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5일] 알렌의 워크북 친구 268과
모든 것이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하소서.
Let all things be exactly as they are.
실습 설명
워크북 파트 II 실습 설명을 읽으세요.
이것을 짧게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읽기: 레슨의 해설 문단을 천천히,
나의 이야기처럼.
◉ 기도: 레슨의 기도문대로 기도하기.
여러 번 할 것을 권합니다.
◉ 아침과 저녁: 그 날의 아이디어를 반복하고 열린 마음 명상(Open Mind Meditation )을 하세요.
◉ 매시간 기억하기: 그날의 아이디어를
반복하고 열린 마음 명상을 하세요.
◉ 자주 상기하기: 그날의 아이디어를 반복하고 잠시 명상을 하며 조용한 시간을 보내세요.
◉ 유혹에 대응하기: 마음이 상할 때마다 그날의 아이디어를 반복하여 평화를 회복하세요.
◉ “워크북 특별 주제”읽기: 하루에 한 번, 그날에 해당되는 워크북 특별 주제를 천천히 읽으세요.
실습 제안:
오늘의 아이디어를 읽을 때 저는 종종,
“모든 것들로 하여금, 정확히 실제로
있는 그대로 존재하도록 허용하자.”
(또는 보다 구체적으로,
“이것이
정확하게 실제로 있는 그대로
존재하도록 허용하자.”)
라고 바꿔서 반복합니다.
“실제로”라는 단어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 눈에
보이는 대로의 모습에
굴복하라는 뜻이
아님을 강조해 줍니다.
오히려
우리가 보는 <세상 자체>가
우리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신의 비평가가
되겠다는 시도이며
<우리의 분리>를
<천국의 단일성>에
투사하는 것입니다.
(1:1)
사물을
실제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눈이 보는
세상을 거절하고,
그런 세상이
실재라는 것을 거절하고,
그 대신에
천국의 실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모든 것들이 정확히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하는 방법이며,
우리가 평화를
찾는 방법입니다.
해설
용서의 관점에서 봤을 때,
오늘 레슨은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은,
신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모든 것이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허용하는 것은
<일종의 용서>입니다.
그것들이
달라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은
<판단하는 것>이고,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다.
Paul Ferrini 가 그의 책
From Ego To Self 에서
“내가
여기에 있는 것에
저항할 때
나는 여기에 있지 않은 것을
갈망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듯이.
우리는
사물이 어때야 한다는
소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사물이
있는 그대로인 것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삶의 모든 것에
완벽하게 만족하고 있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나요?
그러나 오늘 레슨은
우리에게 그러라고 조언합니다.
이것은
나 자신에게나 내 주위의 세상에게나
잔인한 레슨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즐겁지 않은 상황에
- 병, 파괴적인 관계에 묶여 있는 것,
병으로 죽어감, 파산, 끔찍한 불행감 -
있다면,
솔직히 말해
어떻게 “모든 것들이
정확히 있는 그대로
존재하도록 허용하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끔찍하게 들립니다.
우리가
주위에서, 가정에서,
친구들에게서, 세상에서
위와 같은 끔찍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본다면,
어떻게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허용”할 수 있을까요?
그런 상황에서
오늘의 아이디어와 같은 말을
하는데, 우리가 느끼는 저항은,
우리가 보는 상황이 실재라는
우리의 믿음을 보여줍니다.
물론 우리가
그런 고통이 실재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그것이 계속되기를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엄마가 고통 받으며 돌아가시도록 내버려 두기”,
혹은 “남편이 계속 술을 마시고, 나를 때리도록 내버려 두기”를 의미한다면, 우리는 그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아닙니다!
오늘 레슨은
실제로 우리가 보는
고통스러운 상황이
실재가 아님을
인식하라는 요청입니다.
“오직 실재만이
고통에서 자유롭다.”
(2:2)
이것은
“실재인 것은, 아무것도 위협받을 수 없다.
[그리고] 실재가 아닌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T,서문:4) 는 것을 인식하라는 요청입니다.
우리가 먼저
여기서의 “모든 것”이
오직 <실재인 것>만을,
오직
<신에게서 오는 것>만을
의미한다는 것을
인식하기 전에는,
“모든 것들로 하여금
정확히 있는 그대로
존재하도록 허용하자.”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밖에는 다 환상입니다.
“모든 것들로 하여금
정확히 있는 그대로 존재하도록
허용하자.”라고 말하는 것은
고통과
괴로움처럼 보이는 것은
실제로
<거기에 없다는 믿음>을
확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서
우리를 조건과 환경의
세상으로부터 이끌어내서
무조건적인 진리로
데려다 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육안으로 보는 세상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상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든 고통의 환상 뒤에 있는
견고한 실재를 보기를
원한다는 확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고통 받고 있는
형제를 보고 냉담하게,
“그걸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둬.”
라고 말하라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그건 신의 뜻이야.”라고
말하는 기독교식의 잘못입니다.
우리가
고통 받고 죽는 것은
신의 뜻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을 보고 실재로 만들고는,
그것에 대해
신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오늘 레슨은 잘못을 전혀
보지 않는 것에 대한 레슨입니다.
잘못을 보지 마라.
잘못을 실재로 만들지 마라.
사랑을 선택하고, 죄를 용서하라.
(S-2.I.3:3-5)
“모든 것들로 하여금 정확히
있는 그대로 존재하도록 허용하자.”는
사랑이
실재가 되기 위해,
조건이 바뀔
필요가 없다는 확언입니다.
조건이 어떻게 보일지라도
오직 사랑만이 실재입니다.
이것이 이 선언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보는
고통이라는 잘못은
신으로부터
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잘못은
실재가 아닙니다.
잘못은 오직 우리의
<집단적인 마음들>이
투사한 것입니다.
잘못이 있는 이유는
우리가 조건들이
다르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소망을 멈추는 것이 바로
환상을 물리치기 위한 출발입니다.
우주의 창조자 역할을 사임하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바꾸고 저것을 고치고
이것을 요렇게 뜯어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러면 세상은 더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실재를 간섭하여
지금 모습대로의
세상을 지어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런 간섭을 멈춰야 합니다.
우리가 환상의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정상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만약 손가락을 베었다면
나는 몸이 실재가 아님을 안다는 이유로
피가 나도록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밴드를 붙여줍니다.
그러나
그러면서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마법”임을 인식하려 합니다.
나는 단지 환상을 뜯어 고치고 있으며,
그것은 실제로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좀 더 편안한 환상을
만들 뿐입니다.
환상을
보다 편안하게 만드는 것은 무방하지만
결국에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극단적인 조건에도
같은 것이 적용됩니다.
제가 암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가정합시다.
물론 저는 그것에 대처를 할 것입니다.
그것에 대처하는 방법은
실제로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현대의학적인 치료를 받을 수도 있고
식이요법을 통해 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확언이나 정신적인
조건화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환상입니다.
그것들은 다 환상을
뜯어 고치고 있습니다.
결국에는
제 몸이 죽든 살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것들로 하여금
정확히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허용하자.”는
“내 몸에 일어나고 있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주고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암으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없습니다.
내 몸에 일어나고 있는 것은
나의 정체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를 의미합니다.
만약 내가 아플 때,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그런 몸의 조건이
바뀌어야 한다고 고집한다면
나는
단지 애초에 나에게 병을 일으킨
잘못을 지속시키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허용하기”는
내가 조건을 바꾸려는 모든 노력을
멈춰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결과에 대한 모든 투자>를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그 조건이
어떻게 전개되어가든,
어떻게 드러나든,
나는 그것이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궁극적인 선에 영향을 미칠 수 없음을
확신하면서 쉴 수 있습니다.
24과는
“나는 나 자신의 최선의 이익을
지각하지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허용하기”는
우리의 무지를
깨달음으로부터 나오는
자연적인 결과입니다.
극단적으로 제한된 관점에서
움직이는 우리는, 여전히 조건들을
바꾸려 시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가 이해 못하는 것, 고려 사항에 넣지 못한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분리된 마음의 관점>에서는
그야말로 우리는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저
우리가 할 것으로 보는 것을 하지만
그 결과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하든 결과는
신의 손에 있으며, 신의 손은 선한 손
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한 기도는
이런 자세의 한 예입니다.
예수는, “아버지, 할 수만 있으면
이 고난의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Mt 26:39)
예수는 한 개인으로서의 관점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에 대한 신뢰로
예수는 여전히 “당신 뜻대로 그것이 나에게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하소서.”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신의 교사가 반드시
깨달을 필요가 있는 것은,
그가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가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M-10.2:1)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라고
말하는 것은, 이것을 깨닫는 것이며,
신의 판단이 완전하다는
사실을 확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어나는 어떤 것도
판단하지 않습니다.
“오늘 나는
일어나는 어떤 것도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W,243: 제목)
이것은 우리가
어떤 것이라도,
나쁘다고 혹은 좋다고,
판단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전혀 판단하지 않습니다.
실재하는 것은 실재합니다.
마침표.
있는 그대로
존재하도록 허용하세요.
원문 출처:
http://www.circleofa.org/library/acim-commentary/workbook-companion/lesson-268/
ㅡ 기적수업ㆍ공부모임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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