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한강 나루터의 하나로 삼개라고 부르던 곳이며, 이를 한자로 옮겨 마(麻 = 삼마, 字) 포(浦 = 개포 字)라 하였다, 조선 초기부터 대부분 한성부에 속한 성외 지역이었다, 1944년 10월 서대문구에서 나누어져 마포구가 신설되면서 용산구의 일부를 병합한곳이며 서울의 서남부 저지대(低地帶)에 위치하여 과거에는 장마만 지면 물난리를 겪어 온 곳 이기도하나, 한강의 강구(江口)로서 6, 25 전까지만 하여도 서해(西海)의 어선(漁船)들이 출입하여 결빙(結氷)을 제외 하고는 새우젓 배들이 활기를 띠었던 곳이지만 휴전선 관계로 배가 들어오지 못하게 되면서부터 항구로서의 구실을 상실하고 말았다,
@ 유래 동명 순서
(1) 1)공덕동 2)구수동 3)노고산동 4)당인동 @ 양화나루
(2) 5)대흥동 6)도화동 7)동교동 8)서교동
(3) 9)마포동 10)망원동 @ 망원정 11)상수동 12)상암동
(4) 13)성산동 14)신공덕동 15)신수동 16)신정동
(5) 17)아현동 18)연남동 19)염리동 20)용강동
(6) 21)중 동 22)창전동 @ 와우산 23)토정동 24)하중동
(7) 25)합정동 @ 절두산 26)현석동
① 공덕동(孔德洞) 구수동(舊水洞) 노고산동(老姑山洞) 당인동(唐人洞)
☞ 공덕동은 1913년 고양군 용강면(龍江面)에 속하였다가 1936년 경성부의 관할구역을 확장하면서 고양군 용강면으로 되어있던 지금의 마포구의 대부분이 다시 경성부 구역으로 되었으며 1944년 구제도를 신설하면서 마포구 공덕동이 되었다, 이곳은 만리재, 아현(阿峴), 대현(大峴) 등의 고갯마루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내려간 언덕지대이다, 그러므로 큰 언덕이 큰덕로 부르던 것이 한자로 바꾸면서 공덕(孔德)으로 변한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이 한흥시장(漢興市場)에서 길 건너 맞은편 염리동쪽으로 들어가는 길에 푯돌 즉,, 표석이 서서 푯돌배기로 불리워지고 앞 푯돌배기 삼거리로 불리워졌는데 여기에 섰던 표석은 조선말기 고종의 친부인 흥선대원군이 거처하던 아소정(我笑亭)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표시 한 것이다,
☞ 구수동은 신수동과 함께 한성부에 속하게 된 것이 효종9년(1658)에서 현종9년(1688)사이의 10년간에 이루어 졌다고『조선시대도시사회연구』에 추측하고 있는 만큼 그 전에는 성저 10 리대로 되어 있었다, 수선전도에는 수철리(水鐵里)로 기재되어 있음에 비추어 신수동과 결합되어 호칭된 것이라고 추측되며 영조 때에 반포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처음으로 서부 서강방 성외 구수철리계라고 나타난다, 1910년 한성부가 경성부로 되어 경기도에 속하게 되었고 그 이듬해 경성부 행정구역 개편으로 구수동은 5부 36방에서 제외되어 고양군 서강면의 구수철리로 되었다가 다시 1914년 고양군 용강면 구수철리로 호칭 되었다, 1936년 조선총독부가 경성부의 관할구역을 확정 변경할 때 다시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구수정이라고, 했고, 1944년 마포구가 신설되었고, 1946년 일제식 동명을 바뀌 때 구수동이 되어 현재에 이룬다,
신수동과 경계되는 곳에 붉은 언덕(紅峴)마을이라고 하는 동네가 있었다, 이름의 유래는 이 근처의 흙이 몹시 붉었다 하여 불린 것이며 새우무거리마을은 새로 우물을 팠다하여 붙인 이름이다, 서강교는 신수동으로 넘어가는 나지막한 고개를 말한다,
☞노고산동과 대흥동 경계에 있는 높이 106m의 산 서강대학교의 뒷산이 되며 옛날 한양의 서쪽 끝에 있는 산이므로 한미산(漢尾山)이라 하던 것이 할미산으로 불려 지다가 한자로 표기하면서 노고산(老姑山)이 되었다고 한다, 옛 지도에는 노고산(老古山)으로 표기된 경우가 많아 우리말로 바뀔 때 노고산동(老古山洞)으로 하였다 이곳에 노고산 공원이 있다, 한일합병 후 노고산동은 1911년 경성부 5부 36방에서 제외되어 8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노고산동은 다시 경기도에 편입 시켜 고양군 연희면 노고산리라 부르게 되었다, 1936년 조선총독부는 경성부의 관할구역을 확장 변경할 때 다시 경성부에 편입되어 노고산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1943년 서대문구 관할로 되었다가 1964년 마포구에 편입되었다,
노고산에서 예전부터 약숙터가 유명하였는데 특히 눈병 피부병 속병에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노고산에서 신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름으로 분(紛)고개가 있는데 이곳 흙이 가루처럼 고운 까닭에 추수(秋收) 때 벼를 찧으면 이 흙을 섞어 넣어 쉽게 찧었다고 한다, 문지울 고개는 대흥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름으로 비가 오면 땅이 몹시 질었다고 한다,
신촌 노타리 부근은 일제 때 까지만 해도 잔돌배기(細石里)라고 하기도 하고 또는 주막거리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그 까닭은 서소문 쪽에서 아현고개를 넘어오면 자잘한 돌이 많이 있다고 해서 붙인 이름으로 일제가 김포공항까지 군용도로를 만들기 위해 겨우 지개 길 정도에 불과한 길을 확장해서 개통했다고 한다,
☞당인동은 임진왜란 당시 이 일대에서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이끄는 왜군과 이여송(李如松)의 명나라 군대가 진(陣)을 치고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중국을 당(唐)이라 하므로 이곳을 당말이라 하였으며 나중에 당인동이 되었다, 당인리 한강변에 대규모의 당인리 화력발전소가 있어 쉬는 날 없이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서울 시내에 전력을 공급하고 있다, 또한 당인리 발전소에서 서남쪽의 잠두봉 아래로 내려가면 양화나루가 있다, 이곳 양화진(楊花津)은 송파진(松坡津), 한강진(漢江津), 한남진(漢南津)과 더불어 삼진(三津)의 하나였으니 진두(津頭)를 두어 교통의 편의(便宜)을 주었다,
※ 양화나루 또한 양화나루에는 갑신정변 때 삼일천하로 실패하자 김옥균(金玉均)은 일본을 거쳐 상해로 피신하다가 홍종우(洪鍾宇)에게 피살되어 청국 배에 김옥균 시신(屍身)과 홍종우와 합께 양화나루에 도착하여 김옥균은 무릎굻리고 목을 처 효수(梟首)를 하고 능지처참(陵遲處斬)한 모습으로 양화나루 백사장에 3일간 공개되고, 홍종우는 고종황제의 지시로 과거를 보게 하여 급제시켜 고 관직에 등용(登庸)하였다가 나중에는 제주목사가 되었다,
② 대흥동(大興洞) 도화동(桃花洞) 동교동(東橋洞) 서교동(西橋洞)
☞ 대흥동은 인접한 용강동과 함께 한성부 서부 용산방에 속한 곳으로 독, “즉,, 옹기를 구어 파는 곳이었으므로 옹리 또는 독마을이라 불렀던 것이다, 이것이 일제에 잘못 이해되어 독막이 동막(東幕)으로 변전(變轉)되었으며 이때 옹리상계(契)는 용강동(일제 때는 동막상리), 옹리하게는 대흥동(일제 때는 동막하리)이 되었다, 노고산 남쪽에 위치한 대흥동은 답중동(畓中洞), 논우물거리, 불당재, 차돌배기, 큰우물거리, 박석재 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그중 불당재 한 가지만 설명하면, 지금 대흥동 416번지 동산에 고려 말의 최영(崔瑩)장군 사당을 모신 당집이 있었으므로 이곳을 불당재라 하였다, 불당재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과 7월에 최영 장군 영정을 모서 놓고 제사를 드렸는데. 그 이유는 이 마을에 화재가 잦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사당을 모신 후에는 불이 나지 않았으므로 마을에서 몹시 위하였는데 이곳의 불당은 불(弗) 아닌 불(火)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기도 한다,
☞ 도화동은 동쪽은 용산구 도원동 서쪽은 마포구 용강동, 대흥동, 남쪽은 용산구 청암동 북쪽은 공덕, 신공덕, 염리동과 접해 있다, 옛날 이곳에는 복숭아나무가 많고 봄철이면 복사꽃이 피어 경치가 좋은 곳이었다, 복사골 또는 복사꿀이라 부르던 곳이므로 도화동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서부 용산방 마포계 였다, 1911년 경성부 용산면에 속하였고 1914년에는 도하정이라 하였다, 1943년 용산구에 편입되었고 1944년 마포구로 관할이 바뀌었으며 1946년 도화동으로 되었다, 법정동인 이 행정동은 동화1, 2동으로 구분 되어있다,
☞ 동교동과 서교동은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의통방(義通坊) 세교리계(細橋里契) ‘’즉,, 잔다리라고 부르던 곳의 동쪽과 서쪽에 위치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 일대는 고종 때 북부 연희방 세교리 1, 2계(契)였으며 1936년 4월 1일 경성부 행정구역을 확장할 때 동세교리를 동교정(東橋町)으로 서세교리는 서교정으로 바꾸었다, 해방 후 서울시에서 행정구역과 동명을 개편할 때 지금의 동교동과 서교동으로 고쳤으나 동교동은 옛날 윗잔다리, 서교동은 아랫잔다리 일대가 된 것이다, 그런데 동교동과 서교동의 연원이 된 잔다리 가 어떤 다리 형태였는지는 구체적으로 확인된 바가 없다,
그 다리는 가늘게 놓인 다리이거나 혹은 토막토막 끊어진 징검다리 형태로 놓인 여러 개의 작은 다리였는지도 모른다, 동교동의 서교초등학교 앞에는
‘’강섬샘,, 이라는 못이 있었는데 한강과 맞뜷려 있다고 전해지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복개되어 알 길이 없다,
☞ 서교동의 새답바위는 도당물위에 있는 바위인데 냇가에 있어서 아낙네들이 빨래하였던 곳이라고 하나 흔적도 없다, 그리고 여희궁과 잔다리 사이의 들판을 잔다리 들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그 일대가 모두 주택가가 되었다,
③ 마포동(麻浦洞) 망원동(望遠洞) 상수동(上水洞) 상암동(上岩洞)
☞ 마포동은 그전에 한강변에서 해상운송에 많이 이용되는 5개소(오강(五江) 곧 뚝섬, 노량, 용산, 마포, 양화진 중 이곳은 일명 삼개라 하여 붐볐던 곳으로 삼=마(麻), 개=포(浦)로 의역되어 마포라 하였다,
☞ 망원동의 동명은 한강변의 명소 망원정(望遠亭)이 있었던 데에서 유래된다, 처음 한성 5부중 한성부 북부 성밖의 연희방에 속하였는데 고종 초기에 편찬된 육조조례에 보면 망원정 1. 2, 3계(契)가 나오는 것으로써 그 지역도 퍽 넓었던 것을 짐작 할 수 있다, 또 처음에는 지역 명칭도 정(亭)자 이름 그대로 망원정(望遠亭) 또는 망원정동으로 부르던 것이 후에 와서 정자가 생략되어 망원동으로 호칭 된 것으로 보여 진다, 일제 감정통치가 시행될 때는 성외 8면 중 연희면의 망원동으로 되었으며 1913년 경성부의 주위지역을 경기도 고양군 관할로 옮겨 망원동은 고양군의 연희면 망원리로 편입되었다, 1936년 다시 경성부로 편입되어 일제식 동명의 망원정으로 불리어지고 1944년 마포구의 망원정으로 되었다가 1946년 일제식 명칭 정(町)을 동으로 개정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망원동은 양화도(楊花渡)에서 멀지 않은 한강 동안(東岸)에 위치하였는데 지난 1925년 을축년(乙丑年) 홍수의 피해와 연안도로의 공사 등으로 인하여 원형을 찾아볼 수 없다, 망원동은 강변 저평(低平)한 지대인 만큼 지금도 모래내, 모래밭들 물춤발들 바불둑돌 방울내 새풀리뜰 등의 이름들이 전해지며 또 불당이 있었다는 불당골 벽돌을 굽던 마을이다, 벽돌막 새로생긴 마을이라는 의미의 새 말등 마을 이름도 있다, 그중 모래내는 신망원동이라고 하는데 그 것은 장충동의 철거민들에 의해 새로 이루어진 마원동의 마을을 의미하는 것이다,
※ 망원정(望遠亭) 한강변에 위치한 망원동은 옛날 이곳에 망원정(望遠亭)이라는 정자가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이 정자는 지금은 없어진 지 오래 되었으나 양화대교가 놓여 있는 부근 망원동 137번지에 있었다, 태종의 둘째 아들이자 세조의 형님인 효령대군이 양화도의 동쪽에 지은 정자로서 처음에는 정자의 이름이 없었다, 세종 1425년 5월 이곳 형의 별장에 거동하여 정자에 올라 군사들이 훈련하는 것을 구경하면서 술자리를 마련하였는데, 마침 농사에 알맞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하더니 온 들판을 흡족하게 적셔주므로 크게 기뻐한 나머지 정자 이름을 희우정(喜雨亭)이라 부르게 하였다,
또한 이곳은 성종 때에도 임금의 형인 월산대군이 소유가 되었는데 성종이 이곳에 나와 군사들의 수전(水戰)연습을 구경하다가 산수간에 먼 경치가 잘 바라다 보인다는 뜻에서 정자를 더 크게 짓고 이름을 망원정으로 바꾸었다가 그 다음에 등극한 연산군은 망원정에 올라 잔치를 배풀다가 정자가 협소하다 하여 철거하고 1 천 명이 올라앉을 만큼 큰 누각을 짓게 하였다,
왕의 숙모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가 칼로 자기 하문(下門)을 찔러 자살하였는데 이것은 연산군이 박씨를 겁탈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박씨 부인의 친정동생인 박원정은 원통하게 죽은 누님의 원수를 갚기 위해 중종반정에 적극 가담했다는 것이다,
☞ 상수동과 하수동은 조선 영조 때 기록에 의하면 한성부 서부 서강방(西江坊)(성밖) 수일리계(水溢里契)에 속한 곳이었다, 1910년 일제의 강점 이후 경성부 축소 정책에 따라 이곳은 서강면 상수일리와 하수일리가 되었으며 1936년 4월 1일 경성부 관할구역의 확장, 변경 때 다시 경성부에 편입되고 이 일대는 상수일정과 하수일정이 된 곳이다,
이 일대는 옛 이름대로라면 조선시대에 한강변 물이 넘친 적이 있으므로 일(溢) 이라 글자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일제가 지명을 임의로 바꾸면서 수일이란 이름이 곧 물이 넘치다는 뜻이며 세 글자로 된 긴 이름인데도 이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 점이다, 해방 후 1946년 10월 1일 서울의 왜식 동명 개정 때 상수동과 하수동으로 바뀐 것이다,
상수동 930번지에는 왜우물 또는 쌍우물이라고 부르는 우물이 있는데 이는 임진왜란 때 왜적들이 판 우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 하수동의 한강 쪽 아래 마을은 당인동이라고 하며 해방 후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온 당인리 화력발전소 가 있는 곳이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가 주둔했던 곳이며 그 당시 만리동에 진을 친 왜적 소서행장의 군대와 대치했던 곳
하수동 8번지에 있는 당우물 또는 활터께 우물 은 임진왜란 후인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대치하고 있을 때 판 우물이라고 한다, 이곳에도 역사는 되풀이 되는 듯 중국과 일본 군대가 이 나라 땅 한 곳에서도 두 번이나 대치한 사실이 지명으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이 당우물과 왜우물, 그리고 인근 창전동의 신당우물을 그전에는 서강 3대 우물로 꼽기도 하였다,
☞ 상암동은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연희방의 수상리와 휴암리(休岩里)가 있던 곳이다, 수상리는 물치, 물위치가 한자로 표시된 것이고 휴암리는 부엉바위골을 바꿔 쓴 것이다, 수상리의 상(上)자와 휴암리의 암(岩)자를 써서 상암동이 된 것이다, 이곳은 성밖의 지역으로 한때 은평출장소에 속할 때가 있었다, 상암동 426번지에 이르는 난지도(蘭芝島)는 쓰레기를 매립하여 하늘공원과 평화공원을 조성하고 한강변에는 난지한강공원 세천에는 난지천공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2002년 6월에는 월드컵 경기장에서 2002년 월드컵 축기대회를 개최하였다,
④ 성산동(城山洞) 신공덕동(新孔德洞) 신수동(新水洞) 신정동 (新井洞)
☞ 성산동은 부근의 산이 성(城)과 같이 둘러 있으므로 성뫼(城山)라고 불리던 곳이다, 자연 부락으로는 묘꼴(성산2교를 지나 한양성심병원 뒤 주택이 있는 곳) 무리울(성산2동사무소 부근), 풀무골(시영아파트∼불광천 건너 상암동으로 가는 길목) 안골 새말(성산의원 마을 끝에는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해서) 등을 합하여 성산동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서 연희방에 속한 곳이다, 일제 때 고양군에 있다가 해방 후 서대문구에 속한 때가 있었다, 1975년 10월에 마포구에 속하게 되었다, 또한 무리울(武夷洞)뒤에 있는 고개는 인조 때 김자점(金自點)이 풀무꿀에서 병기를 만들며 이 고개에 보초를 세우고 서울 소식을 염탐 했으므로 소식고개라 불렀다고 한다, 성산동1동과 2동에 각각 성산 제1공원 성산 제2공원이 설치되어 있다,
☞ 신공덕동은 1914년 4월 1일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계를 여러 마을로 나누면서 공덕리에 인접한 지역이므로 신공덕동이라 하였다,
☞ 신수동은 구수동과 마찬가지로 나라에 무쇠솥이나 농기구를 만들어 바치던 공장이 있어 무수막 또는 무쇠막이라 하던 것을 한자로 바꾸어 수철리(水鐵里)라 하였으며 그 일대의 새로 만든 마을이라 하여 신수동이라 하였다,
☞ 신정동은 한강과 직접 면하고 있는 지역으로 조선시대에 세금을 받아 드리는 공세터가 있었다, 새우물을 뜻하는 신정(新井)의 내력(來歷)은 자세히 전(傳)해지지 않는다,
⑤ 아현동(阿峴洞) 연남동(延南洞) 염리동(鹽里洞) 용강동(龍江洞)
☞ 아현동은 우리말로 애우개라 부르던 곳으로 애우개는 애오개를 뜻한다, 또 애오개는 만리재와 대현(大峴) 사이의 작은 고개, 작은 아이 같은 고개라는 뜻으로 보고 있다, 일설에는 애고개를 넘어서 어린아이들의 시체를 묻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이곳 283번지에는 옛 서활인서터의 표석이 서있다
☞ 연남동은 1975년 서울시 행정구역 개정에 따라 새로 생긴 동이다, 당시 서대문구 연희동의 일부를 마포구에 붙이면서, 따라 동명을 연희동의 남쪽에 해당되므로 연남동이라 하였다,
☞ 염리동은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용강리였던 것이 1936년 4월 1일 경성부의 관할구역 확장 변경으로 경성부에 편입 염리정이라 하였다, 1944년 10월 23일 마포구가 8번째로 신설되어 마포구 염리정으로 되었다, 이곳은 옛날 소금공급 하던 곳으로 소금배가 드나들고 소금전이 섰으며 소금장수들이 많이 살았다, 염리동을 이룬 마을로는 느트나무배기, 싸룡대 개바위 마루보시사택 고추밭머리등이 있다, 느트나무배기는 65 ~ 67번지 일대, 싸룡대는 개바위 주변에 있던 마을인데 용두머리가 하늘로 올라간 후 그 자리에 빈터가 생겼으므로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구획정리가 되어 있는 지역으로 27 ∼ 44번지 일대이다,
개바위는 바로 쌍룡산 남쪽끝 27 ∼ 88번지에 있는 개처럼 생긴 바위, 철종 때 이곳에 인색한 부자가 자식 없는 대신 큰개를 수십 년 길렀는데 어는 날 갑자기 없어져 찾던 중 동네입구 쌍룡산 남쪽에 자신의 개와 비슷한 모습을 한 바위를 발견하고 너무나 반가워 이름을 부르면 달려가자 컹컹 짓기 시작 하면서 반가워했다, 자세히 보니 개가 아니고 바위로 변한 개를 보는 순간 모든 것이 덧없을 알고 재물을 풀어 동네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한편 자신은 정처 없이 유람을 떠났다,
150번지 동도중고등학교 구내에 있었던 흥선대원군의 별장 아소정(我笑亭)은 아흔 아홉칸으로 1893년부터 이곳에 대원군이 거주하였으며 1902년 2월 그가 세상을 떠나자 아소정 울에 산소를 썼으므로 일대를 한때 국태공원(國太公園)이라 하였다, 대원군의 묘(墓)는 파주로 옮겨갔다,
☞ 용강동은 1913년에는 성외(城外) 지역의 대부분을 경성부에서 때어 고양군에 붙였으며, 이어 다시 종전의 용산면과 연희면의 일부 및 서강면을 합하여 용산면의 龍자와 서강면의 江자를 붙여 고양군의 용강면으로 하니 이것이 용강이란 지명의 출발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곳의 동리로 동막상리(東幕上里)로 쓰였는데 그 것은 용산선 즉 용산에서 당인리로 나가는 철도의 간이역인 동막역(東幕驛)이 있었던 데서 유래 된 것이다,
1936년 서울의 구역 확장에 따라 동막상리가 용강정, 동막하리가 대흥정으로 바뀌게 되었다, 1944년 서대문구의 일부와 용산구의 일부를 합하여 마포구로 설치함에 따라 마포구 용강정으로 되었으며 해방 후 일재식 동명의 개정과 함께 용강동으로 고쳐 오늘에 이른다,
⑥ 중동(中洞) 창전동(倉前洞) 토정동(土亭洞) 하중동(賀中洞)
☞ 중동은 여러 마을 중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하여 가운데 마을, 간테말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서 연희방에 속 하였다, 1911년 경성부 성외 8면 중 연희면의 한 마을로 되었으며 1913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의 중리(中里)로 되니 이 때 부터 해방 후 1949년 서울시로 다시 편입 될 때 까지 중동은 인근의 여러 동리와 하께 서울 인접지역의 한 시골마을로 전락되어있었다 1949년 서대문구에 편입된 후 한때 은평출장소에 속 하였다가 1975년 10월에 마포구에 속하였다,
☞ 창전동은 한일 합병 후 일제가 한성부를 경성부로 고치고 경기도에 예속 시키면서 1911년 창전동은 고양군 서강면 창전리라 칭하였다, 1936년 서울에 편입되면서 창전정이라고 부르다가 1944년 서대문구에서 마포구로 속하게 되었고 1946년 찬정동이라 하였다, 창전동이란 동명은 조선시대에 와우산(臥牛山) 동쪽 기슭에 공미(貢米)를 쌓아 둔 광흥창(廣興倉)앞에 동네가 있었다하여 유래된 것이다,
※ 와우산(臥牛山) 와우산은 우산목적(牛山牧笛)과 농암모연(籠岩暮烟)이라 하여 와우산에서 부는 목동의 피리소리와 농 바위 부근의 저녁 짓는 연기 모습이 서호팔경(西湖八景)으로 꼽혔던 곳이다, 이 산은 한국전쟁 당시인 9, 28수복 때 국군과 인민군 사이에 2,000여명의 사상자를 냈던 격전지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1970년의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으로 귀한 인명이 33명이나 죽고 40명이 부상을 당해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와우아파트의 이름이 된 와우산은 서강 쪽에서 바라보면 마치 소가 누워 있는 모습과 같으므로 와우산 이라 하였다고 하며, 풍수설화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예전에 큰 소가 있었는데 길마는 무악산에 벗어 놓고 (길마재) 굴래는 북아현동에 벗은 다음(굴레방다리 ;勒橋) 서강에 내려가 물을 마시고 이곳에 누웠다는 것, 이 와우산의 소가 여물을 먹는 그릇인 쇠죽통은 하수동에 있던 농바위이고 잔돌백이는 이 소의 쇠똥에 비유되고 있는데 하필 와우 아파트가 들어선 곳이 소의 엉덩이 부분에 해당되어, 소가 엉더이를 흔드는 바람에 아파트도 소처럼 드러누운 것 이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 광흥창(廣興倉) 그 당시에는 선박(船舶)들이 상수동의 점검청(點檢廳) 신정동의 공세(貢稅)터를 일명 대창(大倉)터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광흥창에는 여러 관리들에게 주는 녹봉미(祿俸米)를 저장하여 두었다 따라서 이 곳 광흥창을 중심으로 많은 관리들의 가솔이 모여 살게 되어 서강 서반(西江, 西班)이란 말도 생기고 취락지로 발달되었다,
※ 밤섬 율도동(栗島洞)(밤섬)은 법정동명이었고 행정구역상으로는 서강 서부동회에 속해 있었으나 1968년 2월 10일 밤섬이 폭파됨으로 2월 12일 창전동에 속하게 되었다, 율도동은 영조 때 기록에 의하며 서부 서강방 성외 율도계로 불리다가 갑오경정(1894년) 때 서서(西署) 서강방 율도계 율도로 호칭되었다, 한일 합병 후 1911년 서강면에 속하다가 1914년 여의도와 같이 경기도 고양군 여율리(汝栗里)가 되었으며 다시 1936년 경성부 확장에 따라 여의도정이라 명명되어 편입되었다, 서울특별시가 밤섬을 없앤 이유로는 매년 한강 수위가 높아지면 밤섬주민들은 수재민이 되지 않을 수 없고 이들을 구출과 수용대책은 연례행사(年例行事)처럼 반복되고 또 밤섬이 존재함으로써 한강수로가 변해 여의도 윤중제를 위험하게 해 없앨 수밖에 없었다,
☞ 토정동은 서울대교 위쪽 한강변에 토정동이라는 마을이 있다, 토정동이라는 이름은 조선 명종, 선조 때의 문인(文人)이자 기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토정 이지함(李之函) 선생이 살았던 곳이므로 그의 호가 동명이 된 것이다, 토정 선생은 토정비결로 널리 알려진 예언자일 뿐 아니라 일찍부터 이율곡 선생과도 잘 아는 사이였으며,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의병장 조헌(趙憲) 선생과는 더욱 긴밀한 사이였다,
야사에 의하면, 그는 베옷과 짚신에 삿갓을 쓰고 다녔으며 각종 술법에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한 조각배를 타고 네 귀통이에 큰 바가지를 달아 세 번이나 제주도에 다녀왔는데도 풍파에 곤란이 없었고 몸소 장사를 하여 백성에게 실리를 가르쳤다, 맨손으로 시작하여 순년 동안에 양곡 수만 섬을 모아 쌓아 놓고 모두 가난한 백성에게 나누어 준 뒤 다시 섬으로 들어가서 박을 심어 박 수만 개를 거두고, 그것으로 바가지를 만들어 양곡 몇 천섬을 팔았다,
그는 그 양곡(糧穀)을 경강의 마포로 운반해 와 이곳에 강촌 사람들을 모집해서, 흙을 쌓고 그 안을 발라 높이 100척이나 되는 토실(土室)을 만들어 이름을 토정이라 하였다, 또 그 안에 양곡을 저장하고 토실 위에 거처하며 깊이 사색(思索)하고 연구하여 【토정비결】을 저술했다고 한다,
☞ 하중동은 한강변 물가에 위치한 마을 중 아랫마을은 하수리라 했으며, 그중 가운데 위치한 마을이므로 하중리(下中里)라 하였다, 갑오경장 이후 하중리(賀中里)로 바뀌었으나 바뀌게 된 내력은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⑦ 합정동(合井洞) 현석동(玄石洞)
☞ 합정동은 조선시대 양화나루 근처의 한강변 마을이다, 지금 양화대교와 당산철교 사이의 서울 외국인 묘지 일대가 바로 조선시대 양화진(楊花津)이 있었던 곳이다, 합정동은 본래 이곳에 조개우물(蛤井)이 있었으므로 합정동(蛤井洞)이라 불렀던 곳인데, 당시의 조개우물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1913년 12월 일제의 총독부령에 의하여 행정구역을 바꿀 때 연희면 합정리(合井里)가 되면서 우물을 합했다는 뜻의 이상한 이름이 되고 말았다, 곧 그들의 마음대로 복잡한 글자보다는 쉽고 간편한 글자로 바꾸어 버림으로써 전혀 다른 의미의 이름이 된 것이다,
※ 절두산(切頭山)합정동 남쪽 한강변에 있는 절두산(切頭山)은 지금은 천주교 순교기념관이 들어서 있으나 옛날에 잠두봉(蠶頭峰), 곧 누에머리산이라고도 하고 용산이라고도 하여 경치가 매우 뛰어났던 곳이다, 절두산은 누에가 머리를 치켜든 것 같으므로 들머리 또는 가을두(加乙頭), 용두봉 등으로도 불렸는데 1866년 프랑스 함대가 한강에 들어와 천주교 탄압을 항의하자 수많은 천주교인들을 이곳에 끌고 나와 머리를 자르는 참형을 집행한 곳이다, 그 후 이곳은 이름도 끔찍한 절두산, 곧 머리 자르는 산이 되고 말았다,
☞ 현석동은 조선 시대에 한성부 서부 서강방 성외 흑석리계(黑石里契)로 되었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에 편입됨으로서 경성부에서 제외 되었다가 1936년 경성부의 관할구역 확장 변경으로 경성부에 다시 속하였고 현석정이라고 개칭되었다, 1944년 마포구 신설로 이에 편입되었다가 1946년 마포구 현석동으로 고쳐 현제에 이르렀다,
현석동의 명칭은 조선 숙종(肅宗) 때 학자 박세채(朴世采)가 이곳 77번지에 살았고, 그의 호(號)가 현석(玄石)이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이 근처의 돌이 검어서 검은돌 동네, 했기 때문에 불려진 이름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