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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계형님이 지으신 제문-2
<운계형님의 제문 중 경산형수님께 드린 우리 삼형제의 제문의 초안을 올려본다. 특히 어린 나이에 시집오셔 가혹한 어려움을 겪으신 우리 경산형수님의 시련의 극복담을 교훈삼아 우리 모두는 어려운 세파를 이겨나가도록 하자.
다시 한 번 우리 집을 지키셨고 희생하신 경산형수님의 은혜를 잊지 말자.>
경산형수님께 올린 우리 삼형제의 제문
유세차 기사 이월 정묘삭 초이일 무진(維歲次 己巳 二月 丁卯朔 初 二日 戊辰)은 우리 백형수님 유인경주최씨 기상지일이다.
전일저녁 정묘 불초시동생들 오천정병욱, 정병극, 정병묵 등은 조촐한 상을 차려 형수님의 영전에 삼가재배하오며 소회의 일단을 피력할까 하나이다.
오호라 형수님요 천지신명의 불우인지 조물주의 시기인지
작년 내일 뜻밖에도 유명을 달리한지 어언간 일 년 되어
탈상을 맞이하니 불우한 이 시동생들 비분감개 무량이네
인자하신 우리형수 명문대가 경주최씨 오남매 막내딸로
금지오엽 곱게 자라 십구세의 어린나이 우리 집에 시집오셔
층층시하 다식구의 칠남매 맞며리로 시집살이 하실적에
피땀 흘린 그 고생 그 어디에 비기리오
일제침략 말기이라 농사지어 공출대고 가뭄으로 흉년들어
식량난 겪을 적에 봄이 되면 보리고개 부족식량 보태려고
모주님과 고부끼리 풋보리 뜯어다가 찐보리 마련하고
뒤귀미로 미끼로 쑥 뜯고 나물하고 초가을 임박하면
보리양식 떨러질 때 보리빵아 죽을 쑤고 마당지로 뿍당골로
꿀밤 따서 양식하고 풋나락 잡아다가 찐쌀하여 죽을 쑤어
끼니를 이었지요 낮이면 방아 찍고 밤이면 바느질로
잠도 실컷 못자지요 우리형님 일본군대 징집되어 가신 후에
차디찬 우리 멀방 독수공방 보낸 일 하루 이틀 아니지요.
조국의 해방으로 우리 형님 귀향하여 그 기쁨도 잠시이고
좌우익 싸움과 육이오동란 터저 술남으로 섬들로
피란살이 그 고생들 공산군 후퇴하고 고향수복 하였건만
비행기 폭격으로 우리 집 불에 타고 원산댁 섭포에서
할머니 작고하고 삼년상 집상할 때 상식상 차려들고
앞시내 징금다리 건너 인구의 빈소까지 들러다 날랐던 일.
장질아 태기가 폭발물 터주어서 중상 입어 애 태운일
그 고생 말도 마소.
우리 형님 영천군청 영전되어 가신 후에 전실이가 시중들다
몇 년 후 형수님이 따라가셨건만 무슨 놈의 운수인지
우리 엄마 작고하고 청천벽력 같이 우리 형님 포병하여
삼십육세 일기로써 불귀의 객이 되어 천붕지통(天崩之痛) 금할손가
이따라 우리 주부 작고를 하시오니 일당에 삼빈(三殯)이라
고금에 드문 일로 온 세상이 놀랐지요 이년 후 중형마저
별세를 하고 나니 단란하고 번창하던 우리 가정 폐가되니
이무슨 변고이고 기억조차 하기싫네.
이 풍파 겪은 후에 복잡한 가정정리 혼자서 맡아하고
오남매 어린자식 양육하고 교육할 때 그 정성 그 고생
지필로 표현하리 그 고생 하실 적에 불우한 시동생들
직장생활 하느라고 너무나도 무관심하여 섭섭하고 불만한 점
한두 가지 아니지요 그러나 넓은 도량 항상 관대 하셨지요.
우리 질아 오남매들 모두가 머리 좋고 행실이 선량하여
빈곤한 가정형편 대학도 못 갔으나 형수님이 가정교육
철두철미 하셨기에 모두가 착실하고 효성우애 남의 칭송
대단하니 듣기 좋고 자랑되네.
막네둥이 우석이의 좋은 배필 결혼시켜 살림만 차려주면
모든 고생 끝난다고 항상 말씀하시다가 한편으로 기쁘시고
한편으로 걱정되어 우석이의 새살림집 가옥수리 하신다고
자기 건강 불고하고 너무 과로 하셨지요 몇 년 전 부착하신
인공심장박동기가 고장이 나셨는지 영문도 모르는 채
청천의 벽력같이 졸지에 서거소식 이 무슨 병괴이며
이무슨 운명인고 원통하다 우리 형수 망극하다 우리형수
시집온 후 사십여년 고생만하시다가 이젠 고생 끝이 나고
편할 때가 되었는데 만고효자 질아들이 시탕한번 못해보고
불우한 시동생께 유언 한마다 없으시고 북망산천가실일이
어이 그리 바쁘시어 그렇게도 야속하게 어이홀로 떠나시나.
몇 달 전 셋째동서 우연히 병을 얻어 입원하여 위중할 때
우리 동서 죽으며는 우리시동생 어떡하노 그동서 살릴려고
안절부절 동분서주 백수십리 나드시며 무슨 묘책 있나하며
조약하고 굿도하고 절에 가서 기도하니 지성이면 감천이라
그 동서 살려놓고 불과 몇 달 지난 후에 자기가 먼저 가시니
하늘도 무심하며 신명도 야속하네.
오호통재 형수님요. 맞형수는 부모 같다 옛말이 있지마는
우리 형수 모든 점이 어머니에 질배 없어 무슨 일 부딪히면
아지매요 우야끼요 항상 물어 해결하고 태산같이 믿었는데
그야말로 우리집안 기둥 노릇하셨는데 이제는 어려운 일
누구에게 수의할고 아지매요 아지매요 우리들 어릴 적에
너무나 철부지라 형수 은혜 몰랐지만 이젠 우리 철이 들어
만고 없는 우리 형수 부모처럼 심기려고 굳게 맹세 하였는데
모든 것이 허사되니 원통하고 애닯도다 그래도 일 년 동안
빈소에서나 뵙건만 내일이면 탈상하니 이제는 영영하직
마당지산 진달래는 봄이 되며는 다시피고 강남 갔던 재비들도
내년 봄에 다시 오건만 구천가신 우리 형수 언제 다시 돌아올꼬
인자하신 그 모습 언제다시 상면하며 다정하신 그 목소리
언제 다시 들어 볼꼬 형수님요 형수님요
오가 형편 생각할 때 맞족하 태기네도 다식구에 어렵지만
모두가 건강하고 명화 금연 문경이도 모두가 공부 잘해
금지옥엽 손자 현수 우리 할매 어디갔노 찾을 때는 딱하지만
재롱부리며 잘도 크고. 둘째조카 형기네도 희망해 포항으로
전근되어 근무하고 영록이는 2학년 상록이는 일학년
학교에 잘 다니며. 셋째조카 윤기네도 집도 사고 땅도 사고
재롱둥이 현석이도 유치원 잘 다니고. 막네 족하 우석이도
형수님의 소원대로 좋은 색씨 장가들어 옥동자를 낳아 쓰며
사업도 잘도 되며. 하나 질녀 전실이도 그렇게도 기다리던
옥동자를 낳았으며 걱정하던 전서방의 건강도 좋아져서
재미있게 잘도 살며. 시동생 족하들도 모두들 번창하고
오매불망 애태우던 전서방댁 잘도 사니 남은 식구 걱정은
추호도 하자 말고 고이 고이 잠드소서.
오호통재 형수님요 구천에 가시거든 우리 형님 다시 만나
생시에 못다 한 행복 마음껏 누리시며 우리부모 잘 모시고
고이고이 잠드소서 할말은 태산 같아 밤 세워도 부족하나
이것으로 줄입니다 오호통재 애재상 향(嗚呼痛哉 哀哉尙 饗)
첫댓글 숙부님 쓰신 제문을 읽으니 눈물이 납니다
고생만 하시다 좋은 세상 못보시고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 일생이 너무 불쌍하고
살아계실 때 늘 큰집 걱정하시고 저희들을 극진히 살펴주신 숙부님이 돌아가시고
안계신다고 생각하니 정말 가슴아픕니다.
지금이라도 대구에 전화드리면 "형기가" 하시며 반가워 하실 건데...
살아 계실 때 좀 더 효도 할걸 하는 후회만 앞섭니다.
좋은 자료 찾아올려 주시 인계숙부님 정말 감사합니다
雲溪兄任!
존경 합니다
저희 집안 실록을 재문으로 담아내신 운계형님의 정성이 너무나 생생하고 현실감이 나는 사료 입니다,
제가 5살때 시집오셔서 없는 살림에 갖은 고생 하셨지요
무서운 시조모밑에 시부모내외까지 식구는 많아 상차림이 마루에 길게 뻗어 늘 부족한 식량에
없는 반찬에 얼마나 상차림이 힘드셨을까,
부억에 나무는 왜 생나무로 연기가 부억 가득 사람잡는 굴이였지요
남들은 미리미리 나무를 많이 샇아 마른 나무로 밥을 하는데(그시절 제 느낌이였습니다),
6.25전쟁후 불탄 집을 원망하며 원산댁 아래체에 새를 살면서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먹을꺼리가 적어 큰형님께서 먹거리공급에 애태우시고,
아침저녁 상석을 아버님의 령으로 우리집에서 상을 들고 강을건너 저근댁에 차려진 빈소에 가서 상석을 올리는 일을
그 추운 겨울에도 형수님과 번갈아가며 다닌기억,
지난일들 지금 필설로 표현 하기가 너무 가슴아프고 우리집안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기까지
모두가 고생하셨지요
저에겐 큰형수님은 어머니역활을 하여 주셨고
막내시동생 멀리 타향가서 고생한다고 안타까워 하시던 일이 생생하게 기억됩니다
조금만 더 살아 계셨더라면 형수께 효도하고 손잡고 동서들과 여행하며 즐거움을 함께 하셨을텐데,
운계형님
부디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형님 형수님들 만나시어
즐겁고 행복한 시간 보내시길 기원 드립니다.
없는 살림에 큰 아버님도 일찍 돌아가셔서 너무 고생하신 큰 엄마.ㅠㅠ 방학 때마다 큰 집에 가서 사촌들과 즐겁게 지낸 일, 잊지 못하겠네요~이 글을 보니 더욱 그립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우째 이리 가슴이 아리도록 잘 표현 하셨을까요?
글을 보니 더욱 아버지가 뵙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계실 때 잘해드려야 하는데
후회가 밀려옵니다.
이렇게 편집을 잘해 주셔서 새삼 추억을 되새겨주신 작은 아버님 감사드립니다.
부디 두 분 작은 아버님 건강 조심하셔서 오래 우리 곁에 계셔 주십시요~~♥
저희 할머니께서 고생 많으셨다는 건 알고있었지만 이렇게 자세히 알지 못했었습니다.
앨범에 할머니와 함께 민속촌에서 찍은 사진을 꺼내보았습니다.
저 초등학교 1학년때였는데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는데, 제 기억속에 저를 항상 이뻐해 주셨었습니다.
오늘 따라 할머니가 많이 보고싶습니다.
작은 할아버지께서 쓰신 제문 잘 보았습니다.
글을 보니 할머니께서 고생하시는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너무 어릴때 돌아가셔서 제대로 효도도 못해서.. 할머니가 보고 싶네요
저의 마음이 흔들릴까 적은아버지 제문은 지금도 다 읽지 안습니다. 어머니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또 그 시절을 회상하면 눈물이 날것 같아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