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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대 연산군일기]
1. 왕위를 이은 폐비의 아들 융
성종 시대는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 가장 평화로웠던 시기였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성종의
정치력에 힘입어 조정이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평화의 이면에는 서서히 퇴폐 풍조가
고개를 들고 있었다. 성종은 도학을 숭상하고 스스로 군자임을 자처하는 인물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호기가 넘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호기는 그의 가족관계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그는 12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30명에 가까운 자식들을 얻었다. 결국 이런 호기가 평지풍파를
예고하는 불씨를 낳고 말았다. 그 불씨가 바로 희대의 폭군 연산이었다.
한때 성종의 총애를 독차지했던 왕비 윤씨는 성종이 다른 여자들과 밤을 보내는 일이 잦자
왕 주위의 후궁들을 독살할 요량으로 비상을 숨겨두었다가 발각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그녀는
빈으로 강등될 지경에 처하게 된다. 숙의의 신분에서 내전 최고 위치이자 국모인 중전의 자리에
올라왔는데 다시 빈으로 강등된다는 것은 사형 선고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윤씨는 성종의
배려로 강등되는 수모는 겪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질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급기야 만백성의 어버이인 왕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는 사건을 일으키고 말았다. 국모의 체통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을 저지른 것이다.
중전으로부터 얼굴에 상처를 입은 왕의 체통은 말이 아니었다. 당시 법도로는 있을 수 없는
행위였던 만큼 왕의 분노도 컸지만 그녀의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의 격분은 더한 것이었다.
이 일로 조정에서는 폐비론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하들은 왕비를 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녀는 단순한 왕비가 아니라 바로 다음 왕이 될 왕자의 어머니였던 까닭이다. 따라서
폐비론을 내세웠다가는 다음 왕에 의해 보복당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런데 감히
누가 목숨을 내놓고 세자의 어머니를 폐하자고 하겠는가. 하지만 왕과 인수대비의 입장은 달랐다.
어쩌면 성종 자신은 부부의 정 때문에 왕비를 폐할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수대비는 폐비론을 굽히지 않았다. 여기에 한명회의 훈구 세력과 김종직 등의 사림 세력이
가세했다.
그 때문에 성종은 일부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윤씨를 폐비시키고 말았다. 사가로 폐출된
윤씨의 수난은 단순히 서인으로 전락한 것에 그치지 않았다. 폐출된 지 3년이 지난 1482년 왕자
연산군을 세자에 책봉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자 조정 대신들간에는 폐비 윤씨에 대한 동정론이
대두되었는데, 이것은 오히려 윤씨의 명줄을 재촉하는 결과를 낳았다.
폐비 윤씨가 왕위를 이을 세자의 어머니이기에 결코 사가에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윤씨
동정론에 위기를 느낀 인수대비는 몇몇의 후궁들과 모의를 하여 그녀를 더욱 위기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말하자면 윤씨가 사가에 나간 뒤에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전혀 반성의 빛이 없다는
내용을 꾸며 왕에게 고해바치기에 이르렀고, 이에 분개한 왕은 급기야 사약을 내렸던 것이다.
세자 융은 자신의 친어머니가 폐출당해 사사된 사실을 모르고 자라났다. 융은 윤씨가 폐출될
당시에 불과 네 살바기 어린 아이에 불과했고, 또한 성종이 폐비 윤씨에 대한 사건을 일체
거론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세자 융은 어머니 윤씨가 폐출된 후
왕비로 책봉된 정현왕후 윤씨를 친어머니인 줄로 알고 자랐다. 그러나 천륜은 속일 수 없었던지
융은 정현왕후 윤씨를 별로 따르지 않았다. 물론 정현왕후 역시 폐비의 자식에게 사랑을
쏟아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할머니 인수대비는 융에게 지나칠 만큼 혹독하게 대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쫓아낸 며느리의 아들이 고울 리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정현왕후의 아들
진성대군에게는 대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융의 가슴에 응어리를 만들었다.
이런 성장 배경 탓인지는 몰라도 융은 결코 양순한 아이로 자라지는 않았다. 자신의 내면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음험한 구석이 있었으며 괴팍하고 변덕스러웠다. 게다가 학문을 싫어하고
학자를 좋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고집스럽고 독단적인 성향도 있었다.
성종은 이런 성격을 가진 융을 탐탁치 않게 여겼지만 1483년 그를 세자로 책봉한다. 이때
인수대비는 폐비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면 후에 화를 부를 것이라며 반대했다. 하지만 이때는
진성대군도 태어나지 않은 때라 왕비 소생의 왕자는 융 한 명뿐이었다. 그래서 성종도 다른
선택의 여지 없이 그를 세자로 책봉할 수밖에 없었다.
성종과 주위 사람들이 세자의 다소 포악한 성품을 우려했던 일화들이 야사를 통해 전해지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다음의 두 가지다.
성종이 어느 날 세자를 불러놓고 임금의 도리에 대해 가르치려 할 때였다. 부왕의 부름을 받고
온 융이 성종에게 다가가려 할 때 난데없이 사슴 한 마리가 달려들어 그의 옷과 손 등을
핥아댔다. 그 사슴은 성종이 몹시 아끼던 애완동물이었다. 하지만 융은 사슴이 자신의 옷을
더럽힌 것에 격분한 나머지 부왕이 보는 앞에서 사슴을 발길로 걷어찼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성종은 몹시 화가 나서 융을 꾸짖었다. 성종이 죽자 왕으로 등극한 그는 가장 먼저 그 사슴을
활로 죽여버렸다.
다른 이야기는 그와 그의 스승들에 관한 것이다. 융에게는 허침과 조자서 두 명의 스승이
있었는데, 그들은 당시 학문과 명망이 높아 성종이 친히 세자를 맡아달라고 부탁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들 두 스승들의 성격은 사뭇 대조적이었다. 조자서는 엄하고 깐깐한 데 비해 허침은
너그럽고 포용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융은 장난기가 많은 아이였다. 그래서 자주 수업 시간을 비우기도 하였는데, 이 때문에 깐깐한
조자서는 툭하면 그 사실을 상감에게 고해바치겠다고 으름장을 놓곤 하였다. 하지만 허침은
언제나 웃으면서 부드럽게 타이르곤 하였다.
어린 세자는 당연히 조자서를 싫어하고 허침을 좋아했다. 그래서 하루는 벽에다 '조자서는
대소인배요, 허침은 대성인이다'라고 낙서를 해놓았다. 융의 이 낙서는 단순한 낙서로만 그치지
않았다. 융은 왕위에 오르자 조자서를 가장 먼저 죽여버렸던 것이다.
세자 융에 대한 이 두 가지 일화를 통해 그가 집요하고 끈질기며 자신의 잘잘못에 관계없이
자신을 질책하고 위협하는 존재를 용서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성격은 그가 왕이 된 뒤에 두 번의 사화를 거치는 동안 더욱 적나라하게 표출된다.
2. 연산군의 등극과 광적인 폭정
(1476-1506, 재위 기간 1494년 12월-1506년 9월, 11년 9개월)
어린 시절을 고독하게 보낸 연산군은 왕으로 등극하면서 자신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광폭한
성격을 어김없이 표출하기 시작했다. 12년 집권기 중 두 번에 걸친 사화를 통해 엄청난 인명을
죽이는가 하면, 자신을 비판하는 무리는 단 한 사람도 곁에 두지 않는 전형적인 독재군주로
군림했다.
게다가 여염집 아낙을 겁탈하고 자신의 사냥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민가를 철거하는 등
극악무도하고 패륜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이런 폭정의 결과로 그는 국민적 저항을 받는
희대의 폭군으로 인식되었고 마침내 박원종의 반란으로 폐출되기에 이른다.
연산군은 1476년 성종과 숙의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같은 해 윤씨가 왕비에 책봉되자 그는
연산군에 책봉되었으며, 1479년 윤씨가 폐출된 후 5년 만인 1483년 8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1494년 12월 성종이 죽자 조선 제10대 왕으로 등극했다. 그때 그의 나이 19세였다.
그는 19세에 등극했지만 섭정을 받지는 않았다. 그가 왕으로 오를 때가 12월이었던 만큼
며칠만 지나면 성년이 되는 나이였기 때문이다.
1494년 12월 왕위를 이어받은 연산군은 적어도 무오사화를 겪기 전까지는 폭군의 모습이
아니었다. 즉위초에는 그래도 성종조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졌고, 인재가 많았던
덕분으로 민간은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연산군의 이 4년 동안의 치세는 오히려 성종 말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퇴폐 풍조와 부패상을
일소하는 기간이었다. 그래서 등극 6개월 후에는 전국 모든 도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간의
동정을 살피고 관료의 기강의 바로잡았다. 또한 인재를 확충하기 위해 별시문과를 실시하여
33인을 급제시키고, 변경 지방에 여진족의 침입이 계속되자 귀화한 여진인으로 하여금 그들을
회유케 하여 변방 지역의 안정을 꾀하기도 했다.
문화 정책에서도 문신의 사가독서(유능한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는
제도)를 실시하여 학문의 질을 높이고 조정의 학문 풍토를 새롭게 했으며, 세조 이래 3조의
<국조보감>을 편찬해 후대 왕들의 제왕 수업에 귀감이 되도록 했다.
하지만 이 4년 동안 연산군은 누차에 걸쳐 사림파 관료들과 신경전을 벌이게 된다. 명분과
도의를 중시하는 사림들은 사사건건 간언을 하는가 하면 연산군에게 학문을 강요했다. 원래
학문에 뜻이 없고 학자와 문인들을 경원시하던 연산군은 그 때문에 사림들을 귀찮게 여겼다.
이때 때마침 일어난 것이 1498년, 무오년의 이른바 무오사화다.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에 대한
개인적 원한이 극에 달해 있던 유자광, 이극돈의 상소로 시작된 이 사건은 그렇지 않아도 사림
세력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던 연산군에게 사림세력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가 된 것이다. 이에
이미 죽은 김종직은 부관 참시당하고 김일손 등은 능지처참에 그리고 다수의 사림세력들이
귀양을 가기에 이르렀다(무오사화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뒤에서 다시 언급하였다).
연산군은 무오사화를 통해 집요한 간언으로 자신과 대립했던 사림 세력을 축출하는 한편 일부
훈신 세력까지 제거하게 되었고 왕권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연산은 급속도로 조정을
독점하게 된다.
조정을 장악한 연산군은 매일같이 향연을 베풀고 기생을 궁으로 끌어들였으며 심지어는 여염집
아낙을 겁탈하거나 자신의 친족과 상간하는 등 패륜적인 행동을 끊임없이 자행했다. 이때
궁중으로 들어온 기생들을 흥청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마음껏 떠들고 논다는 뜻인
'흥청거리다'라는 말이 생겨났다.
연산군의 이 같은 사치 행각은 결국 국고를 거덜내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국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공신들에게 지급한 공신전을 강제로 몰수하려
했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은 이에 반발하여 왕과 대립하며 연회를 줄이고 국고를 아낄 것을
간청한다. 이때 정권을 장악하려던 임사홍은 폐비 윤씨 사건을 연산군에게 밀고하게 된다.
연산군은 자신의 친모가 폐비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 내막은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임사홍의 밀고로 그 내막을 알게 되자 관련자들을 모두 죽이는 대살생극을 자행한다. 이것이
갑자사화이다.
갑자사화는 겉으로 보기에는 모친 윤씨에 대한 연산군의 복수극으로 비치지만 사실은 연산군과
임사홍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벌인 고의적인 참살극이었다. 갑자사화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은 사람 세력뿐만 아니라 연산군의 부당한 공신전 몰수 행위를 비판하며 향락적인
궁중 생활에 제동을 걸었던 중신들이었다. 이때 연산군은 대신들뿐만 아니라 인수대비의 머리를
받아 절명케 하는가 하면, 윤씨 폐출에 가담한 성종의 후궁들과 그 자손들, 그리고 내시와
궁녀들까지 모조리 죽였다.
그는 막상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쥐게 되자 문신들의 직간이 귀찮다는 이유로 경연과 사간원,
홍문관 등을 없애버리고, 정언 등의 언관도 혁파 또는 감원하였으며, 기타 모든 상소와 상언,
격고 등 여론과 관련되는 제도들은 남김없이 철폐해버렸다. 또 성균관, 원각사 등을 주색장으로
만들고, 불교 선종의 본산인 흥천사를 마굿간으로 바꾸었으며, 민간의 국문 투서 사건이 발생하자
훈민정음의 사용을 금지하기도 하는 등 광적인 폭정을 일삼았다.
이렇듯 연산군의 폭정이 계속 이어지자 민심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해 전국 각지에서 반정을
도모하는 무리가 늘어났으며, 급기야 1506년 박원종 등이 군사를 일으켜 연산군을 폐하고 성종의
둘째아들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연산군 폐출이 성공하자 박원종 등은 연산군을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시켜 강화도에
유배시켰는데 두 달 뒤인 1506년 11월 그는 그곳에서 3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연산군은 신승선의 딸 폐비 신씨와 다른 후궁에게서 4남 2녀의 자식을 얻었다. 능은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으며 능에는 '연산군지묘'라는 비석 이외에 아무런 장식도 없다(중종 반정
과정은 중종 대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연산군이 반정에 의해 쫓겨난 왕이라는 이유로 그에 대한 자료는 대부분 악행에 대한 것만
기록하고 있다. 때문에 연산군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단적으로 '패륜적 행위를 일삼은 폭군'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최근에 와서는 그의 행위를 왕권 강화를 위한 연산군 나름의
자구책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그의 인간적인 고통과 낭만적 성격을 부각시키며 동정론을 펴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역사를 단순히 실록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연산군에 대한 이러한
평가들은 나름대로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광적인 폭정까지 인간적인 동정론으로
감싸는 것은 위험한 시각이다. 조선 중기 당시의 사고 체계와 삶의 방식을 감안한다면 연산군의
행동은 엄청난 범죄 행위였다. 또 혹자는 연산군의 행동을 왕권 강화책으로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왕군이 강화된다는 것은 단순히 백성과 신하들 위에 군림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왕이 백성과 신하를 하나로 묶어주는 구심체 역할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연산군의
폭정은 왕권의 강화라기보다는 왕군을 볼모로 한 독재의 강권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연산군에 대한 동정론을 펴는 사람들은 흔히 조선왕조사에 또 한 명의 폭군으로 기록된
광해군과 비교하려 들지만 이 또한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광해군은 정치 역학의 희생자인데
반해, 연산군은 인륜과 민심을 배반한 독재자였기 때문이다.
3. 사림파의 개념과 존립 의미
사림파라 함은 일반적으로 16세기에 훈구파 내지 훈신, 척신 계열과 대립한 재야사류를
배경으로 형성된 정치 세력을 일컫는다.
이 사림이라는 용어는 고려말, 조선초에도 간혹 쓰이긴 했으나 무오사화 이후 사화가
거듭되면서 사화를 당한 선비 집단을 통틀어 표현하는 용어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사림파라는
용어는 근대 역사학의 성립 후에 비로소 쓰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한 사학자의 저술에는 조선 전기의 문인, 학자의 유파를 훈구파, 절의파, 사림파, 청담파 등으로
구분했는데 이 구분에서 사림파는 훈구파와 대비되는 존재로서 그 대상이 둘로 나누어지고 있다.
우선 성종 대에는 문장, 경술과 관련하여 영남 일대의 종주격이던 김종직 문하를 가리켰고,
다음으로는 김종직의 제자 김굉필의 밑에서 수업한 중종 대의 조광조 일파를 지칭했다. 김종직
문하들이 주로 문예를 중시한 영남학자들이었다면 조광조 일파는 도학의 비중을 절대시했던
영남, 기호학자들이라는 점이 둘 간의 차이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들을 일컬어 사류 또는 사족이라고 불렀는데,
김종직 이후 도학에 중점을 둔 집단적인 학파를 이룬 사람들을 사림이라고 하기도 했다. 따라서
사림은 현직 관리보다는 재야 지식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학자들을 지칭한다. 이들의 학습은
관학인 사부학당이나 향교보다는 서원이나 서재를 통한 경우가 많았고, 사림파는 신유학(성리학)
중에서도 중국 송대의 정호, 정이 형제와 주희가 체계화한 정주성리학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성리학은 송학, 정주학, 이학, 도학이 한 계통이고 명학, 육왕학, 양명학, 심학이 다른 한 계통을
이룬다. 우리나라에서는 전자인 정주계의 이학이 발달하고 상대적으로 육구연, 왕수인
등이 체계화한 육왕계의 심학은 별로 발달하지 못했다.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흔히
성리학이라고 하면 정주계의 이학을 가리킨다.
우리 나라의 성리학사에서 볼 때 15세기 중엽부터 16세기 말까지는 사림파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사화기 시대라고 할 정도로 많은 사화를 겪으며 사림파 학자들은 15세기 중엽부터
약 1세기 동안 성리학 특유의 실천에 역점을 두고 성장했다.
이처럼 조선 성리학은 일종의 실천 성리학으로서의 도학적 특색을 지녔는데, 사림파 학자들이
성리학의 의리관을 실천에 옮기려는 경향을 흔히 사림파 정신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는
사회 운동 내지는 정치 사상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당시 사림파 학자들이 체질화시킨 성리학의
규범은 도덕적 규범의 성격이 강했지만 동시에 정치적 성격을 지닌 규범이기도 했다.
사림파의 정치적 활동으로 가장 주목되는 것은 향촌 질서의 재확립과 관련되는 사회 운동으로,
일종의 지방자치 기구인 유향소 및 향약의 제도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사회 운동은 관료제에서
나타나는 모순들을 혁신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사림파는 군주 정치에 대한 인식에서도 그 이전의 정주학자들과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조선왕조 초기의 정치 주체는 군주로 인식되고 있었지만, 16세기 이후의 사림파 정신에서는 군주
역시 신하와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닦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군주가 도학적
인격을 갖추지 못하면 군주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가치관이 성립되어 있었다. 주자의
<대학>정신에서 비롯된 이 같은 인식의 전환은 군주제 자체를 부정하기보다는 군주의 절대권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도학적인 이념을 실천하는 군주를 요구하고 있었다.
사림파는 인재의 등용에서도 과거제보다는 천거제를 선호하였다. 그것은 과거제가 인간을
다스리는 능력을 측정하기에는 부족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때문에 사림이 공인하는 인재들을
천거의 형태로 등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실제 중종 대의 조광조 등은 현량과를 통해 이를
실천으로 옮기기도 했다.
16세기 사림은 정치적으로 훈척 세력과 대립하면서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규합되었다. 그러나
16세기 말 선조의 즉위를 계기로 척신 정치가 종식되자 사림은 내부적으로 학연과 파벌에 따라
나누어지게 된다. 이를 흔히 붕당이라고 하는데, 이는 정파간의 상호 견제를 통한 새로운 신권
정치를 낳았다. 따라서 사림은 일차적으로 훈척의 대립 세력으로 발생하여 몇 번에 걸친 사화를
겪은 다음, 선조 이후 훈척 세력이 거의 사라지자 내부적으로 파벌에 따라 나누어져 붕당의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이와 같은 붕당 현상을 한쪽 파벌이 정권을 장악하지 않는 한 조선
조정을 균형 있게 끌어가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이는 곧 조선 후기의 정치에서 왕이 붕당의
조정자로 자리매김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4. 양대 사화를 통한 연산군의 권력 독점
사림과 훈척의 불가피한 대립
사화는 '사림의 화'의 준말로서 말 그대로 사림 세력이 화를 입은 것을 말한다. 사화는
당초 일으킨 쪽인 훈척 계열에서는 난으로 규정하였던 것이나 당한 쪽인 사림측은 올바른
인물들이 죄 없이 당한 화라고 주장하여 '사림의 화'라는 표현을 쓰다가 사림계가 정치적으로
우세해진 선조 대부터 사화라는 표현이 직접 사용되었다.
조선조에 사화는 무오(연산), 갑자(연산), 기묘(중종), 을사(명종)사화 등 네 번에 걸쳐 일어났다.
이 사화는 주로 세조 시대에 형성된 공신과 외척, 인척 세력이 도학적 사상에 기반을 둔 사림
세력의 정계 장악을 저지시킨 정치적 사건들이었다.
사림 세력의 정계 진출은 성종 시대에 와서 본격화되는데 이는 성종의 훈척 세력에 대한 견제
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성종이 등용시킨 대표적인 사림 세력은 김종직 문하의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의 영남사림파였다. 이들 사림 세력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주로
언론을 담당하던 삼사에서 활동하였는데 이 부서들의 역할을 살펴보면 사림들의 활동 범위를
알 수 있다. 사헌부는 백관에 대한 감찰, 탄핵 및 정치에 대한 언론을, 사간원은 국왕에 대한
간쟁과 정치 일반에 대한 언론을 담당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이전에는 이 두 기관의 관원을 대간,
또는 언론양사라고 불렀다. 한편 홍문관은 궁중의 서적과 문헌을 관장하였으며, 정치 대화를
벌이는 경연관으로서 왕의 학문적, 정치적 고문에 응하는 학술적인 직무를 담당하는 곳이었다.
세조 대에 집현전이 없어진 뒤에는 그 기능까지 함께 맡았다.
사림 세력은 주자학의 정통적 계승자임을 자부하는 동시에 요순정치를 이상적 정치로 설정하고
도학적(정주성리학적) 실천을 표방했다. 그래서 훈신, 척신 세력을 불의와 타협하여 권세를 잡은
모리배로 몰아붙이며 자신들이 속한 삼사의 기능을 십분 활용하여 그들을 탄핵하곤 했다.
사림 세력이 언론과 경연을 점유하여 자신들을 비난하자 훈척 계열은 사림들을 '홀로 잘난
무리들'이라고 비방하며 반격을 가하였다. 그래서 이들 두 세력은 정치적, 사상적으로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아 마침내 철저한 적대 관계로 나아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들 두 세력의 대립이 단순한 사상적, 정치적 대립이나 감정적인 반목으로
비칠지 모르지만 사실은 당시 사회 상황의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세종 대 이후 사전의 증가에 따르는 토지 사유화는 과전법의 모순으로 지배층의 토지
겸병 현상이 나타났으며, 이 현상의 극대화는 서민의 경제 생활을 압박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득권 세력인 훈구, 척신 세력은 인척과 벌족을 형성하고 정권을 독점하여 신진 사림의 정계
진출을 안팎으로 막았다. 그러므로 사림파는 이런 사회 구조를 혁신하지 않고는 자신들의 입지를
세울 수 없어 구질서를 혁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구현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훈척 세력과의
대립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성종이 김종직 일파를 등용하여 유교적 왕도 정치를 펴려 한 것도 표면적으로는 학문적인
견지에서 이루어진 듯하지만 실상은 사회적 모순과 불합리성을 제거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렇듯 성종의 의도적인 지원을 받은 사림파의 공략에 훈척 세력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어야 했다. 사림이 언론을 점유하고 또한 왕의 고문역을 수행하고 있는 이상 훈척
세력으로서는 힘으로만 그들을 밀어붙일 수는 없는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무오사화
하지만 성종이 죽자 상황은 급변했다. 성종에 이어 등극한 연산군은 학문을 싫어하고 언론을
귀찮게 여기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사림을 배척하고 있던 연산에게 유자광을
중심으로 한 훈척 세력이 불을 붙이게 되었다.
사건은 1498년 무오년,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1498년 실록청이 개설되고
이극돈이 실록 작업의 당상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 점검 과정에서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과 이극돈 자신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발견했다.
<조의제문>은 진나라 항우가 초의 의제를 폐한 일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 글에서 김종직은
의제를 조의하는 제문 형식을 빌려 의제를 폐위한 항우의 처사를 비판하고 있었다. 이는 곧
세조의 단종 폐위를 빗댄 것으로 은유적으로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나머지 상소문은 세조비 정희왕후 상 중에 전라감사로 있던 이극돈이 근신하지 않고 장흥의
기생과 어울렸다는 불미스러운 사실을 적은 것이었다. 당시 이 상소 사건으로 이극돈은 김종직을
원수 대하듯 했는데, 그것이 사초에 실려 있는 것을 발견하자 그는 분노를 금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달려간 곳이 유자광의 집이었다. 유자광 역시 함양 관청에 붙어 있던 자신의 글을 불태운
일 때문에 김종직과 극한 대립을 보였던 인물이었다. 게다가 김종직은 남이를 무고로 죽인
모리배라고 말하면서 유자광을 멸시하곤 했다.
유자광은 <조의제문>을 읽어보고는 곧 세조의 신임을 받았던 노사신, 윤필상 등의 훈신
세력과 모의한 뒤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상소의 내용은 뻔했다. <조의제문>이 세조를 비방한
글이므로 김종직은 대역 부도한 행위를 했으며, 이를 사초에 실은 김일손 역시 마찬가지라는
논리였다.
그렇지 않아도 연산군은 사림 세력을 싫어하던 차였다. 그래서 즉시 김일손을 문초하게 하였다.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이 김종직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의도하던 바대로 진술을 받아내자 연산군은 김일손을 위시한 모든 김종직 문하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우선 이미 죽은 김종직에게는 무덤을 파서 관을 꺼낸 다음 시신을 다시 한
번 죽이는 부관참시형이 가해졌으며,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이목, 허반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세조를 능멸하였다는 이유로 능지처참 등의 형벌을 내렸고, 같은 죄에 걸린 강겸은 곤장
100대에 가산을 몰수하고 변경의 관노로 삼았다.
그밖에 표연말, 홍한, 정여창, 강경서, 이수공, 정희량, 정승조 등은 불고지죄로 곤장 100대에
3천리 밖으로 귀양보냈으며, 이종준, 최보, 이원, 이주, 김굉필, 박한주, 임희재, 강백진, 이계명,
강혼 등은 모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이루어 국정을 비방하고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한
죄목으로 곤장을 때려 귀양을 보내 관청의 봉수대를 짓게 하였다.
한편 어세겸, 이극돈, 유순, 윤효손, 김전 등은 수사관(실록 자료인 사초를 관장하는
관리)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도 보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되었으며, 홍귀달, 조익정, 허침, 안침
등도 같은 죄로 좌천되었다.
이 사건으로 대부분의 신진 사림이 죽거나 유배당하고 이극돈까지 파면되었지만, 유자광만은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조정의 대세를 장악했다. 이에 따라 정국은 노사신 등의 훈척 계열이
주도하게 되었다.
이렇게 사초가 원인이 되어 무오년에 사림들이 대대적인 화를 입은 사건이라 해서 이를
무오사화라고 하는데, 이 사건을 다른 것과 구별하여 굳이 사화가 아닌
사화라고 쓰는 것은 사초가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이다.
갑자사화
무오사화로 언론 기관의 기능이 완전히 상실된 상황에서 연산군의 국정 운영은 방만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사림이 완전히 제거된 마당이라 그에게 학문을 권하는 이도 없었고,
간언을 하는 이도 없었다. 더군다나 대신들은 한결같이 연산의 비위에 맞는 인물들로 구성되었다.
조정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연산군은 향락과 패륜 행위를 일삼았다. 매일같이 궁궐에서는
연회가 벌어졌으며, 전국 각지에서 뽑아올린 수백 명의 기생들이 동원되었다. 게다가 자신의
큰어머니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겁탈하는 등 종친간의 상간을 범하기도 했고, 여염집 아낙을
궐내로 불러들이기까지 했다.
이렇게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이 심해지자 점차 국가 재정이 거덜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신들은 그의 행동을 비판하지 못했다. 오히려 연산군의 폭정을 기화로 권신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국고가 빈 것을 알고 이를 메우기 위해
공신들에게 지급한 공신전을 요구하고, 노비까지 몰수하려 하자 대신들의 태도는 급변했다. 왕이
향락과 사치에 마음을 빼앗겨 급기야 자신들의 경제 기반까지 몰수하는 것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막상 왕의 요구가 자신들의 이해 관계와 맞물리자 왕의 처사가 부당함을 지적하면서
그동안 못마땅하게 여겨오던 왕의 지나친 향락을 자제해줄 것을 간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하들 모두가 연산군에게 반발했던 것은 아니었다. 무오사화 이후 조정은 다시 외척 중심의
궁중파와, 의정부 및 육조 중심의 부중파로 갈라져 있었다. 따라서 공신전을 소유하고 있던
부중파 관료들은 연산군의 공신전 몰수 의지에 반발하고 있었지만, 궁중파는 일단 왕의 의도에
부합하자는 논리를 펴고 있었다.
이런 대립을 이용하여 정권을 잡으려는 인물이 바로 임사홍이었다. 그는 일찍이 두 아들을
예종과 성종의 부마로 만든 척신 세력 중에 하나였다. 임사홍은 성조 시대에 사림파 신관들에
의해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간 적이 있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사림을 싫어한 그는 연산군과
신하들의 대립을 이용해 훈구 세력과 잔여 사림 세력을 일시에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임사홍은 우선 연산군의 비 신씨 오빠 신수근과 손을 잡고 음모를 꾸미던 끝에 성종의 두 번째
부인이자 연산군의 친모였던 윤씨의 폐비 사건을 들추어낸다. 폐비 윤씨 사건은 성종이 차후에는
거론하지 말라는 유명을 남긴 적이 있어 그때까지 아무도 그 사건을 입에 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임사홍은 이 사건의 내막을 연산군이 알게 될 경우 윤씨의 폐출을 주도했던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에게 동시에 화를 입힐 수 있다는 계산을 한다. 임사홍의 밀고로 윤씨의 폐출 경위를
알게 된 연산군은 엄청난 살인극을 자행한다.
연산군은 우선 윤씨 폐출에 간여한 성종의 두 후궁 엄귀인과 정귀인을 궁중 뜰에서 직접
참하고 정씨의 소출인 안양군, 봉안군을 귀양보내 사사시켰다. 그리고 윤씨 폐출을 주도한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부상을 입혀 절명케 했으며, 비명에 죽은 생모의 넋을 위로하고자
왕비로 추숭하고 성종묘에 배사하려 하였다.
이때 연산군의 행동을 감히 막으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만 응교 권달수와 이행 두
사람만이 성종묘에 배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론을 펴다가 권달수는 죽임을 당하고
이행은 귀양길에 올랐다. 하지만 연산군의 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막상 신하들이 자신의
행동을 저지하지 못하리라는 판단을 한 그는 윤씨 폐위에 가담하거나 방관한 사람을 모두
찾아내어 추죄하기 시작했다.
이 결과 윤씨 폐위와 사사에 찬성했던 윤필상, 이극균, 성준, 이세좌, 권주, 김굉필, 이주 등
10여 명이 사형당하였고, 이미 죽은 한치형, 한명회, 정창손, 어세겸, 심회, 이파, 정여창, 남효온
등은 부관참시에 처해졌다. 이 밖에도 홍귀달, 주계군, 심원, 이유녕, 변형량, 이수공, 곽종번,
박한주, 강백진, 최부, 성중엄, 이원, 신징, 심순문, 강형, 김천령, 정인인, 조지서, 정성근, 성경온,
박은, 조의, 강겸, 홍식, 홍상, 김처선 등이 참혹한 화를 입었으며, 이들의 가족 자녀에 이르기까지
연좌시켜 죄를 적용하였다.
이처럼 1504년 3월부터 10월까지 7개월에 걸쳐 벌어진 이 갑자사화는 희생자의 규모뿐 아니라
그 형벌의 잔인함이 무오사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무오사화는 신진 사림과 훈구 세력 간의
정치 투쟁이었지만, 갑자사화는 왕을 중심으로 한 궁중 세력과 훈구, 사림으로 이루어진 부중
세력의 힘의 대결이었기 때문이다.
5. <연산군일기> 편찬 경위
<연산군일기>는 총63권 43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494년 12월부터 1506년 9월까지 연산군
재위 11년 9개월간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편찬 작업은 연산군 사망 직후인 1506년 11월에 시작되었는데, 폐위된 왕의 사실을 편찬하는
것이므로 일기 수찬이라는 명목하에 일기청을 설치하였다. 이 작업에는 대제학 김감이
감춘추관사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1월에 김감이 대신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자 편찬
작업이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대제학 신용개가 다시 감춘추관사가 되면서
재개되었는데, 3개월 후에 편찬의 공정을 기하기 위해 연산군 때 신임을 받던 인물들은
교체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편찬관이 교체되었다.
교체된 편찬 책임자는 총재관 성희안, 이하 도청당상 2인, 가방당상 4인, 색승지 1인이
임명되어 본격적인 작업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때 참여한 편찬 실무자들의 이름은 부기되어
있지 않지만, 당시 기관사로 참여했던 권벌의 후손이 소장하고 있는 현존의 <일기세초지도>에
의해 그 전모가 파악되고 있다.
이에 의하면 편찬 과정에서 또 다시 책임자의 변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감수 책임자
성희안은 변동이 없었지만, 지춘추관사가 성세명, 신용개 등 6인, 동지춘추관사가 조계상, 이유청
등 8인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수찬관으로 강경서, 이세인 등 5인, 편수관으로 유희저,
김근사 등 24인, 기주관으로 이현보, 이사균 등 7인, 기사관으로 이말, 성세창 등 16인이 참여하여
<연산군일기> 편찬 작업에는 총 66인이 동원되었다. 하지만 이 66인의 편찬 작업은 어려움이
많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당대 사료가 부족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작성된 사료의 신빙성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연산군 대의 시정기는 자주 검열을 받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쉽게 직필을 하지 못했고,
사관이 경연이나 청정에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또한 사관으로 임명된 인물들이
연산군의 측근이 많아 사료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게다가 연산군 폐출 이후 사관들의
활약이 지나치게 위축되어 <연산군일기> 편찬 작업의 기초가 되는 사초를 제출하지 않았다.
이는 무오사화에 대한 여파로 사초 제출 이후에 닥칠 후환을 염려했던 까닭이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연산군일기> 편찬 작업은 시행 3년 만인 1509년 9월에 완료되어
제반 의식을 간단히 치른 다음 실록이 아니라는 이유로 외사고에 봉안되었다.
<연산군일기>는 봉안, 관리에서는 실록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내용과 체제는 실록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책은 대개 한 권에 1, 2개월분의 사실을 수록하고 있지만 부분적으로 6, 7개월분을 수록한
것도 있다. 특히 내용면에서는 무오사화의 후유증으로 사초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만들어졌다.
때문에 부실하기 짝이 없다.
여기에 사용한 사초는 정희량과 이종준이 작성한 것이 대부분이다. 나머지 사초는 아예 제출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각 사건에 대해 정확한 서술을 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사건 자체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채 실린 것이 대부분이다. 또한 사초의 내용도 편자들에 의해 많이 윤색된 흔적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연산군이 폭정을 행한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또 실록에는 의당 사건에 대한 관점, 평, 의미 등을 적은 사론이 따라붙게 마련인데
<연산군일기>에는 사론이 25개 정도밖에 수록되어 있지 않아 실록으로서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다. 그나마 이 사론들도 연산군의 패륜적인 비행에 대한 것뿐이어서 객관성을 의심하게 하고
있다.
내용을 부분적으로 살펴보면 무오사화 이전까지는 왕도 정치, 사원전, 내수사 정리 등에 대한
대간들의 상소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데 비해, 그 이후부터 갑자사화가 일어나던
1504년까지는 대간의 상소와 왕의 전교가 거의 반반을 차지하고 있고, 그 이후 폐위시까지는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에 연관된 인물들의 치죄와 연회에 대한 왕의 전교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대외 관계를 살펴보면 대명 관계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안 된 것에 비해 북방 야인에 대한
회유 문제와 왜인의 토산물 진봉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또 왕의 시문 및 그에
화답한 관료들의 시가 많이 실려 있는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다.
개인에 대한 서술에서는 사림파 성향의 인물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는 데 비해,
왕의 총애를 받던 궁중파 신하들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서술하며 비교적 많은 사론을 첨가하고
있다.
이 같은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연산군일기>는 정확한 사료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과, 연산군의 폭정에 대해 다소 과장된 서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또한 연산군의 폭정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다 보니 정작 기록해야 할 구체적인 사건들을 너무
소홀히 다룬 감도 없지 않다. 그리고 다른 실록 편찬 과정과는 달리 조정이 <연산군일기>
편찬에 너무 소극적이었다는 점도 지적될 수 있겠다.
#연산군 시대의 세계 약사
연산군 시대의 유럽은 콜럼버스, 아메리고 베스푸치, 바스코 다 가마 등의 탐험에 힘입어
아메리카 대륙, 인도, 남아프리카 등에 상륙하여 침략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또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등이 <최후의 만찬>, <다비드상> 등의 작품을 생산한 시기이며,
이탈리아에서는 이른바 문예부흥이라 불리는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는 시기였다.
또한 로마교회가 면죄부를 판매해 세인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고, 종교개혁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