내려섭니다.
♤ 구리고개
춘천시 신동 국군병원에서 춘천시 신북읍 산천리를 연결하는 403번 2차선 포장도로이다.
- 직진으로 도로를 가로질러 건너편 산으로 다시 올라간다.
묘역에서 우측으로 나가면 넓은 수렛길이 지나는 고개를 가로질러 오르고 등로 좌측에 잘 정돈된 가족 납골묘를 지나갑니다.
이윽고 태양광발전단지에 도착합니다. 개념도에는 "춘천농고실습장"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방고개로 향하는 녹색팬스 안쪽에 넓게 태양광발전시설 판넬이 자리하고 있고 태양광발전단지가 마루금입니다. 묘지가 하나 있는데 비석을 보긴 했는데 어느 집안인지 기억이 안납니다.ㅋ
♤ 방(傍)고개
춘천시 신동 국군병원 사거리에서 신북읍 율문리를 잇는 방고개 양쪽으로 태양광발전시설이 넓게 자리하고 있어 방고개 능선으로 올라야 하나 방고개에서 도로따라 아래로 내려선다. 우틀로 가더라도 건너편 능선으로 올라설 수 없다. 하여, 태양광발전단지 울타리에 도달하면 우틀하지 않고 좌틀로 펜스를 따라 방고개 아래로 내려서는 방법을 택하기도 하고, 우틀하여 방고개에서 도로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기도 한다.
태양광발전시설 펜스를 따라 포장도로에 내려서고 방고개 반대쪽으로 좌틀하여 도로를 따라 나갑니다. 우측에 금희농장을 지나자 마자 도로삼거리에서 우틀하고 우틀하여 수레길을 따라 올르면 바리케이드가 나옵니다. 바리케이드 좌측으로 희미한 길흔적을 쫒아 낮은 능선을 향하여 마루금으로 올라섭니다. 우측은 장뇌삼 재배단지라 철조망이 쳐져 있습니다. 이렇게 방고개를 우회하여 능선에 복귀하면 다시 산책로 수준의 마루금과 만나고 지맥은 좌틀로 능선을 따라 진행합니다.
♤ 102보충대대/ 춘천시 신북읍 용산리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제주도 모슬포에서 제1훈련소로 창설된 이 보충대는 휴전 이후, 1953년 8월에 강원도 춘천시 근화동에 자리를 잡았다. 이후 1967년 12월 춘성군 신북면 율문리으로 이전했고, 1987년 10월에 현 위치인 신북면 용산리로 위치를 다시 옮겼다. 이 부대는 교통편이 어려웠던 시절, 각 부대로 배치되기 전 장병들을 모으는 중간 지점 역할을 해왔다. 제1야전군 예하 사단의 입영 장정의 관리 및 호송을 담당하였다. 매주 1천여 명씩, 한 해 4만 6천여 명, 모두 260만 명의 장정들이 거쳐 갔다. 이 곳에 입대하는 입대자들은 전투복 등 기본 보급품을 지급받고 3박 4일 동안의 대기 일정을 마치면,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해 무작위로 이루어지는 부대배치에 따라 제1야전군 지역 각 사단별 신병교육대로 이동했다. 연평균 4만∼5만 명이 입영하여, 65년간 약 260여만 명이 이 부대를 거쳐 갔다. 2016년 11월 1일 공식 해체되었다. 육군 관계자는 보충대대 해체는 국방개혁 기본계획에 따른 부대 통폐합의 일환으로 시행하는 것이라며 과거와 달리 교통이 발달하고 개인 승용차 보유 대수가 증가해 보충대대의 효용성이 감소한 데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로프가 설치된 목책을 따라 올라서면 넓은 공터 봉우리에 3등삼각점과 벤치, 164고지 전적비 안내판이 있습니다. 여기서 적 전차를 바라보고 포사격을 때린 옥산포 벌판이 보이는데 나무로 인해 조망이 나오지 않습니다.
♤ 163.4m봉/ 164고지전적비
춘천대첩이라는 격상된 명칭으로 불리며 춘천시에 호국의 도시라는 명예의 타이틀을 선사한 이 전투는 유명세에 비해 그 실체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것은 춘천 전투 현장에 제대로 그 가치를 알고 건립된 전적비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 말해준다. 춘천에 있는 육군 7연대 1대대의 옥산포 돌격을 기념하는 전공비는 약 2km에 걸쳐 참호진지가 구축되어 있던 164고지에 세운 것이 유일하다. 육탄 돌격의 영웅이라는 심일의 동상은 거대해도 보병이 감행했던 옥산포 돌격의 전적비는 사람들이 별로 오지 않는 164고지 꼭대기[보병 1대대 지휘소가 있던]에 쌀 푸대만한 크기의 것으로 붙어있고 16 포병 대대의 전적비는 과거 군 시설이 있던 신동 주유소 길 건너 강변 공지에 자대에서 시멘트로 엉성하게 만든 것이 있을 따름이다.
164고지 이후로 지맥길을 따라 6.25직전에 축조된 교통호가 보입니다. 우두산까지 약 2km에 걸쳐 가슴 높이로 축성된,, 춘천대첩의 수훈갑, 엄청난 효과를 거둔 유비무환의 현장입니다.
밤나무단지 펜스를 만나 좌틀하여 폐운동기구를 지나 펜스끝 삼거리에서 좌틀합니다. 등로 한가운데 군삼각점을 지나고 국가유공자 묘지 상단에 120.5m봉 삼각점도 지납니다. 곧이어 절개지 상단에 서고 우틀해 수로 따라 내려서다가 좌측 철계단으로 내려가 철망펜스로 나오면 여우고개 입니다.
♤ 여우고개/ 춘천시 우두동
춘천 여우고개는 신북읍 율문리에서 춘천시 우두동으로 가는 길 사이에 있는 춘천~샘밭 국도 사이의 고개를 가리키며 46번 국도가 지나는 곳이다. 옛날에는 고개였으나 도로 개설로 평지가 되었다. 70여년 전만해도 참나무 숲이 울창해 우두벌과 샘밭 사이를 오가는 샛길만 나있을 뿐이었다. 이후부터 지맥은 춘천시 우두동으로 진입한다. 지명 유래를 보면 윗샘밭에 살던 총각이 우두벌에 세워진 서당에 글공부를 가는 길에 어떤 소녀가 그를 유혹했다. 그 소녀는 입에서 구슬 한개를 총각의 입 속에 넣어주고 헤어질 때가 되면 구슬을 되돌려 받았다. 이 사실을 알게된 서당 훈장은 총각에게 구슬을 돌려주지 말고 삼키고 서당으로 올때 소녀를 보지 말고 하늘만 쳐다보고 오라고 당부했다. 총각은 구슬을 삼켰지만 하늘을 쳐다보지 않고 소녀가 여우로 변하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이 사실을 안 훈장은 총각이 하늘을 보고 걸었다면 큰 벼슬을 할 운이었지만 만사가 수포로 돌아갔다고 크게 호통을 쳤다. 그때부터 이 고개를 여우고개라 불렀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 도로 중앙분리대를 넘어 좌틀하여 도로따라 들어와 교통표지판 앞쪽에서 우틀해 밭으로 올라섭니다.
야산을 하나 넘으면 소양5교가 지나는 소양강이 보이고 No.45 송전탑을 끼고 내려가 우일마을 정자에 도착합니다.
마을 정자를 좌측으로 돌아가 고물상 철문앞에서 절개지를 우측을 올라 산으로 올라서면 군삼각점이 있는 밋밋한 공터봉입니다. 숲길을 빠져나와 우두산 오르는 도로에 내려서서 도로따라 3분 정도 진행합니다. 충렬탑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도솔지맥 마지막 봉우리인 우두산 충렬탑 뒤로 올라섭니다.
♤ 우두산(牛頭山)/ 충렬탑(忠烈塔)
우두산은 6·25전쟁 초기 전선에서 아군의 승전보를 울렸던 곳으로 유명하다. 국군이 이곳에서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그때를 기리는 충렬탑이 소슬묘 근처에 세워졌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추념하기 위해 충렬탑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눈에 뜨인다. 우두산을 오르며 수준점을 지나고, 좌측으로 소양강을 보며 충렬탑으로 오른다. 도청으로 가져간 조양루 터를 지키고 있는 정자에서 좌측으로 나가 한국폴리택대학 춘천2캠퍼스 옆으로 내려간다.
- 충렬탑 앞으로 나와 우두정으로 진행한다. 우두산 전적지 안내판을 지나고 우두정에서 좌틀해 넓은 수렛길 따라 내려간다.
춘천지맥 가리산 직전 물노리갈림길에 한천자 묘에 대한 전설이 소개되어 있는데 이와 유사한 부분도 있습니다. 수도지맥 우두산을 지나며 소시모리가 나오는데 일본인들의 마수가 여기 춘천 우두산까지도 뻗쳐 있습니다.
♤ 소슬묘/ 자용산(自聳山)
우두산 정상에 있는 소슬묘는 한중일 관광객들이 좋은 기운을 체험하기 위해 즐겨 찾던 명소로, 소슬묘 바로 옆에 세워진 조선시대 누각 조양루(무덤 뒤)에서 감상할 수 있다. 강원 춘천시 우두동의 우두산(牛頭山)을 찾아간다. 우수산(牛首山)으로도 불리는 우두산은 이름 그대로 ‘소머리산’이니 소를 상징한다. 또 우두산 소재지인 춘천(春川)은 이름에 ‘봄(春)’이 들어가 있어 새해 봄맞이 장소로 제격이다. 이렇게 특정한 시점에 안성맞춤형 지명(地名)을 찾아가는 여행은 우리 선조들이 즐겨 하던 국토 기행법이기도 하다. 조선의 식자층은 선대의 유적지, 신비한 기운이 서려 있는 길지 등을 찾아 살피거나 외적으로부터 신성한 땅을 지키는 행위를 ‘수토(搜討)’라고 표현했다. 우두산은 춘천시 북쪽 용화산의 줄기가 뻗어내려 넓은 들판인 우두벌(평야)에서 우뚝 멈춘 산이다. 산의 생김새가 하늘에서 내려온 소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산의 외형은 동네 뒷산이라 할 정도로 평범한 야산(133m)이다. 산 정상까지 곧장 자동차로 올라갈 수 있고, 입구에서부터 걸어도 10분이면 바로 도착할 수 있다. 그러나 내력만큼은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산이다. 이 산에 깃든 전설 같은 얘기가 수많은 외국인 관광객까지 불러들였다. 산 정상에 있는 소박한 무덤 하나가 바로 그 국제적 전설의 주인공. ‘소슬묘’로 불리는 묘 바로 옆에는 조선시대에 지은 누각 조양루(朝陽樓)가 있는데, 전설도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후기의 문신 이유원은 청나라 황제의 조상 묘로 소문난 이곳을 답사한 후 저서 ‘임하필기’(1871년)에 이렇게 기록했다. “우두산에 옛 무덤 하나가 있는데 주민들이 청조(淸祖)의 묘라고 부른다”고 하면서 주민들의 전언을 소개했다. “묘를 파보았더니 정황기(正黃旗)만 나와 모두들 두려워하면서 봉분을 다시 만들려 했는데 하룻밤 사이에 봉분이 저절로 전과 같이 솟아 나왔다. 그 후로 소나 말이 와서 무덤을 짓밟아 놓아도 다시 전과 같이 솟아 나왔다. 그래서 이 무덤을 스스로 솟은 산이라고 해서 ‘솟을뫼[자용산(自聳山), 혹은 소슬묘]’라고 부른다.” 이유원은 우두산에 대한 조망(眺望) 평도 남겼다. 그는 춘천시의 진산인 봉의산 소양정(현 강원도문화재자료 제1호)에 올라 소양강을 사이에 두고 직선거리로 불과 2.7km 남짓한 우두산 정상을 바라보면서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좋은 자리임은 의심할 게 없다”고 했다. 우두산이 풍수지리적으로 살펴봐도 길한 대지라는 뜻이다. 이 터는 일본과도 얽혀 있다. 조선시대까지 중국 황제의 조상 묘로 알려졌던 이곳이 일제가 한반도를 침탈한 후에는 일본 조상신의 묘로 ‘둔갑’했다. 일제는 이 묘가 일본의 시조신 아마테라스오카미(天照大神)의 남동생 스사노오노미코토(素殘嗚尊)의 묘역이라고 강변했다. 일본 역사서인 ‘일본서기’에는 스사노오노미코토가 신라(한반도)의 소시모리에 강림했다고 기록돼 있는데, 소시모리가 바로 소머리, 즉 우두산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스사노오노미코토는 우리의 국조인 단군이라고까지 우겼다. 이렇게 되면 여신 아마테라스오카미의 나라 일본은 맏이가 되고, 우리나라는 동생이 되는 격이다. 일본 정한파들은 이런 식으로 한반도 침략의 명분을 찾으려 했고, 1930년대에는 우두산 고적화 작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런데 우두산 소슬묘는 무덤으로 보기도 어렵다. 1940년대에 발간된 ‘강원도지’는 이 무덤을 파보니 오래된 기와가 나왔을 뿐 별다른 것이 없었다고 기록했다. 고(故) 전신재 한림대 교수는 이곳이 과거 천신을 모신 제단이라고 추론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장소라는 것이다. 분명한 건 우두산의 소슬묘는 한중일 삼국이 주목한 신비롭고도 신성한 땅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땅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현재는 코로나19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문제로 중국인 관광객들이 눈에 띄지 않지만, 그 전만 해도 이곳은 중국인들이 찾아와 기도하던 명소였다.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 관리들이 춘천을 방문하는 길에 들러 참배하곤 했다. 드라마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인기가 절정일 때 우리나라를 찾은 일본인 관광객들이 이곳에 들러 절을 했다고 한다. 국제적 상징성을 갖춘 이곳에서 새해의 다짐과 소원을 빌어보는 것도 남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두산에서 실질적인 도솔지맥의 산줄기는 끝이 납니다. 조양로터에서 좌틀하여 내려서면 강변로길을 따라 소양강 옆으로 이제부터 도로를 따릅니다. 한국폴리텍대학 춘천2캠퍼스 뒤로 내려서 여기서부터 날머리 소양2교 합수점까지는 약 2.5km 도로구간을 진행합니다. 건물을 끼고 돌아나가 대학정문을 지나 70번 도로와 만나는 우두택지개발 사거리에서 좌틀, 충렬로 도로 따라 소양1교까지 걸어갑니다. 고로, 우두산 조양루터 우두정에서 우측으로 내려서서 우두택지개발 사거리로 나오면 됩니다. 농어촌공사 춘천지소-우두사거리 직진-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강원지원-강원도 농업기술원 소양강 너머로 춘천의 진산 봉의산을 바라보고 소양초교앞 영석마트-동부아파트사거리를 건너 우두강둑길로 들어서면 소양1교에 이른다.
- 소양1교에서 우틀, 강변길따라 소양2교까지 진행합니다.
♤ 소양1교/ 소양교
한국전쟁 개전초기 춘천대첩의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 소양1교는 춘천에서 제일 오래된 다리로 일제시대인 1933년 12월 준공된 397m의 현대식 다리이다. 모든 교각과 교대에는 한국전쟁 당시의 총포탄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춘천대첩으로 유명한 다리인데 그대로 남아 있다. 역사문화적 가치로 근대문화유산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이 추진되고 있다. 소양강 너머로 통신 시설물이 솟아있는 봉의산이 지척이다. 이 다리를 반격시 활용하겠다는 잘못된 판단으로 파괴하지 않았던 것이 6사단이 춘천전투에서 남긴 유일한 실수였다. 소양교는 일제강점기 동안 12년에 걸쳐 춘천과 화천, 양구를 이어주는 교통의 편리성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인제와 양구, 화천 지역의 자원 공출 수단으로 사용되었으며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 때는 북한군 남침 계획을 저지하여 미군의 참전기회를 제공하는데 춘천전투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있어 "춘천대첩"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춘천대첩의 최일선 교두보로 북한군의 춘천시내 진입을 막아내는 중요한 일익을 담당했다. 남북한 간 치열한 격전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는 호국의 현장성을 지니고 있다.
- 우두산에서 한국폴리텍대학으로 내려서서 도로를 따라 약 50분 걸으면 소양1교입니다.
♤ 소양2교/ 합수점
북한강은 강원도 최북단에 위치한 회양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금성군, 화천군을 지나 춘천을 관통한 뒤 가평을 지나 양수리에서 남한강과 합류하여 황해로 흘러든다. 북한강이 분지내로 유입되는 길목에는 춘천댐이 건설되어 있다. 분지의 동쪽에 유입되는 소양강은 홍천 만월봉에서 발원하여 인제군과 소양호를 지나 춘천 우두동에서 북한강과 합류한다. 분지 내부로 유입되는 시점인 월곡리에는 소양강댐이 건설되어 있으며, 마적산 아래 위치한 천전리부터 율문리까지 소양강을 따라 충적지가 발달해 있다. 마주보는 남쪽에 위치한 지내리에는 소양강의 지류인 한계천을 따라 충적지가 형성되어 있다. 현재 의암댐의 건설로 인해 수위가 상승하여 상중도와 하중도, 붕어섬으로 분리되어 있으나, 본래 하나로 연결된 거대한 충적지였다.
- 소양강변 산책로를 따라 5분여 걸어가면 소양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합수점이다. 의암호 멀리 삼악산 청운봉과 용화봉이 바라보인다.
♤ 춘천대첩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먼동이 트기 전, 화천군의 배후령 뒷산에서 소련제 SU-76 자주포를 앞세워 T-34전차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시속 40km로 38선을 넘어 남진하였다. 최전방 국군 진지에서는 오직 몇몇 취사부 사병들이 아침밥 준비를 시작하는 중이었다. 38선을 넘어오는 북한 자주포를 본 국군사병들은 길에 뛰어 나가 예의바르게 "여보세요 여기 건너오시면 안 됩니다"라고 소리쳤다. 첫 자주포에는 북괴군 제 2군단장 최현 소장이 탑승하고 있었다. 최현이 소리쳤다. "간나 새끼들 모조리 쏴 죽이라우!"
6.25전쟁 개전 초기, 소련의 지원에 힘입은 북측 인민군의 강력한 전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것이 상식처럼 돼버렸다. 그러나 큰 전력차에도 불구하고 사흘에 걸쳐서 인민군의 공격을 막아낸 곳이 바로 춘천이다. 중동부전선의 국군 제6사단(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제7연대를 춘천, 제2연대를 홍천 북동쪽에 배치하고, 제19연대를 예비로 원주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사단이 책임지는 광정면의 방어정면은 적목리(현 경기도 가평군 북면)-진흑동(현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까지 84㎞에 이르렀다. 제7연대는 북한군의 주공이 집중될 것으로 예상되는 화천-춘천방면에 1개 대대를, 조공으로 예상되는 양구-춘천방면에 1개 대대를, 그리고 화천-가평 접근로에 2개 중대를 배치해 진지를 강화했다. 이 강원도 중동부 공격로를 택한 북한군 제2군단의 임무는 춘천과 가평을 신속히 점령한 후 서울 동남쪽에서 조공으로 진출해 서울 남부와 수원방면으로 대우회포위기동작전(大迂廻包圍機動作戰)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이 작전의 입증은 인민군 총사령부로부터 하달된 정찰명령 제1호(1950.6.18.)와 제2사단 전투명령 제1호에서 확인된다. 정찰명령 제1호의 내용에는 “공격이 개시되면…(중략)…서울-춘천 철로와 도로상의 이동상황을 파악한다…. (중략)…정찰을 통해 서울-수원-이천 도로상의 이동과 곡수, 수원, 이천부근의 적 활동을 파악한다”고 명령이 하달돼 있었다. 제2사단 전투명령 제1호에도 “사단은 최후임무로 춘천을 당일 내로 점령한 후 가평, 강촌방향으로 진출한다”고 명시해 북한군 제2군단의 작전임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작전이 성공했다면 한국군은 초기에 대통령과 정부요인들 그리고 육군본부가 포로가 돼 ‘항복’을 할 수도 있었다는 것이 사후평가이기도하다. 그런데 이런 북한군의 전략전술기도를 초전에 격파한 것이 국군 제6사단이 버텨준 춘천지역전투의 5일의 기적이었다.
이를 기리는 '춘천대첩 기념 평화공원'에 있는 안내문에 따르면, 춘천대첩은 1950년 6월25일 오전 4시 인민군이 기습남침을 개시함에 따라 강원 춘천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6사단(사단장 대령 김종오) 제7연대가 오전 5시를 기해 비상사태에 돌입하면서 시작됐다. 개전 당일 25일 소양강을 도하해 춘천을 점령하고자 했던 북한군 제2사단은 춘천축선으로, 제12사단을 인제에서 신남-홍천방면으로 동시에 공격했다. 화천-춘천 접근로에는 모진교(소양강댐 공사로 수몰됨)가 있었는데 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사전 폭파에 실패해 SU-76자주대전차포를 앞세운 북한군의 진격을 막지 못하고 철수하면서 봉의산과 우두산일대를 주저항선으로 구축했다. 이 무렵 제7연대 본부소속 57㎜ 대전차포중대 제2소대장 심일(沈鎰)중위가 옥산포로 접근하는 적 SU-76 자주포 3대를 격파했다. 이 전과가 전파되자 제7연대 장병들은 적T-34전차와 SU-76자주포에 대한 공포심을 제거할 수 있었다. 현재 그 지점에는 심일 중위(후에 소령 추서/육사8기)의 전승기념비가 제막돼있어 그 날의 영웅적인 전투를 추모하고 있다. 육사교정에도 심일 소령 기념비가 있다. 춘천을 점령하려고 공격하던 북한군 제2사단은 소양강 백사장을 집결대형으로 공격해오다가 국군 제6사단 제16포병대대(105㎜ 견인포)의 집중포격으로 소양강이 피로 물들 정도의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은 이야기는 북한군이 아군의 포격에 대량살상이 되면서도 부대별로 오와 열을 맞춰서 백사장 개활지를 정면으로 무모한 공격을 반복했다는 것이다. 결국 역골로 퇴각했다. 이 전투를 봉의산 전술지휘소에서 지켜보던 국군 제6사단장(김종오 대령)은 적의 작전지휘능력과 전투기량의 수준을 갈파하고 춘천을 사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한다. 7연대는 제3대대 9중대로 하여금 오월리 방향으로 진격해오는 인민군을 저지하게끔 했으나 자주포와 포병 지원사격을 앞세운 인민군의 공격에 진지를 돌파당해 철수해야 했다. 하지만 우두산 136고지에 진지를 구축해둔 7연대 본부중대와 제1대대는 신동-옥산포 일대에 진출한 인민군들의 움직임을 관측해 적절히 대응하면서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2대대와 3대대도 각각 샘밭과 지암리에서 인민군의 공격을 지연시켰으며 오후 1시부터 집중된 인민군의 포격도 미리 구축해둔 진지 덕분에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막아낼 수 있었다. 뒤이어 국군 대전차포 중대가 인민군 자주포 부대의 공격을 저지하고자 정면 조준사격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대전차포 중대에서는 특공조를 편성해 자주포를 파괴하기로 결정했다. 소대장인 심일 소위를 중심으로 편성된 대전차 5인 특공조는 옥산포 소나무 숲에 매복해 있다가 인민군 자주포 2대를 지근거리에서 수류탄과 화염병으로 공격해 완파하는데 성공했고 승무원 1명도 생포했다. 특공조의 활약은 개전 이후 자주포 공격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던 국군 장병들의 사기를 드높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 제16야전포병대대도 옥산포에서 남하하는 인민군 보병 1개 연대를 집중사격으로 격파해 인민군이 퇴각하도록 만들었다. 인민군이 물러난 사이 국군은 소양강에 방어선을 구축했고 우두동에 있던 야포 포대도 현 춘천시청 자리에 해당하는 위치로 옮겼다. 한마디로 이 혈전은 포병전투였다. 병력의 부족으로 포탄을 공급하기에 어려움이 많았으나 춘천방직공장 여직공들과 춘천 학도호국단 학생들이 손에 포탄을 들고, 시민들이 지게에 지고 포탄을 운반해 주는 군(軍)·경(警)·민(民)·학(學)의 총력전으로 싸운 춘천전투는 구국(救國)의 도시라는 명예를 남겼다. 특히 강원도 경찰의 참전과 군경합동작전은 긴밀한 협조 하에 이루어졌던 점도 춘천전투의 비사(秘史)이다. 경찰국 경비계장 손계천 경감과 국군 제6사단 제7연대장 임부택 중령과는 선후배간으로 평소에 친밀한 유대를 가졌으며, 춘천역 뒤 소양강 제방에 춘천서 병력과 강원경찰학교 교육 중인 신임순경 중대가 배치됐다. 후평동으로 우회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전투경찰 9대대를 배치했고 전투에 참가해 시내로 진입하는 북한군을 격퇴했다. 이처럼 춘천전투는 6.25전쟁에서 첫 군경합동작전의 승리로 기록되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춘천전투가 중동부전선의 결전장이 될 것임을 예상하고 예비연대 제19연대를 춘천으로 이동 배치했다. 다음날인 26일 오전 3시 인민군이 국군 1대대가 주둔한 우두산을 공격해 공방전이 펼쳐졌으며 경찰도 참전해 국군의 우두산 방어를 도왔다. 26일 아침 북한군이 재공격을 위해 역골-옥산포 일대에 집결하는 것을 국군 제7연대 제1대대가 파쇄(破碎)공격을 해 격퇴시켰고, 14시경에는 북한군 제6연대가 초월(超越)공격으로 옥산포-마전리-춘천방면으로 투입했으나 전날 아군 제19연대가 증원된 사실을 모르는 북한군은 포병의 집중포화에 걸려들어 막대한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그럼에도 적은 제2, 제3제대를 같은 방향으로 병력투입을 했으나 아군의 집중포격에 소양강 도하는 좌절됐다. 인민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던 1대대는 6사단의 방어전면 축소 명령을 받아 소양강 이남으로 철수했다. 이후 소양강을 사이에 두고 포사격을 중심으로 한 국군과 인민군의 공방전이 벌어졌다. 인민군은 소양강 도하를 시도했으나 전날 소양강변에 미리 진지를 구축해두고 대비하고 있던 국군의 집중적인 포사격에 큰 타격을 입고 한발 물러나게 됐다. 27일 오전 5시부터 연대 2개와 전차 중대가 합류한 인민군이 다시 공격을 개시해 소양강 도하를 시도했지만 국군은 소양강 너머에서 집중적인 포사격을 가해 이를 저지했다. 이때 춘천사범학교 학생들이 나서 포탄을 나르는 등 국군의 작전수행에 도움을 줬다. 오전 11시 즈음 인민군이 소양교를 통한 도하를 시도하자 국군도 소양교 위에 미리 설치해둔 장애물 등을 활용해 저지에 나섰고 경찰도 합류해 힘을 보탰지만 전차를 앞세운 인민군의 공격에 결국 돌파당하고 말았다.
27일 아침 북한군 제2군단장은 제2사단의 돈좌(頓挫)상황에 따라 제12사단에서 2개 연대를 춘천지역으로 증원시켰다. 10시부터 T-34전차와 SU-76자주포를 앞세워 봉의산 방면으로 집중공격을 재개했으나 국군 제7연대가 적의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혈전을 벌였다. 이 무렵 그동안 두절됐던 육군본부와 유선망이 소통됐다. 육본은 “서부전선은 완전히 무너졌다. 육군본부는 시흥으로 철수한다. 제6사단장은 판단에 따라 중앙선을 중심으로 한 중부전선에서 지연전(遲延戰)을 전개하라”는 명령을 끝으로 통신이 두절됐다. 이때서야 김종오 사단장은 전선의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하게 됐다고 한다. 오후에 북한군이 전차로 소양교를 돌파하면서 춘천 동북방 원진나루터 쪽으로 진출해 왔다. 이에 국군 제7연대의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17시 30분경 춘천을 포기하고 원창고개 방향으로 철수했고, 18시경 북한군이 춘천시내를 진입했다.
28일에는 춘천에서 철수한 제7연대는 원창고개에 제2대대를 배치하고, 연대주력은 홍천북쪽 사현으로 철수했다. 이처럼 제7연대는 격전의 와중에서도 건제를 유지한 채 질서 있게 계획된 철수작전을 완료해 전투력을 보존했다. 국군 제6사단은 비록 춘천을 상실했지만 제7연대와 제2연대의 원창고개-말고개선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전투에서도 성공했다. 29일 오전 북한군은 오전 2개 연대규모로 원창고개를 재공격했다. 제7연대 제2대대가 격퇴했으나 11시경 백기를 든 적의 기만전술에 속아서 철수를 했고, 홍천북쪽 사현에 있는 연대본부와 합류했다. 오후에는 홍천-원주방향으로 축차적인 지연전을 실시하며 철수하게 됐다. 춘천지역 전투에서 압도적인 북한군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아군은 장교 8명을 포함한 200여명 전사와 전상 353명으로 비교적 적은 피해인 반면에 북한군은 제2사단 포병사령관을 포함한 6,572명의 전사상자를 내었고, 122명의 포로가 잡혔으며 7대의 SU-76자주포와 18대의 전차가 손실되는 대패를 당했다. 이러한 가운데 6사단은 오후 12시 육군본부로부터 서부전선이 붕괴됐다는 연략을 받고, 전선조정을 위해 지연전을 펼치면서 홍천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접수받아 학곡리, 원창고개 방면으로 철수하게 됐다. 이날 밤 원창고개에 진지를 구축한 국군은 이후 원창고개에서 인민군을 상대로 지연전을 펼친 후 홍천과 원주 등지를 거쳐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해 춘천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는 막을 내렸다.
춘천과 인근 지역들에서 벌어진 이 사흘간의 혈투에 동원된 병력은 국군 약 9,300명, 인민군 약 3만8,000명이다. 국군은 곡사포 12문과 대전차포 12문에 불과했던 반면, 인민군은 곡사포만 154문에 자주포는 17대, 전차 30대로 전력면에서 국군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열세에도 사흘에 걸쳐 인민군의 남하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은 6사단이 사전에 인민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어서였다. 1950년 6월19일 7연대 지역에 귀순한 인민군 포로로부터 북한이 남침을 하거나 무력 도발을 시도하려 한다는 진술을 들은 6사단은 연대 수색정찰대의 정찰을 통해 진술이 사실임을 확인 후 주말 외출·외박을 통제하고 경계 강화 및 전투준비 태세를 갖추도록 지시를 내렸다. 6.25 개전 당시 무방비 상태에서 인민군의 기습 공격을 당해야 했던 다른 지역들과는 대조적이다. 6사단은 이뿐만 아니라 포병대대를 담당하는 군의관들도 유사시 포사격을 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등 간부교육에 박차를 가했고 포병의 세부적인 화력지원 계획도 수립해뒀다. 23일 전군에 대해 비상해제가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6사단은 여전히 외출·외박을 통제하고 경계태세를 유지했다. 이러한 만반의 준비로 6사단은 인민군의 기습 남침에도 잘 대응할 수 있었고 덕분에 국군은 낙동간 방어전선을 구축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됐다. 6사단의 성공적인 대응으로 단시간에 강원도를 돌파해 수원까지 진출한 후 국군의 퇴로를 막으려 했던 인민군의 전략은 실패했고, 인민군은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제2군단장을 직위해제함과 동시에 제2, 7사단장도 경질했으며 7사단을 인민군에서 제명했다. 이렇듯 춘천대첩은 7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언제든 유사시에 대비하는 안보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 만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임을 전하고 있다. 춘천시는 이러한 춘천대첩의 의의와 몸바쳐 싸운 호국영령들을 기리고자 2000년 6월26일 소양강변에 춘천대첩 기념 평화공원을 조성했다. 기념 공원은 참전용사들을 기리는 무공탑과 참전용사들의 모습 및 당시 소양강변에서 인민군에게 포격을 가하는 모습을 재현한 조각 등으로 구성돼 있다. 춘천대첩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진행됐는지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 공원은 근화동 영서로 소양강변을 따라 조성돼 있으며, 누구에게나 상시 개방돼 있어 춘천대첩의 의의를 느끼고자 하는 시민들은 언제든 방문할 수 있다.
첫댓글 어이쿠 엇그제 댕겨온 산행기가 벌써 올라오다니.
592.3봉을 지나고 수리봉직전에 암봉을통과 하느라 간이 콩알만했던 기역이 납니다.
우리는 춘천에서 택시를하는 친구가 있어서 친구덕을 밧던 도솔지맥 마지막구간 이었습니다.
도솔지맥 졸업 축하드림니다.
부뜰운영자님!
후기의 85%는 이미 자료 정리로 작성해두고 다녀와서 나머지 15%만 수정, 보완하는 식입니다.^^
수리봉 직전 암봉 비춥니다.
크게 사고날 위험이 아주 높습니다.
먼저 지나가시고 산패 정리해두신 덕분에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퐁라라님 ! ㅡㅎ
지맥산행하시는 님들은 산에 대한 굉장한 열정이 있는분만 가능할것 같습니다
먼길마다않고 단순에 달려가시니 ㅡㅠ
대단하시기만 합니다
산행거리도 길고 산행시간도 길고 요즘같은 해가 잛은 시기엔 ~^-^
덕분에 춘천의 지맥산들 잘봤습니다
마지막 하산 뒤풀이가 멋지네요 ㅡ
도솔지맥 2구간 졸업식이라 춘천 닭갈비로 마무리 하셨네요 ㅡ~^-^
2구간 졸업 축하 드립니다
동부능선 선배님도 노안이라 ㅍㅗㅇ인데 ㅍㅜㅇ으로 읽으시네요.^^ ㅋ
지맥보다는 거기에 얽히고 쌓인 사람 사는 동네 이야기가 너무 잼있습니다.
소원했던 친구와 회포도 푸는 기회가 되었구요.
마지막 되풀이 환상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아 ~!
퐁 ㅡㅎ
굉장히 맛있는가 봐요 !ㅎ
와~식성이 대단하시내요~
막걸리 시병에 닭갈비에 막국수에 볶음밥에다 엄메야~
배님을 혹사 시켜내유~
도솔지맥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 축하드립니다~
힘드신 여정을 막걸리 시병으로 해결 하셨내요~
안.줄산을 항상 응원드립니다~()()()
법광선배님!
위대(胃大)한 사람만의 뒤풀이입니다.^^ ㅋ
실은 배가 아파서 혼났습니다. 미련한 사람의 뒤풀이였지요.
2구간, 졸업구간은 구간이 짧아 그닥 어렵지않게 진행하였구요.
도솔지맥은 친구의 도움으로 고생이 되지 않고 수월하게 진행하였네요.
친구가 강원병무청에 근무하는데, 강원도 일대 출장을 자주 다닌답니다.
해서 영월지맥도 출장 날짜와 같이 맞춰보기로 약조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소양2교 합수점에서 도솔지맥 마무리를 축하드립니다.
구간 최고봉인 수리봉을 넘어 지내교차로 , 여우고개를 지나 마지막 봉인 우두산을 내려서게 되는 군요.
해질 녁의 소양강 변에 반사되어 노을진 모습도 운치를 더하네요.
맞은편 봉의산도 다녀오시고 소양강처녀상도 잘 어울리네요.
뭐니해도 춘천 닭갈비에 막국수며 막걸리라~~ ㅎ
수고많으셨습니다.^^
방장님!
친구의 지원으로 수월하게 도솔을 끝냈습니다.
도솔지맥 하며 46번국도를 빼놓을 수 없을것 같습니다.
도솔지맥과는 여우고개, 배후령, 백치고개, 추곡령, 공리고개, 양구터널과 만나는군요.
독도법에 국도는 홀수는 남북으로, 짝수는 동서로 진행된다고 배웠습니다.
46번 국도가 인천에서 고성까지 진행이 되는군요.
소양강변을 굽이굽이 지나던 예전 46번 국도와,직선화한 신46번국도...
세상에나,,,
한강 북쪽 강변북로, 강선봉에서 바라보던 경춘가도 그리고 춘천에서 양구까지의 터널,
양구 용하리에서 양구터널, 양구대교를 건너 신남,
신남에서 인제를 지나 진부령을 넘어 고성까지가 46번 국도였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친구 도움 덕분에 추곡약수로 아침밥까지 지어먹고,, 도솔지맥 야물딱지게 해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큰 산줄기 하나 깔끔하게 매조지함을 축하드립니다.
산과 나누는 퐁라라님의 대화가 한층 깊어졌으리라 생각됩니다.
수리봉 근처 암봉이 상당히 위험한가 봅니다.
앞으로 도솔을 진행할 분들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겠네요.
산에 대한 욕심이 너무 과하신 거 아닌지.....
도솔지맥으로 부족해 봉의산까지 뚝딱 하셨습니다.
이번에도 친구분과의 우정이 훈훈함으로 다가옵니다.
사진으로 보는 닭갈비의 비쥬얼에 침샘이 요동을 칩니다.
앞으로도 산과의 돈독한 관계가 무탈하게 잘 진행되기를 바랍니다.
고생하신 흔적, 즐겁게 구경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범산선배님!
전번 춘천지맥에서는 군용 배낭과 나침의를 습득했는데요.
보고드리자면 이번 도솔지맥에서도 노획물이 있었지만 피해품도 생겼습니다.
등로에서 작업모인지 군용 모자를 하나 습득했습니다만...
두무치에 대포시켰던 물품 중에 얼룩무늬 1인용 텐트를 누가 가져갔습니다.
다행인 것은 같이 있는 것중에
침낭카바 23만원, 여름용 침낭이 30년 전에 15만원인가 주고 구입했는데...
그 중에 풍물시장에서 28,000원 부르는 텐트를 23,000원에 구입했는데 그것만 가져갔습니다.
친구가 그러던데 그 자리에 주차된 차량이 하나 있었다구 하더군요.
아마도... 약초꾼인거 같은데 꼭 필요해 보여서 가져갔겠지요.
눈에 띄는 곳에 놓아둔 제 잘못도 있으니 쿨하게 하나 또 장만하기로 했습니다.^^
다행히 진행이 빨라 봉의산에 올를 시간이 되었습니다.
봉의산 정상에서 춘천대첩의 현장을 보고싶기도 했구요. 그닥 높고 험한 산은 아니었습니다.
수리봉 직전의 암봉은 후답자 분들께서는 주저없이 우회했음 싶더군요.
만약 발이 미끌려 추락을 하더라도 눈을 뜨고 균형을 놓치면 안되는데
거꾸로 쳐박는다든지 머리부터 박으면 중상입니다. 굳이 올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아직 철이 덜 들었나 ㅋ
산행기를 읽으면서 전투 얘기가 더 재밌으니...ㅍ
주중에 다녀 오신걸 보니 또 야근하고 휴가냈나봅니다.
졸업하셨다니 축하드리고
다음은 어느 학교 입학하실련지 ^^
멋진 산행
응원드립니다. 화이팅 !!!
이슬하선배님!
산길을 걷다보면 몇 가지 테마가 꼭 함께합니다.
테마를 모르고 진행하면 지맥이 재미가 없을 지경입니다.
삼국시대, 후삼국시대, 고려태조 왕건, 조선태조 이성계, 임진왜란, 동학, 천주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6.25 한국전쟁, 등등등
도솔지맥은 그 중 6.25 한국전쟁이 테마입니다.^^
도솔지맥을 하며 한국전쟁 초반의 춘천대첩, 중반의 중공군 춘계공세, 후반부 고지전을 모른다면 그야말로 앙꼬없는 찐빵이 된답니다.
이번에는 하루짜리라 따로 휴가를 쓰지않고 비번날에 맞춰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다음엔 영월지맥을 째려보고 있습니다.
영월, 금오, 보현, 팔공, 호미 순으로 우선 생각하고 있는데 변수는 언제나 상존하니깐요.
저질체력이라 한겨울에 텐트지고 지맥을 이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끔찍합니다. ㅋ 감사합니다.^^
이번 산행기는 평소보다 덜 길어 산행기 완주했습니다. 여유도 있구요 ㅎᆢ 도솔 완주 축하드립니다.
상배성님!
완주하시느라 욕봤심더~ ㅋ
내용에 미쳐 못다한 얘기 댓글에서 해야는데...
내일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