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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난)
-한 편의 수필이 이루어질 때까지-
욕망과 부자유/이향아
‘무슨 말을 써야할지 막막하다.’는 사람들을 더러 만난다.
특별하고 거창한 글을 쓰려고 하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특별한 소재가 특별한 글을 만드는 건 아니다.
나는 보통 일상생활에서 글의 소재를 얻는다. 평소에 저장해 둔 토막글 묶음에서 예금을 인출하듯이 꺼내 쓰는 것이다. 그것은 평범하고 단순한 기록이지만 각기 제목을 달고 있어서 보통의 일기와는 다르다. 그러나 길어도 5매 안팎의 그야말로 토막글이어서 수필의 종자가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 수필이 되지는 못한다.
글을 발표할 기회가 되면 나는 이들 글 묶음에서, 발표할 지면의 요구에 부합하는가, 방향이나 어조가 그 독자들의 성향과 맞는가를 고려하여 선택 첨삭한다.
<세잔느를 아십니까>라는 수필은 <찻집 바이올렛>이라는 토막글을 발판으로 이루어졌다. 다음은 토막글의 내용인데 읽기 편하게 1). 2). 3)으로 분류하였다.
1). 충장로에 나갔다가 찻집 ‘바이올렛’에 들렀다. 왼쪽 벽이 거의 끝나는 그 자리에 나지막하게 걸려있는 20호짜리 유화. 내가 바이올렛에 가는 것은 차를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그림을 보기 위해서다.
“유명한 화가는 아닌가 봐요.”
작고 희미한 작가의 사인을 들여다보며 찻집 주인이 말했다.
거기에는 따뜻하고 아기자기한 수필 한 편이 담겨 있다. 그림이 있는 이야기가 있듯이, 이야기가 있는 그림도 있구나 생각하였다. 내가 바이올렛 찻집의 그림에 특별히 끌리는 것은 인간과 인생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내가 지향하는 삶의 방향과 같기 때문일 것이다.
2). 빨래가 널린 집, 새끼 토막이 떨어져 있는 마당, 시래기를 엮어 매단 헛간, 호박고지가 마르는 장독대, 나는 이러한 생활의 모습을 사랑한다.
한쪽으로 쓸릴 듯 기울어진 부엌 의지간에 오전 열시의 햇살이 비스듬히 비치고 사람들은 일하러 논밭으로 나갔다. 부엌 아궁이에 아직 남아 있는 불씨, 흙벽에는 매주 몇 덩이 혹은 씨종자 옥수수 몇 자루가 매달리고 창호지 문은 여기저기 찢어져 있는데 토실토실한 암탉은 구구거리며 돌아다니는....이러한 풍경을 나는 좋아한다.
3). 영라가 오면 바이올렛으로 가야지. 미국 이민 20년 만에 벼르고 온다는 그를 이끌고 그림이 잘 보이는 그 구석자리에 앉아야지.
영라는 내게 편지를 보낼 때면 곧잘 마네, 모네, 세잔느, 샤갈 등의 그림을 동봉하곤 했다. 전공이 아닌데도 동서미술사를 통달하고 있던 영라. 나는 그를 통해서 세계적 화가들의 이름과 편안하게 만날 수 있었다. 그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러나 수필 <세잔느를 아십니까>에서는 위의 글 중 2)만 그대로 살렸다. 1)은 개념만 취했으며 3)은 모두 삭제했다. 생활 속에서 소재를 잡더라도 시시콜콜한 일까지 나열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2)의 위치를 수필의 절정이 거의 가라앉는 부분에 두어 전체의 초점이 흐려지지 않게 배치하였다. 수필은 서두는 다음과 같다.
'세잔느를 좋아하세요?'
'네, 그럼요.'
'그 사람의 <목매단 사람의 집>이라는 그림을 아십니까?'
'글쎄요..... 그런 그림도 있었던가요?'
첫 문장에 따라서 수필의 방향은 사뭇 달라진다. 그것은 차를 운전하면서 고속도로로 갈 것인가, 지방도로로 갈 것인가를 정하는 일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첫 문장은 작품 전체의 목적지를 의미하기도 하고 암시하기도 한다.
그런데 ‘세잔느를 좋아하세요?’로 시작한 네 개의 대화체 문장이 만족스러운 건 아니다.
수필에서의(소설도 마찬가지이다) 대화체는 적절한 긴장감으로 은유하고 상징해야 하는데 그리 성공한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위의 서두에서는 다만 <목매단 사람의 집>이 세잔느를 대변할 만한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공표하였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미술을 전공한 사람들이 세잔느는 알고 있어도 <목매단 사람의 집>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나는 수필을 다음과 같이 이어갔다.
-<목매단 사람의 집>은 그저 평범한 풍경화다. 허술한 두 채의 집을 좌우에 근경으로 두고 두 지붕 사이로 멀리 낮은 언덕이 보이는 그저 그런 그림이다.
인적은 없다. 집의 창을 반쯤 가린 몇 그루 나무들의 잎이 모두 진 걸 보면 아마 늦은 가을인가? 색깔과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노란 갈색을 띠고 있다.(중략)
목을 맨 사람이 살던 집은 한 마디로 음습한 집이다. 그가 목을 맴으로 인하여 더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 집은 거기 있는지 없는지 누구 하나 눈여겨보지 않을 소외된 집이다. 살아남은 식구들이 몇인지는 몰라도 뿔뿔이 타지로 나가 있거나 무단가출의 상태에 있어 우 울과 정적만이 농무처럼 눌어붙은 답답한 집이다.
그 집은 창이 작으니 빛도 적을 것이다. 벽이 두꺼워서 웬만한 소리는 들리지도 않을 것 같다. 목 맨 사람의 집을 지배하는 것은 질기고 오래된 나태의 분위기다. 세잔느는 이걸 높은 언덕에서 그렸는지 그림이 전체적으로 가라앉아 있다.-
그러나 전문가도 아닌 내가 어떻게 이런 걸 소상하게 알게 되었는지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 문학은 과학 이상으로 인과관계를 중시한다. 겉으로 명료하게 노출되지 않을 뿐, 행위와 사건에 대한 배후와 필연성은 ‘Reality’라는 이름으로 작품의 저변에 깔려 있어야 한다. 무슨 일을 작가 혼자 꿍꿍이속으로 은폐하거나 대강짐작으로 처리하려고 하면 작품 전체의 구조가 틀어져 버리고 의심만 끝까지 남게 된다.
-수십 년 전 나는 K출판사에서 만든 고급 아트지 4.6배판 크기의『세계미술대전집』12권을 2년 분납 조건으로 사들였다.(중략)
그것은 실로 강렬한 충동이었다. 그 충동의 근원이 바로 세잔느의 <목매단 사람의 집>이라는 그림이었다. 아니다. 그림이 아니라 제목이었다. 제목을 읽고 그림을 보고 그림을 들여다보면서 다시 제목을 연결시켰다. 나는 거기서 한 사람이 그 소중한 목숨을 버리게 되기까지의 진실하고 간곡한 고백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생각하면 아름다운 충동이었다. 충동은 뜨거운 열정이 없고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문제의 그림을 만나기까지의 경로를 밝혔다. 만나서 어떻게 되었는가. 독자가 작가보다 앞서 가서 기다릴 수가 있다. 그 기다리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작품은 매력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크다.
내가 세잔느에게 유혹 당하는 이유, 감동과 충동의 요체, 그와 나와의 동일성은 무엇인가? 그의 내면의 생각, 죽음과 삶에 대한 고뇌와 철학은 나의 그것과 어떻게 일치하는가? 나는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 나는 다시 이렇게 이어갔다.
-세잔느가 풍경화에 반드시 사람의 흔적을 그려 넣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과 생활을 중시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위대하고 신비하고 엄숙한 자연도 인간이 배제된 상태에서는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웅변하는 것이 아닐는지. (중략)
인간의 삶, 그 아름다움은 물론 고통과 슬픔까지도 사랑한 세잔느라면 목숨을 처리하여 살기를 포기한 목매단 사람의 집에 무심할 수 없었을 것이다.(중략) 죽은 사람의 집에 대한 그의 동정과 관심은 죽음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삶에 대한 애정과 성실성이며,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다. 내가 세잔느의 그림에서 취하고 싶은 것도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위에서 언급한 토막글 <찻집 바이올렛>의 2)를 삽입하였다.
찻집의 그림과 세잔느의 공통점을 강조하고 그들 둘을 알고 있으니 나도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수필은 단일한 체험으로 완성할 때도 있으나 복합적인 체험을 얽기도 한다. 단일한 체험일 때는 이해가 쉽지만 자칫하면 깊이가 얕아질 수 있다. 복합적인 것은 이중 삼중의 배후를 가지기 때문에 탄탄한 반면 구성력이 약하고 지루해질 수도 있다. 아무리 비슷한 경험이라도 대등하게 병립시키지 않는 것이 좋다.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엑스트라를 적당한 선에서 약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세잔느를 아십니까>에서, 찻집의 그림 설명을 뒤쪽으로 미룬 것은 주종관계를 고려한 것이다. 나는 효과를 위하여 순서를 여러 번 바꾸어 보기도 한다.
퇴고는 작품을 소리 내어 읽는 것으로 시작된다. 시를 낭독 하듯이 하다보면 리듬을 즐기게 된다. 아무리 견고한 논문일지라도 모든 문장은 스스로 리듬을 구비하고 있다. 읽다가 제대로 흐르지 않고 막힌다면 문장이 바르지 않은 것이다. 어려운 말은 가능한 한 쉽고 친 근한 말로 고치고 어미와 조사 접속사들이 제대로 되었는지 점검한다. 마감일에 임박하여 정신없이 끝내지 말고 일주일 전쯤 완결하여 숙성 시키는 것이 좋다.
제목은 그 글의 이름이며 간판이다. 이름이 사람의 이미지에 영향을 주는 것처럼 글에서도 그렇다. 설명적인 제목은 피하고 글을 전체적으로 아우르는 제목, 여운을 가진 제목이 좋다.
반세기 가까이 글을 쓰며 살았건만 해야 할 말들이 참으로 많다. 그 많은 말들을 어찌 다 풀어내나, 아득할 때도 있다. 그러나 무엇이 그 흐름을 막는지 모르겠다. 나는 아직도 글을 쓰는 일에서 부자유를 느낀다.
2012년 <에세이21>-
<세잔느를 아십니까?> 수필 원문
'세잔느를 좋아하세요?'
'네, 좋아합니다.'
'그 사람의 <목 매단 사람의 집>이라는 그림을 아시죠?'
'....글쎄요. 그런 그림이 있던가요?'
<목 매단 사람의 집>은 세잔느의 그림 가운데서 특별히 알려진 작품은 아닌 모양이다.
또 그의 화풍을 대변할 만한 작품도 않는 것 같다.
미술을 전공하는 사람들도 <목 매단 사람의 집>이라고 하는 세잔느의 그림을 잘 모르는 걸 보면 말이다.
<목 매단 사람의 집>은 그저 평범한 풍경화다. 허술한 두 채의 집을 좌우에 근경으로 두고 두 지붕 사이로 멀리 낮은 언덕이 보이는 그저 그런 그림이다.
인적은 없다. 집의 창을 반쯤 가린 몇 그루 나무들의 잎이 모두 진 걸 보면 아마 늦은 가을인가?색깔과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노란 갈색을 띠고 있다.
별스럽지 않은 그림, 대표작도 아니고, 미술 선생님들도 잘 모르는 것을, 내가 어떻게 이만큼 소상히 알게 되었는가.
솔직히 말해서 나는 <목 매단 사람의 집>이라는 그림 때문에 세잔느의 다른 그림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고 말해야 옳다.
수십 년 전 나는 <목 대단 사람의 집>, 다만 그 한 장의 그림을 보고 K출판사에서 만든 고급 아트지 4.6배판 크기의 [세계미술대전집] 12권을 2년 분할 월부로 사들였다. 이것은 내가 저지른 사건으로는 매우 큰 것이었으며, 전무후무한 독단이요 용기였다.
그런 고가의 책을 더구나 전공분야의 서적도 아닌 것을 구입하면서, 어째서 단 한 마디의 의논도 없었느냐고 남편은 내 즉흥적 처사를 못마당해하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또 반사적으로 내 행위의 정당함을 내세웠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다음 생각하니 그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사전에 의논하지 않은 것이 흠이긴 했지만 나는 그때 분명히 충동적으로 책을 샀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실로 강렬한 충동이었다. 그 충동의 근원이 바로 세잔느의 <목 매단 사람의 집>이었다.
아니다. 그림 그 자체가 아니라 그림의 제목이었다. 제목을 읽고 그림을 보고 그림을 들여다보면서 다시 제목을 연결시켰다.
나는 거기서 한 사람이 그 소중한 목숨을 버리게 되기까지의 진실하고 간곡한 고백을 듣는 심정으로 책을 사들였던 것이다.
생각하면 아름다운 충동이었다.
충동은 뜨거운 열정이 없고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목을 맨 사람이 살던 집은 한 마디로 음습한 집이다. 그가 목을 맴으로 인하여 더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 집은 거기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누구 하나 눈여겨 보지 않을 소외된 집이다. 살아 남은 식구들이 몇인지는 몰라도 뿔뿔이 타지로 나가 있거나 무단가출의 상태에 있어 우울과 정적만이 농무처럼 눌어붙은 답답한 집이다.
그 집은 창이 작으니 빛도 적을 것이다. 벽이 두꺼워서 왠만한 소리는 들리지도 않을 것 같다. 목 맨 사람의 집을 지배하는 것은 질기고 오래된 나태의 분위기다. 세잔느는 이걸 높은 언덕에서 그렸는지 그림이 전체적으로 가라앉아 있다.
세계 화가들의 작품을 겨우 열 두 권으로 편집해 놓은 작품집을 보고 내가 감히 무엇이라고 깊이 있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때로는 한 단면만을 보고 판단하는 문외한의 눈이 전문가가 모르는 것을 지적해 낼 수도 있다.
세잔느는 약 2년간 오베르 지방에 머물러 작품 활동을 하였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의 작품에는 오베르의 풍경화가 여럿이다. <목매단 사람의 집> 역시 그 오베르 지방의 한 모습을 그린 것이다.
세잔느가 그린 풍경화들은 어디의 풍경이든지, 오베르든 에스타크든 프로방스든, 그리고 그가 강과 바다, 나무와 바위 중 무엇을 그렸든지 간에 그 풍경화 가운데에는 반드시 원경으로든 근경으로든 '사람이 사는 집'이 있다.
풍경화에 반드시 인가를 그려 넣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 생활을 중시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위대하고 신비하고 엄숙한 자연도 인간이 배제된 상태에서는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웅변하는 것이 아닐는지.
아마 나의 추측은 들어맞을 것 같다.
인간의 삶, 그 아름다움은 물론 고통과 슬픔까지도 사랑한 세잔느라면 목숨을 처리하여 살기를 포기한 목매단 사람의 집에 자석처럼 끌리는 호기심과 동정을 느끼지 않았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수십 장의 다른 그림들을 그저 지나쳐 넘기면서도 목매단 사람의 집 앞에서 시선을 고정시키고 울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듯이 세잔느도 그러하였을 것이다.
풍성한 오베르의 자연 경관 가운데서도 꼭 자살한 사람의 집을 택하여 무엇인가를 그려내야 한다고 생각했을 세잔느.
죽은 사람의 집에 대한 그의 관심은 죽음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삶에 대한 관심인 것이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경외심과 성실성을 표현한 것이며 생명에의 옹호정신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내가 세잔느의 그림에서 취택한 것도 바로 그것이다.
나는 삶을 찬양하며 삶의 흔적을 사랑한다.
빨래가 널린 집, 새끼 토막이 떨여져 있는 마당, 시래기를 엮어 매단 헛간, 호박고지가 마르는 장독대, 나는 이러한 생활의 모습을 사랑한다.
한쪽으로 쓸릴 듯 기울어진 부엌 의지간에 오전 열시의 햇살이 비스듬히 비치고 사람들은 일하러 논밭으로 나갔는데 부엌 아궁이에 아직 남아 있는 불씨, 흙바람벽에는 매주 몇 덩이 혹은 씨종자 옥수수 몇 자루가 매달리고 창호지 문은 여기저기 찢어져 있는데 토실토실한 암탉은 구구거리며 돌아다니는....이러한 풍경을 나는 좋아한다.
물론 나와 문화권이 다른 세잔느의 그림에 이러한 것이 취급되었을 리가 없다. 애초부터 바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식탁 위에 놓인 과일 그릇, 커피 주전자, 꽃병, 함부로 구겨진 식탁보 등을 정물의 소재로 삼았다는 점, 향토에 대한 애정을 수많은 화폭에 담았다는 점, 등은 그가 예술가로서 그만큼 견실하였으며 실생활에 충실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더구나 그는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자화상들은 대부분 눈을 한쪽으로 치켜뜬 모습을 하고 있는데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면서 그리려면 그렇게 되기도 하겠지만, 이것은 어쩌면 자기 응시, 자기 비판의 눈길 같이 생각된다. 그는 가장 가까운 자기를 먼저 응시하고 혈연과 지연을 바라보면서 차츰 인류의 보편성에 호소한 화가였음에 틀림 없을 것이다. 이것은 순리의 경로이다.
어떤 이는 예술과 생활을 극력 분리시키면서 예술가가 생활에 초연하기를 요구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그가 허공에 떠서 환영과 추상으로 된 유다른 세계에 머물러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위대한 예술은 위대한 생활에서 잉태된다. 그리고 위대한 생활이란 즉, 별스럽지 않은, 자질구레하고 시시한 매일매일이 연합해서 이룬다. 타고난 목숨을 목숨으로 다스리는 일은 실로 위대하다.
<목매단 사람의 집> 앞에서 멈춘 세잔느의 발길. 그것을 그려낸 세잔느의 정성은 그가 원래 가지고 타고난 목숨에 대한 존엄성 때문이었다. 죽은 이에 대한 끓어오르는 애정 때문이었다.
첫댓글 위 글은 이향아 선생의 작품<세잔느를 아십니까?>라는 수필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알기쉽게 설명한 글입니다. 많은 부분에서 배워야할 점이 많습니다. 복합적체험과 단일한체험의 구성에서 각기 장단점, 주의점을 알게 해 주고, 퇴고의 과정과 핵심부분(청색으로 표시한 글)을 어디에 배치했는가 등등. 원본과 과정을 비교하며 읽어보시면 도움이 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