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지맥
부뜰이와 천왕봉이 걸어온 영월지맥 지맥길146(접속8/이탈4.4)km/80시간31분
산행일=2018년9월1일 산행지=영월지맥 7구간(제천/영월) 산행경로=동막재=>모산재=>386봉=>다량고개=>배재=>346봉=>삭고개=>527봉=>조을재=>524봉=>567.7봉=>문영월재=>524봉=>설매산갈림길=>682봉=>707봉=>가창산(820)=>672봉=>521봉=>591봉=>598봉=>550.5봉=>523봉=>중산재 거리 및 소요시간=17.8km/9시간3분
지난주에 이여 이번주에도 영월지맥을 이여볼려구 한다. 영월지맥을 중간 구간부터 진행하게 되여 뒤죽박죽으로 앞 뒤로는 완주을 하였고 중간에 남은 한구간을 진행하여 졸업을 하게된다. 마침 산행지가 제천이고 제천에서 멀지않은 곳에 고향인 단양이 있고 때가 때인지라 겸사겸사 벌초까지하구 올라올 계획으로 금욜저녁 인천을 출발한다. 인천을 출발하여 두시간만에 들머리인 동막고개에 도착하고 일출직전 산행을 할 생각으로 4시30분에 알람을 마추고 천왕봉이는 뒷좌석에서 나는 조수석에서 쉬는 시간을 갖는다. 곧 깊은 잠에 빠져들고 알람소리에 잠을 깨고 물을 끌여서 컵라면 하나씩 먹고나니 금새 5시20분이 훌쩍 넘어간다. 주위가 희끄무레 밝아오기 시작하여 랜턴없이 산행을 시작한다.
들머리는 사진에서 보이는 좌측에 시멘트 임도로 올라가야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민가와 과수원을 통과해야 하는데. 과실이 익어가는 계절이라 농장주와 마딱뜨리면 제지를 받을 수도 있으니 도로로 우회하자는 천왕봉이의 의견에 그렇게 하기로 한다. 과수원을 무사히 지나더라도 곧 공원묘지도 그렇고 도저히 통과할 수 없는 변전소도 있고하여 동막마을 쪽으로 우회해서 진행한다. 동막고개(東幕峙)는 충청북도 제천시 송학면 도화리에 있는 고개로 동쪽에 막을 친 것처럼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나 동막이란 지명은 다른 지역에도 흔히 있는 지명이므로 한자 지명에 맞춘 인위적 설명인 것으로 보인다. 동막고개는 제천시 고암동에서 송학면 도화리로 넘어가는 고개이고 2차선 도로로 고개 좌측에는 세명대학교와 솔밭공원,의림지가 있다.
도화리 방향.
동막마을 쪽으로 도로따라 내려간다.
200m정도 내려가면 효자마을 동막이라는 효자비가 있다. 동막마을은 효자 박전(朴瀍)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마을이다 효자 박전 이야기의 전반부는 효자 박전(朴澱)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병환이 든 아버지를 살렷다는 이야기고, 후반부는 아버지가 음력 6월에 배를 드시고 싶다 하자 죽음을 무릅쓴 지극 정성으로 배가 든 작은 궤짝을 구하여 드렸다는 효행담이다.
동막고개에서 20여분 진행하면 개나리공원 입구에 닫는다. 정상등로로 진행해도 이곳으로 내려와서 도로길로 우회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우측이 마루금이고 마루금에 들어앉은 변전소가 보인다.
도화동 마을입석이 보이고 농약 제조공장인 인바이오믹스(주)가 보인다. 이쪽으로 가면 될것도 같은데. 확신이 서지않아 그냥 큰길로 진행한다. 후에 확인해보니 이쪽으로 가는게 조금이라도 마루금과 가깝고 거리도 단축된다.
우측에 인바이오믹스 와 변전소를 바라보며 도로길을 걷는다.
사거리에서 제천.단양쪽으로 우측으로 올라가면 이내 다랑고개에 닫는다.
좌측에 금강레미콘이 보이고
우측에는 금강기사식당과 송학중기와 선진사료가 자리잡고 있다.
금강레미콘 정문을 지나고
동막고개에서 여기 다랑고개까지 도로길을 걸어 마루금에 닫고 배재까지는 그럭저럭 마루금 가까이로 가지만 배재부터는 다시 삭고개까지 도로길을 걸어야 한다. 다랑고개는 제천시 고암동에서 송학면 도화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82번 지방도가 지나며 고개 정상부에는 제천변전소와 버스정류장 우측으로 농약 제조공장인 인바이오믹스(주)가 있다.
지나온길 돌아보고
다랑고개에서 2분 들어가면 제천쓰래기매립장이 나오고 쓰레기장 안에는 골프장이 만들어져 있다.
좌측으로는 금강레미콘이 보인다.
대진황경산업 간판이 보이면 우측으로 내려가는데 밭이고 농가가 한체있고 길이 없어서 일하시는 농민에게 배재를 가야 한다고하니 요리조리 밭으로 가라고 한다.
우측이 마루금이고 쓰레기매립장과 골프장이 있는 곳이다.
부득히 밭으로 나갈 수 밖에 없다.
아직 입주전인 통나무 전원주택
통나무 전원마을을 지나고
한우농장을 지난다.
음만전 버스정류장을 지난다.
앞에 보이는 저기가 배재이다. 배재에서 38번국도를 건너는 것도 쉽지않은 일이고 등로도 사납다고 하여 이곳에서 육교로 건너며 삭고개까지 도로길을 걷는다. 배재(敗峴)는 제천시 고암동 고척마을에서 송학면 무도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38번국도의 4차선 도로가 지나가고 있으며 고개 정상에는 오일뱅크 주유소가 자라잡고 있다. 지명 유래는 여러가지 설로 전해내려 오는데 고개 형상이 배(船)와 같이 생겼다고 뱃재(船峴), 배를 많이 팔았다고 배고개(梨峴), 임진왜란 때 왜적에 패했다고 팻재(敗峴)라 불려졌다 제천 지역의 신혼부부는 예전부터 신행길로 제천시 고암동에서 송학면 무도리로 가는 고개를 피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때 우리 관군과 의병이 이곳까지 쳐들어 온 왜군을 고개에서 맞아 일전을 벌이나 중과 부적으로 패배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 고개를 ‘팻재’ 또는 ‘패현’이라 하였고, 신혼부부는 불길한 장소라 생각하고 이 길을 피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신혼부부는 인생의 새로운 출발이기에 ‘실패’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팻재를 금기로 하여 이 고개를 지나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좌측 송학방향
삭고개에 도착하고 주위을 살펴보지만 사람이 올라간 흔적을 찿을 수 없다. 삭고개는 제천시 송학면 무도리에 있는 고개로 삽고개라고 부르기도 하며 제천 송학면에서 강원도 영월군 한반도면(옛지명:서면)으로 가는 고개로 절개지에 토사를 방지하기 위해 돌을 철사로 역어서 담을 쌓았는데. 올라갈 엄두가 안난다. 조금더 진행해본다.
밭으로 올라가 볼까하다가 조금더 내려가본다.
삭고개라는 버스정류장이 있고 버스정류장을 좌측에 끼고 마을길로 들어간다.
마을길로 들어가니 갈림길이 나오고 좌측으로 틀어서 계속 올라간다.
마을 길가에 무슨 뜻으로 이런걸 만들어 놓았을까.
38번국도 굴다리가 보이고. 38번국도는 굴다리로 통과한다.
굴다리로 38번국도를 통과해서 조금 올라가니 길은 끈기고 밭이 나오는데 그물망으로 막아 놓았다. 밭에서는 어르신 한분이 일을하고 계시는데. 여기는 길이 없는데 어떻게 여기로 왔냐구 하면서 요리죠리해서 능선으로 붙으라고 친절히 가르쳐준다.
여기서 정리를 해보면 삭고개에서 마루금으로 올려치던가 삭고개을 넘지말고 좌측으로 붙어서 마을로 들어섯으면 여기위치에서 앞에 보이는 임도길로 올라오게 될 것이다.
여기도 잡목은 쉽지않아 보인다.
되돌아 나와서 밭으로 올라간다.
듬성듬성 있는 들깨밭으로 올라간다.
들깨 밭에서 돌아본 38번국도 저 도로를 무단횡단을 했다는 사람들도 꽤 있다.
가까스로 마루금에 붙으니 오래묵은 임도길이 있다.
임도길에서 능선으로 붙었다가 다시 임도에 내려서고 좌측으로 조금 올라가니 왕박산 갈림길에 닫는다.
왕박산시루봉을 바라보고
갈림길 임도에서 아침겸 점심식사를 한다. 동막고개에서 8.2km지점이고 도로길로 진행했으니 3시간이 안걸렸다. 식사후 혼자서 왕박산을 다녀올려구 출발했는데. 200m쯤 가보니 임도길은 없어지고 가시잡목이 앞을 막는데 도저히 나갈 수가 없다. 숲사이로 내려다 보니 아래쪽에 두룹나무 같은 밭이 보이는데 내려설수가 없어서 왕박산을 포기하고 돌아온다. 돌아오다 보니 밑으로 내려가는 길이 보이는데 천왕봉이가 혼자서 기다릴 것을 생각하니 것도 아닌거 같아서 그냥 돌아선다.
왕박산(王朴山)시루봉(해발527m)은 충북 제천시 흑석동과 송학면, 영월군 남면에 걸쳐있는 봉우리로 산행지도에는 527봉 또는 왕박산 갈림길로 되어 있고 “왕박산(王朴山)시루”라는 안내판이 세워져있다. 왕박산이라 부르게된 유래을 보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의 왕족과 유신들은 뿔뿔이 흩어져 초야에 묻히거나 멀리 낙도에 은신하였는데 조선의 조정에서는 고려 유신들을 찾아 회유하여 등용하기도 하였지만, 많은 왕족과 유신들은 숨어 버리고 말았다. 왕박산에도 개경(開京)에서 고려 왕족이 내려와 은신하고, 성을 박씨(朴氏)로 고쳐 살았다. 성을 왕씨에서 박씨로 고쳐서 숨어 살았다고 해서 왕박산이라 부르게 되였다. 고려 왕족은 그 후 별 탈 없이 조용히 살았으며 자손들도 번성해 나갔다. 사람들은 고려 왕족인 왕씨가 박씨로 성을 바꿔 살았던 곳이라고 하여 ‘왕박산’또는 ‘왕박산 시루’라 하게 되었으며 마을 사람들은 새로 생긴 박씨 자손들을 ‘왕박씨’라 불렀다. 조선 건국 이후 고려 왕족들이 성을 왕씨에서 전(全)씨, 옥(玉)씨 등으로 바꾸어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를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1454~1492)이 지은 수필집 (추강냉화)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왕박산루에서 내려서면 등로는 널찍하지만 얼마 안되서 전형적인 지맥길로 변한다.
우측으로 잠시잠깐 제천시내가 내려다 보이고 지금은 페쇄된 제천 비행장도 보인다. 제천비행장(G-605, ICAO:RK6O)은 제천시 모산동과 고암동에 걸쳐있는 비행장으로 1960년대에 세기항공이 항공편을 취항했으나 1969년 8월 22일 안성에서 서울(김포)~제천간 항공편이 추락하는 참사로 세기항공의 영업이 정지되여 인용 여객 운항이 중단되였다.
왕박산시루에서 20여분 내려서면 작은 돌탐이 있는 조을재이다. 조을치(鳥乙峙 490m)는 강원도 영월군 남면 토교리에서 제천시 흑석동 서문리로 넘어가는 길에 위치한 고개이다. 조을치(鳥乙峙)란 그 지형이 조리형국이라 조리재라고 부르며 곡식이 많이 모여들어서 큰 부자가 나는 명당이 있다는 얘기가 전해오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영월로 가는 관행(官行) 길이었다고 한다. 무동산,왕박산, 삼태산이 삼각형으로 우묵하게 둘러싸고 있는 모양이 조리와 같아 붙여진 이름으로 조올치와 가창산 사이에 제천 방향으로 나란히 솟은 산봉우리는 아래부터 차례로1봉, 2봉, 3봉, 땀봉으로 부르며 영진지도에는 조을치로 표기되어 있고 이 지역 사람들은 조리재라 부른다. 조을재 정상에는 민초들이 만든듯한 작은 돌탑하나와 이정표가 서 있고 커다란 소나무 한그루엔 무속인들이 걸어논 듯한 오색천이 걸려있다. 조을재에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옛날 충청도 지방에 김씨 성을 가진 이가 살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키도 작고 성품이 몹시 경망스러워 주위 사람들은 이름 대신 '조리'라는 별명을 만들어서 불렀다. 그런데 김조리는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김조리는 혹시 아버지의 묘를 잘못써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유골을 괴나리 봇짐 속에 소중히 모신 다음 명당이 많다는 강원도를 향하여 발길을 옮겼다. 김조리가 충북과 강원도의 경계인 왕박산밑 점제에 도착하자 날이 저물었다. 그는 주막집의 목로방(木盧房)에서 장사꾼들과 함께 자면서 아버지의 유골이 든 봇짐을 가슴에 안고 있다가 잠자리에 들 때에야 머리맡에 모셔 놓고 잠이 들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 눈을 떠보니 아버지의 유골이 든 봇짐은 없어지고 참빗 장사꾼의 큰 보따리만 덩그렇게 남아 있었다. 유골 봇짐을 잃어버린 그는 대성 통곡을 했지만 찾을 길이 없었다. 김조리는 유골 봇짐과 바꾸어진 참빛 보따리를 가지고 다니면서 장사를 했는데 이상하게도 가는 곳마다 참빗이 잘 팔려 큰 돈을 벌었다 그 후에도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어 몇 년 안가서 장가도 들고 땅도 많이 사서 큰 부자가 되었다. 한편, 그 주막집에서 함께 자던 참빗 장수는 김조리가 봇짐을 소중하게 여기므로 혹시 무슨 보물이라도 있는게 아닌가하는 욕심으로 그날 새벽 봇짐을 훔쳐가지고 도망을 쳐서 조리재 중턱에서 봇짐을 풀어보니 뜻밖에도 사람 유골이 나왔던 것이다. 참빗장수는 어처구니가 없고 화가나서 그 유골봇짐을 큰 참나무 밑에다 휙 던져버리고 조리재를 내려오다가 아!나도 조상을 모시는 사람인데 하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참나무 밑에 유골을 묻어준 후 남의 집 머슴살이를 전전하다가 10여년이 지난 후 충청도의 큰 부자집 머슴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집 주인은 추석이 다가와도 아버지 산소에 벌초할 생각은 하지 않고 한숨만 쉬고 있었다. 머슴은 숫돌에다 낫을 갈면서 "주인 어른,올해도 벌초를 안 가시렵니까?" 하고 물으니 "나도 예전에는 자네처럼 머슴살이도 하고 행상도 했다네. 그러나 하도 되는 일이 없어서 아버님의 유골을 강원도의 명당 자리로 모시고 가던 중에 어느 참빗장사가 실수로 봇짐을 바꾸어 가는 바람에 아버님의 유골을 잃어버렸다네. 주인의 말을 들은 머슴은 갑자기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제가 바로 그 때 유골을 훔쳐간 참빗장수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용서를 빌었다. 주인은 오히려 반가워하면서 아버님의 유골을 찾게 해달라고 말했다. 그 다음날 김조리는 이름난 지관을 모시고 머슴과 함께 이곳 왕박산 줄기의 큰 참나무 밑에 있는 아버님의 묘를 찾아냈고 지관은 패침을 놓고 유골이 묻힌 묘를 한참 주시하더니 무릎을 치면서 어느 유명한 지관 어른이 당대에 발복하는 조리형국의 혈에다 묘를 잡아 주었소?"라면서 놀라는 것이었다. 그 후 김부자는 참빗장수였던 머슴에게 많은 재산을 나누어주고 친형제처럼 의좋게 살았다고 한다.
조을재에 이정목
왕박산(王朴山:598m) 뒤로 무등산((舞童山:620m)이 보인다.
조을재에서 가볍게 한봉우리 올라서면 벌목이된 524봉이다.
벌목이된 524봉에서 내려섯다가 다시 올라서면 삼각점이 있는 567.7봉이다.
567.7봉에 삼각점 이끼가 잔뜩 끼여서 알아볼 수는 없다..
567.7봉에서 내려서면 바로 괴골마을로 내려설 수 있는 삼거리이고 문영월재이다. 문영월재에는 우측으로 괴골이고 진행방향으로 가창산이 3.6km라고 안내한다. 문영월재는 충북 제천시 흑석동에서 강원도 영월군 남면 토교리를 넘어가는 고개인데...지명유래는 찰을 수 없었다.
문영월재에서 칙넝쿨이 뒤엉킨 잡목숲을 헤치며 올라간다.
문영월재에서 잡목숲을 헤치고 올라서면 설매산 갈림길이고 진행방향으로 가창산이 2.6km이고 우측으로는 설매산이 2.63km라고 안내한다.
설매산 갈림길에서 삻은 계란을 안주삼아 캔맥하나 까서 나눠마시며 쉬는 시간을 갖는다.
어수선한 길은 계속되고 다져지지 않은 땅이라 걷기가 좋은편은 아니다.
예전 광산에서 쓰이던 임도길을 건너서 올라가는데 여기도 잡목이 좀 까칠하다.
1년전에 앞서가신 기차산꾼님과 소슬바람님 표지기가 길안내를 잘해준다.
폐광의 흔적
아침에는 낮게깔린 안개로 시야를 내여주지 않더니 안개가 완전히 걷힌 지금은 수십킬로미터까지 막힘없이 보여준다.
예전 광산에서 쓰던 것이 겠지만 무엇을 운반하던 배관인지는 알 수가 없다..
숲 사이로 오늘구간의 최고봉인 가창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가창산(歌唱山:해발819 m)은 충북 제천시 흑석동과 단양군 어상천면 강원도 영월군 남면에 걸쳐있는 산으로 조선시대 연산군 때 의리있는 두 선비의 전설로 알려진 가창산(歌唱山)은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갑자사화로 부모를 잃은 서울 명문가 출신의 두 친구가 양평 용문산에서 10년 넘게 수학하였다. 어느 삼짇날 스승의 권유로 속세로 돌아온 이들은 절대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자로서 후진을 양성하자는 맹세를 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한 친구는 대장부로서 벼슬길에 나아가 높은 포부와 경륜을 펼치고 싶어 알성시를 보아 장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이후 안락하고 부유한 생활을 하던 중 자신이 우정을 배신하였음을 깨닫고 옛 친구에게 사과하고자 각 지방관들에게 친구를 찾아 달라 부탁하였다. 얼마 뒤 강원 감사를 지내던 친구에게 옛 친구의 소식을 들은 그가 제천현에 있는 산에 은거하는 옛 친구의 집을 찾아가니, 낭랑한 목소리로 글을 읽던 친구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기며 그의 잘못을 용서해 주었다. 두 사람이 소박한 저녁을 먹은 뒤 정담을 나누고 시를 지어 화답하며 우정을 나누자 친구의 아내도 동화되어 두 사람의 정담에 맞춰 성심껏 가야금을 타니, 친구는 아름다운 가야금 가락에 넋을 잃었다. 이처럼 한 여인의 간절하고 지극한 정성이 친구를 즐겁게 했다고 하여 후에 사람들이 이 산을 가창산(歌唱山)이라 하였으며 또한 피난살이로 고달픈 왕이 시름시름 앓으니 신하들이 왕을 위해 연회를 베풀어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하여 붙인 이름 이라고 한다.
가창산의 삼각점
가창산에서 좌측으로 강원도와 충청북도 도계능선
진행방향으로 좌측에 나뭇가지에 살짝 보이는 삼태산의 누에머리봉이 보이고 우측으로 아련하게 소백산이 보인다.
가창산에서 살짝 내려서면 좌측으로 강원도와 춫청북도 도계능선이고 지맥길은 우측으로 틀어서 내려간다.
가창산에서 30여분 내려서면 갈림길이고 우측으로 갑산지맥이 분기점이고 영월지맥은 좌측으로 가파르게 내려간다.
갑산지맥 분기점에서 영월지맥은 좌측으로 내려간다.
산행지도에 없는 임도길에 내려서고 지형을 보니 임도길로 진행해도 될거 같은데 숲에 선답자의 표지기가 보여서 숲으로 들엇는데 영 길이 없다.
10여분만에 잠목숲을 헤여나니 임도길이 보인다. 그냥 임도로 진행하는게 편하겠다.
벌목된 곳으로 521봉을 오르는데. 벌목지에는 어린 호도나무가 심어져있다.
521봉 오르며 돌아보니 지나온 갑산지맥 분기봉이 보이고 조금멀리 우측으로 가창산이 보인다.
철문을 세워 놓은걸 보니 철망으로 울타리를 칠 모양이다. 지맥꾼들에겐 방갑지 않은 시설물이다.
521봉에서 다시한번 가창산을 돌아본다.
521봉에서 시작된 잡목숲은 591봉을 넘을때까지 절정에 이른다. 2km가 안되는거리을 두시간만에 통과한다.
엄청난 잡목 숲이지만 소백산이 멋드러지게 시야에 들어온다.
멧돼지가 놀다간 흔적.
벌집. 첨에는 뱀 껍질인줄 알았고 이렇게 생긴 벌집은 처음본다.
우측으로 조망
엄청난 잡목이다. 한발짝 앞에선 사람이 보이질 않을 정도다
우측에 삼태산의 누에머리봉이 보인다.
아득히 백두대간의 소백산 라인
오랜만에 보는 푸른 하늘이다.
그렇게 지독한 잡목숲이 지나와서 바라보니 그냥 평범해 보인다.
지독한 잡목숲을 지나고 삼각점이 있는 550.5봉에 올라서고 바람도 제법 시원하고 이제 523봉 하나만 넘으면 날머리인 중산재에 떨어질 것이다.
오랜만에 홀대모 방장님 흔적을 본다.
550.5봉의 삼각점.
지금까지 아껴두엇던 캔맥까서 마시며 한참을 쉬여간다.
동막재에서 초반에는 도로길을 삭고개까지 걷고 가창산 갑산지맥분기봉을 지나면서 시작된 잡목숲을 어렵게 통과하여 삼각점이 있는 550.5봉부터 조금 유순해진 길을 걸어 오늘 날머리인 중산재에 내려선다. 중산재(中山峙:해발343m)는 단양군 어상천면 연곡리에서 대전리를 넘어가는 고개로 제천에서 영월과 쌍용으로 이어지는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있고 우측 아래 대전리에 참나무쟁이 마을이 보인다. 참나무쟁이란 예전에 참나무가 많아서 붙혀진 지명이라고 하며 중산재라는 지명은 산과 산사이의 중간에 위치한 고개라하여 붙혀진 지명이라고 하는데 이 지역사람들은 장재(場峙)라고도 부른다. 교통이 불편했던 옛날에 이곳 어상천 사람들이 제천에 있는 장(場)에 다닐 때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하여 장재(場峙) 또는 장고개 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바람에 이곳에는 장을 보러 다니는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도둑들이 득실거리기도 한 곳이였다.
중산재에서 산행을 종료한다. 처음 시작부터 뒤죽박죽으로 진행된 영월지맥.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더니 내가 그짝으로 영월지맥을 졸업한다.
중산재 고갯마루에 있는 민가에 주소를 제천택시에 보내고 이리로 오라고 부탁을 하니 20분정도 걸린다고 하더니 엉뚱한 곳에 가서 어디에 있냐고 하니원. 재차 설명을 한다 어상천면 대전리에서 단양 연곡리로 넘어가는 고개라고...다시 10분이 지나서 택시 도착하고 제천 동막고개로가서 차량회수하고 단양으로 간다.
단양군 대강면 미노리 마을입구 개울가에 자리를 잡고 오늘밤은 여기서 보낸다.
오리훈재을 안주삼아 쏘맥으로 저녁을 해먹고 우렁차게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편안한 밤을 보낸다.
아침이 되고 수원에서 동생이 내려왔다. 아침은 간단하게 라면으로 먹고 윗쪽으로 조금 이동하면 신구리라는 마을이 있고 여기가 내가 태여난 곳이다. 옛날에 그많던 집안이 모두들 떠나고 지금은 연고라고는 아무도 없는 추억속에 고향이 되였다. 그래도 조상님들 묘소가 있으니 매년 한번정도는 찿게되는 곳이다.
벌초를 마치고 조금 내려오면 명품소나무가 보이는곳
성금리 다리밑에서 알탕을하고
삼겹살로 점심을 먹고 인천으로 올라간다.
소요경비 이동거리=447km(왕복) 유류비=41.720원(연비15km/디젤1.400원) 톨비=갈때 없음/올때 2.800원 1일차=하산식:오리훈재(8.000원)/맥주(8.000원) 택시요금=26.000원 2일차=하산식:맥주(6.000원).행동식 등(15.000원) 합계=107.52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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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영월지맥을 마무리하셨군요.
왕박산, 가창산 구간이었네요.
잡목기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진행을 더디게 하는 곳도 만납니다.
날씨도 맑아 산행에는 적격인 요즈음입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영월지맥을 참 뒤죽박죽으로 여렵게 마무리 했습니다.
날씨가 선선해지니 어디를 먼저 가야할지 행복한 고민을 하게되는 요즘입니다.
늘 감사드림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