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懲毖錄)』-류성룡(柳成龍)의 입장에서 류성룡을 생각해보다.
역사학과 1학년
20130267최연우
징비록(懲毖錄), 류성룡 저, 남윤수 역해, 하서출판사, 1999
1.저자 류성룡 및 저술배경 소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은 1542년(중종 37) 10월에 태어났으며 1562년, 21세가 되는 나이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로 들어갔다. 그리고 류성룡은 1564년, 23세에 소과시험인 생원과(生員科) 진사시(進士試)에, 1566년, 25세에 문과시험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고 1593년에 영의정(領議政)에 임명되었다. 류성룡의 나이 51세가 되던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그리고 거듭된 패전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벼슬에 올라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이 되었다. 이듬해 호서, 호남, 영남을 관장하는 삼도 도체찰사(都體察使)라는 직책을 맡아 전시 상황의 군사 업무를 관장했다. 류성룡은 전국 각처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게 하고 훈련도감(訓鍊都監)을 설치하여 군대를 편성했다. 다시 신임을 얻은 류성룡은 영의정 자리를 되찾아 1598년까지 정부를 이끌었다. 또한, 그가 설치한 훈련도감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5군영 가운데 가장 중추적인 군영으로 성장했으며, 지방에서 바치는 공물을 쌀로 바치게 하는 그의 선구적인 정책 또한 훗날 대동법(大同法)이 만들어지는데 영향을 주었다. 그가 명재상(名宰相)이라고 평가를 받는 주된 이유는 고통 받는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 있어서 탁상공론(卓上空論)이 아닌 실질적인 개선책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질적인 개선책을 마련하게 된 것은 왜란을 통해 고통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징비’란 ≪시경≫ 소비편(小毖篇)의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에서 딴 말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류성룡은 『징비록』을 통해서 임진왜란(壬辰倭亂) 같은 국가의 큰 사건을 상세히 적어서 후대에게 전해 후대에 이 같은 일을 경계하길 바라는 것이 저술 목적이다.
2.본론
1)명재상(名宰相) 류성룡
조선 선조 때 관직을 지낸 류성룡은 후대에 임진왜란을 극복해낸 명재상으로서 이름을 남기고 있다. 앞서 저자소개에서도 말했듯이 류성룡은 당시 붕당(朋黨) 싸움에 치여서 국사(國事)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당시 임진왜란이라는 큰 전쟁을 치루는 도중에서도 붕당간의 탁상공론(卓上空論)이 치열했다. 전쟁 속에서 어떻게 나라를 운영해야하는지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성리학적인 내용이나 자기 당파(黨派)의 이익을 위해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러한 정치적 흐름 속에서 영의정(領議政)인 류성룡은 동인이라고 하여 서인의 비판을 거세게 받고 있었다. 그래서 류성룡은 다른 당파의 비판과 임진왜란을 극복을 해야한다는 큰 숙제를 안고 있었다. 조선 40만, 일본 30만, 명 10만이라는 엄청난 인원이 참여한 임진왜란을 극복하기 위해서 류성룡은 상대 당파까지 포용해야만 했다. 한 사례를 들자면, 선조 5년 이준경은 죽음을 앞두고 붕당의 폐단(弊端)을 없애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삼사(三司)를 비롯한 서인의 영수 정철 등이 이준경의 삭탈관직을 주장했었다. 이준경과 류성룡은 4년전 문소전 문제를 가지고 대립했었다. 그렇지만 류성룡은 ‘대신이 죽음에 임박해서 임금에게 올린 말이 부당하다면 물리치는 것이 옳지만 죄를 주는 것은 너무 심합니다.’ 라고 이준경을 옹호하였다. 이 사례를 통해서 개인적인 문제나 감정 보다는 나라일을 먼저 생각하는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을 볼 수 있었다. 왜 류성룡이 조선의 명재상으로 이름이 후대에 전해지는가를 알 수 있었다.
2)혁명적인 정치가
『징비록』을 읽으면서 류성룡이 얼마나 혁명적인 정치가였는가를 엿볼 수 있었다. 첫 번째 이유는 양반 종군(從軍)과 노비 충군(充軍)을 함께 한 부대로 만들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양인들로만 이루어진 당시의 군대는 안정적이지 못했다. 특권층이었던 양반과 양반의 소유물로 여겨지던 노비들은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류성룡은 지방에 속오군(束伍軍) 체제를 도입시켰고 양반과 천민 역시 군대에 보내려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군대를 안정화시키고 부족한 군인의 수를 늘려서 임진왜란은 타파하고자 했다. 이는 조선 당시의 위기를 신분간의 화합과 협동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결국 실패를 하였지만 나는 발상에 의의가 있다고 본다.
두 번째는 세금 징수법의 변화다. 그전까지의 세금 징수는 특산품이나 마을 별로 여러 가지의 물품으로 했다. 류성룡은 ‘작미법(作米法)’이라해서 세금의 징수를 쌀이나 콩으로 대체하여 세금 징수를 보다 원활하게 해서 국가의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했다. 여러 특산품과 물품으로 세금을 내는 것은 파악하는 것과 징수가 원활하지 못했기 때문에 재정적인 문제를 동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쌀이나 콩은 그 당시의 화폐의 역할을 하던 물품이다. 국가에게 쌀과 콩으로 세금을 내면 빠르고 정확하게 세금을 징수할 수 있고 이것은 왜적을 막는 군비로 곧바로 사용이 될 수 있었다. 이는 훗날 ‘대동법(大同法)’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류성룡은 국방과 재정적인 문제를 혁신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모습에서 혁신적인 정치가의 모습이 무엇인지 볼 수 있었다.
3)동인으로서의 정치가
류성룡은 동인이었다. 물론 앞에서 말했듯이 당파간의 싸움보다는 임진왜란을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아무리 류성룡이 당파간의 싸움을 피했다고는 하지만 동인으로서 서인의 정치적인 공격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징비록』의 저술목적이 임진왜란의 인과나 과정 등을 후대에 전하는 것 이외에도 자신을 향했던 정치적인 공격에 대한 변호를 하기 위한 것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징비록』을 썼던 당시의 전후 상황을 고려해보았기 때문이다. 류성룡은 북인의 탄핵을 받고 낙향하여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또한 낙향을 하고 난 후에도 상대 당파들은 류성룡이 일본과의 화의를 했으며 영의정으로서의 임진왜란의 책임을 져야한다고 주장을 하면서 압박을 하였다. 관직을 잃고 낙향한 류성룡이 그러한 정치적인 공격을 변호하는 유일한 방법은 저술활동을 통해서 후대에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역사는 승리자의 입장에서 쓰여졌다. 정치적인 승리자인 북인의 입장에서 남인인 류성룡을 판단하고 후대에 남길 것이기에 류성룡은 대책을 강구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자신의 변호를 하는 것도 저술의 한 목적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3.결론
류성룡이 임진왜란이라는 큰 국난을 타계한 명재상임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징비록』이라는 책을 후대에게 전함으로써 임진왜란 당시의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후대의 역사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혁명적인 발상을 통해서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류성룡을 후대는 충분히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류성룡에 대한 무조건적인 칭송이 아닌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시선을 가지고 이 책을 읽는다면 현재 우리에게 유익함을 주는 저서임을 말하고 싶다.
4.참고문헌 및 논문
이재호, 『징비록(국역정본)』, 역사의 아침, 2007
김경수, 「징비록에 대한 사학사적 고찰」, pp,10~24, 2012
석민영, 「『징비록』과 역사·문화 기록의 중요성」,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06
장준호, 「『징비록』의 저술배경과 李舜臣·元均에 대한 서술」,『이순신연구논총』통권 제16호 pp,77~121,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11
『징비록』독후감 20130267 역사학과 1학년 최연우.hwp
첫댓글 본인이 읽은 징비록의 번역본의 출판연도 번역자 출판사 등의 서지사항을 적어야 함. 꼭 리포트식으로 안써도 됨. 본인의 견해가 부족함.
문장이 짧아서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교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책에 대한 소개만 이루어졌지 자신의 생각이 많이 있는것 같지는 않습니다. 책에서 인상받은 부분에 좀 더 상세하게 쓴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일단 읽은 책에 대한 서지사항은 적었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더 수정하겠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