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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세계의 사목헌장」해설 회개와 쇄신이 기본정신인 제2차 바티칸공의회문헌「현대세계의사목헌장」의 해설을 통해 급변하는 사회 속에 던져진 교회의 모습을 찾고, 또한 가톨릭직장인들이 교회의 정신에 입각하여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함께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
우리는 이제 사목헌장의 새로운 장을 시작하게 됩니다. 새로운 장을 시작하면서 지금까지의 여정을 잠깐 되돌아보면 1장에서는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해서, 2장에서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 인간 공동체에 대해서 묵상했습니다.
이제 시작하는 3장은 우주 안의 인간활동이라는 제목입니다. 제목부터가 거창합니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다양한 인간활동이 먼저 떠오릅니다. 참으로 다양하고 복잡한 인간의 활동에 대해서 교회가 왜 관심을 가져야 할까요? 그것은 인간의 활동이 세계를 바꾸고, 또 그 활동이 인간의 삶 자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서 홀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활동이 너무나 다양하고 복잡하기에 교회는 모든 인간의 활동에 대한 구체적이고 즉각적인 성찰을 할 수 없음을 먼저 고백합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을 위탁받아 보존하며 거기서 종교적 내지 윤리적 분야의 여러 원리를 찾아내고 있으므로 개개의 문제에 언제나 즉각적인 해답은 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최근에 인류가 걷기 시작한 행로를 비추어 주기 위해서 계시의 빛을 모든 사람의 경험에 결부시키고자 한다”(33항) 인간의 활동에 대한 백과사전 식의 고찰이 아니라, 사목헌장은 인간 활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먼저 질문합니다. “인간 활동의 의의와 가치는 무엇인가? 이 모든 것은 어떻게 사용될 것인가? 개인적 내지 사회적 노력은 도대체 무슨 목적을 지향하고 있는가?”(33항) 이 질문은 바티칸 공의회 당시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고 있는 활동들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이 활동들을 통해서 무엇을 느끼고 체험하는가?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 특히 경제적 발전에 따른 여러 현상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어렵고 딱딱해 보이는 이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저의 고향마을에 전화가 처음 들어온 것은 제가 초등학생 때입니다. 큰아버지께서 면서기였기에 보급차원에서 우리 집에 검은색 소리통이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 전화기를 사용하려면 먼저 옆에 붙어 있는 막대기(?)를 열심히 돌려야 합니다. 그래야 신호가 가기 때문이지요. 마치 경운기 처음 시동걸 때처럼 아주아주 열심히 돌려야합니다. 마을에 한 대 뿐인 이 전화기를 가장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신 분은 저의 할머니였습니다. 이상한 막대기를 돌리면 면에 있는 택시회사도 나오고, 방앗간도 나오는 것을 보시면서도 믿기지가 않으셨는지 이리저리 살펴보시기도 하셨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그런데 그 전화가 있다는 것이 참 귀찮은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동네 공중전화이기에 전화가 오면 그 집에 가서 전화 왔다고 알려주어야 하는 거창한 사명이 아이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화 오는 소리가 들리면 몰래 숨거나 다른 곳으로 도망간 적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전화기를 처음 구경한 후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만난 전화기는 옆에 막대기가 사라지고 색깔도 다양한 전화기들이었습니다. 동그란 다이얼판이 돌아가는 소리는 매력적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무선전화기가 나왔습니다. 전화기를 들고 동네 슈퍼에 갈 수 있다는 광고를 보면서 ‘참 좋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삐삐가 나오고 핸드폰이 나왔습니다. 갑자기 글의 분위기가 ‘그 때를 아십니까?’로 가는 것 같지만 매일 쓰는 핸드폰 하나만 보더라도 짧은 시간 안에 참으로 많은 발전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 발전은 나의 삶에, 그리고 우리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울려대는 핸드폰 소리가 귀찮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핸드폰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기는 하지만 그 만남의 깊이가 표면적인 만남이 되기가 쉽고 그 많은 연결들이 우리를 귀찮게도 합니다. 통신수단의 발전이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만남의 또 다른 터전이 되었지만 그 만남의 내용이나 만남의 질을 생각해 보면 그 발전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좋은 것, 나아가 복음적이지만은 않습니다. 복음서에는 핸드폰의 핸자도 나오지 않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른 핸드폰 사용설명서도 나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기에 사목헌장 33항의 질문은 우리 역시 제기해야 할 질문인 것입니다. “인간 활동의 의의와 가치는 무엇인가? 이 모든 것은 어떻게 사용될 것인가? 개인적 내지 사회적 노력은 도대체 무슨 목적을 지향하고 있는가?”
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고 자주 사용하는 것들 - 예를 들면 핸드폰, 이메일, 컴퓨터, 음식, 신발 - 중에 한 가지를 정해서 사목헌장이 제기하는 질문에 비추어 묵상해 본다면 나의 삶을 복음의 빛으로 비추어보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시간이 다음 항목에서 풀어나가는 것들을 위한 준비가 될 것입니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핸드폰은 역시 울리고 있습니다.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입니다. 고객님은.......”
저는 오늘 핸드폰을 앞에 놓고 묵상할 것입니다.
인간활동의 가치와 규범(34-35항)
김영욱 신부(초등부주일학교 교사연합회)
▣「현대세계의 사목헌장」해설 회개와 쇄신이 기본정신인 제2차 바티칸공의회문헌「현대세계의사목헌장」의 해설을 통해 급변하는 사회 속에 던져진 교회의 모습을 찾고, 또한 가톨릭직장인들이 교회의 정신에 입각하여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함께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
작년 가을에 자전거를 타고 인사동 구경을 갔다가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겨져 있는 물건을 샀습니다. 무엇일까요? ‘참 잘했어요’ 도장입니다. 남자와 여자 어린이의 얼굴과 “참 잘했어요” 라는 글이 써 있는 도장입니다. 기억나시나요? 초등학교 시절 나름대로 숙제를 열심히 해 가면 선생님은 숙제 검사를 하시면서 이 도장을 찍어 주셨죠. 반 아이들 모두에게 이 도장을 받는 기쁨이 돌아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은 날은 왠지 뿌듯하고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습니다.
저는 이 도장으로 제가 보아야 할 서류들-보고서, 교리교안, 계획서 등의 초안-을 검토한 후 찍어 줍니다. “역시 초등부 담당 신부님이네요.” 라고 웃으며 말하는 연구원들도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좋아했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달 숙제를 하셨는지요? “웬 숙제?” 하시는 분들은 지난달에 제가 썼던 글을 다시 복습(?)을 해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지향하는 가치는 무엇인지?’ ‘내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많은 사물들-인간 노력의 결과들-이 나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이 숙제였습니다.
사목헌장의 34항과 35항은 인간 활동의 가치와 규범이 무엇인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세기를 통하여 생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노력해온 이 거대한 노력은 그 자체가 하느님의 계획에 부합한다는 것이 신자들에게는 명백한 일이다.”(34항)
“인간활동의 규범은 그것이 하느님의 계획과 그 뜻을 따라 인류의 진정한 복지에 부합하고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인간으로서의 사명을 완전무결하게 추구하며 실천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35항)
가톨릭 신앙인에게 인간활동의 가치와 규범은 궁극적으로 하느님께로 향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인간의 활동이 하느님의 계획, 하느님의 뜻에 맞는가? 아니면 하느님의 계획과 그 뜻을 거스르는가? 이것이 인간 활동의 가치와 규범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초등부 주일학교 어린이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하고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문제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목헌장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제시합니다. 즉 창조사건 안에서 우리는 인간 활동의 가치와 규범이 되는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첫 부분에 나와있는 세상 만물과 인간의 창조이야기에서 하느님은 어떤 모습일까요?
물론 창조주이신 분, 우주 만물의 기원이 되시는 분, 전지전능하신 분,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분임을 잘 알고 있지만 이렇게 생각해 볼 수 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기 전에 인간을 먼저 창조하시고 “너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인간이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터전, 즉 세상 만물을 먼저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도 참 좋은 터전을 만드셨습니다. 우리 인간을 위해서. 해와 달과 나무와 풀과 바람과 별과 바다와 산과 하늘,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이 살 수 있는 터전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기쁘게 살 수 있는 터전을 먼저 만드시고 나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이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드신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우리 활동의 가치와 규범 역시 나와 다른 이들이 기쁘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나라의 보배’, ‘청소년은 우리의 미래’ 이런 구호를 우리는 자주 만나게 됩니다. 정부나 시민단체 등에서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위한 시설을 만들고 그들이 잘 자라나도록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학교나 가정에서도 아이들에게 “거짓말하지 마라”, “착하게 살아라”, “사이좋게 지내라” 라는 등의 말을 자주 합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뜻을 기억한다면 이렇게, 혹은 저렇게 하라고 하기 이전에 그들이 기쁘게 살아 갈 수 있는 터전을 먼저 만드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는 그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이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갈 터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참 좋은 세상의 모습은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터전이 되는, 그러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땀흘려 노력하는 그 많은 활동이 이기적인 마음으로 욕심을 내거나 힘과 권력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닌 서로의 행복을 위한 터전을 가꾸어 나가는 모습이 되도록 기도 드립니다.
파스카의 신비 안에서 완성된 인간 활동(37-39항)
김영욱 신부(초등부주일학교 교사연합회)
▣「현대세계의 사목헌장」해설 회개와 쇄신이 기본정신인 제2차 바티칸공의회문헌「현대세계의사목헌장」의 해설을 통해 급변하는 사회 속에 던져진 교회의 모습을 찾고, 또한 가톨릭직장인들이 교회의 정신에 입각하여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함께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
한겨울의 찬바람을 다 맞고 이제는 파아란 새순을 보이는 나무를 보며 ‘아! 봄이 오는구나’라고 느껴 봅니다. 겨울을 겨울답게 보낸 사람만이 봄다운 봄을 맞이한다는 어느 시인의 말을 생각하며 ‘성큼 찾아온 봄을 어떻게 맞이할까?’ 보다는 지난겨울을 어떻게 보냈는지 먼저 돌아봅니다. 참 추웠지요. 월드컵의 함성 속에 가려진 두 여중생의 죽음이 가져온 어둠을 우리의 작은 촛불로 밝히려 모였습니다. 찬바람이 불어오던 그 때 촛불로 부활하는 두 소녀의 모습이 우리를 더욱 춥게 했고 또한 더욱 따뜻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촛불을 들었던 우리의 손은 다시금 조화(弔花)를 들어야 했습니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희망의 새싹이 아닌 절망의 깊은 수렁을 만났습니다.
지난 호에서 인간이 기쁘고 행복하게 당신을 사랑하고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드신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묵상했습니다. 그 다음 다루어야 할 사목헌장의 내용을 읽으면서 먼저 눈에 들어와 마음에 자리잡은 내용은 “교만과 무질서한 자애심(自愛心) 때문에 매일같이 탈선의 위험을 겪고 있는 인간의 모든 활동”이라는 대목이었습니다. 자신의 길을 벗어난 것은 지하철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교만과 무질서한 자애심과 무관심, 이기심에 길들여진 인간이 탈선하여 무고한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다른 이들이 기쁘게 살아갈 터전을 만들어 가는 것, 이것이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이어가는 인간활동의 지향이라면 이에 반하여 이루어지는 모든 것은 하느님을 거스르고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하는 것이 됩니다. 경쟁 사회의 구조 속에서 인간은 자신을 먼저 생각하게 되고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와 더 힘센 권력과 더 많은 재물을 소유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나 자신 혹은 나의 것을 지켜야 하고 더 많이 소유하고자 하는 유혹에 대해 사목헌장은 모든 것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선물임을 잊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피조물을 주신 데 대하여 고마우신 하느님께 감사 드리며 청빈과 자유의 정신으로 피조물을 사용하고 그 혜택을 누리며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소유하는 사람으로서”(37항) 생활할 것을 제시합니다.
이러한 생활은 우리 인간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고 우리 인간을 위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는 것이라고 사목헌장은 강조합니다. 그래서 38항의 제목은 “파스카의 신비 안에서 완성된 인간 활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묻히심, 그리고 영광스러운 부활은 그 분 삶의 핵심입니다. 다른 이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셨던 예수님의 삶은 십자가 위에서 너무나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게 되면 상대방은 우리의 사랑을 통하여 더욱 인간다운 생활, 기쁘고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이는 창조의 정신이며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목헌장이 인간의 모든 활동이 어떻게 완성되는지, 어떤 모습으로 완성되는지에 대한 답으로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제시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다른 이를 위하여 자신을 먼저 내어주는 삶이야말로 인간 활동의 지향이며 완성된 모습입니다.
사목헌장은 자신을 내어주는 삶의 모습은 “중대한 일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먼저 일상 생활 환경에서 실천해야 한다”(38항)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내가 만나는 가족들과 직장의 동료들, 친구와 스쳐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의 따뜻한 말 한마디, 밝은 미소와 그를 위한 배려가 세상을 참으로 아름답게 합니다.
에모토 마사루라는 사람이 쓴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 중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이 분은 물을 연구한 학자인데 물을 가지고 이런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두 유리병에 물을 넣고 한 쪽에는 ‘고맙습니다’라는 글자를 붙여놓고 다른 쪽에는 ‘망할 놈’이라는 글자를 붙여 놓은 후에 물의 결정을 찍는 것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라는 글자가 붙은 물은 깨끗한 육각형 결정을 만들었습니다. 그에 비해 ‘망할 놈’이라는 글자를 붙인 물은 그 결정이 찌그러져 있었습니다. 그 책에는 각각의 결정 사진들이 실려있는 데 그 사진을 보면서 다른 위를 위한 사랑이 모든 것을 완성시킨다는 자명한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다른 이들이 무심코 던진 한 마디 말에, 찡그린 표정에 우리는 많이 아파합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는 아주 쉬운 진리를 우리는 자주 잊어버립니다. 물도 자신에 대한 따뜻한 말 한마디에 기쁜 반응을 보이며 자신도 다른 존재에게 아주 좋은 모습으로 내어줄려고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시길 부탁드립니다.
우리 각자가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해 먼저 자신을 내어주는 삶의 모습은 분명 하느님 나라의 삶입니다. “이 나라는 이미 현세에 신비롭게 현존하고 있으나 주님이 오실 때에 완성될 것이다”(39항). 새 봄을 맞이하면서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시기는 무엇을 끊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시기이기 이전에 인간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신 하느님과 예수님께 돌아가는 시기입니다. 은총의 사순시기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교회가 세상에 줄 수 있는 도움들(40-42항)
김영욱 신부(초등부주일학교 교사연합회)
▣「현대세계의 사목헌장」해설 회개와 쇄신이 기본정신인 제2차 바티칸공의회문헌「현대세계의사목헌장」의 해설을 통해 급변하는 사회 속에 던져진 교회의 모습을 찾고, 또한 가톨릭직장인들이 교회의 정신에 입각하여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함께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
노오란 옷을 입고 일제히 노래하는 개나리들을 보며 ‘아, 새봄이 왔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왜 매년 똑같이 찾아오는 봄을 새봄이라고 할까요? 새여름, 새가을이라고는 하지 않지만 봄은 늘 새봄이라고 합니다. 항상 새봄이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생명의 소중함을 새롭게 체험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꽁꽁 언 땅을 뚫고 솟아나는 풀잎들도, 밝은 웃음처럼 환하게 핀 목련도, 진달래의 아련한 분홍빛도 생전 처음 본 것처럼 새롭게 새롭게 우리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줍니다.
우리에게 찾아온 새봄처럼, 사목헌장을 묵상하는 우리에게 새로운 장이 찾아왔습니다. 제4장 ‘현대세계 안의 교회의 사명’이라는 제목을 달고 찾아온 새로운 장은 앞서 살펴본 인간의 존엄성, 인간 공동체, 인간 활동의 의의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무인도에 홀로 살아가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아주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인간들과 함께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사람들을 피해갈 수 없으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등지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교회는 볼 수 있는 단체요 영적 공동체로서 전 인류와 함께 길을 걸으며 세계와 같은 운명을 겪고 있습니다(40항).
사목헌장은 제4장에서 교회가 세상 안에 존재하면서 세상에 줄 수 있는 도움들에 관한 일반 원칙을 밝힙니다.
첫 번째로, 교회는 각 개인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그것은 인간 존재의 의의를 밝혀 각 개인이 자신의 삶에 충실히 살아가도록 하는 도움입니다. “인간의 최후 목적인 하느님의 신비를 밝혀 주는 것이 교회에 맡겨진 사명이므로 교회는 동시에 인간 존재의 의의, 즉 인간에 대한 깊은 진리를 인간에게 밝혀 준다”(41항)라고 사목헌장은 말합니다.
삶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삶은 계란이다’ 라고 웃으며 말하기도 하고,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수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나름대로의 답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너의 삶과 나의 삶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참된 행복과 구원을 갈망하는 인간에게 그 답을 제시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창조주이신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교회는 선포합니다. 그것이 각 개인에게 주는 교회의 도움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당신 모상대로 창조하셨고 인간을 죄에서 구해주셨으므로 그분만이 이런 문제에 완전한 해답을 주실 수 있다”(41항).
하느님의 존재가 인간 존재의 의의를 밝혀주는 해답이라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거나 인간의 자유의지를 박탈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또한 양심의 존엄성과 그 자유결정을 거룩히 존중하고 인간의 모든 재능을 하느님께 대한 봉사와 인간들의 행복을 위하여 이용하라고 끊임없이 권고하며 모든 사람에게 박애정신을 권장한다”(41항).
두 번째로, 교회는 인류 사회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사목헌장은 특별히 인류가 서로 일치를 이루는 데 있어서 교회가 도움을 주어야 하며 또 줄 수 있다고 합니다. “일치의 촉진은 바로 교회의 본질적 사명과 일치한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의 성사와 같은 것으로서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와 전 인류 일치의 표지요 연장이기 때문이다”(42항). 되짚어 생각해 보면 우리의 현실 안에서 일치되지 못한 모습,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너무나 많은 선(線)이 있기에 교회의 이 사명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초등학교 시절 책상 가운데 너무나 뚜렷하게 그어진 선은 나와 나의 짝을 갈라놓습니다. “넘어오면…”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서로를 갈라놓는 선을 너무나 자주 만나게 됩니다. 학교에서 보았던 수많은 6.25 한국전쟁 기념 포스터에는 한반도를 갈라놓은 선이 늘 등장합니다. 남과 북, 경상도와 전라도, 청소년과 어른, 남자와 여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갈라놓고 나라와 나라를 갈라놓고 종교들을 서로 갈라놓는 선들 때문에 갈등과 반목, 마찰과 심지어는 전쟁을 벌이는 지금의 현실은 우리를 무력하게도 만들지만 동시에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할 모습을 일깨워 주고 우리를 독려하기도 합니다.
너와 나를 갈라놓는 선, 높은 담은, 나를 지켜주고 나의 것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썩게 만들어 버립니다. 나의 것을 지키기 위해 더 높게 쌓는 담은 나를 어둠 속으로 몰고 갑니다. “교회가 현대 인류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도 실생활에 실천되고 있는 이 신앙과 사랑에서 발견되는 것이지 순 인간적 방법으로 외적 지배권을 행사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42항).
사순시기와 부활의 기쁨 속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 무엇인지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우리 인간의 일치, 인간 서로간의 일치를 위해 당신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교회가 인류의 일치를 위한 사명을 수행하는데 등불이 됩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고서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율법 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셨습니다”(에페 3, 14 - 15).
세상의 빛인 우리들(43항)
김영욱 신부(초등부주일학교 교사연합회)
▣「현대세계의 사목헌장」해설 회개와 쇄신이 기본정신인 제2차 바티칸공의회문헌「현대세계의사목헌장」의 해설을 통해 급변하는 사회 속에 던져진 교회의 모습을 찾고, 또한 가톨릭직장인들이 교회의 정신에 입각하여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함께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
참 고운 연두 빛으로 흔들리던 나뭇잎들이 더욱 푸르름을 더해가며 여름이 다가옴을 느낍니다. 비 온 뒤의 깨끗하고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파아란 하늘같은 어린이들을 생각해 보고, 푸르게 나를 감싸는 하늘같은 부모님의 마음을 생각해 보고, 티 없이 깨끗하신 마음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성모님을 생각하는 5월입니다.
물론 우리 주위의 현실은 높푸른 하늘보다는 무겁게 짓누르는 잿빛 하늘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나 어제 같은 오늘이 나를 짓누르고 오늘 같은 내일이 나를 힘들게 하여도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와 웃음이 희망을 잃지 않게 합니다.
우리의 여정은 이제 사목헌장 제4장 ‘현대 세계 안의 교회의 사명’의 마지막 부분에 와 있습니다. 또한 이 부분은 전체 1부 ‘부르심을 받은 교회와 인간’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됩니다.
제1부의 긴 여정을 마무리하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면 ‘내가 알고 있고 듣고 깨달은 신앙의 내용을 내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발바닥 신자’, ‘무늬만 신자’가 아닌 진정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신앙인으로 살기 위한 고민과 노력이기도 합니다.
성당에 처음 오는 예비신자들이 천주교에 대해서 실망하는 모습 중의 하나는 기존의 신자들이 성당 안에서의 모습과 성당 밖에서의 모습이 다를 때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백하는 신앙과 그들의 일상생활 사이의 모순은 현대의 중요한 오류 중의 하나라 하겠다. 구약에 있어서 이미 이런 스캔달을 예언자들이 강력히 규탄하였고 더욱이 신약에 있어서는 예 수 그리스도께서 중한 벌로 경고하셨다.”(43항).
사목헌장이 이렇게 강한 어조로 경고하는 것은, 우리가 겪어야 할 유혹과 삶의 모순을 몰라서가 아니라 유혹에 빠지지 말고 깨어있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식의 안일함과 나태함은 우리 자신을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 우리의 빛을 됫박으로 덮어두는 어리석은 신앙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 14)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빛이 되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빛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장난처럼 들릴 지도 모르지만 이 차이를 깨닫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거울을 보듯 자신의 모습을 성찰해 보면 내 안에는 참으로 많은 어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욕심과 미움으로, 부족함과 거짓으로, 이기심과 나태함으로 생겨난 이 어둠은 나를 짓누릅니다. 그래서 이 어둠을 벗어버리고 ‘빛이 되기 위해’ 애씁니다. 빛이 되기 위해 많은 다짐과 노력들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다짐과 노력 이전에 깨달아야 하는 것은 예수께서 ‘빛이 되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세상의 빛입니다. 우리 존재의 중심에는 예수께서 밝혀주신 생명과 사랑의 빛이 환하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 빛은 꺼지지도 않으며 그 어떤 어둠도 이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요한 1, 5)
세례성사 예식 중에 사제는 부활초에서 불을 붙여 새 영세자의 대부모에게 전해 줍니다. 대부모의 손을 통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빛이 전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제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러분(당신)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빛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빛의 아들(딸)로서 살아가며 신앙에 항구하여 하늘나라에 계시는 천사들과 함께 여러분(당신)도 재림하시는 주님을 영접할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그 빛을 간직하며 나만을 위해 비추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어둠-슬픔과 절망-을 밝혀 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 전반에 걸쳐서 행동적 역할을 맡은 평신도들은 세상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침투시켜야 할 뿐 아니라 인간 사회 한가운데서 범사(凡事)에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불린 것이다.”(43항)
이번 부활절 아침에 저는 어떤 성당의 오전 9시 미사를 집전하러 가게되었습니다. 지하철을 내려 계단을 올라가다가 계단 중간에서 구걸하는 할아버지를 보게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는 손에 두 개의 부활계란을 들고 있었습니다. 아마 지하철역 가까운 성당의 신자분이 자신이 받은 부활계란을 드린 것 같았습니다. 그 부활계란을 이리저리 살펴보시던 할아버지는 그 중의 하나를 깨서 껍질을 벗기고 맛있게 드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미래(?)를 위해서 저장해 두시려는 것이었는지 주머니에 넣으셨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부활계란을 깨는 모습이 저에게 충격을 준 것이었습니다. 부활계란이 예쁘다고 오랫동안 보관하게 되면 결국엔 썩고 맙니다. 깨지고 벗겨질 때에야 썩지 않고 다른 이를 위한 조그만 선물이 될 수 있음을 할아버지를 통해 깨달았습니다. 부활은 자신을 깨고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자신의 껍질 속에서만 웅크리고 있다면 결국엔 썩고 맙니다. 껍질을 깨는 아픔이 있기에 다른 이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귀한 선물이 됩니다.
어떤 분이 천주교 신자들은 사순시기는 잘 보내면서 부활시기는 제대로 보내지 못한다고, 기뻐할 줄 모른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모두도 부활의 증인이 되어 세상 안에서 기쁨의 소식을 전하며, 기쁜 하루 하루를 보내시기를 기도합니다.
혼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46-50항)
김영욱 신부(초등부주일학교 교사연합회)
▣「현대세계의 사목헌장」해설 회개와 쇄신이 기본정신인 제2차 바티칸공의회문헌「현대세계의사목헌장」의 해설을 통해 급변하는 사회 속에 던져진 교회의 모습을 찾고, 또한 가톨릭직장인들이 교회의 정신에 입각하여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함께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
한 해의 절반을 뒤로하고 남은 반을 시작하는 7월입니다. 사목헌장의 절반을 마치고 새로운 절반을 시작하는 것과 7월의 시작이 겹치는 것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사목헌장의 전반부가 인간 존엄성의 의미와 인간은 세상 안에서 개인적․사회적으로 어떤 사명을 수행해야하는가에 대한 원칙적인 내용을 다루었다면 제2부에서는 ‘현대’의 몇 가지 긴급한 과제를 다루게 됩니다. 마치 수학의 원리과 공식을 공부하고 그 원리와 공식을 가지고 실전문제들을 풀게 되는 경우와 비슷합니다.
“오늘날 일반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많은 과제 중에서 특히 혼인과 가정, 문화, 경제, 사회, 정치생활, 민족간의 유대와 평화를 들 수 있다. 이 같은 문제에 대하여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원리와 빛을 명백히 보여 줌으로써 이 복잡다단한 문제들의 해결을 찾는 데에 신자들을 지도하고 모든 사람들을 밝혀 주고자 하는 바이다.”(46항)
사목헌장이 발표되던 당시나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이나 긴급한 문제들의 내용은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목헌장이 언급한 긴급한 과제들이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글을 준비하면서 ‘복잡다단한 문제’라는 단어가 제 마음속에 깊이 다가옵니다.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과연 누구나 만족할 수 있는 해결책이 있을까? 가톨릭교회의 원칙적 입장을 확인하는 것이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것인가?
제1장은 ‘혼인과 가정의 존엄성’에 대해 다루게 됩니다. 2001년 통계청 보고를 보면 하루 평균 877쌍이 결혼했고 370쌍이 이혼했다고 하는데, 이는 오늘 내가 세 곳의 결혼식장에 갔다면 그 중 한 곳에서 결혼한 부부는 이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혼인과 가정의 존엄성이 무너져 가는 현실 앞에서 사목헌장은 먼저 현대인들이 잃어가고 있는 혼인과 가정의 신성성(神聖性)을 언급합니다. 혼인과 가정이라는 제도의 원천은 인간이 아닌 하느님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부부생활과 부부애로 깊이 맺어진 공동체는 조물주 친히 제정하셨고 조물주 친히 그 법칙을 주셨으며 결혼 당사자도 철회치 못할 인격적 동의의 계약으로 성립된다”(48항)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만나고 사랑하게 되어 결혼하는 것이 인간의 자유의사로써만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이기에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그 결합을 파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부부의) 깊은 일치는 인격과 인격의 상호교환이므로 자녀의 행복이 요구하듯이, 부부의 완전한 신의와 그 일치의 불가해소성(不可解消性)을 강요한다.”(48항)
부부는 둘이 아니라 한 몸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혼인의 불가해소성은 그 본래의 의미가 지향하는 바를 알려줍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 1615항에서 교회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혼인의 불가해소성에 대한 이 분명한 강조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할 수도, 또 실현할 수 없는 요구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부부들에게 모세의 율법보다 더 무겁고 감당하기에 벅찬 짐을 지우신 것은 아니었다. 죄로 인해 어지러워진 원래의 창조질서를 회복시키려고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나라라고 하는 새로운 차원에서 혼인생활을 하도록 친히 힘과 은총을 주신다. 그리스도를 따르고 자신을 끊어버리며 자신의 십자가를 짐으로써 부부들은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혼인의 본래의 의미를 이해하고 이를 생활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혼인의 이러한 은총은 모든 그리스도인 생활의 원천인 십자가의 열매이다.”
교회의 혼인 예식에서 부부가 될 신랑과 신부는 서로의 손을 잡고 “나는 당신을 내 남편(아내)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약속합니다”라고 서약합니다. 혼인의 이 서약은 단순한 계약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계약은 당사자의 합의나 다른 요소에 의하여 취소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혼인성사의 서약은 나의 남편, 아내가 될 사람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어 평생 공동 운명체로서의 삶을 살겠다는 서약입니다. 저는 혼인성사를 거행할 때 서로의 손을 뼈가 으스러지도록 꼭 잡으라고 합니다. 혼인성사를 거행할 때는 서로의 손을 꼭 잡을 수 있지만 앞으로의 삶에서는 마주잡은 손을 놓고 싶을 때가 너무나 많을 것입니다. 삶의 모진 풍파 속에서도 서로가 잡은 그 손을, 그 사랑의 결합을, 그 성스러운 서약을 포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온전히 자신의 전 존재를 내어주는 이 약속의 표현은 서약과 손을 잡는 것입니다. 서약을 마친 후 사제는 하느님께서 맺으신 것을 사람이 풀지 못할 것이라고 기도합니다. 즉 부부의 노력만이 아니라 혼인의 제정자시며 두 사람을 맺어주신 하느님의 은총의 힘이 두 사람을 지켜주고 그 결합을 굳건히 해 주심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법은 부부애의 뜻을 완전히 보여주고 부부애를 보호하며 참으로 인간다운 완성에로 이끌어 준다.”(50항)
혼인은 성소(聖召)입니다. 혼인의 첫 시작부터 혼인성소의 모든 의미를 다 알아듣고,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그 사랑의 약속을 삶의 여정 안에서 가꾸어 나갈 때 하느님의 부르심은 완성되어 갑니다.
“평생을 기약하고 한 사람과 결합하는 것은 어렵게 생각될 수도 있고 심지어 불가능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결정적이며 돌이킬 수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시고, 부부들은 이 사랑에 참여하며, 이 사랑이 그들을 지탱하고 힘을 주며, 또 그들이 신의를 지킴으로써 하느님의 성실한 사랑의 증인이 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가톨릭교회교리서 1648항)
처음의 마음으로(51-52항)
김영욱 신부(초등부주일학교 교사연합회)
▣「현대세계의 사목헌장」해설 회개와 쇄신이 기본정신인 제2차 바티칸공의회문헌「현대세계의사목헌장」의 해설을 통해 급변하는 사회 속에 던져진 교회의 모습을 찾고, 또한 가톨릭직장인들이 교회의 정신에 입각하여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함께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
해마다 7월이 되면 많은 교구와 수도회에서 사제, 부제서품식이 있습니다. “왜 하필 더운 여름에 서품식을 하는가?”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나름대로의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7월 5일이 한국의 첫 사제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축일이기에 그 날에 맞추어 서품식이 열리는 것입니다. 저 역시 7월 4일에 있었던 서울대교구 사제서품식에 참석하여 새 신부님들을 위해 기도하고 제가 서품 받던 그 날, 주님의 제단에 엎드려 기도했던 첫 마음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처음 시작과는 참 많이 변한 저의 모습이 부끄럽고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너무 멀리 온 것 같은’ 그래서 그 첫 마음으로 돌아가기가 어렵게도 느껴지는 시간 속에서 다시금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네 삶에 있어서 ‘첫’, 혹은 ‘처음’이라는 말은 상당한 매력으로 다가옵니다. 첫눈, 새해 첫날, 첫사랑 등의 용어는 우리네 삶에 있어서 처음이라는 이유만으로 기쁨을 주는 기억들입니다. 첫마음을 기억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로 돌아가기 위한 도피가 아닙니다. 현실을 버리고 도망가기 위해 처음의 모습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더욱 충실하며 미래를 성실히 준비하기 위해 처음의 마음과 처음의 시간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인 혼인과 가정의 부분을 다루면서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첫마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때문입니다. 본당에 있을 때 봉성체를 받으셨던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어느 날은 제가 두 분이 결혼하시던 그 순간을 기억하시느냐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 순간 병상에 누워 계시던 할아버지도, 몇 해 동안 병수발을 하셨던 할머니의 얼굴에도 작은 미소가 번져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두 분은 아주 정확히 그 때를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그 첫마음을 늘 간직하고 계시기에 60여 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살아 오셨겠구나 하고 혼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혼인의 처음 시작도 그리고 지금도 고통과 어려움뿐인 분들도 있으실 겁니다. 혹시 그러한 분들이 계시다면 제 기억 속에 있는 시원한 물 한 모금 같은 이야기를 나누어 드리렵니다.
아주 젊은 부부였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후에 같이 살게 되었고 제가 만났을 당시에는 갓난아기도 있었습니다. 그 두 분의 모습은 정말로 가난하고 힘든 처지였습니다. 여유 공간이라고는 없는 그런 좁은 집에서 힘겹게 살아가지만 부부가 늘 웃음은 잃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부인은 이미 세례를 받았고 남편이 세례를 받으려고 하는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혼인조당’ 중이라 세례를 받기 전에 혼인성사를 먼저 받아야 했습니다. 성모님의 승천 대축일을 전후한 주일이 세례성사 날짜였기에 8월 초에 혼인성사 날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혼인성사가 있기 바로 며칠 전에 부인이 화상을 입었습니다. 아주 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병원에 입원하고 치료를 받아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병원에서 혼인성사를 거행하기로 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나던 더운 여름날 저녁, 저와 수녀님은 병원으로 갔습니다. ‘병자성사가 아닌 혼인성사를 병원에서 하다니, 그것도 이렇게 더운 날!’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면서 준비를 하는데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하얀 웨딩드레스 대신에 환자복을 입은 신부와 땀에 흠뻑 젖은 신랑을 보면서 다들 겉으로는 웃음을 잃지 않았지만 마음은 무거웠습니다.
혼인 성사는 시작되었고 신랑과 신부가 두 손을 잡고 혼인서약을 하는 차례가 왔습니다. 혼인서약은 “나 ( )는 당신을 내 아내(남편)으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겠습니다”라는 내용입니다. 신랑은 휠체어에 앉아 있는 신부의 손을 꼭 잡고 혼인서약을 시작했습니다. 잘 하다가 ‘병들거나’라는 대목 전에 말없이 신부를 보았습니다. 온 몸에 화상을 입고 환자복을 입고 있는 자신의 평생반려자를 보면서 소리 죽여 울기 시작했습니다. 흐르는 땀보다 더 굵고 맑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고요한 침묵만이 병실에 가득했습니다. “괜찮아. 울지마 좋아질거야” 보다 못한 신부가 신랑을 위로하고 신랑은 흐느끼며 서약을 마쳤습니다. 신부의 차례가 되었는데 눈물과 흐느낌 때문에 시작도 하지 못했습니다. 서러운 눈물을 흘리며 한마디 한마디 혼인서약을 하는 동안 두 사람뿐만 아니라 함께 한 이들 역시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혼인성사가 끝나고 기념촬영을 하면서 눈물과 땀이 뒤범벅이 된 얼굴을 서로 바라보며 기뻐했던 부부였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많은 아름다운 모습 중에서 참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참 많은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은 가족입니다. 이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 - 가족이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 - 을 깨닫고 실천하는 사람은 많이 없습니다. 가족이 선물이라는 사실은 가족은 내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내 것이 아니라 공짜로 받은 사랑의 선물입니다. 아버지이기 때문에, 어머니이기 때문에, 남편이기 때문에 혹은 이러저러한 다른 이유로 지배하거나 소유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사랑으로 시작했던 그 첫 마음을 잃어 가는 가장 좋은(?) 모습일 것입니다.
사목헌장이 발표되던 때보다 더욱 많은 어려움과 문제들이 우리들의 가정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수많은 해결책들이 제시되지만 그 중의 한 가지는 첫 마음을 잃지 않도록 기억하고 내 삶의 가장 귀한 선물이 가족을 주신 하느님께 또 그 가족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 긴급한 과제-문화발전의 촉진(53-59항)
김영욱 신부(초등부주일학교 교사연합회)
▣「현대세계의 사목헌장」해설 회개와 쇄신이 기본정신인 제2차 바티칸공의회문헌「현대세계의사목헌장」의 해설을 통해 급변하는 사회 속에 던져진 교회의 모습을 찾고, 또한 가톨릭직장인들이 교회의 정신에 입각하여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함께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
사목헌장이 제기한 긴급한 과제 중의 두 번째는 문화 발전의 촉진이라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ꡐ문화ꡑ라는 단어가 붙은 많은 용어를 접하고 살아갑니다. 식사문화, 여행문화, 정치문화, 전통문화, 청소년문화 등등. 이렇게 문화라는 용어가 인간 생활 안에서 폭넓게 사용되는 것은 문화라는 것이 인간 삶의 어떤 특정한 부분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 생활의 총체적인 성격을 포함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목헌장은 이를 어떻게 정의할까요? ꡒ문화란 광의로는 인간이 정신과 육체를 연마하고 발전시키는 데 이용하는 모든 사물을 말한다. 인간은 지식과 노동으로 전세계를 지배하려고 노력하고 가정과 온갖 시민사회에 있어서 관습과 제도를 발전시킴으로써 사회생활을 더 인간답게 만들며 마침내 시대의 흐름 속에서 위대한 정신적 경험과 소망을 그 작품 속에 표현하고 전달하며 보존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발전과 더 나아가서 전 인류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ꡓ(53항)
인간이 자신의 존재 의미를 충만하게 실현할 수 있도록 형성한 삶의 구체적인 형태가 문화입니다. 비록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문화의 다양한 형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못하더라도 인간 삶의 총체성으로서의 문화 개념은 사목헌장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화를 지칭하는ꡐcultureꡑ는 라틴어ꡐcultusꡑ의 번역으로, 그 사전적인 의미는 먼저 경작, 재배를 뜻합니다. 이는 인간 삶의 터전인 땅을 가꾼다는 의미로, 파괴와 착취가 아닌 창조의 보존과 나눔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공경, 예배를 뜻합니다. 땅을 경작한다는 것은 신적인 것, 혹은 하늘(天), 하느님께 대한 경배와 그에 대한 감사의 예배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문화의 개념 안에는 종교적인 특성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물론 현재 쓰고 있는 문화의 개념에는 이런 종교적인 성격이 거의 사라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을 인정하면서 사목헌장은 복음과 문화와의 관계, 교회와 문화와의 관계를 언급합니다. 복음이 선포되는 곳은 상상 속의 장소가 아닌 인간이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자리입니다. 그 안에서 인간은 특별한 문화를 형성하며 그 영향을 받고 또 문화를 발전시키며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 선포와 문화는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교회는 당연히 복음과 문화의 관계, 교회와 문화의 관계를 성찰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다양하고 빠른 변화를 보이고 있는 문화들 속에서 과연 복음은 어떻게 그 빛을 발할 수 있으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 교회와 우리의 과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당신의 문화 안에서 어떻게 당신 말씀을 선포하셨으며 처신하셨는가?
첫 번째로 볼 수 있는 것은 복음은 그 민족, 사회, 개인의 삶을 규정하는 문화를 해체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뜻 앞에서 인간적인 가치들이 우선 할 수 없음을 예수께서는 보여주십니다. ꡒ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ꡓ(마태 6, 31 - 33)
ꡒ다른 사람에게ꡐ나를 따라오라ꡑ하고 말씀하시자 그는ꡐ선생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께서는ꡐ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여라ꡑ하셨다.ꡓ(루가 9, 59 - 60) 이러한 말씀들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혹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당혹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인간 삶을 규정하는 문화-먹고, 입고, 장례를 치름 등-를 해체하기에, 그분의 말씀 특히 회개에로의 초대는 참으로 거북하고 피하고 싶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분은 당시의 문화 안에서 당신의 기쁜 소식을 전하십니다. 이는 다양한 비유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분은 빵을 만들 때에 필요한 누룩을 통해서, 씨를 뿌리는 농부의 모습, 혼인 잔치의 모습, 당시에 자주 볼 수 있었던 돈을 빌리고 갚는 모습을 통해서 당신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즉 말씀을 듣는 청중들의 문화를 통해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결국 예수께서는 인간 문화의 해체와 수용을 통해 전혀 새로운 삶의 양식을 알려주시고 요구하신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의 삶의 모습, 다른 말로 하자면 하느님 나라의 문화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구원의 메시지와 인간 문화 사이에는 여러 가지 관계가 있다. 하느님께서는 혈육을 취하신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당신을 완전히 보여주시기까지, 당신 백성에게 당신을 계시하실 때 각 시대에 고유한 문화에 적응시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도 시대의 변천을 따라 여러 환경 속에서 살아오면서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모든 백성들에게 널리 설교하며 설명하고 그것을 더 깊이 연구하여 깨닫고 전례와 여러 계층의 신자 공동체 생활 가운데서 더 잘 표현하기 위하여 문화의 소산을 이용하여 왔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모든 시대의 모든 백성들에게 파견되었으므로 어떠한 민족이나 국가에도, 또 어떠한 특수 관습이나 고금의 어떠한 생활 습성에도 불가분의 배타적 관계로 얽매이지 않는다. 고유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스스로의 보편적 사명을 의식하고 있으므로 여러 형태의 문화와 접촉할 수 있고 또 그로써 교회와 여러 가지 문화가 함께 풍요해진다.ꡓ(58항)
우리 삶의 양식은 분명 현재의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그 안에서 복음의 눈으로 그러한 삶의 양식을 성찰하고 하느님 나라의 삶의 모습으로 바꾸어 나가는 것, 이것이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경제생활(63-72항)
김영욱 신부(초등부주일학교 교사연합회)
▣「현대세계의 사목헌장」해설 회개와 쇄신이 기본정신인 제2차 바티칸공의회문헌「현대세계의사목헌장」의 해설을 통해 급변하는 사회 속에 던져진 교회의 모습을 찾고, 또한 가톨릭직장인들이 교회의 정신에 입각하여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함께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
얼마 전 같이 활동하는 교사들에게 가을이 오면 어떤 노래가 떠오르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라고 시작하는 ‘가을편지'도 있고, 윤도현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라는 노래도 젊은 사람들이 많이 좋아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가을노래는 참 많습니다. 김광석의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신계행의 ‘가을사랑’, 안치환의 ‘귀뚜라미’, 패티 김의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이문세의 ‘가을이 오면’ 등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10월의 마지막 날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이용의 ‘잊혀진 계절’도 있군요. 깊어가는 가을을 가을답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사목헌장의 다른 주제들도 저에게는 어렵고 다루기 벅찼는데 이번엔 정말로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번에 다룰 곳이 별로 익숙하지 않은 경제-사회생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 안에서, 세상과 함께 생활하기에 사목헌장은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경제 문제를 바라보고 그 안에서 복음적인 원칙이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사목헌장이 제시하는 경제생활 전체를 지배하는 몇 가지 원칙들은 67항에서 72항까지에 나옵니다. 이 몇 가지 원칙들에는 노동, 노동 조건, 여가(67항), 기업(경영) 참여, 노동조합, 노동쟁의(68항), 투자와 통화(70항), 재산 취득, 사유권, 대지주(71항)가 주제로 나옵니다. 이 원칙들의 전제는 경제발전이란 인간에게 봉사하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생산의 기본 목적은 단순한 생산품의 증가나 수익이나 지배권력이 아니라 오직 그것은 인간에게 대한 봉사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은 인간의 물질적 요구와 지적, 도덕적, 정신적, 종교적 생활의 요청을 포함한 인간 전체를 말하는 것이며 인종과 지역의 차별 없이 각 사람과 사람들로 구성된 모든 집단을 뜻한다.”(64항) 특정한 소수의 이익만을 위한 경제 발전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공동선을 지향하는 경제 발전을 사목헌장은 주장합니다. 물론 사목헌장은 당시에 엄청난 차별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차별을 제거하고 평등을 이루어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개인의 권리와 각 민족의 특성을 존중하면서 정의와 평등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개인적 내지 사회적 차별 대우와 결부되어 가끔 증대해 가는 현재의 경제적 불평등을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제거하도록 계속 노력해야 하겠다”(66항).
이러한 경제적 평등에 관해서는 69항에서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이 이용하도록 창조하셨다. 따라서 창조된 재화는 사랑을 동반하는 정의에 입각하여 공정하게 풍부히 나누어져야 한다.(⋯) 누구나 이 재화를 사용함에 있어서 합법적으로 소유하는 외적 사물을 사유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공유물로도 여겨야 한다. 즉 자신에게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유익을 줄 수 있도록 사용하라는 뜻이다. 여하간 모든 사람은 자신과 가족들을 위하여 넉넉한 재화를 소유할 권리를 가진다”(69항).
이 부분은 현재 세상의 경제 원칙과 그 모습들에 복음의 빛을 전해줍니다. 나와 너의 분명한 구분과 나의 것에 대한 양보할 수 없는, 그래서 전쟁도 불사하는 이 세상에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다른 이는 넘어서는 안 되는 많은 금(선)들을 그어 놓고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공의회는 평등의 정신과 나아가, “모든 사람은 자신과 가족들을 위하여 넉넉한 재화를 소유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선포합니다. 마태오 복음 20장 1절에서 16절에는 ‘포도원 일꾼과 품삯’이라는 예수님의 비유 말씀이 나옵니다. 어느 포도원의 주인이 자신의 포도밭에 일할 일꾼들을 모으러 나갑니다. 새벽에도 오전 9시에도, 그리고 오후 5시에도 거리에 나가 사람들을 불러 모아 일을 시켰습니다. 오후 6시에 품삯을 치르는데 오후 5시에 일한 사람이나, 오전 9시에 일한 사람도, 새벽에 와서 일한 사람도 똑같은 품삯을 받게 됩니다. 당연히 새벽부터 나와서 일한 사람이 화를 냈겠지요.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일한 자기네들과 오후 5시에 와서 1시간 동안 어슬렁거렸던 사람들과 똑같은 품삯을 받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따졌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 품삯을 받았으니 상관없다고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성서에 나온 그 사람처럼 화를 내며 일한 시간만큼 품삯을 지불하라고 하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원칙은 일한 만큼 받는 것, 투자한 만큼 거두고 싶은 것, 내가 노력한 만큼 얻고 싶은 것입니다. 경제부분에서만이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그 원칙은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오후 5시에도 일거리를 찾지 못해 빈둥거리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으로 치부되고, 그렇게 해서 그 가족들이 굶주리게 되면 부모를 잘못 만났느니, 세상이 참 더러우니, 불쌍하다느니 하면서 나와는 별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전혀 다른 원칙을 가지고 계십니다. 오후 5시에도 일거리가 없는 그 사람도 한 가장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면 그에게 필요한 만큼의 품삯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과 가족들을 위하여 넉넉한 재화를 소유할 권리를 가진다.”라는 사목헌장의 선포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교회의 소망입니다. 이러한 원칙이 현실 안에서도 통용되고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남이 해야 할 사명이 아니라 나의 사명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굶어 죽어가고 있다면 먹을 것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내가 나누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름답게 물들어 가는 가을처럼 우리네 삶도 서로 나누며 사랑으로 물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정치와 그리스도인(73-76항)
김영욱 신부(초등부주일학교 교사연합회)
▣「현대세계의 사목헌장」해설 회개와 쇄신이 기본정신인 제2차 바티칸공의회문헌「현대세계의사목헌장」의 해설을 통해 급변하는 사회 속에 던져진 교회의 모습을 찾고, 또한 가톨릭직장인들이 교회의 정신에 입각하여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함께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
미사 때 드리는 ‘보편 지향 기도’ 중에는 가끔씩 ‘위정자들을 위해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내용은 대부분 위정자들, 혹은 정치인들이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에 맞게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기도할 때마다 무엇인가 허전한 마음이 들고는 합니다. 이는 ‘과연 그들이 우리가 이렇게 기도한다고 바뀔까?’라는 생각과 어쩌면 정치, 혹은 정치인에 대한 선입견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입견은 제 개인만의 것이기보다는 이 나라 역사 안에서 파생되어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정치인들의 부정부패와 권력을 휘어잡고 다른 이들을 억압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붙인 그들의 모습에서 청렴결백하고 진정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정치인들을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어리석은 짓이라는 생각까지 들게 합니다. 그래서 정치적 무관심이 커져가고 선거 때만 되면 투표율이 최하를 기록했다는 보도가 더욱 정치적 무관심을 조장하고 그러한 무관심을 일부러 조장하는 것도 정치세력들의 숨은 의도라는 생각이 들면 더욱 답답해집니다. 이러한 답답함이 올바른 정치를 위한 고민으로 연결되기 보다는 쉽게 무관심의 악순환으로 연결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사목헌장 73항부터 76항까지는 ‘정치 공동체의 생활’이라는 제목으로 정치에 관한 부분을 다룹니다.
신부와 ‘조폭’의 공통점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갑자기 조폭이 등장해서 이상하게 생각하시겠지만 공통점들 중에는 ‘검은 옷을 즐겨 입는다.’와 ‘남자들끼리 떼 지어 모여 다닌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생각해 보아도 공통점입니다. 그렇다면 정치인과 신앙인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재미있는 대답도 있을 수 있겠지만 사목헌장을 통해서 생각해 보면 진정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정치 공동체는 공동선을 위해서 존재하고, 공동선 안에서 정당화되고 그 의의를 발견하며, 공동선 안에서 비로소 고유의 권리를 얻게 된다. 공동선은 개인과 가정과 단체가 보다 완전하게 보다 쉽게 자기완성에 도달할 수 있는, 사회생활의 모든 조건들의 총체를 내포한다.”(74항) 즉 정치 공동체의 본질과 목적은 공동선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바로 공동선을 지향한다는 것이 신앙인과 정치인들의 공통점인 것입니다. 선거철이 되면 우리는 주변에서 우리 사회와 지역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많은 일꾼들을 만나게 됩니다. 사회와 지역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 힘없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서민들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당’이며 바로 ‘내’가 그 사람이라고 외치는 목소리도 듣게 됩니다. 그들이 외치는 내용은 신앙인의 삶과 닮아 있습니다. 우리 역시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고, 목마른 이들에게 마실 것을 주고, 헐벗은 이를 돌보는 것이 신앙인의 사명이라고 알고 또 그렇게 실천하고 있습니다.(마태 25, 31 - 46 참조)
따라서 정치 공동체와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존재이유인 공동선을 지향하고 공동선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에 대해서는 교회 역시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국가 복지에 헌신하며 이런 임무의 중책을 수락하는 사람들의 활동을 교회는 찬양하며 높이 평가하는 바이다.”(75항) 그러나 동시에 사목헌장은 정치 공동체와 교회의 활동에 대한 구분, 다른 점을 언급합니다. “다원적 사회에 있어서는 정치 공동체와 교회의 관계를 올바르게 보아야 하며, 신자들이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 그리스교적 양심에 따라 시민으로서 자기 이름으로 행하는 일과 교회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과 교회의 이름으로 사목자들과 함께 행하는 일을 명백히 구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76항) 공동선을 지향한다는 것의 공통점은 있지만 그 본래의 뿌리는 엄연히 구별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와 신앙인의 삶은 권력을 통한 지배의 삶이 아니라 섬김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권력에 대한 의지를 포기합니다. “확실히 현세 사물과 인간 조건에 있어서 현세를 초월하는 것과는 서로 깊이 결합되어 있다. 따라서 교회도 그 고유한 사명이 요구하는 한계 내에서는 현세 사물을 이용한다. 그러나 교회는 국가 권력이 제공하는 특권에 희망을 걸지는 않는다.”(76항)
이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입니다. 권력은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편하게 합니다. 권력이 존재하는 곳, 그래서 명령과 복종이 존재하는 곳, 지배와 경쟁이 있는 곳에서는 서로 섬기는 모습보다는 더 높은 권력을 향한 경쟁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제자들) 가까이 불러놓고 ‘너희도 알다시피 이방인들의 통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또 높은 사람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사이에서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로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하셨다.”(마르 10, 42 - 45)
이 말씀이 정치 공동체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연결되거나 생활 안에서의 정치적 실천을 축소하려는 뜻이 아니라 신앙인의 삶의 기반은 권력이 아닌 사랑에 있음을 일깨워 주시는 말씀입니다. 권력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일상생활 안에서 남을 지배하는 편안함이 아니라 남을 섬기는 사랑의 길, 비록 고통과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섬기는 모습을 보여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합시다.
평화의 증진과 국제 공동체 촉진(77-93항)
김영욱 신부(초등부주일학교 교사연합회)
▣「현대세계의 사목헌장」해설 회개와 쇄신이 기본정신인 제2차 바티칸공의회문헌「현대세계의사목헌장」의 해설을 통해 급변하는 사회 속에 던져진 교회의 모습을 찾고, 또한 가톨릭직장인들이 교회의 정신에 입각하여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함께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하시죠? 흔히 말하듯 다사다난했던 2003년도의 마지막 달인 12월입니다. 그런데 저희가 함께 걸어온 사목 헌장의 해설의 여정도 마지막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우연의 일치는 ‘마지막’이라는 부분이 겹쳤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사목헌장의 마지막 주제는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전례적으로 대림시기를 보내고 성탄시기를 맞이하는 우리의 신앙생활과도 일치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평화의 왕이신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탄을 맞이한 교회는 ‘하늘 높을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평화!’라고 노래하게 됩니다. 평화의 노래를 우리가 목청껏 부르는 것은 지금의 현실이 평화를 너무나 목말라 하기 때문입니다.
사목헌장의 마지막 부분인 5장의 제목은 ‘평화의 증진과 국제 공동체의 촉진’입니다. 17개 항을 하나로 묶어 다룬다는 것이 다소 무리인 듯 느껴질 수 있겠지만 ‘평화’라는 하나의 주제 아래 전체를 맺음말처럼 바라볼 수 있기에 한 번에 다루고자 합니다.
평화를 증진하고 국제 공동체의 협력을 촉진하는 공의회의 가르침은 “전쟁의 광란과 위협에서 오는 심한 고통과 불안이 사람들 사이에서 아직 가셔지지 않은 오늘날 인류 가족 전체는 그 성숙 과정의 최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77항)라고 당시의 현실에 대한 진단부터 시작됩니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인류 가족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더욱 성숙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전쟁과 폭력의 고통과 불안 속에 있습니다.
얼마 전 어느 잡지에 나온 세계 분쟁 지도를 본 적이 있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폭력, 대립의 모습은 ‘진정한 평화란 가능한 것일까?’ 라는 질문을 하게 합니다.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 그리고 이어지는 파병문제, 북한과의 관계 등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관련된 전쟁과 폭력의 모습에서 지금의 현실에서 평화의 모습은 무엇이며, 어떻게 가능한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이런 세상의 고민에 대해 사목헌장은 먼저 평화가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평화는 전쟁 없는 상태도 아니요, 적대세력간의 균형 유지만도 아니며, 전제적 지배의 결과도 아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평화는 정의의 실현인 것이다. 인간 사회의 창설자이신 하느님께서 인간 사회에 부여하신 질서, 또 항상 보다 완전한 정의를 갈망하는 인간들이 실현해야 할 그 질서의 현실화가 바로 평화인 것이다. (…)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타인과 타 국민, 그리고 그들의 품위를 존경하려는 확고한 의지와 형제애의 성실한 실천이 평화 건설을 위해 절대로 필요하다. 이렇게 평화는 정의의 내용을 초월하는 사랑의 결실이다.”(78항)
평화는 정의의 실현이며 사랑의 결실입니다. 그렇기에 평화는 하느님의 선물이요, 부활하신 예수님의 선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발현하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요한 20, 19)하고 인사하셨습니다. 타인을 위하여 생명까지도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랑의 결실이 평화임을 예수님께서는 당신 죽음과 부활로 보여주셨습니다.
평화의 본질을 밝힌 후 사목헌장은 전쟁, 특히 전면 전쟁을 거부하고 군비경쟁으로 인한 전쟁요인의 확대를 경고합니다. 이어서 나라와 나라사이의 전쟁을 금지하고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 국제 협력을 제안합니다. “여러 나라가 뜻을 합하여, 어떤 전쟁이든지 절대로 금지할 수 있는 시대를 준비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물론 모든 국가들이 인정하는 국제적 공권(公權)이 확립되어야 하고 이 공권이 모든 국가의 안전과 정의의 준수와 권리의 존중을 보장해 주기 위해서는 효과적인 권한을 보유해야 한다.”(82항)
공의회의 선언과 바람과는 상관없이 명목상으로는 모든 국가의 안전과 정의와 권리의 존중을 위한 국제적 기구들이 선진국들의 자국의 이익추구를 위한 또 다른 전쟁터가 되는 현실의 모습을 우리는 자주 보게 됩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듯이 평화를 위한 노력은 인간적인 절망과 폭력 앞에서도 계속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공의회의 교부들은 사목헌장을 마지막 부분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신앙인들의 역할을 되새겨 줍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모든 사람 안에서 형님이신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말과 실천으로써 실제로 사랑하며, 이로써 진리를 증명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의 신비를 다른 사람들과 서로 나누는 그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써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 가슴속에 생생한 희망을 일으켜 줄 수 있다.”(93항)
우리의 얼굴을 파고드는 매서운 겨울바람처럼 우리의 삶을 위협하며 다가오는 많은 절망적인 순간에서도 우리의 눈을 똑바로 뜨고 희망의 자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희망의 자리는 말구유에 누워있는 한 아기입니다. 포대기에 싸인 갓난아기가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라는 사실,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는 아기가 힘과 욕심으로 살아가는 세상을 밝히는 구세주라는 사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힘 있는 사람을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갓 태어난 아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유력한 사람 앞에서 우리는 부러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말구유에 누운 아기 앞에서 부러움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평화는 정의의 실현이며 사랑의 결실이며, 이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하며 기쁜 성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을 시작하며(1항)
박영훈 토마 수사(구속주회)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제 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평신도는 사회의 누룩으로 세상에서 주 예수의 부활과 생명의 증인이 되어야 하고, 평신도를 통해서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에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의 해설을 통해 가톨릭직장인들이 삶의 일터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
ꡒ야훼여, 나는 당신만을 믿사옵니다. 당신만이 내 하느님이시라 고백하며 나의 앞날을 당신의 손에 맡기나이다.”(시편 31, 14)
지금 이 글을 준비하는 마음이 위 시편의 말씀과 같습니다. 오로지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조심스럽게 마음을 열어 보고자 합니다.
2004년에는 직장 공동체 여러분과 함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을 가지고 함께 묵상해 보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한 일꾼으로서의 저는, 모두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고취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아직 미약하고 부족한 우리들의 신앙이지만 그 부족함을 주님께서 키워주시리라 믿으며, 우리의 소명에 대한 굳은 신앙을 가질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그리할 때 ‘사람의 몸은 하나이지만 그 몸에는 여러 가지 지체가 있고 그 지체의 기능도 각각 다릅니다.(로마 12,4)’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맡은 소임에 충실한 신앙인으로 자리할 것입니다.
먼저 ‘평신도 사도직’의 개념을 정리하고 시작하는 것이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먼저 ‘평신도’라는 말은 희랍어 ‘λαικοꐠ’(라이코스)에서 유래한 말로, 원래 ‘군중, 사람들, 인구’를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성서 상에서 이 단어의 의미는 모두가 새로운 이스라엘, 즉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을 이룬다는 보편적 교회관(敎會觀)을 드러내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새로운 이스라엘, 새로운 하느님 백성과 관련이 있는 ‘평신도’라는 말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며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에 속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직’의 의미는 ‘사도’를 뜻하는 라틴어 ‘apostolus’(아포스톨루스)라는 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용어는 권위의 부여에 대하여 보다 발전된 개념으로 사용되었고 대리자처럼 주로 메시지나 임무의 위임에 관련되어 사용되었습니다. 보냄을 받은 사람은 그를 보낸 사람을 대리하며, 이러한 보냄과 위임에는 자신에게 그러한 사명을 위임한 이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이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신도 사도직’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백성으로서 주님의 파견을 받은 복음의 증거자인 것입니다.
요즘 우리들은 ‘정보화, 국제화, 다양화’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이 말들은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대표하는 표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분주히 일하고 있는 모습 속에서 많은 분들이 좋은 결실을 맺기를 희망합니다. 그렇지만 그 국제화와 정보화를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어려움을 감수해야만 하는 모순적인 상황 역시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보랏빛 청사진 이면에 담겨있는 인간성 소외와 빈부의 격차 등은 마음속에 깊은 골을 만들고 있으며, 오히려 ‘획일화’하려는 모습들이 아닌가 하는 우려 또한 됩니다. 얼마 전에는 경제적인 압박에 못 이겨 일가족이 모두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꽃다운 나이에 수능시험의 결과에 비관해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프고 슬픈 일입니까!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 모습을 보시고 얼마나 아파하셨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깨어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마련하신 은총을 얻기 위해 깨어서 기도해야 하고, 깨어 이웃의 아픔과 슬픔을 바라보려고 해야 합니다. 이런 시기에 교회 안에서 평신도들의 역할은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내 이웃, 내 직장 동료들을 위해 마음을 열고 함께 하려는 마음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고민을 들어주고 슬픔을 나눌 수 있는 마음은 현대가 지향하는 것들 속에 드리운 어두움을 밝은 빛으로 비춰줄 수 있습니다. 또한 최근에는 가톨릭교회를 떠나 이 시대가 만들어내 새로운 종교로 개종하는 신자분들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는 교회에 대한 올바른 의미와 지식을 갖지 못하고 감정에 치우쳐 자신의 감정에 따라 하느님을 만들어내는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더 복잡한 문제들이 그 안에 숨겨져 있었겠지만, 중심을 놓치고 있지 않나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이런 모습들 속에서 공의회는 우리 모두가 복음화의 지도자가 되기를 촉구합니다. 평신도는 하느님 앞에서 낮은 위치에 있는 부류가 아닙니다. 하느님 앞에서 모두 함께 공존하고 모두 함께 하느님의 사업 동참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본 교령에서는 평신도 사도직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오늘에 와서 평신도들로 하여금 자신의 책임을 의식하고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와 교회에 봉사하도록 움직여 주시는 성령의 활동이 뚜렷해진 것은 다방면에 걸쳐서 평신도 사도직이 긴박하게 요청된다는 표시라 하겠다.”(1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은 모든 교회의 구성원들이 함께 교회를 이끌어가는 ‘친교’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신도 사도직이라 함은 교회 안에서 모든 이들이 친교를 이룰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인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두 함께 일치를 이루도록 희망하고 친교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직장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은 작은 공동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 안에서 친교의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며,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최전방 부대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선교사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제1장 사도직에 불린 평신도
박영훈 토마 수사(구속주회)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제 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평신도는 사회의 누룩으로 세상에서 주 예수의 부활과 생명의 증인이 되어야 하고, 평신도를 통해서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에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의 해설을 통해 가톨릭직장인들이 삶의 일터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
지금 제가 머물고 있는 곳은 산으로 둘러싸인 곳입니다. 산 중턱에 위치한 곳이라 야생 동물들이 많습니다. 겨울철이 되어서인지 먹을 것을 찾아 저희 수도원을 찾아옵니다. 간밤에 눈이 내렸습니다. 살포시 쌓인 눈 위로 난 발자국을 보면서 어떤 동물이 왔다 갔는지 알게 됩니다. 잠시 그 발자국을 보면서 마음의 눈을 지그시 감아봅니다.
‘나는 어떤 발자국을 남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발자국을 따라 걸어가는 것이 바로 우리 신앙인들이 걸어가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라 말씀하셨습니다. 평신도로 불리움 받았다는 것은 바로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임무를 부여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평신도 사도직은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백성으로서 주님의 파견을 받은 복음의 증거자가 되는 활동이고, 그 활동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와 일치할 수 있습니다.
평신도 사도직 교령 제1장을 시작하면서 ‘증거‘라는 말을 보게 됩니다. 증거는 우리가 경험하고 배운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에 대해 알아야 하고 그리스도를 만나고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증거한다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말씀을 내 생활 속에 옮겨 놓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통해서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당신을 증거하셨고, 우리는 그 증거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그분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이 바로 ‘회개와 용서의 삶’이었기에 당시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언제나 예수님을 시기하였고, 당시 지도자들로서는 예수님의 정신과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완성하지 못한 임무를 제자들에게 맡기셨고 다시금 지금의 우리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은 주어졌습니다. 그 사명은 바로 ‘하느님 나라를 지금 이 자리에 실현’하는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평신도 사도직을 교회의 설립과 같이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참조, 평신도교령2항). 따라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교회를 이루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구원활동에 적극적인 동참을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사도직을 수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평신도 사도직에 대해 정의를 내리기를 “평신도 사도직은 교회의 구원 사명 자체의 한 부분이며, 주께서 친히 성세와 견진을 통하여 모든 사람을 이 사도직에 부르시는 것이다(교회헌장 33항).” 여기서 ‘교회의 구원사명 자체’라는 말은 구원사업에 있어서 성직자의 사도직 활동에 협조만을 뜻하는 소극적인 개념을 넘어서는 것이며, 또한 ‘주께서....부르신다.’라고 언급하는 것은 평신도의 활동이 성직자의 의지가 아니라 하느님의 의지가 부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평신도 사도직의 근거는 ‘세례성사와 견진성사’에서 출발합니다. 평신도는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었기에 그리스도의 제사에 봉헌되며, 이것은 사도직의 첫 걸음을 의미합니다. 그럼으로 평신도 사도직을 수행하는 것은 세례의 의미를 더욱 깊고 돈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례는 과거의 낡은 옷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희망의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직을 수행하면서 우리는 개인의 신앙과 공동체의 신앙을 함께 키워갈 수 있는 것이고 세례를 실현해 가는 것입니다. 또한 견진성사를 통해 평신도들은 더욱 견고해지며, 세상에 파견되어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교회를 수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진성사는 성령의 은총에 의해 이루어지고, 특히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사도직의 원천과 정점은 ‘성체성사’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일치 및 교회와의 일치는 성체성사를 통해서 완전해지기에 성체성사는 사도직에 있어서 정점이요 원천인 것입니다.
평신도의 고유한 특성은 ‘세속 영성생활’에 있습니다(교회헌장 31항 참조). 이것은 평신도가 세속 속에서 사도직을 수행해야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에 대해 평신도 교령 2항과 3항에서 평신도 사도직의 세속적 영성생활을 잘 나타내고 있다. 우리에게 ‘세속’이라는 말이 조금은 부정적으로 들리기도 하지만, 세속을 세상이라는 말로 바꾸어 생각한다면 우리가 행하는 사도직은 세상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증거하는 것이 됩니다. 특히 여기서 발견되는 것은 세속은 더 이상 부정적인 곳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이 실천되어야 하는 복된 곳이라는 점입니다. 즉 하느님 나라가 임하는 곳으로서,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세상에 임하신 것과 같이 이러한 곳에서 평신도는 사도직을 수행함으로써 하느님의 구원을 받고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우리가 활동하는 삶의 장이 되는 것이며 세상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 받고 있습니다. 그런 긍정적인 활동의 무대인 세상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성을 삶으로서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은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이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섞지 않고 구원되게 하기 위해서 소금이 되셨고, 우리들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쳐주시기 위해 등대와 같은 빛이 되셨습니다. 세상이 더욱 살기 어렵고 인간이 다른 물질들로 평가되고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의 올바른 빛이 되어 세상 곳곳에서 빛이 될 수 있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은 그리스도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제2장 평신도사도직의 목표(5-8항)
편집부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제 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평신도는 사회의 누룩으로 세상에서 주 예수의 부활과 생명의 증인이 되어야 하고, 평신도를 통해서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에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의 해설을 통해 가톨릭직장인들이 삶의 일터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
작년 이맘 때 무렵, 어느 날 출근하여 들어선 사무실 안에서 놀라운 일을 발견했습니다. 축일 선물로 받았던 창가의 난초 화분에서 옅은 연녹빛의 새 촉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소 바지런하지 못한 성격으로 화초를 키워본 적이 없는데다가 명동의 탁한 공기와 쉴 새 없이 뿜어대는 담배연기 속에서도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덕분에 영양제도 사다 꽂아주고, 촉도 닦아주는 등 평소의 저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비록 1년이 지난 지금까지 꽃을 피운 적은 없지만 무럭무럭 커가는 것이 마냥 신통하기만 하고, 결국은 잘 키워보자는 쪽으로 목표를 갖게 되었습니다.
무언가 진행되는 일들은 목표가 있기 마련입니다. 설정되어 있는 목표는 일의 진행과정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그 과정이 엇나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볼 수 있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직무, 곧 평신도 사도직 역시 이러한 목표를 지니고 있으며, 제2장(5~8항)이 그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 성업은 본래 사람들을 구원할 목적을 가졌지만, 현세 질서를 개선하려는 목적도 가지고 있다.”(5항)
공의회의 교령은 위와 같이 사도직의 목표를 두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업적과 긴밀히 연결된 것인 바, 바로 ‘복음전파와 성화’라는 직무와 ‘현세 질서의 복음화’라는 직무입니다. 비록 두 직무로 나뉘어져 있기는 하지만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깊은 연관 속에서 함께 수행해야 할 하나의 사명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즉 신앙의 근본 목적은 ‘성화’되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구원이므로,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이들이 당연히 가져야 할 목표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도록’ 세상 속에 복음정신을 침투시켜 복음적 가치들이 세상을 이끄는 원리가 되도록 노력해나가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와 성화’라는 직무에 대해 공의회는 이렇게 천명합니다.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은총을 받음으로써 이루어지는 인간 구원을 목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와 그 지체들의 사도직은 말과 행동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에 알리고, 그리스도의 은총을 전해줌으로써 수행된다. … 이 성스러운 교회회의는 평신도들이 각기 재능과 지식에 따라, 교회의 정신대로 그리스도교의 원리를 밝혀주고, 옹호하며, 현대의 여러 문제해결에 적응시켜야 할 자신의 임무를 보다 열심히 수행하도록 권고하는 바이다.”(6항)
‘성화’(聖化)란 다름이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의 거룩함에 참여함으로써 얻게 되는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이가 구원에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 스스로가 노력하고, 또 자신의 주변에 그러한 기회가 제공되도록 복음을 선포해야 함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사람이 되시어 행하시고 가르치셨던 그 사명을 이어받는 것이요, 그리스도인 각자가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수행해야 할 당연한 직무입니다.
앞의 것이 ‘개인의 성화’와 관련된 측면의 직무라면, 뒤의 직무는 한발 더 나아가 전 세계적이고 우주적인 구원을 위한 보편 직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창조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세상의 완성을 위해,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서도 충실하게 자신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곧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모든 피조물이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로마 8,21)을 위해 길을 닦아 나가는 것입니다.
“현세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은 사람들이 마음을 합하여 현세 질서를 마련하고 끊임없이 완성해 나아가는 일이다. … 사람들이 현세 질서를 바로잡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로 향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온 교회의 임무이다. … 윤리적 내지 영적 도움을 제공하는 것은 사목자들의 임무이다. 평신도는 현세 질서의 쇄신을 고유의 임무로 알고, 현세 질서 안에서 복음의 빛과 교회의 정신의 인도를 받아 그리스도교적 사랑으로써 구체적으로 직접 행동해야 한다.”(7항)
세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은 ‘세속성’을 고유한 본성으로 지니게 됩니다. 자신이 몸담고 살고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직무는 자신이 처한 삶의 자리를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환경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에 대한 것입니다. 교회가 인권과 생명을 수호하고 사회정의를 위해 목소리를 모으며 창조질서의 회복을 위해 전개해나가는 다양한 운동들은 이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직무의 실천에 있어 공의회가 특히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애덕행위라 부르는 ‘자선사업’입니다. “교회는 초기에 있어서 성체 전례(미사)에 '애찬'(Agape)을 겸함으로써, 교회 전체가 그리스도 주위에 사랑의 끈으로 뭉쳐 있음을 표현하였다. 이와 같이 교회는 언제나 이 사랑의 표로 식별되며, 다른 사람들의 자선 사업을 기뻐하는 동시에, 자선사업은 교회의 의무요 양보할 수 없는 권리임을 강력히 주장한다.”(8항)
‘직무’라는 말을 듣게 되면 하나의 의무조항 같아 으레 부담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길이요, 한 인간의 단순한 선행을 넘어서서 그리스도의 세상 구원을 위한 업적에 협조자가 되는 권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 일을 하고 계시며 그 안에 복을 담아놓았기 때문입니다.
이웃 사랑과 우리들의 사도직
-제3장 사도직의 여러 분야(9-12항)
박영훈 토마 수사(구속주회)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제 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평신도는 사회의 누룩으로 세상에서 주 예수의 부활과 생명의 증인이 되어야 하고, 평신도를 통해서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에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의 해설을 통해 가톨릭직장인들이 삶의 일터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완성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할 때에 완성된다고 말씀하십니다(참조: 마태 22,34-40). 이웃 사랑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의 이웃들을 사랑하시기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느님 사랑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순시기의 마지막을 보내고 새 생명의 탄생인 부활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마지막에 우리들이 간직하고 만나게 될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숨죽이며 실의에 빠져 있던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식과 빈 무덤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모습을 ‘봄(보다)’으로서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고 절망과 실의는 사라지고 새로운 희망으로 부활의 소식을 이웃들에게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늘나라의 모습을 우리는 세상 안에서 구현하고 나누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그 사도직의 임무를 실천함으로써 우리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그런 도움은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집니다. 이에 평신도 교령 9항에서는 사도직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사도직 활동의 여러 분야가 있음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여러 단체들, 가정, 청소년들, 사회환경, 국가 질서와 국제 질서 등이다.…교회의 여러 가지 사도직 분야에 있어서도 보다 광범한 여성들의 참여가 대단히 중요하다(교령 9항).’ 교령9항은 앞으로 보게 될 내용들의 서론으로서 다양한 사도직 활동의 형태들을 설명하면서 우리들이 보게 될 자세한 내용을 먼저 정리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성의 활동 영역이 넓어지고 있기에 여성들의 사도직 참여에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평신도들은 소속 단체의 전례 생활에 능동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영적 양식을 얻어, 그 단체의 사도적 활동에 열심히 참여한다(10항).’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통해서 교회를 세워주셨고 우리 신앙인들은 그 교회를 통해서 은총의 선물을 받으며 양육됩니다. 특히 교회가 수행하는 ‘전례’는 우리들에게 영적인 힘이 되고 은총의 정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은총의 힘으로 이웃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말씀을 전하고, 교리를 가르치는 일은 교회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본당의 일에 협력하고 본당 공동체와 단체들 안에서 하나되는 것은 하느님께 받은 것을 다시금 하느님께 돌려 드리는 의무요 영광인 것입니다.
‘신자 부부는 자신들 상호간에 있어서나 자녀나 그 밖의 다른 식구들에게 있어서 은총의 협력자요 신앙의 증인들이다(11항).’
교령에서 두 번째 사도직의 활동 영역으로 ‘가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가정은 작은 교회로서 창조주 하느님께서 인간 사회에서 활동하시는 원천이고 기초입니다. 그리고 그 가정은 교회를 위해서나 사회를 위해서도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현대에 나타나는 인간성 상실이나 폭력 등의 사회적인 문제들로 인하여 가정의 중요성이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서 인식되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으며, 신앙인의 마음 안에서는 우리들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영성의 장소’, ‘성화의 장’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것같이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신성한 유대로서 부부가 결합되고, 자녀를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보아 존경으로서 기르고 가르치며, 자녀는 양친 안에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가정에 기도와 전례와 무한한 사랑의 정신이 넘쳐흐를 때에 한 가정이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바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신자된 부부가 맨 먼저 시작해야 할 평신도 사도직으로서 세속에 사는 평신도에 의하지 않고는 절대로 불가능한 ‘사도직의 장’이고 누구에 의해서도 추구될 수 없는 ‘사도직의 목표’입니다.
세 번째로 교령에서는 사도직의 분야로서 ‘청소년들’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청소년들은 그 시대 인간 생활의 하나의 희망입니다. 그런데 현대 세계에 눈을 돌릴 때에 두 세대, 즉 현대의 성인과 다음 세대를 짊어질 청소년들과의 사이에 풀 수 없는 상호 불신이 가득 차 있다는 어두운 사실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상호 불신의 원인에 대해 교령에서는 ‘생활환경, 정신 상태, 그들의 가정과의 관계는 대단히 변했다(12항).’라는 것도 중요한 원인의 하나입니다. 경쟁사회이고 정보화 사회인 오늘날의 문화가 우리들의 세대를 더욱 더 좁혀 하나가 되게 하기보다는 세대간의 갈등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문화에 거부한다는 것은 시대를 역행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은 현대 청소년들과의 생활 환경, 사고 방식, 각 가정과의 연관 등의 근본적 변화, 즉 시대의 변모가 이해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청소년들이 이 사회의 꿈이고 희망인 것처럼 청소년들에 대한 사도직은 하느님 나라의 밝은 미래를 밝혀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함께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바로 하느님의 사랑, 즉 우리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완성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사랑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고기잡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모습을 통해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열심히 그물을 쳤지만 고기를 잡지 못하고 피곤하기만 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손수 아침상을 마련해 주시고 빵과 물고기를 주시며 ‘와서 아침을 들어라.’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도 다정한 아버지임을 보여주십니다(참조: 요한 21,1이하). 이 모습은 바로 하느님 나라의 잔치상과 같은 모습이고 우리가 받게 될 은총의 모습입니다. 직접 상을 차려주시고 따뜻한 마음으로 우리들에게 무엇인가를 먹이고 싶어 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들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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