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구약중간사
-----------------------------------------------------------
마카비상1장 - 마카비하15장
-----------------------------------------------------------
목표 : 1. 마카비서는 구약과 신약 사이 중간시대를 반영하는 외경임을 알게 한다
2. 약400년간의 중간시대에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가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배우게 한다.
3. 박해 속에서의 유대 마카비의 신앙투쟁을 상기하며, 암흑기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은 계속됨을 깨닫게 한다.
내 용 : 박해의 시작, 박해 속에서의 마카비가의 신앙 투쟁
구약시대가 끝나고 신약시대가 시작되기까지의 약 400년간을 가리키며, 이 시대는 유대인들의 박해시대이므로 묵시문학 즉 외경 혹은 위경(저나나 쓰여진 연대가 허위로 되어있는 것)에 속한 작품들이 많이 배태되었다. 중간시대는 신구약을 연결하는 다리역할을 하는 기간이다.
마카비서는 구약 39권에 포함되지 않은 외경(Apocrypha 정경에 들지 못한 가치있는 책들을 가리키며 70권의 외경이 있으나 천주교의 라틴어 성경엔 12권-1546 트렌트회의 결정-이 있다. 이솝의 우화보다 훨씬 종교적 가치가 있다) 중의 하나이다. 개역 성서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공동번역 성서에는 8권(토비트 유딧 에스델 지혜서 집회서 바룩 다니엘 마카비서)의 외경 중의 하나로 포함되어 있다.
외경은 주로 주전 2세기로부터 주후 1세기 사이에 기록된 작품으로 구약성서 시대가 끝나는 주전 3세기경부터 신약성서가 시작되는 주후 1세기 사이에의 시대상을 잘 말해 주고 있어 그 상황을 어느 정도는 알 수가 있다. 외경은 묵시나 종말론적 작품들이 주종을 이루지만 이방인의 박해가 혹심했던 시기로써 이 시기의 생존권 투쟁은 물론 여호와의 신앙을 파괴하는 대적자들에 대항하여 신앙을 고수했던 기록들을 잘 간직하고 있다.
마카비서도 이 시대의 작품으로 상한선은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주전323)으로 말미암아 시작되는 후계자들의 분열에 대한 갈등상태에서부터, 하한선은 요한 힐카너스(주전134-104) 대제사장의 행적까지로 그을 수 있다. 그러나 마카비 형제와 관련된 자들은 에피파네스 안티오커스 4세(주전175-163)의 박해와 관련된 자들이므로 상한선을 주전 175년에서 주전 104년으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마카비서의 히브리 명칭은 ‘사바나이엘 집안의 책(The book of the houses of Sabanaiel)이라고 불리워진다. 셀류시드 왕조의 안티오커스 4세는 피지배 문화를 희랍화함으로써 자기 통치 체계를 통일하고 획일적으로 피지배 민족을 동화시키려는 의도에서 희랍문화 동화정책을 강하게 추진하였다. 철저한 유대박멸 정책을 실시하면서 유대종교의식을 통제하고 이교의 종교 풍습을 따를 것을 강요했다. 이런 동화정책에 강한 반발을 보인 유대민족을 멸절하기 위해 안티오커스는 예루살렘 성전과 기물을 파괴하고 성전물품들을 약탈해 갔다.
이런 안티오커스의 잔인한 박해에 성전을 보호하고 율법을 준수하여 유대교를 회복하고, 민족 생존권 보장을 위하 투쟁이 시도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독립운동을 시작한 자들이 마타디아와 그의 다섯 아들들인데, 즉 요한, 시몬, 유다, 엘르아잘 그리고 요나단이었다. 이 아들들 중에 특히 마카비라 불리우는 유다가 주동이 되어 독립 운동을 하였기 때문에 그 별명을 따서 마카비 운동이라고 부른다.
마카비 상은 16장으로 구성되고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 후 후계자들의 갈등으로부터 시작되어 안티오커스 4세의 유대교 탄압(1:20-64), 마따디아와 그의 아들들의 봉기, 마따디아의 죽음과 유언(2:49-79), 유다 마카비의 승리(3:10-26), 리시아 파병(3:27-60), 엠마오 전투(4장),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의 죽음(6장), 새 임금 데메드리오 1세 등극(7장), 니가노르의 패망(7:26-48), 로마인과의 맹약(8장), 데메드리오와 요나단의 관계(10장), 데메드리오의 죽음, 로마와 스파르타의 전쟁, 요나단의 최후(13장), 그리고 시몬과 그 아들들의 피살로 마카비 상은 끝난다. 마카비 하는 마카비 상과 대동소이하다. 마카비 상은 사건의 전개가 시간 순으로 배열되지만, 마카비 하는 후세에 남기기 위하여 여러 책을 보고 요약 정리한 것이다.
I. 시대적 배경
성서의 중간시대는 페르시아의 고레스에 의해 귀환이 시작되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민족적 단결을 시도하지만, 주전 332년 알렉산더에 의해 함락되면서 헬레니즘화의 강행과 이에 대한 유대의 반헬레니즘 운동이 격돌하는 시기이다. 따라서 시대적 배경은 희랍화 정책(Hellenization)이 한참 진행 중이던 희랍 전성시대로부터 출발한다. 마카비 상 1장에 의하면, 바사의 다리오 왕(주전333)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하고 근동 전 지역을 석권하였다. 그러나 그가 12년간 통치하고 죽은 후 후계자들이 땅을 나누어 가지고 애굽의 프톨레미 왕조와 시리아의 셀류시드 왕조로 나누어 다스리면서 희랍화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이들 중에 셀류시드 왕조의 안티오커스 4세가 집권(주전175-163년 사이에 시리아의 분봉왕이 된 자)하면서 유대민족 박멸정책을 시도하였다.
특히 안티오커스는 유대 민족에게 다음과 같은 종교탄압 정책을 강행(마카비상 1:41-50)하였다. 1) 유대인들은 이교도 관습을 따를 것, 2) 성소 안에서 번제를 드리거나 희생제물을 드리거나 술을 봉헌하는 예식을 하지 말 것, 3) 안식일과 기타 축제일을 지키지 말 것, 4) 성소와 성직자들을 모독할 것, 5) 이교의 제단과 성전과 신당을 세울 것, 6) 돼지와 부정한 짐승을 희생 제물로 잡아 바칠 것, 7) 사내아이에게 할례를 하지 말 것, 8) 모든 음란과 모독 행위로 스스로를 더럽힐 것, 9) 율법을 저버리고 모든 규칙을 바꿀 것 등으로 이것을 행하지 않은 때에는 사형에 처한다는 칙령을 발표하였다. 이런 치명적인 왕명을 내렸으므로 많은 유대인이 이에 동조하여 율법을 저버리고 하나님께 배신행위를 하였다. 그러나 경건한 유대인들은 피난을 가거나 은신처를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시리아 월력 기슬레 월 15일(주전167년 12월8일)에 안티오커스 4세는 번제단에 이교 우상을 세우고, 율법서는 발견되는 대로 불태워 버렸으며 율법책을 읽다가 발견되면 사형에 처했다(마카비상 1:55-57). 자기 아이에 할례를 해 준 어머니를 사형에 처했고 젖먹이 어린이들을 목매달아 죽였다. 뿐만 아니라 할례를 베푼 자에게도 사형을 행했다. 안식일을 지키다가 사형을 당한 사람은 천명이나 되었다(마카비상 2:31-38). 이렇게 심한 박해 속에서 경건한 유대인들이 무수히 희생을 당했으니 유대인들의 율법준수와 생존은 직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이것은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포기하느냐, 아니면 죽음으로 율법을 준수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느냐의 선택의 문제 뿐이었다. 이런 상황 하에서 경건한 마카비 일가의 신앙고수와 유다의 독립운동은 전개되어 질 수 밖에 없었다.
성서의 중간시대인 400년간의 하나님의 침묵기는 신앙 깊은 사람이 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고 괴로워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는 시기이다. 이에 대해 네 가지가 시도된다. 1) 율법의 강화 - 이것이 하나님의 도움을 얻는다고 생각하여 하시딤의 경건운동이 일어난다. 2) 조심성의 사상 - 지혜문학의 발생. ‘정의가 왜 보상받지 못하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올바르기만 해서는 안 되고 지혜를 가진 인생의 삶의 필요성 제기. 3) 종말관 - ‘이 세상에서 올바르게 사는 사람은 손해인가?’와 함께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지배를 소망하며 메시아를 대망하며 묵시문학이 출현한다. 4) 죄의 문제 - 욥기와 같이 ‘인간의 의로운 것이 무엇인가? 죄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바르게 살기를 원하면서 죄를 짓는 인간의 모습을 보며, 선악을 초월한 죄의 근원을 찾게 되며 모태에 있을 때부터 죄인됨을 인식하게 된다.
역사속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메시아가 다스리는 하나님나라의 도래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소망하며 메시아를 기다리게 되었다. 다윗 자손에서 유대민족의 메시아가 나오리라고 보았다.
유대교의 각 파마다 외적인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구약시대에 보편적이던 우상숭배는 수많은 율법들을 지킴에 의한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공회(산헤드린)는 종교적인 것과 민사상 이스라엘의 최고 법정이 되었다. 주요 결정사항은 로마의 검문과 조사를 받아야 했으며, 대제사장이 공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아론으로부터 내려오는 제사장의 직분은 고용직으로 바뀌어 정치적 선심에 의해 팔릴 때가 많았다. 회당은 로마제국시대동안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가르침과 모임의 장소로 계속되었다. 여섯 개의 유대 파벌이 백성의 추종을 놓고 경쟁하였다. 바리새인들은 구약성경과 유대의 구약전통을 지지하던 굳센 보수주의파였다. 율법주의자였고 분리주의자였다. 대부분 중류층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사두개인들은 상류층의 종교적 정치적 자유주의자들로 부유하고 사회생활에 익숙해 있는 합리주의자들로 부활과 영혼의 영원성에 대한 믿음과 전통을 거부한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직접적으로 가르치고 해석했던 사람들로 구약성경과 전통을 공부하는 이들은 일반적으로 높은 존경을 받았으나 사소한 문제로 많은 시간을 논쟁하는데 보냈다. 헤롯당은 헤롯가문의 권력을 계속 유지하는데 전념하던 유대인들이다. 열혈당원은 헤롯당의 정치적 반대파로 로마에 대한 폭동까지도 사용했으며 팔레스틴이 모세의 시절과 같이 신정정치로 돌아가길 원했다. 에세네파는 고립주의의 극단론자들로 쿰란지역의 사람들이 살지 않는 동굴에 은둔함으로 일상생활과 종교생활의 부패를 피하려고 했다. 1947년 그들이 간수해놓은 성경의 사본인 사해사본이 발견되었으며 수도원 같은 생활에 대한 훈련교본의 사본도 함께 발견되었다.
주전250년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12지파에서 6명씩 참여한 72명의 사람에 의해 번역되어진 70인역 성경(LXX)이 헬라어 번역판으로 나왔다.
세력의 각축장이 된 유대역사에 영향을 미친 국가들
1) 앗수르 (아시리아 900년경 패권 -612년) - 주전722년 북이스라엘 정복, 이방인과의 결혼으로 사마리아인이라는 혼혈민족을 생성
2) 바벨론(바빌로니아 주전612-536) - 느부갓네살왕이 주전606년 남 유다 정복, 586년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파괴
3) 바사(페르시아 536-332) - 고레스의 귀환, 서기관이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자로서의 활동 시작
4) 그리스 (332-176)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에 의해 성취된 그리스세계와 오리엔트 세계와의 통합으로 그의 동서융합정책은 두 문화권의 융합을 가져왔으며 이를 위해 알렉산드리아 도시를 설립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부터 로마가 그리스 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시기의 시작까지 약 3세기간의 역사를 헬레니즘 시대라 하며 결혼정책, 동서인종이 함께 거주하는 신도시 건설, 교통로 개척과 화폐발행, 세계동포주의 사상을 불어넣었다. 언어는 코이네와 그리스어가 쓰였으며 철학사상은 스토아주의와 에피쿠러스사상이며, 종교사상은 혼합적이며 다신교와 점성술 밀의종교 모신숭배가 만연하였다. 알렉산드리아에서 70인역이 번역되었다.
①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국 (주전301-198)- 종교와 문화적 전통을 지키며 평화 적용, 대제사장에게 통치 위임, 장로회의를 통한 자치
② 시리아의 셀류커스 왕국 (주전198) - 팔레스틴 지배권 장악. 성전제사 경비 부담. 종교인 세금면제. 대제사장직 매관매직. 주전167년 금지 성전 매음행위. 하시딤의 각성운동
5) 하스몬왕가(176-63)
6) 로마(63-주후500) - 자유도시는 자치권과 통상권을 인정했으며 단지 군사권과 외교권은 로마가 장악하였다. 동맹도시는 자치권만을 인정하였다.
히브리연대기(연대는 근사치)
주전 586 예루살렘성전 파괴
516 예루살렘 성전 재건
458 에스라의 2차 귀환, 예루살렘 성벽 재건
420 사마리아인이 예루살렘 주민의 배척으로 자신들의 성전을 그리심산에 세움
333 알렉산더 대왕이 유대를 정복하자 희랍의 영향이 크게 미침 (희랍시대)
175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가 수리아의 왕이 되어 유대교 말살정책 시도
169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성전이 약탈되고 더럽혀짐
167 마따디아가 모딘에서 수리아 관헌을 살해하여 마카비가의 혁명이 시작됨
165 유다 마카비가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을 몰아내고 성전을 정결케하여 재봉헌
139 로마가 유대를 인정, 그러나 계속적인 투쟁과 불안 야기
63 로마의 폼페이 장군이 예루살렘을 정복 (로마시대)
40 피르니아인들이 예루살렘 장악
37 헤롯이 군대로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로마에서 유대의 왕이란 칭호를 받음
20 헤롯이 성전을 재건
6-4 예수의 베들레헴 탄생
4 헤롯의 죽음
주후 70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파괴, 유대인들의 흩어짐.
II. 신구약중간사 - 마카비상하서
1. 박해시작 : 마카비상 1:1-2:38, 마카비하 1:1-7:42(상2:22)
시리아의 안티오커스 4세의 희랍화 정책은 유대인들에게도 유대교를 버리고 희랍신과 우상을 섬길 것을 강요하였다. 이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에게는 가차 없이 학살을 감행하였다. 유대인들은 왕명을 지키기보다는 차라리 안식일을 지키다 깨끗이 죽겠다며 저항 없이 천여명이나 순교했다. 이러한 박해가 시작될 때 마따디아(Mattathias 마카비 운동의 창시자가 되는 모데인의 제사장으로 희랍화 정책에 첫 반기를 든 사람이다. 그의 다섯 아들들이 주동이 되어 유다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와 그의 아들들은 필사의 각오를 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결코 배반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였다.
마따디아는 말하기를 “왕의 영토에 사는 모든 이방인이 왕명을 따라 조상의 종교를 버리고 왕에게 복종한다 할지라도, 나와 내 아들들과 내 형제들은 우리 조상들이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지킬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과 규례를 절대로 버릴 수가 없소. 우리는 왕명을 따를 수 없을 뿐더러 우리의 종교의 관습은 한 치도 양보할 수가 없소”라고 하였다. 이렇게 외치자 정의와 율법을 따라 살려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라 나왔다. 그는 이교 제단을 헐고 유대교 정화 작업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얼마가지 않아 임종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는 그의 아들들을 불러놓고 다음과 유언을 하였다.
옛날에 우리 조상들이 이룬 업적을 기억하여라. 그러면 너희들은 큰 영광과 불멸의 이름을 얻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시련을 받고도 믿음을 지켜서 의로운 사람이란 인정을 받지 않았느냐? 요셉은 곤경에 빠졌어도 계명을 지켜서 에집트의 주인이 되었고, 우리 조상 비느하스는 그의 큰 열성 때문에, 영원히 사제직을 차지하라는 약속을 받았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완수하여 이스라엘의 재판관이 되었고, 갈렙은 회중 앞에서 올바르게 증언하여 땅을 물려받았다. 다윗은 그의 자비로운 마음 때문에 영원한 왕권을 차지하였으며 엘리야는 불타는 열성으로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하늘로 들려올라 갔고 하나니야와 아자리야와 미사엘은 그들의 믿음 때문에 불구덩이서 살아 나왔으며 다니엘은 끝내 결백하였기 때문에 사자의 입에서 살아 나왔다. 그러므로 너희는 대대로 이것을 명심하여라. 하나님에게 희망을 거는 자는 힘을 잃는 일이 결코 없으리라. 죄인의 위협하는 말을 무서워하지 말아라. 그의 영광은 벌레가 우글거리는 똥더미로 변한다. 죄인은 오늘 높은 자리에 올랐다가도 내일이면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는 죽어서 흙이 되고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아들들아, 용기를 내어 굳세어져라. 그리고 율법을 굳게 지켜라. 이것이 너희들이 차지할 영광이다. (마카비상 2:51-64)
이런 마따디아의 마지막 말을 명심하고 그의 다섯 아들들은 그 무서운 박해에서도 단결하고 그들의 신앙의 정조를 굽히지 않았다.
2. 박해 속에서의 마카비가의 신앙투쟁 :
마카비 상 2:39-16:24 마카비 하 8:1-15:39 (상4:9-11)
유다 마카비가 마따디아의 후계자로 부상하여 민족 신앙을 고수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고 다음에는 요나단 그리고 시몬과 그 아들 요한에 이르기까지 네 사람의 주도 하에 마카비 독립 운동이 전개되었다.
1) 유다 마카비의 투쟁기 (주전 166-160)
유다의 첫 대결은 시리아의 세론 장군과의 벧호른의 대결이었다. 세론과 배교한 유대인들이 합세하여 진을 쳤을 때 적은 수효의 유다 마카비 군대가 대적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때 유다는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전쟁의 승리는 군대의 다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힘에 의존한다. 이교도들이 우리 처자를 학살하고 재산을 약탈해 갔으니 우리는 우리의 생명과 율법을 보호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는 앞에서 원수들을 무찔러 주실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조금도 저들을 무서워 말라”(마카비상3:19-22)라고 하였다. 이 말을 마치고 급습하여 적군 800명을 죽이자 나머지는 블레셋 땅으로 도망갔다.
이러한 승리가 안티오커스 4세의 귀에 들리자 왕은 분통이 터져 리시아(안티오커스왕 자신이 바사 원정을 하고 있는 동안 리시아는 그의 친족중의 한 사람으로서 왕의 직무를 맡아 대행케 했으며 유프라데에서 애굽까지 통치하였다. 이스라엘 초토화 작전을 여러 번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에게 왕권을 위임하고 유브라데강 방면으로 원정을 갔다. 그러나 리시아는 프톨레미 니가노르 고르기아에게 보병4만 기병 7천을 딸려 유대 땅으로 보내 유대 박멸정책을 실시하였다.
리시아의 군대는 엠마오에 진을 쳤고 유다는 미스바에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대전 준비를 하였다. 그날 그들은 단식하고 베옷을 두르고 머리에 재를 뿌리며 옷을 찢으며 통곡했다. 그리고 그들은 율법책을 펴서 앞 일을 하나님께 물어 보았다.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당해낼 수가 있겠습니까?”(마카비상3:35). 그런 다음 지휘자를 임명하고 엠마오 남쪽으로 군대를 이동시켰다. 병사들에게 격려의 말을 하기를 “이교도들이 우리와 우리의 성전을 짓부수려고 집결했다. 내일 그들과 싸워야 하니 무장을 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여라. 우리는 우리 민족과 우리 성전이 망하는 것을 보느니 보다는 차라리 싸우다 죽는 것이 더 낫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 질 것이다”(마카비상3:58-60)
고르기아 보명 5천과 정예기병 1천이 야음을 틈타 유다를 습격하자 유다는 방황하는 부하들에게 “적군의 수효를 두려워 말라 그들의 공격을 두려워 말라. 바로가 군대를 몰고 우리 조상들을 추격했을 때, 우리 조상들이 홍해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생각해 보라.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호소하자.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와 맺은 계약을 상기하셔서 우리 앞의 적들을 지금 무찔러 주실 것이다. 그러면 모든 이교도들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살려주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유다와 그의 동료들은 적군에 대항하여 싸워 적 3천명을 죽이고 승리하였다. 그리하여 유다의 군인들은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은 선하시고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도다”라는 시편 말씀으로 찬송하였다.
분개한 리시아는 다음 해 정예부대 6만과 기병 5천을 동원, 에돔과 벧술에 진을 치고 공격 준비를 하였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유다는 1만명을 데리고 대진하기 전에 기도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주님, 찬송을 받으소서. 당신은 종 다윗의 손을 빌어 블레셋을 무찔렀듯이 저 적군을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 손에 넘기시고 보병과 기병에 치욕을 안겨 주소서. 저들을 공포 속에 몰아넣으시고 강하다고 자기 스스로를 믿는 저들의 콧대를 꺾으소서. 당신의 이름을 아는 모든 이들로 하여금 찬미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한 후 적군과 교전하여 리시아군 5천을 죽이고 승리하였다.
이렇게 승리를 거듭한 후에 그는 성전을 정화하고 봉헌하였다. 이교도들에 의해 파괴된 성전을 보수하고 우상을 헐어버리고 번제단을 새롭게 건축하고 성소와 성전 내부를 정화하였다. 등과 분향 제단과 상을 성소 안에 다시 만들어 놓고 등에 불을 피우고 상에 빵을 놓고 모든 정화 작업을 마친 후에 시리아 월력 기레스 월 즉 9월 25일(주전164년 12월)에 하나님의 율법대로 새로 만든 번제단에 희생제물을 바치고 봉선식을 거행하였으니 이것을 봉헌한다는 의미로 하누카(Hanukha)라고 한다. 우리 신약 성경에 수전절/봉헌절(요10:22-23)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안티오커스 4세도 죽고 데메드리오 1세가 리시아와 왕의 아들들을 죽이고 집권하였다. 왕은 바키데스와 유대 배반자 알키모스(안티오커스 정책에 동조하고 율법을 배반한자로 데메드리오 1세가 등극하자 또 왕에게 아첨한 자)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여 다시 유다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베레아에 진을 치고 공격하였으니 유다의 군대들은 소집할 시간도 없었으며, 적은 숫자이므로 사기가 저하되었다. 그러나 유다는 “우리가 죽어야 할 때가 왔다면 우리가 우리 동료들을 위해 용감하게 싸우다 죽자”라고 하며 싸우다 전사하였으니 그 형제 중 요나단이 유다 마카비의 계승자가 되어 유대인들을 치리하였다. (마카비란 뜻은 망치 혹은 대장장이란 의미로 이 독립운동을 마카비 운동이라고도 하며 이 일가를 하시모니안일가라고도 한다. 70년 지속된 이들의 통치를 하시모니안 왕조라고도 한다.)
2) 요나단의 투쟁기 (주전160-143)
바키데스가 예루살렘을 위시한 여러 도시 즉 여리고 엠마오 벧호른 벧엘 딤나 등 각 곳을 요새화하고 성을 쌓고 수비병을 두었다. 그런데 성전 벽을 헐라고 명하던 대제사장 대제사장 알키모스가 갑자기 죽자 겁을 먹은 바키데스가 본국으로 귀국하였다. 그래서 요나단은 이스라엘 반역자들을 처단하고 얼마간은 전쟁 없이 살았다.
그런데 안티오커스 4세의 아들 중에 하나인 알렉산더 에피파네스가 자기가 왕이라고 선포하자 데메드리오 왕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때 요나단은 데메드리오왕의 과거지사를 기억하므로 화친을 거절하고 알렉산더와 동맹을 맺고 알렉산더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데메드리오 왕의 아들 데메드리오 2세가 시리아 총독 아폴로니우스를 파견 요나단을 제거하려 하였다. 요나단은 병력 일만을 선택하여 아폴로니우스 군대를 섬멸하였으니 칼에 죽고 불에 타죽은 자가 8천을 넘게 되었고 요나단의 승리로 끝나자 알렉산더 에피파네스는 더욱 요나단을 지원하였다.
그 후 애굽왕 프톨레미아와 시리아의 알렉산더 에피파네스는 사돈간이었으나 전쟁을 일으켜 알렉산더가 죽고 얼마 후 흐톨레미아도 죽으므로 애굽과 시리아의 긴장 관계는 끝나고 데메드리오 2세와 요나단과의 관계만이 남게 되었다. 왕은 요나단에게 호의를 제공하고 세금을 면제해주고 유다와 타 지방도 요나단의 영토로 인정한다는 계약 문서를 보내왔다. 그리고 점령 지역의 반항 세력이 없으므로 군대를 해산하고 용병만을 주둔시켰다.
그런데 지방에서 반항이 일어나 요나단에게 구원병을 요청하자 정예병력 3천을 파견하여 시위를 진압하고 데메드리오왕의 왕좌를 안정시켰으나 은혜를 망각하자 트리폰(안티오커스 5세를 왕위에서 찬탈하여 왕이 되었던 자)과 요나단은 동맹을 맺고 데메드리오 왕을 격퇴시켰다. 그 후 트리폰의 계교에 요나단이 넘어가 죽게 된다. 요나단의 후계는 그의 형제 시몬이 맡았다. 국제무대의 각축전에서 요나단은 능란한 외교술을 발휘하였고, 이로써 유다는 계속 생존권을 보장받고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다.
3) 시몬의 투쟁기 (주전43-134)
시몬은 안티오커스 6세를 죽이고 왕이 된 트리폰의 악정을 고발하면서 데메드리오 2세 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세금을 면제해 줄 것을 탄원하였다. 왕의 세금면제 허가와 용서를 받고 시몬은 여러 곳에 요새를 구축하고 성벽을 쌓으며 성문을 닫고 식량을 성안에 비축하고 평안을 누렸다. 이때부터(주전142) 이방인의 속박에서 벗어났음을 기념해서 공문서와 계약서에 “유대인의 대제사장이며 사령관이며 지도자인 시몬 제 1년”이라고 기록하였다. 그 후 시몬은 게젤을 요새화했고 예루살렘성을 재건하고 성전 방비를 더욱 굳게 하였다. 그래서 시몬이 다스리던 유다는 항상 평온하였다.
그 후 시몬은 로마와 스파르타와도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나라의 평온을 유지했으니 여리고의 사령관 프톨레미가 선을 악으로 갚은 계교에 넘어가 시몬과 그 아들들이 피살되었다. 그 후 시몬의 아들인 요한 힐카너스(주전134-104 대제사장)에 의해 통치되다가 유다는 다시 정복자들의 손에 시달렸으며 계속 로마의 정복들에 의해 박해를 받았고 예수 당시까지 유다는 나라 없는 비운을 면치 못하였다. 그래서 메시아 대망에 기대 할 수 밖에 없었다.
III. 신학적 의미
1. 이방인의 지배와 박해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유대 민족을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채찍질하려는 것이다. 이방인에게는 죄를 즉시 벌하시지 않고 그들의 죄가 막중할 때까지 기다리신다. 그러나 유대 민족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그 때마다 벌을 주어 죄가 절정에 이르지 않도록 해 주셨다. 징벌은 채찍질하는 것이지 절대로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워야 한다. 심판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도록 하여 주시는 것이다.
2. 전쟁은 하나님의 소관이다. 전쟁의 승패는 군대의 숫자나 무기의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하나님이 전쟁에 승리를 주시는 것이다. 적들은 유다의 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적이고 군대도 하나님의 군대로서 소위 ‘성전’개념에서 마카비 민족 운동을 이해해야 한다. 전쟁이 목적도 율법과 성전을 수호하는 것이 주 임무이지 생존권을 쟁취하려는 것이 아니다.
3. 마카비가를 통해서 암흑시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계속 진행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민족 살해로 인해 종족이 멸종될 위기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때를 따라 구원자들을 보내어 박해와 위기에서 민족을 구하고 신앙을 보존한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구원사의 섭리와 계획은 어떤 세상의 힘도 거역할 수 없고 도도히 물결 따라 흐르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4.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고백할 수 있다. 유다 민족이 국제무대의 각축장에서 용이하게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힘없는 피지배 민족이지만 역사의 주이신 하나님께서 열방 왕들의 생명을 조절하시어 유다 민족의 생존권과 신앙을 고수할 수 있도록 구원해 주심은 역사가 역사의 주이신 하나님의 주관에 의해 지배됨을 배우게 된다. 세계 패권을 장악했지만 하님께서 패권자의 생명을 데려가시므로 역사의 판도가 늘 바뀜을 요나단의 외교사에서 배울 수 있다. 이런 박해와 투쟁의 연속인 암흑시애데 서광이 비쳤으니 예수 메시아의 탄생으로 새 역사의 장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IV. 지평의 확장 - 생각을 열어주는 질문 (발견과 응답)
1. 이교문화의 이식에 저항하여 전통문화 고수와 종교적인 정화운동을 위한 노력과 흔적을 성경에서 또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찾아보자.
2. 징계와 고통에 대해서 어떤 개념을 가지고 있는가? 징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이 버린 사람인가? 전쟁의 결과를 좌우하는 힘은 어디에 달려있는가? 전쟁이라는 고통 속에 있으면 하나님의 역사도 무의미한가? 전쟁 속에서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암흑기는 하나님이 주무시는 시간이 아니다. 마카비의 민족운동은 암흑기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산 증거이다. 이스라엘에 위기가 왔을 때,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러서는 하나님의 움직이심이 너무나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