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교실
심현숙 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지난 해 9월 13일 오후 1시, Coquitlam Winslow Community School의 105호실에 들어섰을 때 나는 낯선 많은 얼굴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 반은 ESL Intermediate Class였다. 그 동안 이곳에서 살면서 영어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으나 시간이 없어 배우지 못하다가 마침 쉬는 틈이 생겨서 만사를 제쳐놓고 영어학교의 문을 열었다. 20여명 되는 학생들이 거의 다른 국적을 가지고 있어서 세계 각국을 단축시켜 놓은 듯 하나의 사회를 연상시켰다. 동양 사람들이 많은 편이어서 얼른 보면 비슷한 점이 많은 것처럼 보이나 체취부터 모두가 다르고 영어가 아니면 의사소통이 안 된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하여 조금 불안하였다. 그러나 그 곳에 모인 대부분이 나와 비슷한 수준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이 정도면 이 곳에서 공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안심되었다. 선생님은 40대 후반의 캐나다인 여자였는데 민족에 대한 차별이 없었다. ESL 코스를 반복하여 가르치다보니 요령이 생겨 교수법이 뛰어나고 발음이 나쁜 영어도 잘 알아듣는다. 한국에서 학창시절에 영어 교육을 받았고 이민 오기 전에도 학원에 다니며 영어 공부를 하였으니 웬만하면 매사를 아쉬운 대로 해내려니 하였다. 그러나 그 생각은 착오였다. 이민 와서 처음 식당을 할 때에 손님들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길이 없었다. 이럴 수가……. 너무도 당혹스러웠다. 그 때의 힘들었던 일들을 어떻게 일일이 예를 들을 수가 있을까. 모두 모르는 단어이거나 어려운 문장은 아니지만 도대체 귀에 들려오지가 않으니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사람과 같을 수밖에 없었다. 또 일을 하다보면 직원들 간에도 영어가 잘 통하지 않아서 오해가 생기기도 하지만 무지하고 못된 사람들은 영어를 못한다는 약점을 이용하여 자기 유리한 쪽으로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누명을 쓰고 분해서 눈이 퉁퉁 붓도록 울면서도 속 시원히 따지지 못한 것은 그만큼 양순하거나 속상함을 참아낼 만한 인격의 소유자이어서가 아니다. 단 그들을 이해시키거나 감동시킬만한 영어 실력이 없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은 수치에 앞서서 불편하고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 억울하면서도 항변 못한 것이 가슴 터질 듯 했다. 그래서 짬만 생기면 영어를 배워야겠다고 평소에 마음먹었다. 무엇보다도 듣고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싶어서 수업시간에 귀를 열고 열중하였다. 그러나 영어를 배우러 간 내게 의외로 캐나다인들의 생활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였다. 한국어에는 생략된 주어가 영어에는 꼭 붙어 다닌다. 이 기본적인 차이를 한국에서는 몰랐었다. 시간이 갈수록 언어가 다르다는 것은 의식구조, 사고방식, 생활 습관 등 문화가 다르다는 뜻임을 알았다. ‘이곳 문화가 좋다’가 아니고 여러 가지로 우리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외국어를 통해서 밖에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셈이다. 한국어만 쓸 때는 내 나라 한국만 알고 살아왔다. 어떤 학자는 ‘영어 혹은 그 밖의 모든 외국어는 창(窓)이다’라고 말했다. 창을 통해서 사고의 유연성이 생겨 인간으로 성장한다. 갇혀있던 이 공간 말고 넓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치게 된다. 우리는 밖에서 들어오는 창문의 햇빛을 통해서 나와 내가 앉은 자리를 자세히 볼 수 있다. 오밀조밀 꾸며놓은 세간에서 자상한 손길도 볼 수 있고 가구 위에 수북이 쌓인 먼지에서 나태함을 지적할 수도 있다. 이렇듯 영어를 배우면서 새삼스럽게 모국어에 대하여 자각하는 계기도 되었다. 인간에 있어서 모국어는 문화다. 일제하에서 우리 조상들은 국토를 빼앗기면서 언어까지도 빼앗겼을 때 그 고통이 오죽했을까. 그것은 국토와 언어만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었고 문화와 정신까지도 송두리째 빼앗겼다는 것을 이 곳에 와서 알았다. 각국의 각계각층 사람들이 자기 수준에 맞는 ESL 영어 교실을 이용하여 문맹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친다. 아무도 잘난 척하거나 뽐내지 않는 이들에게 때로는 어떤 공감대를 느낀다. 겉모습은 각양각색이지만 가슴을 헤쳐 보면 향수병이라는 고질병이 있고 한 자 이상 되는 이민의 한은 누구에게나 있을진대 단어 몇 개라도 더 배우고 외우려는 이국의 친구들에게 우렁찬 박수를 보내고 싶다. 중국인들은 대지(大地)의 후예답게 타민족에게도 이해심이 깊고 협조 잘하는 것을 이번 영어 교실 친구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들은 추석에 ‘Moon Cake'라며 월병(月餠)을 만들어 왔고 우리는 무지개떡과 송편을 만들어 갔다. 다른 나라 사람들도 약속이나 한 것처럼 차례차례 자기 나라의 고유 음식을 요리하여 가지고 와서 맛을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감사합니다.’ 하며 가게에서 스치던 그런 관계가 아니고 언어는 다르나 가슴과 가슴으로, 마음과 마음으로 사귀고 싶은 것은 모든 인간의 소망이다. 친절을 베푸는 것이 좋다는 것은 누구의 가슴에나 있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 들어갔던 영어 교실에서 뜻밖에 인생을 배우고 내 조국, 내 민족 그리고 인류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1994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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