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3월 23일, 페리 부두의 총성 — "이천만의 독립재판"
1908년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 페리 부두. 대한제국의 친일 외교고문 더럼 스티븐스가 미국 내에서 일본의 조선 지배를 노골적으로 찬양하는 망언을 일삼던 그날, 전명운 의사가 그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총은 불발했고 격투가 벌어졌다. 그 순간 장인환 의사의 총탄이 스티븐스를 쓰러뜨렸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의열투쟁의 첫 총성으로 기록되는 이 사건은, 이듬해 안중근 의거로 이어지는 추동력이자 미주 한인 사회를 하나로 묶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이 터졌을 때, 상륙한 지 채 5개월도 되지 않은 청년 송종수는 곧장 장인환·전명운 재판후원회의 재무를 맡았다. 그리고 이 시점을 전후해 그는 이름을 '송종익(宋鍾翊)'으로 바꾼다. 개명은 곧 각성의 표시였다.
그가 맡은 일은 막중했다. 재판에 필요한 막대한 변호사 비용과 각지에서 답지하는 후원금을 오차 없이 투명하게 관리하는 일이었다. 동시에 그는 여론전에도 나서,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에 "일본은 자유의 적이오, 스티븐스는 공리의 적"이라는 논설을 기고하기도 했다.
"한국의 독립은 곧 금일이오… 이 재판은 세계에 공개 재판이오. 이 재판을 이겨야 우리 이천만의 독립이 될 것." — 우강 송종익
스물한 살 청년이 남긴 이 한 문장에는, 앞으로 반세기 가까이 이어질 그의 삶의 방향이 이미 담겨 있었다. 한 개인의 재판을 '이천만 민족의 재판'으로 확장해서 본 이 시선이, 훗날 그를 미주 독립운동 자금의 '금고지기'로 만든 원점이었다.
개명(改名)까지 하며 각오를 다졌던 그의 결단, 여러분은 어떻게 보시나요? 댓글로 의견을 남겨주세요.
참고 슬라이드: 5, 6장 (스티븐스 저격 사건과 재판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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