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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래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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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자료실 스크랩 시편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서래옥 추천 0 조회 55 14.05.20 18: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시편 어떻게 읽을 것인가>

 

배경연구

 

 

 

1. 시편의 기독론적 설교 / 김정우 ...................................................... 2

 

2. 시편에 나타난 믿음 / 김이곤 ......................................................... 3

 

3. 이스라엘의 지리적, 사회적 배경에서 본 시편 / 편집부 .......................... 4

 

4. 말씀의 책 시편 / 송재근 ............................................................... 5

 

5. 시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이상훈 ................................................ 7

 

6. 시편의 구조 이해 / 김정우 ............................................................ 8

 

7. 시편의 신학적 메시지 / 차준희 ....................................................... 9

 

8. 시편에도 문맥이 있는가 / 김성수 ....................................................10

 

9. 시편에 나오는 원수에 대하여 / 이태훈 .............................................11

 

10. 시편을 통해 본 인간 이해 / 정종호 ................................................12

 

11. 시편 설교를 위한 방법론 / 김정우 .................................................14

 

12. 언약갱신 시편 / 송재근 ..............................................................16

 

 

 

1. 시편의 기독론적 설교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눅 24:44)고 말씀하시며, 구약 성경과 그분과의 관계를 설정해 주셨다. 예수님이 보실 때, 시편은 분명히 그리스도이신 자신을 증거 한다. 그래서 자신의 메시아적 사적을 구약에서부터 증거 하기 위해 많은 시편을 인용하셨다.

모든 시편에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인 이유는 구약의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또 모든 시편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인 이유는 아직까지도 구약과 신약 두 성경을 어떻게 연결시켜야 하는지 합의된 방법론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주시와 기독론적 설교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은 저주시에서 기독론적인 설교를 하였을까? 문제는 저주시의 성격에 있다. 예수님은 저주시와 깊은 거리감을 두고 본문을 인용하시는 것 같지 않다. 달리 말하자면, 그는 앞에 열거한 여러 학자들처럼 자주 시편을 영적으로 저급한 시들로 여기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는 ‘저주시’들도 높은 구약적 영성이 있다고 여기신다. 왜냐하면 저주시에서 시인들은 개인적인 보복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시행하려는 정신을 추구하기 때문이다.l

또한 시인은 하나님의 종이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고난을 받고, 하나님의 성전을 위한 열정이 있다. 시인은 궁극적으로 악인과 악을 제하고, 의인을 일으키길 구한다. 따라서 이 기도는 윤리적이다. 그는 진리가 거짓을, 의가 불의를 극복할 수 있도록 구한다. 따라서 우리는 저주 시편을 하나님의 성도가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는 기도로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저주시 속에 기독론적 해석의 발판이 있다고 본다.

 

제왕시에서 본 기독론적 설교의 조망

제왕시의 가독론적 해석은 일견해 볼 때 대단히 쉽다. 신약에서 기독론적으로 인용하는 많은 시편들이 제왕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약 인용의 범위를 넘어가는 정경적 해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제왕 시편에 나타난 왕의 모습은 ‘영광스럽고 또한 고난 가운데 있는 왕’을 그리고 있다. 시편 89편에 나타난 ‘영광과 수난’의 양면적인 다윗 왕의 모습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양면적 모습을 조명하고 있다. 제왕시의 왕의 이념은 신약기독론과 유기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신약기독론에서 완성된다.

 

결론적 적용

신약의 시편 인용은 인용된 절뿐 아니라 인용된 시편 전체를 기독론적으로 보게 하며 나아가 인용되지 않은 다른 시편까지 기독론적으로 볼 수 있는 ‘패러다임’을 제시해 준다. 또한 시편의 최종적인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시편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며 노래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초대 교회 및 종교개혁의 전통을 따라 모든 시편에서 전해야 한다.

 

2. 시편에 나타난 믿음

 

시편은 ‘믿음’의 현실을 그 어떤 다른 책들보다 더욱 리얼하게-매우 실존적으로-표현한 책이다. 왜냐하면 시편은 신앙 공동체의 공적 예배 의전에서 형성되고 읽히고 다듬어지며 첨삭/보존/성장/전승되어 온 책으로써, 이스라엘 계약 공동체의 신앙적 삶의 현실을 문학화했기 때문이다.

 

시편 시인들의 신앙 현실

  1. 시편의 ‘믿음’을 해석하는 ‘해석의 요체’:‘의지’행위로써의 ‘믿음’

시편에 나타난 신앙 현실이 지닌 특성은 70인역이 ‘믿음’의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상태를 ‘의지 행위’에서 찾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확인되고, 또 이 ‘의지 행위’가 ‘믿음’과 동의어가 될 뿐만 아니라 ‘희망 행위’와 특별히 동의어가 된다는 것을 70인역이 여러 곳에서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참고 70인역의 시 48. 113. 115. 134. 145 편 등)

 

2. ‘의지’/‘신뢰’는 ‘희망’을 창조한다.

시인의 ‘의지’/‘신뢰’의 마음은, 그가 고난중에 처하였을 대 그의 의지의 대상을 향하여 잠잠치 아니하고 입을 열도록 만든다. 이러한 ‘의지’의 믿음은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고 희망을 갖게 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의지 신앙의 신학적 확립으로 하여금 ‘거짓 믿음’과 ‘거짓 안전’이 무엇인지를 식별하는 역할도 할 수 있게 한다. 왜냐하면 ‘평화’는 자주 사람들이 거짓 신뢰에 빠지도록 자신을 위장하기 때문이다.

 

3. 운명 극복의 동인(incentive) 역할을 하는 ‘의지 신앙’

시편 시인들이 말하는 ‘의지 신앙’으로써의 ‘믿음’은, 그러므로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갖게 하는 실천적인 성격의 밍음이며, 결코 교조적이고도 관념적인 성격의 믿음이나 ‘거짓 안보’로 흐세무민하는 거짓 믿음이 아님이, ‘기도’라는 시인의 경건 양식을 통하여 더욱 분명하게 확인된다.

 

4. 맺는 말

시편에 그려진 ‘믿음’은 하나님-시인(인간)‘ 사이의 관계 현실 안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특히 ‘탄원의 시’들의 경우는 ‘시인→하나님(신학)/시인→자신(심리학)/시인→이웃과 원수(사회학)’ 사이의 밀접한 관계 상황 안에서 믿음의 현실이 ‘전개/개진’된다. 그러므로 시편의 세계에서는 ‘믿음’이란 ‘헤에민’(to believe/faith)이라는 개념에서보다는 ‘빠타흐’(to trust/confidence)라는 개념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교조를 입으로, 마음으로 고백하는 ‘믿음’이 아니라 ‘참 안전’(샬롬)이 진정으로 보장된 분(personality), 그분과의 삶을 통한 관계 상황 안에서 형성되는 ‘믿음’이 시편의 세계가 말하는 ‘믿음’의 실체라고 하겠다.

 

 

 

3. 이스라엘의 지리적, 사회적 배경에서 본 시편

 

이스라엘 지형의 특징

 

이스라엘은 겨우 20,700km에 불과한 작은 땅을 차지하고 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동서로 자른 이스라엘 지형의 단면은 고도차를 잘 보여 준다. 지중해변에 위치한 욥바에서 동쪽으로 한 시간을 달리면 해발 800m에 위치한 예루살렘에 도달한다.

동서로 좁고 급격한 고도차를 보이는 지형적 구조와 함께 서쪽에 위치한 ‘지중해’와 남쪽에 위치한 ‘아라비아 사막’이 이스라엘의 날씨를 결정하는 중요한 두 요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날씨는 ‘바다와 사막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비구름을 동반한 시원한 바람은 항상 서쪽에서 불어오며 뜨겁고 건조한 바람은 남동쪽의 아라비아 사막에서 불어온다.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편서풍의 비구름은 서부 해안 평야에 풍성한 비를 뿌리지만 예루살렘이 위치한 해발 600~1,000m의 서부 산악 지대를 넘지 못하고 동쪽으로 가면서 점차 소멸된다.

비가 많이 오는 우기가 되면 광야에도 홍수가 나고 급류가 생긴다. 4~10월까지 이스라엘에는 비가 오지 않는 건기가 이어진다. 이때 유대 광야는 실로 바싹 마른 돌맹이밖에 보이지 않는 황무지가 된다. 그러나 10월 초막절을 지내고 나면 이른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이슬 역시 메마른 광야를 살아나게 하는 청량제 역할을 한다. 이스라엘의 1년 날씨에는 비와 이슬이 중요했다. 우기가 시작되는 10월경의 초막절 마지막 날에는 성전의 제사장의 뜰에서 ‘이른 비’의 축복을 간구하는 기도문을 올렸다. 건기가 시작되는 4월경의 유월절에는 그 마지막 날에 이슬의 축복을 간구하는 기도문을 올렸다.

 

광야와 방위(方位)

 

유대인들은 동쪽을 앞쪽으로, 서쪽을 뒤쪽으로, 남쪽을 오른쪽으로, 북쪽을 왼쪽으로 표현한다. 남쪽은 이글거리는 태양이 떠 있는 곳이다. 남쪽, 즉 우편에 태양이 떠 있는 정오에 광야 길을 걷는다고 상상해 보자. 타들어 가는 광야의 태양은 엘리야와 요나 같은 선지자들도 차라리 죽기를 간구할 만큼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다. 그러할 때 내 우편, 즉 남쪽에서 하나님이 나를 위한 그늘이 되어 주시겠다는 뜻이다.

 

장막의 구조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든 장막의 내부는 이렇다. 입구는 동쪽에 만들었다. 동쪽의 아라비아 사막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으로 보온 효과를 얻으려는 의도다. 안에 들어가면 양쪽에 방이 한 개씩 있고, 가장 서쪽에 또 다른 방이 있는데, 이 방을 성경은 ‘골방’이라고 부른다. 이 방은 여자들과 아이들의 전용 공간이었다.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아낙네들에게 골방이야말로 자신들의 공간이었다.

 

 

4. 말씀의 책 시편

 

기도와 찬양의 책 - 시편

 

우리는 진실한 기도를 드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면서도 주기도문을 단순하게 암송할 뿐 실제적인 내용의 깊이를 생각하지 않는댜. 시편은 기도가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가르쳐주는 책이다. 즉, 시편은 우리가 어떻게 말로, 즉 기도로 하나님께 언약적 반응을 할 것인가를 가르친다.

그런데 우리는 기도뿐 아니라 찬양과 감사도 잘 하지 못하는 존재다. 저차원적인 기도가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유익을 구하듯이 저차원적인 찬양과 감사는 현실의 이익에 집착하게 한다. 이러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의 눈을 뜨게 만들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역사에 대한 기도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주제로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의 신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시편인 셈이다.

 

1. 언약적 관계 속에서의 인간의 반응의 책 - 시편

(영적)이스라엘의 기도와 찬양과 감사가 가능한 것은 이 모두가 언약의 하나님에 대한 언약의 당사자로서의 이스라엘의 언약적 반응이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영적)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절대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공적인 언약관계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찬송의 깊이는 단순한 창조주와 피조물, 구속주와 구속받은 자 정도의 내용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언약적 자비’에 근거하여 용서를 간구하기도 하고, 자신의 ‘언약적 의’를 드러내며 문제를 해결하여 주기를 기원하기도 한다. 시편은 여호와 하나님과 (영적)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의 역사 속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적 자비와 언약적 공의가 나타난 것을 감사, 찬양, 기원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2. 찬양과 감사의 책 - 시편

무엇보다도 시편은 찬양과 감사의 책이다. 창주주 하나님 되심을 찬양하는 동시에 구속주 하나님 되심을 찬양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찬양과 감사는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을 향하여 언약적 행위인 ‘자비와 성실’을 이행하시는 하나님께 집중되어 있다.

 

3. 애통과 간구의 책 - 시편

시편 가운에 무엇보다도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게 애통과 간구의 시다. 이스라엘이 특별하고 유일한 언약백성이기 때문에 용서받기를 간구하는 기도가 사실상 주종을 이루나, 죄와 관계없는 고난 속에서의 절규도 나타나 있다.

 

4. 공동체와 개인이 하나님께 반응하는 책 - 시편

한 개인과 하나님인 언약을 맺는 것이 아니라 (영적)이스라엘 공동체와 삼위일체 공동체 하나님이 언약을 맺는 것이고, 한 개인은 그 공동체에 속해서 언약에 동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인주의가 극도로 발전한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시편을 보통 개인시로만 이해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되는 현상이다.

 

말씀의 책 - 시편

1.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인 시편

 

원래 시편의 대부분은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가운데 처했던 개인과 공동체가 언약에 기초해서 하나님에게 반응했던 내용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철저히 인간의 소리요, 비록 언약의 당사자이지만 피조물인 (영적)이스라엘이 언약의 하나님을 향해 반응했던 소리다.

시편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반응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인 시편은 다른 성경 65권과는 그 성격이 판이하다. 시편은 자신을 향해서 그런 언약적 행동을 하시는 하나님께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특이한 책이 되는 셈이다.

 

2. 하나님의 편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소개하는 시편

 

시편 속에는 하나님 편에서의 언약적 선포를 소개하는 경우가 있다. 즉 하나님께서 직접 입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인용하는 경우인데, 완악한 (영적)이스라엘의 지도자와 백성을 구체적으로 책망하시고 한다.

예배 인도자가 하나님을 2인칭으로 표현할 때는 그의 얼굴이 하나님을 향하고 예배 공동체를 등에 두고 있는 경우다. 하나님을 3인칭으로 표현할 경우는 예배 인도자가 하나님을 등에 두고 얼굴이 예배 공동체를 향하고 있는 경우로 보면 된다. 이때 예배 인도자가 언약의 중보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경우는 지혜자처럼 하나님에 대해 선포하고 설교하는 시편도 있다.

 

맺는 말

 

시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언약적 말씀과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언약적 반응의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것은 위로인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에 대해 우리를 대단히 능동적으로 만드는 요소다.

말씀의 신학은 있으나 기도의 신학은 약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1차적 은혜를 받는 신학은 있으나 최선을 다해 우리의 것을 하나님께 드린 후 그것을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 표현하는 2차적 은혜를 누리는 신학이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시편은 이런 신학의 불균형을 시정하고 21세기에 즈음하여 진정으로 하나님과 말씀을 주고 받으며 행동을 주고 받게 함으로써 새로운 하나님나라의 역사로 우리를 초대하는 전위대 역할을 하는 특별한 계시다.

 

5. 시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시편 대부분의 시들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차원의 내용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말씀 드리는 차원의 성격이 더욱 강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이 비록 시편이 조직적으로 정제된 신학을 제공하고 있지는 않으나, 시편 신학은 구약의 ‘심장’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매우 방대하여 구약성경의 신학을 모두 보여 준다.

 

시편의 신학 -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

 

시편 신학에서 중요한 특성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다. 따라서 시편에는 이러한 관계를 표현하기 위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 상당수 등장하였는데, 예를 들어 목자, 왕, 남편, 아버지, 어머니 등과 같은 표현이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나누시는 특정한 관계적 측면을 강조할 때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계약적인 사랑’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대한 기도와 찬양은 물론, 슬픔의 기도를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음을 재확인하였고, 이와 같은 다양한 삶의 태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응답하였다.

시편에 반영되어 있는 포괄적인 삶의 범주를 통해서 우리는 시편이 추상적이고 철학적이라기보다는 하나님 백성의 삶에서 비롯된 ‘대중적인 신학’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감정과 상황의 축소판이자 영적 체험의 전시장

 

우리는 시편에 대한 신학적인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시편 본래의 의미와 신학적 특성은 물론, 세월의 흐름에 따른 신학적 특성을 같이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현대의 독자들은 시편을 읽을 때나 혹은 시편의 내용을 삶과 연관 짓고, 그것을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기에 앞서 인식해야 할 전제가 있다.

시편의 독자들은 시편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면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부분적으로 시편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예언적인 신탁이 존재함과 동시에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에서 비롯되는 왕, 제사장, 선지자 등과 같은 다양한 인물의 고백 그리고 인간 삶의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비롯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다양한 응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시편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의 천성을 드러냄으로써, ‘각 사람’의 다양한 심적 상태와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시편에 있는 기쁨과 고통 그리고 분노, 복수심과 증오심을 느꼈던 수많은 사람의 목소리와 표현은 인간의 수치스러운 습성의 표현이다. 즉 시편은 다양한 삶의 체험을 비추어 주는데 그 범위는 왕에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하다.

시편은 인간의 감정과 상황의 축소판이며 영적 체험의 전시장이고, 단순할 듯하지만 결코 단순하지 않다. 역사를 통해 전해 내려오는 하나님과의 수많은 관계성의 체험이 시편에 공존하는 것이다.

 

6. 시편의 구조 이해

 

 

시편 편집의 과정

 

현재의 시편이 만들어지기 전에 여러 개체의 시들이 여기 저기, 이동네 저 동네, 이 성소 저 성소에 흩어져 있었고,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하나의 낱권으로 모여지기 시작하였고, 결국 바벨론 포로 후의 최종적인 편집자가 현재 형태로 만들었을 것이다. 시편이 현재 형태로 만들어지기까지 어떤 편집과정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몇 개의 실마리들이 시편 속에 담겨 있다.

 

 

시편 편집 과정에 대한 시편 자체의 증거

 

첫째, 여러 시편에 나타나는 표제들이 편집 과정이 있었다는 주장을 뒷받침 해준다. 둘째, 현재의 시편에는 몇 개의 중복이 나타나고 있다. 셋째, 현재의 시편 편집에 따르면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데 뚜렷이 다른 두 개의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넷째, 시편 72:20에 따르면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필하니라’고 말한다. 다섯째, 할렐루야 시편은 큰 할렐, 애굽 할렐이든지 모두 제4권과 5권에만 나타난다. 이 모든 사실을 정리해 볼 때, 현재의 시편은 긴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점진적으로 초기의 묶음들이 후대의 묶음들에 포함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시편 편집 과정에 대한 잠정적 가설

 

현재의 시편이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으로 만들어졌는지 정확하게 제시할 수 없지만, 다섯 권으로 이루어진 시편은 그 발전 단계를 반영해준다. 즉 제 1권은 2권보다 더 초기의 것이며, 제2권은 3권보다 더 먼저 있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모든 학자들이 의견일치를 보고 있다.

 

 

시편의 전체적 구조

 

현재의 시편은 모두 다섯 권으로 나누어져 있고, 각 권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송영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시편이 마지막 형태에서 다섯 권으로 짜인 것은 모세오경이 다섯 권으로 구성 되었기 때문에, 그 틀에 맞춘 것으로 대부분 생각한다. 시편 1:1에 대한 미드라쉬를 보면, ‘모세는 오경을 이스라엘에 주었고, 이것에 일치하게 다윗은 다섯 권으로 된 시편책을 주었다’고 말한다. 물론 다윗이 모든 시편을 다 편집을 했다는 말은 아니지만, 오경처럼 시편도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졌다는 뜻이다.

 

7. 시편의 신학적 메시지

 

시편의 특성

 

시편은 기도와 찬양, 그리고 묵상의 모음집이기 때문에 성경 중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성경의 이야기체 문학인 오경과 역사서들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행동을 보여 주며, 예언서들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한마디로 시편은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신앙고백 모음집이다. 어떤 면에서 사람의 책인 시편은, 특히 유대교와 기독교와 공예배와 개인적인 명상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시편의 분류

 

궁켈이 그의 「시편 입문서」에서 분류한 몇 가지 주요 양식은 개인 탄원시, 찬양시, 감사시, 제왕시, 공동체 탄원시 등이다. 이외에도 공도에 감사시, 지혜시, 신뢰시, 순례시, 성소출입문의식과 어떤 양식의 시편에도 예속시킬 수 없는 혼합시편 등이 있다. 물론 세부적인 면에 있어서는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지만, 궁켈이 구별한 시편의 양식들은 오늘날까지도 학계에서 대체로 수용되고 있다.

 

1. 찬양시

대체적으로 찬양시는 야웨를 찬양하라는 외침과 찬양의 이유를 제사하는 두 가지 요소를 갖는다.

 

2. 탄원시

탄원시들은 시편의 등뼈로 불린다. 이들이 시편의 양식 가운데서 가장 많이 나오며 시편의 약 5분의 1이 이 양식에 속한다. 탄원시는 기원하는 사람이 개인인지 여러 사람인지에 따라서 개인 탄언시와 공동체 탄원시로 나누어진다.

 

3. 감사시

하나님의 도움으로 고난을 벗어났을 때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감사시’로 고마운 마음을 노래하였다. 이 양식에 속하는 시편들 역시 탄원시들과 마찬가지로 ‘개인 감사시’와 ‘공동체 감사시’로 나뉜다. 공동체 감사시는 눈에 띄게도 시편 124편과 129편만 속한다.

주목되는 것은 감사시가 탄원시보다 훨씬 더 적다는 사실이다.

 

4. 신뢰시

신뢰시는 야웨에 대한 신뢰나 확신을 표현하는 시편의 한 양식이다. 첫째, 야웨는 양떼인 성도들의 목자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성도와 생사고락을 함께하신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보호할 뿐만아니라 인도하시는 분이다. 넷째. 하나님의 집은 약자와 박해받는 자들의 보호처가 된다. 다섯째, 하나님께서는 박해받는 약자를 정성스럽게 대접하신다.

 

 

8. 시편에도 문맥이 있는가

 

과거의 시편 해석

 

19세기 들어 역사비평학자들은 다윗의 시편들에 나타난 내용과 다윗의 생애를 기록한 다른 성경들을 비교하면서 그 내용의 불일치를 지적하거나 많은 시편들을 다윗 이후의 시대들과 연결시켰다.

과거 해석 방법들은 시편 연구에 많은 기여를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편 언어가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상황을 명백하게 말하지 않기 때문에 역사적 측면을 강조한 이 방법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한 권의 책 즉 한 권의 성경 안에 들어 있는 시편의 문맥을 깊이 생각지 않았으며, 다른 종교 전통과의 비교를 너무 과도하게 시편 해석에 적용했다.

 

시편 해석에서의 변화들

 

첫 번째 변화는 시편의 문학적인 특징에 대한 강조다. 즉 시편이 갖고 있는 문학적인 측면을 강조해 다른 문학 작품을 분석하는 데 사용하던 도구들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문학적 분석은 주로 히브리 시가 갖고 있는 주요 특징인 평행법, 어휘나 어구의 반복, 비유 등에 대한 관찰로 이뤄진다.

두 번째 변화는 시편들이 전수되고 사용되면서 어떻게 그 시편들의 의미에 영향을 미쳤는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시편들은 전수되는 과정에서 언래의 사용 목적과 다른 역사적 상황에서 다른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수정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세 번재 변화는 한 시편이 시편이라는 책 속에 놓인 위치와 그 시편이 주변의 다른 시편들 혹은 시편 전체와 갖는 문학적 문맥을 강조하는 현상이다.

네 번째 변화는 세 번째 경향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인데, 시편을 한 권으로 보는 관점의 출현이다, 이 관점에 의하면 현재의 시편은 다양한 시대에 이뤄졌던 편집과 배열을 결합함으로써 창출된 것이기 때문에, 시편이 성경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과정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문맥 속에서의 시편 연구를 기대하며

 

문맥 속에서의 시편 연구가 시편 연구의 유일한 접근 방식은 아니다. 오히려 전통적인 해석 방법이나 그동안 많은 학자들이 해온 시편 연구에 대한 일종의 결론과 같은 접근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까지 각 시편을 독립적으로 해석했던 방법들에 대해 이 접근 방식이 수행될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교회를 세우고 유익하게 하는 시편 해석은 한 시편의 역사적, 문학적, 문법적 해석을 포함해야 하지만, 그와 더불어 시편의 해석은 각 시편을 이웃하는 시편들과 시편 전체의 문맥 그리고 구약 전체와 성경 전체의 문맥도 고려해 해석해야 온전한 해석과 설교로 이어질 수 있다.

 

9. 시편에 나오는 원수에 대하여

 

원수에 대한 다양한 이해들

 

공동체 탄식시나 찬양시에서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원수는 그들을 위협하는 이방 민족(나라)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공동체 탄식시나 찬양시에서는 탄식기도나 찬양을 드리는 주체가 이스라엘 백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 탄식시에서는 원수의 정체가 분명하지 않다. 원수가 일반적인 용어로 서술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탄식을 드리는 주체인 시인을 누구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원수의 정체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⑴ 시편의 원수를 집합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다.

⑵ 시편의 원수를 제의적이나 상징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다.

⑶ 시편의 원수를 개인의 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다.

 

원수는 어떤 존재들인가

 

시편에서 원수는 일반적으로 서술되기 때문에 그 정체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유발할 수 밖에 없다.

원수에 대한 서술이 일반적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상당히 다양하고도 구체적인 언급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시인은 그들이 무고한 송사, 압제, 약탈, 살인, 도둑, 거짓말, 거짓 증언 등의 행동을 한다고 탄식한다.

공동체 탄식시나 제왕시에서는 원수가 국가적인 적을 나타내지만, 개인 탄식시에서는 개인의 대적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시인은 원수의 핍박에 대해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간구한다. 원수들의 주된 목표는 시인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 버리려는 것이다. 원수들은 가난하고 병든, 의로운 시인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다.

 

 

시편에 나오는 저주기도에 대한 이해

 

원수의 파멸을 간구하는 저주기도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탄식시에 나오는 시인의 정죄나 저주기도가 원수들에 대한 복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시인은 하나님께서 정의를 실현하시어, 대적들에게 빼앗긴 공의를 회복하시기를 간구할 뿐이다. 따라서 기도자의 원수들에 대한 멸망의 간구는 정의회복의 기도지 복수의 기도가 아니다.

우리는 탄식시에 나오는 원수에 대한 저주의 기도를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와 대치시키기보다 서로 다른 양상의 두 가지 기돌 인정해야 할 것이다,. 즉 시편의 기도가 우리에게 좀 더 현식적이고 인간적인 것이라면, 예수님의 기도는 이상적이고 신적인 차원의 기도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의 기도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목표인 것은 분명하다.

 

10. 시편을 통해 본 인간 이해

 

시편에서는 인간을 독립된 존재로 보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과 연결시켜 인간을 이해하려 한다. 하나님의 간섭과 보호와 인도하심이 없는 인간의 삶을 시편기자는 상상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간관은 인간을 고정된 존재로 보지 않고 언제나 움직일 수 있고 변화가 가능한 존재로 보는 시각이며, 이러한 인간의 모습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파악할 수 있다.

 

 

창조주 앞에 선 인간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편들 가운데 특별히 인간 개개인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한 시편들이었다. 이 시편에서 시편 기자는 태초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사실보다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시편 기자는 인간의 태어남과 성장을 자연현상으로 설명하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행위로 보았으며, 인간 개개인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손길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강조하였다.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 시편 기자는 사람이 오래 동안 사는 것 같으나 그 평생은 한 순간이요 화살과 같이 빨리 지나간다고 하였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한계가 있는 피조물이라 해서 인간을 낮게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존귀한 존재임을 강조하였다. 비록 한계가 있지만 인간은 존귀하며, 인간이 존귀한 까닭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있다기보다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피조물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책임을 잘 수행하는 데 있음을 강조하였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인간

 

시편에는 악인에 관한 묘사가 참으로 자주 나타난다. 악인은 주로 의인을 핍박하고 의인을 조롱하는 인물로서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을 무시하는 인물로서 공공연히 하나님은 없거나 무능하다는 조롱의 말을 하기도 한다. 한편 고통을 당하는 의인들은 하나님께 악인들을 징계하고 의인을 구해주시기를 간청하며 부르짖게 되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그의 공의는 확실하고도 명확하여 악인들은 그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고 강조하였다.

시편 기자는 인간이 죄의 세력 앞에 노출되어 있지만 무력하여 전혀 항거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이 의로운 행동과 의인의 길을 선택할 능력이 있음을 말하며, 이러한 능력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극대화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악인만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인 의인도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을 수 있으며, 죄인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죄의 고백인데,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지 않을 때 인간은 극심한 고통을 경험하게 되며, 죄를 고백할 때 죄인은 자신의 허물을 용서받는 ‘복 있는 사람’ 이 된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인간

 

인간은 피조 될 때부터 독립된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창조자와 그리고 다른 피조물과의 상호 관련성 속에서 살아가도록 만들어졌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졌으나 하나님과의 주고받는 신뢰가 없이는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나 인간의 능력은 지극히 작고, 하나님은 전지하시나 인간은 모르는 것이 훨씬 많으며, 하나님은 영원하시나 인간은 시간의 제한을 받는 존재이다. 이러한 존재인 인간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의지하기를 거듭 권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인간의 연약함을 보충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창조자가 원하시는 인간의 모습을 구현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은 제 구실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현재 주어진 여건 가운데 최선을 다하고, 그 다음 일어날 미래의 시간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간

 

시편에는 인간이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한다거나, 여호와의 율법이 송이꿀보다 달며, 여호와의 계명을 정금보다 더 사랑한다는 등의 표현이 있는데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하나님께 보다 더 적극적인 반응을 보여주는 표현들이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이 정도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께 보다 더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시편 기자는 분명 사람은 사랑을 주고받는 존재로 보았으며, 사람과 하나님 사이도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사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시편의 인간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외우는 신앙 고백문속에 결정체처럼 자리 잡고 빛을 발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을 이끌어가는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더볼어 살아가는 인간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받을 복은 첫째, 가족의 번성과 가정의 행복이다. 시편 기자는 인간의 기본적인 행복한 모습을 가정의 행복에서 먼저 찾으려고 하였고, 이러한 행복은 하나님의 선물임을 강조하였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는 감탄은 개인의 행복이 공동체의 화목 가운데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아름다운 공동체에 하나님은 더 많은 복을 주시며, 공동체 안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 곧 연장자나 어린이나 힘 있는 사람이나 힘없는 사람 모두가 활력에 넘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공동체의 개념은 확대되어 하나님 앞에 선 예배 공동체 즉 이스라엘 백성으로 확대되는데, 이 공동체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함께 경험한 공동체이며 그 경험과 신앙고백을 대대로 전달할 공동체다.

 

 

삶과 죽음

 

생명은 그 자체가 스스로 존재하며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며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은 곧 생명의 근원이 될 수 있으며, 생명력을 되살릴 수 있는 곳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하나님이 그 생명을 주시기도 하며, 거둬 가시기도 하고, 주신 생명을 보호하고 새롭게 하실 수도 있는 것이다. 시편에서는 죽음의 세계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스올에서는 주님을 기억할 수도 없고 주님을 찬양할 수도 없는 곳으로 묘사되어 있다. 즉 시편에서는 육체적인 죽음이 인간에게 자연적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지만 시편에서 강조된 것은 하나님과 격리되고 단절되는 상황이 곧 근본적인 죽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육신이 살아있어도 인간은 ‘죽음’을 경험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질병으로 위중할 때나 악인의 핍박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죽음 가운데서 건져 달라’는 말로써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누가 인간을 알 수 있는가

 

하나님만이 인간의 모든 것을 아신다는 말은 결국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련성 속에서만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이며, 하나님 앞에 열려 있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아시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며, 하나님이 인간을 둘러싸고 인간을 돌보며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계시기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가장 잘 안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인간을 가장 사랑한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시편 기자는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보다 인간 개개인을 창조하시고 돌보시며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강하게 부각시켰으며,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만이 참으로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사랑 앞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요, 인간의 입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찬탄이 끊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11. 시편 설교를 위한 방법론

 

 

제1단계 : 시편 설교를 위한 기초 연구단계

전통적으로 시편 설교는 시편의 표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왔다. 시편의 표제는 이 시편을 보는 하나의 창문이지 전체를 다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표제는 출발점으로나, 혹은 설교 중 필요할 때 예증으로 사용하는 데에 만족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다윗의 삶과 그리스도의 삶과 신자의 삶에는 고난과 승리라는 공통적인 패턴이 있기 때문이다.

 

제2단계 : 주석단계

어떤 설교도 튼튼한 본문 이해의 바탕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형식과 배경을 결정한 후 이제 주석 작업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가 시편 주석을 시작할 때, 우리는 선배들의 주석 작업을 일차적으로 참고할 수밖에 없다. 주석을 할 때에 단어와 구의 의미를 하나씩 차근차근 살피는 습관을 기른다면, 시간이 갈수록 주석하는 능력을 갖게 되고 주석 자체가 재미있어질 것이다. 주석을 하는 과정에서 은혜를 받고, 그러는 사이에 뭔가 설교를 위한 힌트를 얻게 된다.

 

제3단계 : 구조분석과 수사분석의 단계

시편의 형식과 배경을 결정하고 주석을 끝낸 후에는, 구조를 새롭게 짜볼 필요가 있다. 시편의 구조를 짜는 이유는 이 시편 자체에 포함되어 있는 사상의 흐름을 찾기 위함일 뿐 아니라, 우리 설교의 대지를 서너 개로 나누기 위함이다. 시편 자체가 핵심단어를 통해 맛있는 구조를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면, 우리 스스로 설교의 뼈대를 새로 결정해야 할 필요가 없고 성경의 흐름을 따라 자연스럽게 넘어가도 좋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조분석은 분석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우리는 좀더 객관적인 구조분석을 해야 하며, 이것을 하기 위해 수사비평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제4단계 : 신학화 작업의 단계

설교에 신학이 없을 때, 설교의 깊이가 없어진다. 아무리 본문 강해를 힘쓴다 해도, 마지막에는 어떤 신학적인 강조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신학이란 궁극적으로 내가 믿는 것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주석의 깊이와 수사학적 분석의 통찰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인 초점이 없다면, 성도들은 말씀을 다 들은 후에 무엇을 마음에 간직하고 가겠는가?

 

제5단계 : 지평 융합의 단계

이제 우리는 본문의 지평(역사적, 문학적, 신학적)을 떠나, 우리 현실의 지평으로 넘어와야 한다. 우리의 현장은 수많은 변화와 다양성 속에 있기 때문에 현실적인 지평 역시 본문의 지평만큼이나 만만치 않다.

 

 

 

마지막 단계 : “복음을 전하라”

복음 외에는 우리에게 새로운 방향과 힘과 희망을 주는 구원의 메시지가 없다. 어떤 시편을 전하든지 우리는 복음의 높은 고지에 서서 전하기를 힘써야 한다. 복음을 전할 때, 전하는 자는 힘이 나고 듣는 자는 아멘으로 화답하게 된다. 결국 우리는 성도들이 주님과 올바른 영적-언약적 관계를 갖도록 격려해야 하며, 나아가 우리는 복음으로 새로워진 각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격려해야 할 것이다.

 

 

12. 언약갱신 시편

 

서론

 

시편 24편은 전체가 10절로 구성된 간략한 시편이기는 하나, 이것을 읽거나 듣노라면 모종의 장중한 힘을 느끼게 된다. 절수가 짧으나 복합적인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에 학자들은 이 시편 전체를 다양하게 이해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는 힘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고 그로 인해 시편은 그 전체를 정확하게 설교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시편 이해에 있어서 장르 인식의 중요성

 

우리는 이 시편의 장르를 언약갱신 시편으로 볼 수 있다. 이 장르의 또 다른 예는 시편 50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두 시편의 상황이 언약갱신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시편 50편은 시편 24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점점 피상적이 되어가는 언약갱신 의식에 대해서 거의 파괴적일 정도의 근본적인 비판을 내리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시편 24편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1. 신학적인 메시지

전체적으로 이 시편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언약을 갱신하려고 모였을 때의 상황 속에서 해석할 수 있음을 보았다. 우리 한국인에게 익숙한 이교도적인 예배 개념을 완전히 떠난 성경적인 예배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성경이 주는 가장 근본적인 대답은 바로 ‘언약갱신 행위가 곧 예배’라는 것이 필자의 확신이다.

필자의 주장대로 예배가 언약갱신 행위라면 이 시편은 오늘날의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따라가야 할 원래적인 순서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편을 설교할 경우의 제목은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자의 자세’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시편의 설교를 통하여 성도들이 예배에 참석하는 근본적인 자세를 가르치는 것을 하나의 확실한 목표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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