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에는 한 줄기 바람이 골목을 휑하고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간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몸을 움츠리며 옷깃을 여민다. 동지가 지났어도 오후가 되면서 해는 삼각산 중턱을 향하더니 어느새 어두운 그림자를 길게 늘어트린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 질 녘이 될 때면 지금도 고향을 떠나 서울 하늘 아래서 향수에 젖어 고향 집이 눈에 아른거리고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눈물 흘리던 청소년 시절이 생각난다.
그 당시 중학교 졸업 후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일찌감치 고등학교 진학을 단념하고 서울에서 공장 다니는 육촌형이 고향으로 내려오는 설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가난했지만, 어머니가 사주시는 설빔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즐거운 명절이었다. 그러나 그해 설은 가난에 찌든 시골생활을 빨리 벗어나 육촌형처럼 돈을 벌려고 말로만 듣던 서울에 간절하게 가고 싶었다. 멋지게 차려입은 형의 모습은 눈부셨고, 부러웠다.
형 따라 서울로 가기 위해 흙먼지 풀풀 날리며 달리는 직행버스를 탔다.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로 가는 만원버스도 불편은 커녕 마음은 설레고 마냥 행복했다. 형이 다니는 공장은 청량리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염색 공장이었다. 지금이야 명절에도 도로 등 교통수단이 좋아져서 길이 막혀도 한나절이면 괴산에서 서울까지 충분한 시간인데 시골집에서 아침에 출발했는데도 도착해보니 저녁 무렵이 되었다.
공장문을 들어서는 순간 생전 처음 맡아보는 화공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숨쉬기 조차 힘들어 코를 손으로 막으면서 형따라 이 층으로 올라갔다. 문을 여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골에서 중학교 다닐 때 손수 만들었던 토끼집이 갑자기 떠올랐다. 한 개 층을 삼 층으로 나누어 토끼집처럼 여러 칸을 만들어 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있는 문으로 들어가면 어른이 앉을 수 있는 높이에다 두 명이 잠을 잘 수 있는 좁은 공간이었다. 다수 인원을 수용하려고 최소의 비용을 들여 만든 기숙사였다. 일 층 외에는 사다리로 오르내릴 수 있는 방이다. 처음 보는 시골뜨기가 들어서자 호기심 가득한 눈들이 집중되어 어디에다 시선을 둘지 몰라 아예 고개를 숙여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시골에서 토끼들이 먹이 달라고 고개를 밖으로 내미는 모습이 떠올라 신기하면서도 눈앞 현실이 혼란스러웠다.
중학교 시절 겨울방학 기간에 어머니께서 이웃집에서 토끼새끼 한 마리를 얻어오셨다. 귀엽고 앙증스러워서 사과 상자에 넣어 춥지 않게 정성을 다해 보살폈다. 겨울철이라 먹이라고는 음식물 찌꺼기가 고작이었고, 말려놓은 무청을 어머니 몰래 걷어다 먹이고, 심지어는 먹던 밥을 남겨서 먹이곤 했다. 다행히도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서 봄이 왔을 때는 사과 상자 집이 비좁을 정도로 어미 토끼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 암컷이라 번식도 시켜야 했기에 큰 집을 지어주기로 하고 어머니한테 장에 가시면 못을 사다 달라고 부탁드렸다. 주재료인 송판이 귀하기에 일요일에 동생들과 인근 산에 올라 곧게 자란 지겟작대기 굴기의 나무를 베어와 머리속에서 설계도를 그리며 삼 층 토끼집을 짓기로 하고 며칠 동안 기둥도 세우고 칸막이도 하고 문도 만들고, 비가 새지 않도록 지붕도 만들었다. 그렇게 완성된 토끼집은 어미 토끼가 낳은 새끼들로 채워지면서 개체 수가 늘어났다. 우리 형제들은 먹이를 구하느냐고 그만큼 바빠졌다. 학교 갔다 오면서 토끼들이 좋아하는 풀 뜯어날 났고 학교 갔다 와서도 동생들과 칡이파리를 비롯하여 먹이풀을 구하러 산야를 돌아다녔다. 형제들이 열심히 기른 보람으로 어머니는 다 자란 토끼를 시장에 내다 팔아 자식들의 학비에도 보태셨고, 몇 마리는 동네 아저씨들과 아버지의 술안주로 붙잡혀 갔다. 나머지는 우리가족에게 맛있는 고기반찬이 되어 주었다. 남겨진 털은 우리 형제들에게 겨울에 귀를 따뜻하게 하는 귀마개로 요긴하게 쓰여 졌다.
나에게 소중한 토끼의 추억을 되살려준 첫 직장생활은 끼니마다 쌀밥을 주는데 반찬은 소금콩나물국에 왜간장이 전부였다. 매일 쌀밥을 먹는다는 것이 시골보다 좋았고, 콩나물 국물을 떠먹으며 간장에 비벼 맛있게 먹었다. 일부 오래 근무한 직원들은 시장에서 김치 등 반찬을 사다 먹으며 생활하고 있었지만, 대부분 직공은 나와 처지가 같은 시골 출신이라 한 푼을 아끼려고 공장에서 제공되는 음식을 식탁도 없는 곳에서 끼리끼리 앉아서 먹었다. 월급은 첫 달에 삼천 원 가까이 받았다. 그것을 한 푼도 헛되게 쓰지 않고 만원이 모이면 고향 집에 보내 드렸다. 적은 돈이지만, 고생하시는 부모님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리겠다.고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일했다.
때로는 고향 집에 가고 싶고 부모님과 동생들이 보고 싶어서 아무도 없는 구석에서 눈물 흘리던 날도 있었다.
울적한 마음이 들면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즐겁게 생활하려고 쉬는 날이면 같은 또래들과 어울려 시내 구경도 다니면서 적응해 나갔다. 작업장은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 시절에는 부족한 것이 너무 많았다. 지금은 흔한 안전 마스크도 그때는 귀했다. 작업에 쓰였던 화학물질들은 제 규정대로 관리가 안 되었을 때도 인체와 환경에 얼마나 해로운 것인지 몰랐다. 제대로 된 안전장비 없이 인체에 부분적으로 노출되면서 일해야 했다. 그 이후에 화학이론을 공부할 기회가 있었기에 공장에서 원단 섬유 탈색용도로 사용되었던 황산(H2SO4), 염산(HCL) 등은 위험물질이기에 그 심각성을 알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베이비 붐 세대들이 보릿고개를 겪으면서 70년대 초 산업화 바람에 힘입어 어린나이에 배움을 중단하고 가난한 집안을 돕기 위하여 산업현장에 민물처럼 밀려들었다. 그 시절에는 입에 풀칠하기에도 어려운 집들도 많았기에 그만큼 절박했다. 한 매스컴 경제토론에서 "그 시대의 젊음이 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보릿고개를 넘었고, 선진산업국가로 발돋움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그것을 보고 가슴 한구석에선 뭉클하고, 뿌듯해졌다. 염색공장은 오래전에 공해물질 배출업소로 지정되어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다. 그 자리는 섬유시험연구소로 신축되어 섬유산업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지금도 그곳을 지날 때면 힘들었던 시절의 토끼집이 생각나서 감회가 새롭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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