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은 북상하여 어떤 낯선 이의 가슴을 적실까
태풍의 여파로 종일 비바람 거세게 몰아쳤다. 마당에서 껑충하게 자란 대추나무가 신장개업한 가게 앞에서 춤을 추는 비닐인형처럼 온몸을 꺾으며 격한 춤을 췄다. 위태롭게 비바람을 맞고 있는 것은 대추나무뿐이 아니었다. 석류나무, 감나무 심지어 바람을 막느라고 마루 앞에 쳐 놓은 비닐을 넝쿨로 감으며 오르고 있던 호박도 아직 아기 주먹만한 열매를 콘크리트 바닥에 떨구며 거센 비바람을 위태롭게 견디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태풍을 제일 잘 견디고 있는 것들은 풀이었다. 그들은 연약하므로 제일 강한 것들이었다.
철학자 노자는 그러한 자연의 철리로부터 자신의 사상을 정립시켰을 것이고, 시인 김수영은 역시 그러한 자연의 현상으로부터 '풀'이라는 시를 형상화했을 것이다.
이는 굳세지만 부러져버리고, 혀는 부드럽지만 살아남는다.
풀이 눕는다/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발목까지/발밑까지 눕는다
하긴 나도 어제, 그제부터 태풍 전야의 날들을 풀보다 더 낮게 엎디어져 있었다. 용두에서 빵집을 하던 남원 아지매가 문을 닫고 어디로 갔나 했더니 섬진강변 컨테이너집을 얻어서 옮겨간 것을 그제 저녁에야 알았다. 거기서 소주 한 병을 마시며 이 집 이름을 '은행나무집'으로 바꾸자고 아지매와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어제는 아침부터 소주를 마셨다. 그냥 소주를 마신 게 아니라 우리들의 삶을 마셨다. 누군가 닭을 치겠다고 했다. 그러면 나는 그 생산물인 계란과 닭고기를 순천이나 광주와 같은 대도시의 아파트에 갖다가 팔기로 했다. 계란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땀흘려 생산한 쌀, 밀, 마늘, 양파, 고추, 감자, 고구마, 생강, 블루베리 등등을 소비자와 직거래로 파는 사업을 하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소비자들이 우리를 믿는 것이라고 광석이가 말했다.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아니면 계절에 한 번 정도 소비자 가족들을 불러와 하룻밤 자면서 우리가 짓는 농사와 우리가 사는 산과 들과 강을 직접 보고 호흡하게 하자. 그렇게 합의하고 또 마시고 각자 사라졌다.
그 저녁부터 나는 매번의 끼니를 손수 해결했다. 끼니는 가난한 집 제사 돌아오듯 잘도 돌아왔다. 나는 저녁을 먹으면 즉각 설거지를 하고 솥에 쌀을 씻어 안쳐놓았다. 그래야 내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가스불을 켜면 밥이 되는 것이고 몇 가지 소찬에 아침을 먹을 수 있게 되니까. 텃밭에서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가지를 따서 나물을 무치고, 호랑이 보호색 모양을 한 강낭콩을 대여섯 개 따서 밥에 넣고, 고추를 따고, 아 그리고 그 무엇보다 씨를 막 뿌려대서 빽빽하게 자라는 어린 상추를 쑥쑥 뽑아 뜸이 충분히 든 더운 밥에 고추장과 참기름을 쳐서 쓱쓱 비벼서 땀을 뻘뻘 흘리며 잘 먹었다. 솥에서 밥이 뜸이 들 무렵 코에 맡아져 오는 강낭콩의 구수한 냄새와 비를 맞고 싱싱하게 자라난 상추의 색깔과 형상은 혼자 먹는 궁상을 충분히 상쇄해주고도 남는다.
밥을 먹자 곧 저녁이 왔다. 이 저녁은 신화 속의 어떤 거인이 몰고 다니는 걸까. 사물들을 어둠 속에 가두어 버리는 거인 아니면 괴물이 대낮에는 어디에 웅크리고 있을까. 내가 만약 도시에 산다면 이 저녁을 혼자 보낼 수 있을까. 아마 그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아니 도시의 편리함이 나를 혼자 있도록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담배도 한 모금 빨지 않았다. 담배를 사러 가고 싶어도 비바람이 너무 거세서 차마 엄두를 낼 수도 없었다. 단 하루라도 수행자처럼 살자. 전혀 내 의지가 아니었지만 흡연에 대한 욕구를 이겨내며 비바람과 잘 어울렸다.
그릇들과 접시들이 있던 자리에 책을 올려 놓았다. 성공회대 교수 한홍구가 쓴 대한민국 간첩조작사를 읽었다. 놀라운 것은 중앙정보부가 국가안전기획부로, 국가정보원으로 바뀌면서도 그들의 본질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국정원이 댓글 공작 등으로 선거에 불법 개입한 정황이 구체적 증거로 드러나자 국정원은 조직의 존립 자체가 흔들리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간첩이었다. 화교 출신으로 서울시 공무원이 된 유우성은 그래서 거의 간첩으로 만들어질 뻔했다. 중정이 됐건, 안기부가 됐건, 국정원이 됐건 그들은 늘 그런 식이었다. 민중의 저항으로 또는 자신들의 무리수로 정권이 위기에 몰리면 늘 무고한 사람들을 간첩으로 만들어 희생양을 삼고 물타기를 하고 진실을 호도해 사람들의 시선을 안갯속으로 몰아갔다. 그들의 공작에 간첩으로 조작된 사람들은 삶을 송두리 망쳐야 했다.
유우성도 아마 간첩으로 만들어지고 감옥에서 한 20년 썩다가 생을 마감하거나 마감하기 직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겠지. 20년 감옥에서 살다 삶을 마감한 이후나 마감하기 직전 무죄 판결을 받으면 뭐하나. 도대체 누가 그 선량한 사람의 인생을 보상해줄 수 있겠는가.
유우성을 살려 준 사람은 변호사 장경욱이었다. 나보다 7살이나 어린 인권 변호사 장경욱. 그가 끈질기게 증거를 대면서 유우성은 간첩이 아님을 법원에 밝혀도 국정원과 검찰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국정원과 검찰이 중국 여권까지를 조작한 것이 들통나자 유우성은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
유우성이 맞은 생의 태풍은 실로 가혹하고 끔찍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 담대하고 끈질기고 치밀했던 변호사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회생할 수 있었다. 적어도 그 가혹한 태풍에 가뭇없이 날아가 버린 다른 희생양들에 비하면 좀 운이 좋았다.
태풍이 온다고 단 이틀 칩거한 나도 운이 좋은 것일까. 텃밭의 작물들 뽑아다가 매끼 밥 잘 먹고, 오산과 계족산을 넘어 섬진강의 물들에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용두의 들판으로 달려온 그 비바람을 가슴에 안으며 이틀을 잘 보냈다.
비바람은 북상하여 어떤 낯선 이의 가슴을 적실까.
첫댓글 풀이 눕는다/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발목까지/발밑까지 눕는다
이제사 밥도 해먹고 궁리도 해보고 철이 들어가는구먼...
비바람 부는 날이나 태풍전야에만 있는 감상만은 아니겄제
명석한 조언과 담대한 동참을 부탁헌다 ㅎㅎ
@송태웅 아니 더이상 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