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지도'는 전국에서 가장 복음화율이 높은 전남 신안군에 위치한, 2만여 주민이 사는 섬이다
조선시대 사관이었던 김탁현 선생의 자손으로 유학자의 자존심을 내세우는 우리집은 지도 김씨들의 본향으로 달마다 7대조까지 제사를 드리는 종갓집이었다
아버지는 동네 유림회 회장을 지내셨고 도유사관 직분을 맡아 평상시에도 늘 제사를 드리고 엄격한 규칙 아래 선비로 살아가셨다
우리 어머니는 유교 신봉자인 아버지 그늘 밑에서 한마디도 못하고 늘 베틀에 앉아 길쌈을 하시거나 아버지를 대신해 소작인을 부려 농사일을 맡았다
인고의 세월을 견딘, 철저한 유교적인 아내요 며느리였다
테레사 수녀와 참 많이 닮은 우리 어머니는 집 안에서 복음을 제일 먼저 받아들이고 철야기도를 아주 많이 하신 분이다
나는 여덟살 때 어머니와 각별했던, 지도면 일대를 복음화시킨 문준경 전도사님을 통해 예수를 알게 되었고 인격적인 체험은 열여덟에 했다
일본군에 끌려갔다가 도망쳐 만주 목단강 근처의 조그만 마을에서 1여 년간 숨어 지낸 적이 있었다
그때, 이 위기 속에서 살아난다면 일생동안 백가지 전도운동으로 우리 민족을 예수 믿게 하고 좋은 나라 만들겠다고 서원했다
예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용광로처럼 활활 타올라 제일 먼저 아버지께 편지로 예수님을 소개했다
아버지께서는 당신이 직접 천자문과 명심보감 등을 읽히며 아들에게 유교의 진리를 가르치셨는데 그런 아들이 서양 문물에 빠져 서양 귀신을 믿으니 족보에서 제명하시겠다고 하시면서 완강하게 거부하셨다
아버님께 예수님을 전한 이후로 한참 동안 문중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등 어려운 점이 많았다
해방이 된후 만주에서 만난 첫 아내 인정진 사모와 결혼해서 귀국했다
6.25가 발발하자 유일하게 이승만 정권을 지지했던 아버지와 기독교인이었던 나와 아내는 죽음을 당할수 밖에 없었다
그 당시 지도면 일대에서는 2천여 명의 민간인이 공산당에게 떼죽음을 당했다
지도의 역사는 우리 민족의 비극 그 자체였다
백여명의 살인부대가 칼과 몽둥이를 들고 사람들을 묶어 산으로 끌고 갔다
10월3일 한밤중에 집에 들이닥친 그들은 나와 내 아내를 밖으로 끌어내었다
옆에서는 네 살짜리 어린 딸 은희가 잠을 자고 있었는데 순교를 각오한 아내는 입에다 손을 대고 아이가 깨지 않도록 순순히 나갔다
마당에 끌려 나가니 그들이 아버지를 마당에 무릎 꿇리고 밧줄로 묶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유학자로서 선비의 기개를 버리지 않고
‘이놈들아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 하시면서 호령하고 계셨다
동네 뒷산까지 끌려갔더니 마을 친척들을 비롯한 60여명의 사람들이 끌려 나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먼 친척 아저씨와 그 집안의 여덟 아들들이 모두 끌려나와 죽음을 맞았다
곤봉으로 사람들을 때려 신신시킨후 한꺼번에 죽창이나 일본도로 찔러 절명시켰는데 내 눈앞에서 아버지와 아내가 죽어가는 모습을 봐야 했다
아버지는 그런 분이 다시 없을 정도로 그 와중에서 호령이 대단했다
‘천도가 무섭지 않느냐’고 꾸짖으시며 죽음을 맞이하시던 아버지,
나 역시 정신없이 내리치는 몽둥이질에 쓰러졌다
여덟살 짜리 아이가 도망치다 잡혀 살려달라고 애원해도 무참히 짓밟고 검으로 찌른 그 사람을 보면서 나는 그들을 저주했다
‘하나님, 사랑하는 주님은 인류사에 모든 저주 받을 짓을 다 보셨겠지요? 지금 이순간 맷돌을 만들어 저를 포함해 우리 인간이 사는 땅과 하늘을 맞들어 멧돌질해서 없애주십시오’
그때, 의식이 가물가물해져 아무것도 분간할수 없는 그 때에 짐승의 울음소리, 마치 소가 울부짖는 듯한 절규가 들렸다
곤봉에 맞아 숨이 끊어졌다가 다시 정신이 돌아오셔서 아들인 내 이름을 간절히 부르고 계셨다
의식을 잃어가던 나는 아버지의 피 토하는 그 부르짖음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숨이 멎어가는 그 순간까지 나를 부르셨던 그 외침은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고 외쳤던 예수님의 부르짖음이었다
소월의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 만해가 찾았던 ‘님의 얼굴’이 절대자를 향한 절규이듯
십자가 고통의 극한 상황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부르셨던 예수님처럼..
천도를 철저하게 믿어 하나님은 알지 못하셨지만 그런 아버지가 죽음의 순간까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내 이름을 부르다가 부르다가 숨이 끊어지셨다
나 역시 예수님을 몰랐다면, 그 이름을, 제일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다가 죽었을 것이다
시체더미 밑에 깔려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나중에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어 살펴보니 곤봉에 맞아 입과 턱이 피범벅이 되어 다 깨어져 있었다
나는 그 때 이 세상의 모든 죄와 죽음, 고통, 저주, 절망을 짊어지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울부짖었던 예수님의 고토을 보았다
바로 그 십자가의 고통이 하나님과 만날 수 없었던 우리를 하나님과 만날수 있게 해준 것이고 이런 고통 속에서 주님이 나를 찾아오셨다
사랑하는 내 가족들의 죽음을 경험했기에 전 인류를 향한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을 함께 체험한 것이다
그렇기에 민족의 고통과 죄악조차 끌어안는 길은 우리 모두 전 민족이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아 ‘전라남도를 거룩한 도시로 만들자’하고 다짐했다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생환한후 나는 토벌군 300명과 상륙한 육군 대장 앞에 나서서 온 몸으로 저지했다
그리고 전라도지사에게 탄원서를 올려서 피해자 가족으로서 가해자들을 용서한다고 설득했다
복수는 피를 부르고 주님의 은혜를 머물게 할 수 없지만 용서는 은혜를 부르고 사랑을 피우는 법이다
지금 지도는 63%가 기독교화 되었다
전남 성시화 운동은 그렇게 씨가 터서 싹을 냈다
첫딸 은희는 본능적으로 알아서 그런지 네 살 때 죽은 엄마 이야기를 한번도 않했다
은희는 천사같은 아이였다
지금은 미국에서 교회 권사로 섬기며 잘 살고 있다
둘째 딸 신희는 아주 마음이 곱고 가녀린 꽃처럼 예뻤다
C.C.C에서 아버지를 도와 간사를 하다가 결혼하고 미국에 갔는데 미국 병원의 오진으로 뒤늦게 위암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 나와 165일동안 투병하다가 내게 슬픈 무덤을 남기고 하늘나라에 갔다
셋째 딸인 윤희는 C.C.C간사로 섬기더니 지금 C.C.C대표인 사위 박성민과 함께 미국에서 신약, 구약 박사 학위를 받고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막내 희수는 기독교 교육학을 공부하고 지금 한국 컴패션 대표인 서정인 목사와 결혼했다
컴패션의 현지 어린이 지원사역은 놀랄만큼 효과적인 열매를 거두고 있다
나는 내 딸 신희가 가혹하게 죽음의 순간까지 견디었던 극한 고통을 보면서
그리고 아버지와 첫 아내의 죽음을 보면서 정신을 놓을 만큼 감당못할 아픔을 겪었다
‘아빠, 살길이 없을까요? 살고 싶어요’
간절하게 되뇌던 딸은 죽는순간 마지막 유언기도를 했다
‘사랑하는 주님 나의 눈물과 고통과 죽음이 찬송으로 사랑과 기도로 변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딸은 말을 못하고 의식을 놓더니 하늘나라에 갔다
손이 점점 식어가면서 굳어져 갔다
그 모든 존재가 사라지는 제로점이었다
그때 나의 아버지가 숨을 넘기면서 내 이름을 불렀다는 것이나
내가 신희의 이름을 부른 것이나
첫 아내가 순교하면서 딸 은희를 불렀을 것이나
그리고 신희가 죽으면서 불렀을 아이들의 이름을 생각할 때
그 모든 고통들 앞에서 존재가 사라지는 ‘존재의 제로점’을 느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었으면 피 흘리는 구원이 없었다면 그때 그 사건이 없었다면 회복할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 섭섭함이 커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럴 때 십자가의 예수님은 소나기 같은 피를 흘리고 계셨다
내가 없어지는 존재의 제로점에서 나는 주님을 만나서 영혼 전에 택했다는 사랑도 이해되고
아버지의 학살과 첫 아내의 순교가 이해되고 소중한 보물 같은 내 딸아이의 죽음도 용서가 되었다
그리고 영혼에 대한 간절함이 더해졌다
지금 나의 아내 전효심 사모는 나주의 부잣집에서 유복하게 자랐는데 천사처럼 평생 내 뒤치다꺼리하면서 나를 돌보았다
나를 미국 보내서 공부시키고 내가 58년 한국대학생 선교회 (K.C.C.C)를 창설한후 ‘선교한국’의 거대한 비전을 갖고 영혼구원 사역에 힘쓸 때 약국일 하며 헌신적으로 가정을 돌보는 한편 선교재정을 뒷바라지 했다
오랜시간동안 인고하고 불평없이 헌신해준 아내가 더 없이 고맙고 감사하다
살면서 혼자 감당해야 했던 일들도 많았을 텐데, 손을 잡고 고맙다고 말을 할라치면 쑥스러워하며 ‘뭐 새삼스럽게 그러냐’며 ‘나 바빠요!’하고는 도망가 버린다
가정에서 나온 잠재적 에너지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핵이 되듯이
아내는 지금의 C.C.C가 태동하고 내가 헌신한 사역에 전념한수 있도록 에너지가 되었다
지금의 아내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로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역시 아버지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선교한국을 향한 비전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님이 천도님이라고 불렀던 하나님, 아버지가 순국까지 하셨으니 나중에 주님 다시 오실 때, 정상참작 하시지 않을까?
로마서 2장에 나오는 의로운 심판을 기대해본다
-김준곤 한국 C.C.C총재/월간 아버지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