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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사 광주상황 첫 발표 직후 20사단 투입
공수 집단 발포에도 시위대 안물러서
리어카에 [두주검]싣고 금남로로 행진
시위대,각목.쇠파이프 낫들고 총갈에 대항.... 1894년 갑오농민혁명 방불
제1장 10일간의 항쟁
39 새벽을 깨운 두 주검
21일 새벽 광주역앞에서 행해진 공수부대의 발포는 오히려 시위열기를 가열시킨다. 총성에 대한 두려움도 잠시뿐 시위대는 집단발포에 대해 쇠파이프와 몽둥이 각목 낫을 들고 저항한다 가히 1894년 갑오 농민혁명을 방불케 한다.
새벽 4시,3공수여단12,15대대는 전남대로의 철수를 결정한다. 남은 것은 분수대 앞에 흥건히 고인 핏자국. 숱한 시민들의 주검은 군용트럭에 실려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당시 목숨을 걸고 공수부대에 저항했던 시민들은 이날 새벽의 공방을 목숨을 건 [전투]로 표현한다.
신역전투의 종료.
그러나 신역전투의 종료가 [저항]의 종료를 의미하는것은 아니다 .이시각 조선대 앞에서는 3천여명의 시민들이 [연행학생 석방]들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다. 자정무렵 3대의 버스를 앞세우고 정문으로 쇄도한 시위대들이 무려 4시간동안이나 자리를 옮기지 않은채 치열한 투석전을 전개한다.
7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의 협공에 밀려 조선대앞 시위대가 해산된것은 새벽 4시 40분.(특전사 전투 상보) 20일 낮동안 시민들의 중심 집결지였던 전남도청앞에서도 시민들의 저항은 계속된다. 새벽 3시께 3천명으로 불어난 도청앞 시위대는 당시 도청을 경비하고 있던 11공수부대원들과 밀고 밀리는 공방을 계속한다.
이밖에도 2백 -3백명 단위의 소규모 시위대가 전남대와 조선대 도청등을 축으로 시내 곳곳을 누빈다. 전옥주씨를 중심으로한 일부 시위대는 밤새워 시내 전역을 돌며 21일 모든 시민들이 공설운동장 앞으로 집결해 줄것을 호소한다.
당시 아시아자동차에 근무하던 김정기씨 (당시 19세)의 증언. [마이크 장치를 한 트럭을 선두로 시위대 행렬은 시내를 계속해서 돌았다. 금남로를 통해서 유동삼거리 ,낭동시장을 지나 다시 천변로를 따라 접십자병원.학동오거리,그리고 공설운동장까지 날이 샐때까지 시위대의 행렬은 계속됐다. 행렬이 계속되는 동안 계엄군들이 집으로 돌아가라는 회유방송을 하긴 했지만 시위대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사람수가 줄어들면 공수부대의 공격을 받는다고 해서 더욱 강하게 힘을 합하여 행진했다. ]
전남대 철학과 2학년에 재학중이던 박정열씨는 당시 시위대의 분위기는 새벽이라는 시간적 상황을 느낄수 없을만큼 열기에 차있었다고 회상한다. 80년 5월 당시 전남방직에서 잡역부로 일하고 있던 김상집씨 (빛고을 수의고병원장) 동 도청인근에서 계속된 새벽 시위에 참여 계엄군의 총격에 쓰러져 가는 시민들은 목격한다.....
[새벽녘이 돼 전남여고 후문쪽에 있던 공수부대원들을 노동청까지 격퇴시키고 국세청 골목에서 광주 경찰서를 점령하기 위해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짱돌을 들고 싸우던 중 옆사람이 맥없이 쓰러졌다. 옆구리에 총을 맞은 것이다.]
시위대들의 기세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자 계엄군들과 경찰의 시위진압방식도 소극적인 방법으로 바뀐다. 주력부대는 전남대와 조선대,도청으로 철수하고 소규모 부대 일부만이 주요 지역에 남는다.
계엄군들이 일부 철수하자 골목길등으로 피신했던 시민들이 또다시 거리로 나온다. 당시 계엄군이 추정한 새벽 시위대 숫자는 1만여명(계엄사상황일지). 중심지,혹은 변두리의 구분없이 시위대의 함성이 메아리친다.
새벽 5시. 광주역 인근에서 시커먼 연기가 치솟아 오른다. 공수부대원들이 떠난지 한시간뒤 1천여명으로 불어난 시민들중 일부가 KBS와 역전파출소에 불을 지른다. 그리고 잠시후 시위대 후미에서 분노에 찬 외침이 들려온다. [사람이 죽었다!] 광주역 대합실에서 발견된 2구의 시체. 전남대로 철수한 3공수여단이 미처 치우지 못한 시신이다.
이를 처음 목격한 이관택씨 (당시 32세)는 당시 상황을 끔찍하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며 몸서리를 친다. [21일 새벽 광주역으로 갔다. 시민들이 역앞에 모여 있었다. 불에 타는 방송국건물을 보며 일부 시민들은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텅빈 역안으로 들어가 봤다. 그런데 한쪽에서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시민들을 불러 달려가 보니 그는 팬티차림으로 허벅지가 찢어져 피범벅이 된채 죽어 있었다. 대검에 찔린것 같았다. ]
김정기씨의 증언. [날이 밝을 무렵 광주역 광장에 있는 분수대에서 몸을 씻고 있는데 누군가가 광주역안에 시체가 있다고 외쳤다. 누가봐도 구타로 인한 사망이라는 것을 알수 있을 정도로 온몸에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잠시후 광주역사내에서도 또 한구의 시체가 발견됐으나 차마 볼 수 없었다. 그것을 보고 분노에 들끓은 시민들은 곧바로 도청으로 갔다.]
시민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뀐다.
누군가가 군용지프에 손수레(리어카)를 연결, 그위에 시체를 싣는다. 조금전까지만해도 시위대 맨앞에 서있던 대형 태극기가 시체위에 덮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주검을 앞세운 시위대는 도청으로 향한다.
구호는 변한다. [두환아 내자식을 내놓아라] [찢어 죽이자] [시민 여러분 우리 친구 형제는 이렇게 죽어 있습니다]. 당시 25세의 나이로 건축업에 종사하고 있던 차용봉씨는 21일 새벽 두구의 시체를 목격하곤 이날 시민군이 되기를 자원한다.
[유동삼거리에서 지프 뒤에 연결된 손수레위에 태극기로 덮인 물체가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시체였다. 다리는 퉁퉁 부어 있었으며 피가 온통 굳어 있었다. 함께 보고 있던 시민들은 그동안 들었던 소문이 유언비어가 아님을 확인하고 분통을 터뜨렸다. 앞을 다투어 모금함에 돈을 넣었다. 눈앞에 공수부대원이 있다면 당장 죽여버리고 싶은 심정을 간직한 채 도청쪽으로 향하는 시위대에 합류했다. ]
새벽 6시께 시체를 앞세운 시위대는 광주 은행 본점 앞까지 진출,연좌농성을 벌인다. 시내 곳곳을 돌며 시위를 벌이던 시민들이 속속 도청인근으로 집결한다. 소문을 듣고 달려온 시민들은 한결같이 분노에 치를 떤다.
일부 학생들은 인근 지하상가 공사현장에서 각목과 쇠파이프를 마련 시민들에게 나눠준다. 밤새 광주 곳곳을 누비던 각종 차량들이 시위대에 합류한다. 아침 8시 1만여명의 시민들은 가톨릭센터까지 진출, 11공수여단과 대치한다. [도지사와 시장은 시체를 인수하고 사과하라]는 구호가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그리고 일부 시민들은 아시아 자동차로 발걸음을 돌린다. [이제 더이상 참을수가 없습니다. 그리기 위해서는 차량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
21일 새벽 발견된 2구의 주검. 그것은 무장투쟁 시위상황의 극적 변화(uprising)의 신호탄이 된다.
한편 계엄 사령부는 이날 아침 최초로 광주에서의 참상을 공표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평범한 유혈충돌의 알림에 불과하다. [광주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합세해 지난 18일 부터 연 4일째 소요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이 소요사태는 아직 수습되지 않고 있으며 조속한 시일내에 평온을 회복하도록 강구하겠다.]는 것이 전부다.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도 시민들을 향한 발포도,수많은 죽음도 그리고 시민들을 분노케한 진짜 이유도 빠져 버린다.
계엄사의 첫발표가 있던 오전 8시 40분께 박준병이 이끄는 20사단 병력 1천 6백 40여명이 광주에 진입한다. 공수부대에 이어 27일까지 [5.18]진압의 핵심부대가 되는 20사단 (사단장 박준병)의 첫등장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