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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Energy and Equity)》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 Energy and Equity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이반 일리히. p103
Energy and Equity
자동차가 만들어낸 ‘가속화’ 신화를 전복시킨 획기적인 ‘교통의 정치학‘이 바로 이 책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근대화’란 병의 가장 심각한 증세인 에너지 중독 내지 속도 중독이 이미 우리를 혼수상태에 빠뜨리고 있다. 고도 기술 산업화를 향한 ‘발전’과 ‘개발’이 초래한 에너지의 친미와 과잉소비는 자연파괴를 가속화시켰고 인간에게서 자유와 자율적 능력을 뺏어 사회적 불공정을 확대시켜 왔다.(성장을 멈춰라!)
우리는 문명의 이기 운운하며 오염과 무관한 에너지를 개발하면 충분하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하고 또 실제로 풍부하게 에너지가 존재한다고 하여도 에너지의 대량소비는 인간을 정신적으로 노예화시키는 마약과 같은 작용을 한다.
#에너지 위기
최근 유행처럼 에너지 위기의 절박함이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에너지 위기’라는 표현은 어떤 모순을 은폐하고 나아가 어떤 환상을 신성화하고 있다. 곧 공정성과 산업발전을 함께 추구하는 것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모순을 은폐하고, 기계의 힘이 인간의 힘을 무제한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 환상을 옹호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을 해소하고 환상을 없애버리기 위해서는, ‘위기’라는 표현을 통해 애매하게 된 현실, 곧 대량의 에너지 소비는 필연적으로 자연환경을 파괴하며, 그와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제관계도 타락시탄다고 하는 점을 분명히 밝히는 일이 시급하다.
1인당 사용하는 전력이 어떤 한계 이하라면 전동기는 사회의 진보를 위한 조건을 개선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한계를 넘게 되면 에너지 증대는 공정성을 희생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미국에서는 총에너지 사용량의 25%에서 45% 사이가 수송수단에 의해 소비되고 있다. 곧 수송수단을 제조하고, 움직이게 하며 주행, 비행, 주차 등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그만큼의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1인당 소비하는 에너지가 적정 수준을 넘어서면, 어떤 사회의 정치체제나 문화적 환경도 필연적으로 타락하게 된다는 점이다.
과도한 에너지 투입된 도구 사용? 과열량 함유 식품 섭취와 같은 위험!
이른바 ‘에너지 위기’는 정치적으로 애매한 문제이다? 이러한 결과를 역전시킬 수 있는 중대한 열쇠는 추리의 문제가 아니라 결단의 문제이다!
에너지 위기는 에너지를 더욱 많이 투입한다고 해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의 질이란 인간이 조정할 수 있는 에너지 노예의 수로 결정된다고 하는 환상이 없어져야만 비로소 에너지 위기도 해소될 수 있다.
열량이 너무 과잉되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은 좁은 범위 내에 머물러 있어야만 생물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건강에 도움이 된다.(다차원적 균형)
#교통의 산업화
자기 힘으로 스스로 움직여 왔던 인간의 공동체가 어쩔 수 없이 자동차에 의존하게 되면, 수송수단의 개량에 의해 얻을 수 있으리라고 예정하였던 가치, 바로 수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자신의 발로 걷고 있는 사람들은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기본적으로 평등하다!
역효과를 낳은 수송산업의 성장? 인간의 불평등을 낳았고, 인간의 이동성을 산업적으로 규정된 도로망에 얽어맸으며, 미증유의
심각한 시간의 결핍을 낳았다.
엄청난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로가 계속 건설되고 자동차, 특히 마이카가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러한 문제에 대해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보조금, 비용의 사회화!)
수송수단의 증가? 수송에 의해 강제되어 다른 활동에 소비되는 시간(통근, 사고, 수리,..)
#속도에 마비된 상상력
수송수단의 이용자는 자동차, 전차, 버스, 지하철, 엘리베이터 등에 매일 의존하고 있으므로 도리어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며 안달하고 있다!
효율적 이동과 빠른 속도? 수송수단에 높은 의존, 개인의 자유와 기계에 의해 설계된 노정 사이에는 엄청난 모순이 생겨나게 된다!
#생활시간의 최종적 대체
하나의 사회 속에서 수송에 관계된 복합적인 시간소비는 극소수의 인간들이 빠른 이동으로 얻는 시간의 절약보다도 훨씬 급속하게 증대된다.(불평등의 증대)
속도가 높아짐에 따라 필연적으로 소수인의 좌석에 마력이 집중되고, 대부분의 통근자에게는 시간의 결핍이 더욱 심각하게 됨과 동시에 자신들은 뒤떨어져 있다고 하는 상대적 박탈감이 더욱 격심해진다(속도의 양극화)
#가속의 무익성
속도의 한계란 형평성을 지키기 위하여 필요할 뿐만 아니라, 일정한 사회에 있어서 이동의 총거리를 증대시킴과 동시에 이동에 소요되는 생활시간의 총계를 감소시키기 위해서도 필요한 조건이라는 점이다.
#산업의 근본적 독점
자율적 이동은 산업의 생산물이 아니라 이동하는 인간의 독자적 활동이다. 그것은 분명히 사용가치를 지니고 있으나 교환가치를 지닐 필요는 조금도 없다.
고속의 수송기관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하여, 특권만이 아니라 기본적인 요구까지도 거절하는 모든 사회에서는 인간 개인의 리듬이 의지에 반하여 무리하게 빨라지고 있다.
#파악하기 어려운 속도의 한계
최적정 최고속도? 수송수단의 최적속도가 진전되는 정치과정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일반인에 의해 결정된다면, 모든 산업사회의 구조를 뒷받침하는 기초도 분쇄될 수 있을 것이다.
#인력이동의 효율성
자전거는 인간의 신진대사 에너지를 이동력의 한도에 정확하게 맞춘 균형 잡힌 이상적인 변환기이다. 이 도구를 사용하면 인간은 모든 기계의 효율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동물의 능력을 능가하게 된다!!!
#지배적 모터 vs 보조적 모터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갖추고 있는 기동력은 대체로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저설비, 과일개발, 그리고 성숙된 기술
저설비나 과잉산업화의 세계와는 별도로 탈산업적인 효율을 갖춘 세계를 위한 여지가 있다. 그곳에서는 산업적인 생산양식이 다른 자율적인 생산양식을 보충한다. 달리 말하자면 기술이 성숙된 세계를 위한 장소가 있는 것이다.
보조적 모터! 자전거만으로는 불충분하고, 다양한 보조적 모터 이용하는 세계? 모든 장소가 사람들에게 열려 있고, 누구라도 스스로 자기 속도로 천천히 즐겁게 여행하며, 인간이 수십만 년 이상 두 다리로 걸어온 대지와 수송수단이 단절됨이 없이 긴 거리를 가는 그러한 세계이다!
저설비는 인간을 비능률적인 노동으로 좌절시키고 인간이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원시적인 상태로 몰아넣는다. 과잉산업화는 인간을 자신들이 숭배하는 도구의 노예로 만들고, 작업상의 서열을 더욱 첨예하게 강화하며, 불평등한 권력이 엄청난 소득의 차이를 낳는 결과를 초래한다.(조화로운 삶을 위한 적정기술!)
현재 우리들이 있는 장소로부터 성숙한 기술의 세계로 통하는 길이 두 개 있다? 첫째는, 부로부터의 해방의 길이고, 둘째는, 의존으로부터의 해방의 길이다! 양자가 목표로 삼는 목적지는 같다.
수송수단의 한계속도는 그것이 정치적 공동체의 모든 사람의 이해관계에 근거하여 이익을 반영한 경우에 처음으로 실효성이 있는 것이 될 수 있다.
에너지로부터의 해방? 산업상의 조건으로 일괄 소비되는 에너지량이 사회환경에 미치는 영향, 이러한 결과를 역전시킬 수 있는 중대한 열쇠는 추리의 문제가 아니라 결단의 문제인 것이다!
자동차의 보급에 의한 자유 원칙의 붕괴?
가장 좋은 해결방법은 자동차를 모두 폐기하고 자전거를 타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방법이니 자동차 소유자가 그 사회적 비용을 전적으로 부담한다는 원칙만이라도 관철되어야 한다(비용의 사회화, 이익의 개인화, 보조금의 진실)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이 책의 저자는 이반 일리치입니다. 그는 타율화된 학교제도의 폐지를 주장한 <학교 없는 사회>, 관료화된(타율화된) 병원제도가 만들어낸 병원(病原)에 대해 다룬 <병원이 병을 만든다>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인간을 노예화하는 에너지 소비와 속도에 대한 고발!
행복한 사회는 오직 자전거의 속도로만 가능하다
현대는 에너지 과잉소비 시대입니다. 이 책은 빠른 수송이 어떻게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하고 인간의 자율적 능력을 해치는지 고발한 책입니다.
자동차가 있어도 모든 사람이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값비싼 자동차들은 엄청난 화석연료를 써대면서도 결국은 자전거보다 못한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도로 건설과 관리에 드는 비용, 자동차를 구입하고 유지하는 데 드는 모든 비용을 계산하면 자동차는 결코 자전거보다 빠르지도 않고 효율적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에너지 위기’나 ‘생태 위기’와 같은 표면적 이유를 넘어 ‘자전거’로 상징되는 적정에너지, 적정기술이 어떻게 한 사회의 행복에 이바지하는지를 보여주는 역작이다
에너지는 인간이 만들어낸 도구를 노예처럼 쓸 수 있게 해주는 기본적 요소입니다. 하지만 에너지는 또한 인간을 도구들에 예속시키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동차 없이는 아예 이동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동력화된 수송의 노예가 되었으며,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는 생활은 단 하루도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도심은 주차난에 시달리고 있고 교통 사고로 인해 수많은 인명이 살상당하고 있습니다. 또한 도로 건설로 인한 자연 환경 파괴, 자동차 매연은 심각합니다.
지구에 사는 우리들은 이미 꽉 막힌 자동차들 때문에 안달하고 지겨워 죽을 지경입니다. 값비싼 자동차들은 엄청난 화석연료를 써대면서도 결국은 자전거보다 못한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이 책은 ‘에너지 위기’나 ‘생태 위기’와 같은 표면적 이유를 넘어 ‘자전거’로 상징되는 적정에너지, 적정기술이 어떻게 한 사회의 행복에 이바지하는지를 보여주는 역작입니다.
공평과 평등(equality)은 다릅니다.
평등이 ‘권리와 혜택의 고른 배분’이라는 산술적 의미에 치우쳐 있다면, 공평성은 정의(justice)와 관계된 것이고 주어진 사회적 차별을 보정한다는 적극적 의미를 가집니다.
이반 일리치는 이 책에서 속도, 에너지, 자동차 등의 키워드를 통해 인간의 자유와 사회적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을 묻고 잇습니다.
적정 에너지와 적정 기술을 넘는 순간, 사회는 공동체적 가치를 잃으며, 인간을 산업(수송산업)의 노예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자전거는 인류가 도달한 최적의 기술, 최적의 에너지 효율을 가리키는 말과 같습니다.
자전거가 자동차보다 훨씬 빠르다고 하면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동차는 실제로 자전거보다 매우 느린 교통수단입니다. 물론 속도만을 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정체와 포화로 인해 차의 이동속도가 턱없이 느려진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차를 구입 유지하는 비용과 연료비, 세금, 보험료, 통행료 등을 버는 데 바치는 시간까지 합치면 자동차는 자전거보다 훨씬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습니다.
우리는 차에 앉아 시속 80킬로미터의 속도를 만끽하며 달리지만, 사실은 시속 20킬로미터가 채 안 되는 자전거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닙니다. 자동차를 움직이는 것은 에너지인데, 휘발유를 쓰는 자동차건 요즘 각광받는 전기차건 마찬가지입니다. 교통 분야에 들어가는 에너지 사용량은 총에너지 사용량의 45퍼센트에 달한다고 합니다. 한 사회의 가용 에너지가 ‘속도’라는 이름 아래 교통에 독점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자전거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달리기 위해 한정된 화석연료를 펑펑 쓰고 있는 셈입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자동차가 제시하는 속도의 꿈이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자동차는 한 사회가 가진 가용에너지의 대부분을 독점할 뿐 아니라, 도로 건설비, 주차장 등의 공공시설 비용, 공해 비용 등을 유발함으로써 막대한 세금을 탕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동차의 속도를 확보하는 데 투입되는 세금은 자동차 없는 사람들도 똑같이 부담하고 있습니다.
자동차를 중심에 둔 교통시스템은 애초부터 차별에 근거한 것입니다. 꽉 막힌 출퇴근 시간에 버스와 콩나물 지하철을 탈 수밖에 없는 사람은 한가한 시간대에 빠르고 편하게 이동할 수 있는 계층에 비해 운송시스템 자체에 의해 차별을 당하는 것입니다.
시간은 돈으로 환산되고, 이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사람이 경쟁에서 앞섭니다. 물론 이 모든 불공정은 자동차를 가진 사람과 나아가 그 자동차를 생산하는 산업을 우선적으로 배려해 온 국가와 정부 탓이 큽니다. 개인이 아닌 사회가 제도적 불공정을 조장해온 것이죠.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집밖을 나서는 즉시 자동차를 타지 않고는 한 걸음도 이동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겨우 몇 킬로미터를 가는 데도 차를 타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습니다. 인
자동차 때문에 인간의 타고난 자력이동 능력을 퇴화하고, 인간의 노예인 줄 알았던 에너지와 자동차에 의해 거꾸로 노예가 되고 만 것입니다.
에너지 소비와 수송산업의 발달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습니다. 수송수단을 생산하고, 움직이게 하고, 주행과 주차 등의 편의를 도모하는 데 사회가 쓰는 총에너지의 45퍼센트가 들어간다고 합니다. 사회적 가용에너지의 상당 부분이 사람들을 빠르게 이동시킨다는 명목 아래 쓰이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속도가 아무리 증가하고 에너지를 많이 써도 우리는 도리어 시간이 부족하다며 안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 평균 32킬로미터를 이동하지만 사실상 반경 8킬로미터 내의 범위에서 맴맴 돌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발로 걸을 때보다 훨씬 좁은 반경 안에서 움직이면서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먼 곳까지 갈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발이 수송수단에 의지하면서 대지와의 관계를 잃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발을 통해 시공간 속에 그 자신의 세계를 구축합니다. 발로 걷는 속도와 거리에 맞춰 그의 생활세계와 인간관계와 마을이 생기고 그에게 ‘의미’를 가진 세상이 구성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빠른 속도로 달리는 차 안에서 창밖을 스쳐가는 풍경을 보며, 마치 자신의 활동범위가 넓어진 듯 착각하지만, 사실은 신기루에 불과한 세상만을 만나고 있는 셈입니다. 스스로 발자취를 남기고, 의미와 기억을 심고, 주권을 주장할 수 있는 영토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사회가 속도를 우상화할수록 공평성은 저사라집니다. 그 이유는 무제한의 속도를 누리는 데는 엄청난 비용이 들며,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이기 때문입니다.
빠른 속도는 소수 인간의 시간을 고액의 가치로 자본화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대다수 사람들의 시간을 희생시킨 결과인 것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쳇바퀴 돌 듯 출퇴근과 대중교통에 구속되어 있는 사이, 소수는 가장 교통이 편리한 곳에서 빠르게 이동하거나 비행기를 타기 때문입니다.
표준적인 미국 남성은 1년에 1,600시간 이상을 차에 씁니다. 주행중이거나 정차해 있을 때만이 아닙니다. 그는 차를 사기 위해 계약금, 월부금을 벌어야 하고, 연료비, 보험료, 세금, 교통위반 시의 벌금을 내기 위해 노동시간의 상당 부분을 바쳐야 합니다. 이 시간을 모두 합치면 하루에 깨어 있는 16시간 중 4시간에 달합니다.
표준적인 미국인은 1년에 1만 2,000킬로미터를 이동하는 데 1,600시간을 소비하고 있는 꼴입니다. 이것은 시속으로 치면 7.5킬로미터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속 7.5킬로미터면 수송산업이 발달하지 않는 나라의 사람들도 어디든 갈 수 있는 속도입니다. 자동차 등록대수 2천만 대가 넘는 한국도 미국과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이 책에서 에너지 낭비와 속도의 무익함을 대신할 수 있는 이동수단으로 자전거를 추천합니다.
자전거는 보행속도인 시속 5~6킬로미터보다 3~4배 빠른 속도로 이동하면서 에너지는 보행의 5분의 1밖에 쓰지 않는 최고의 이동수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전거는 인간의 신진대사 에너지를 이동력의 한도에 정확하게 맞춘 이상적인 변환장치입니다.
화석연료를 쓰는 모든 기계보다 열역학적 효율이 높을 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 모두의 능력보다 이동능력이 뛰어납니다. 그리고 자전거 주행에 필요한 공공시설의 건설비는 자동차보다 턱없이 적을 뿐 아니라, 자전거와 자동차 사이의 전체 가격차이보다도 적습니다.
자동차 한 대가 주차하는 공간에 자전거는 18대를 세울 수 있고, 주행시 필요한 공간도 30분의 1밖에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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