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심덕·김우진 ‘현해탄 정사(情死)’ 미스터리
신동아|기사입력 2007-09-27 12:12 |최종수정2007-10-25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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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심덕과 김우진의 생존설을 제기한 ‘삼천리’ 1931년 1월호 ‘불생불사의 악단 여왕 윤심덕’ 기사. |
[신동아]
1926년 8월3일 밤 11시 시모노세키 항.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가 요란한 기적을 울리며 부산항을 향해 출발했다. 그믐을 사흘 앞둔 여름밤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한 시간이 지나 날이 바뀌자 아스라이 보이던 항구의 불빛마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한증막 같은 객실에서 사람에 부대끼며 비지땀을 흘리던 삼등실 승객들도 피로에 지쳐 차례로 골아 떨어졌다.
새벽 4시 도쿠주마루가 쓰시마섬 앞바다를 통과할 때, 갑판을 순찰하던 급사가 일등실 객실문 하나가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손전등으로 안을 비춰보니 승객은 오간 데 없고 짐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꼭두새벽에 문을 열어놓고 도대체 어디 간 거지?’
주위를 둘러보니 갑판 위에는 개미 새끼 하나 보이지 않았다. 급사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객실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켰다. 여행가방 위에 ‘보이에게’로 시작되는 메모지 한 장과 팁 5원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미안하지만 짐을 집으로 보내주시오. 목포부 북교동 김수산. 경성부 서대문정 윤수선.’
급사는 메모지를 움켜쥐고 황급히 조타실을 향해 내달렸다. 얼마 후 밤새도록 승객들의 숙면을 방해하던 둔탁한 엔진 소음이 멈췄고, 도쿠주마루의 모든 객실에는 불이 들어왔다. 사라진 일등실 승객 두 명을 찾기 위해 승조원들과 승객들은 배 안 구석구석을 뒤졌고, 선장은 뱃머리를 돌려 항로 주변을 수색했다.
도쿠주마루는 예정시간보다 반나절이나 늦게 부산항에 입항했다. 부산항에서 하선한 승객은 시모노세키 항에서 탑승한 승객보다 두 명이 적었다.
의문의 情死
이튿날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는 물론 ‘도쿄아사히심분’까지 현해탄에 몸을 던져 정사한 청춘 남녀의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기사는 김우진과 윤심덕이 ‘서로 껴안고’ 현해탄에 몸을 던졌다고 전했지만, 실제로 두 사람이 자살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승객 모두가 잠든 새벽 4시에 두 사람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으므로 그들이 언제 어느 지점에서 투신했는지, 과연 투신한 것이 맞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윤심덕의 유류품에는 현금 140원과 장신구, 김우진의 유류품에는 현금 20원과 금시계가 있을 뿐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윤심덕은 최고의 소프라노로 대중의 인기를 한몸에 받던 음악가였고, 김우진은 목포 백만장자 김성규의 장남으로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전도유망한 극작가였다. 목격자도 없고 유서도 남기지 않아 두 사람이 무엇 때문에 어떻게 동반 자살했는지 정확히 알 길이 없었지만, 언론은 정사라 단정하고 앞 다투어 추측기사를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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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심덕(왼쪽)과 동생 윤성덕. |
사고 발생 사흘 후인 8월7일 밤, 김우진의 동생 김철진은 목포 자택으로 찾아온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우진의 가족은 현상금 500원을 걸면서까지 시신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두 사람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유서도 없고 시신도 없는 의문의 정사였다.
사고 발생 이틀 후, 윤심덕이 사고 직전 오사카 닛토(日東)레코드에서 27곡을 녹음한 사실이 알려졌다. 원래 계약은 26곡을 녹음하는 것이었지만, 윤심덕은 이바노비치의 왈츠곡 ‘다뉴브 강의 잔물결’에 자신이 가사를 붙인 노래 한 곡을 더 녹음하자고 제안했다. 윤심덕이 노래하고 동생 윤성덕이 피아노로 반주한 그 노래가 바로 ‘사(死)의 찬미’다.
‘사의 찬미’가 포함된 윤심덕의 유고 음반은 사고 발생 일주일 후부터 오사카를 시작으로 일본과 조선 전역에서 대대적으로 발매됐다. ‘사의 찬미’는 일본에서 발매된 최초의 조선어 노래였다. 정사 사건에 관한 사회적 관심에 힘입어 ‘사의 찬미’는 전대미문의 판매고를 올렸다.
윤심덕이 살아 있다고?
“얼마나 기쁘십니까?”
1930년 12월, 매일신보 김을한 기자가 이화여전 음악과 윤성덕 교수를 찾아가 대뜸 축하인사를 건넸다. 윤성덕은 윤심덕과 오사카에서 함께 지내다 윤심덕이 현해탄에 투신하기 불과 몇 시간 전 요코하마에서 미국 유학길에 올랐기 때문에 미국에 도착한 후에야 언니의 자살 소식을 들었다. 노스웨스턴대학 음악과를 졸업한 윤성덕은 1928년 귀국해 모교인 이화여전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김을한의 뜬금없는 질문에 윤성덕이 되물었다.
한 시간 남짓 이어진 인터뷰가 끝나갈 때 윤성덕은 언니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지나친 관심에 불만을 표시했다. 그가 “남이야 살았든지 죽었든지 무슨 걱정이냐, 죽었으면 죽었고 살았으면 살았지. 도대체 조선사회는 왜 이렇게 남을 칭찬하기도 잘하고 욕하기도 잘하는지 모르겠다”고 되묻자, 김을한 기자는 인터뷰에 응해주어 고맙다는 말로 자리를 물러나야 했다. 윤심덕이 살아 있다는 윤성덕의 확신만 확인했을 뿐 뚜렷한 증거를 얻지 못한 채였다.
윤심덕과 김우진의 생존설은 두 사람이 정사한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두 사람 모두 유서도 시체도 발견되지 않았으니 가족들이 그렇게 믿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두 사람의 생존설을 확대 재생산한 것은 호사가들과 언론이었다. 두 사람의 정사 덕분에 엉뚱한 사람이 돈방석에 앉았으니 호사가들이 입방아를 찧을 만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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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심덕의 삶과 애정사를 전하는 ‘삼천리’ 1938년 11월호 ‘다한한 윤심덕’ 기사. |
동반자살한 이후의 상황도 의문이었지만, 자살 동기나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더 큰 의문이었다. 윤심덕과 김우진은 제각기 아픔과 고민은 있었지만 함께 정사해야 할 뚜렷한 이유는 없었다. 윤심덕에게 김우진은 여러 남자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고, 김우진 역시 함께 죽어야 할 만큼 윤심덕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왈녀’라 불리던 여인
윤심덕은 1897년 평양 순영리에서 부친 윤석호와 모친 김씨 사이의 1남 3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윤심덕이 태어난 직후 그의 가족은 진남포로 이주했다. 부모는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윤석호는 나물장사를 하고 김씨는 병원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힘겹게 살았지만 네 자녀를 모두 훌륭히 교육시켰다. 맏딸 윤심성은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경상북도 안동으로 출가했고, 막내딸 윤성덕은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윤심덕의 하나뿐인 남동생 윤기정은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도쿄음악학교와 오하이오대학에서 성악을 공부했다.
모친 김씨가 윤심덕을 임신했을 때 쌍둥이를 임신한 듯 보일 정도로 배가 불렀다. 윤심덕은 ‘6척(180cm) 장신’이라 불릴 만큼 키가 컸고, 어려서부터 성격이 사내아이같이 활달해 ‘왈녀’라 불렸다. 둘째였지만 4남매의 리더 노릇을 했고 동생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만큼 우애가 남달랐다. 여기까지가 학계에 공인된 윤심덕의 가정환경이다. 하지만 이와는 다른 기록도 전해진다.
윤심덕의 집안이 ‘큰 부잣집’이 아니라는 점에서 신빙성이 떨어지는 기록이다. 하지만 서른에 이르도록 윤심덕의 혼사가 번번이 깨어졌고 윤심덕이 가까운 친구들에게 가족들이 자신을 차별한다고 털어놓았음을 미루어볼 때, 윤심덕이 정상적인 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윤심덕은 열한 살에 진남포 삼숭학교에 입학해 박인덕, 김일엽과 단짝 친구로 지냈다. 공교롭게도 훗날 세 여인 모두 남자 때문에 비극적 삶을 살아야 했다. 박인덕은 청년 부호 김운호와 결혼했다가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자 조선 최초로 남편에게 위자료를 주고 이혼했고, 김일엽은 네 차례 결혼에 실패한 뒤 수덕사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
열네 살 되던 해에 집안이 진남포에서 평양으로 이사하자 윤심덕은 평양 숭의여학교로 전학했다. 평양에 이주한 이후 모친 김씨는 미국인 여의사 홀 부인이 운영하는 광혜여의원에서 일했다. 그러한 인연으로 홀 부인은 윤심덕의 후견인이 되었다. 의사가 되는 게 어떻겠느냐는 홀 부인의 권고에 따라 윤심덕은 숭의여학교를 졸업한 후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에 편입했다. 숭의여학교는 총독부에서 정식으로 인가를 받은 학교가 아니어서 상급학교에 진학하려면 인가받은 학교에서 2년간 더 공부해야 했다. 평양여고보에서 공부하면서 윤심덕은 의사가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음을 깨닫고, 졸업 후 서울에 올라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편입했다.
1915년 윤심덕은 총독부 관비유학생에 선발돼 교사생활을 1년 만에 청산하고 도쿄 유학을 떠났다. 아오야마가쿠인(靑山學院)을 거쳐 도쿄음악학교 성악과에 입학했다. 도쿄음악학교는 우에노(上野)공원에 위치해 우에노음악학교라고도 불렸다. 윤심덕은 도쿄음악학교에 입학한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김우진과의 만남
도쿄에서 윤심덕은 유학생들과 폭넓게 교유했다. 윤심덕은 왈녀라는 별명처럼 성격이 남성적이고 쾌활해서 남학생에게도 내외하는 법 없이 몇 번 만나면 서슴없이 말을 놓았다. 홍난파, 채동선, 김우진 등 숱한 남학생과 염문을 뿌렸지만, 자기가 싫으면 아무리 구애해도 받아주지 않았다.
니혼(日本)대학 문과에 다니던 박정식은 윤심덕에게 반해 약혼하자고 하루에도 몇 번씩 연애편지를 보냈다. 꽃다발과 사랑의 시를 전하면서 전력을 다해 구애했지만, 윤심덕은 냉정하게 뿌리쳤다. 박정식은 실연의 충격으로 정신이상이 생겨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귀국해 몇 년 동안 총독부병원 8호실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박정식의 친구들이 윤심덕에게 찾아와 “사람이 그 지경까지 되었는데 사랑을 받아줄 수 없느냐?”고 부탁하자 윤심덕은 짜증을 내며 퉁명스럽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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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집안 때문에 불행했던 극작가 김우진. 윤심덕의 애인 가운데 한 사람이긴 했지만, 같이 정사를 결행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던 듯하다. |
“그것이 왜 내 탓이냐. 아무리 내게 반해 실성했기로 내가 싫은데 어떻게 사랑을 받아주느냐?”
윤심덕은 싫은 사람에게는 한없이 쌀쌀맞게 대했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서슴없이 애정을 표시했다.
1921년 윤심덕은 여름방학을 이용해 김우진, 홍난파, 조명희 등 30명의 청년들과 함께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 노동자 단체 동우회의 운영비 모금을 위한 고국 순회공연에 나섰다. 이때 윤심덕은 김우진과 처음 만났다. 그때만 해도 김우진은 목포에 아내와 딸이 있었던 데다 도쿄에서 일본인 간호사와 사랑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선머슴 같은 윤심덕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윤심덕도 동우회 순회공연단에 참여한 다른 청년과 친밀한 관계여서 김우진에게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었다.
김우진은 1897년 목포의 대지주 김성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윤심덕과 동갑이었지만 성격이나 가정환경은 판이했다. 가난한 집 둘째딸로 자란 윤심덕이 쾌활하고 대범했음에 반해 부잣집 맏아들로 자란 김우진은 예민하고 신중했다. 김우진은 어려서부터 문학에 뜻을 두었지만 완고한 부친은 장남인 그가 가업을 잇기를 바랐다. 김우진은 목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목포심상고등소학교를 다니다가, 1915년 부친의 뜻에 따라 일본 구마모토농업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문학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졸업 후 와세다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김우진이 윤심덕을 처음 만난 것은 와세다대 2학년 때였다.
졸업을 한 해 앞둔 1923년, 김우진과 사귀던 일본인 간호사가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그해 여름방학 김우진은 목포 본가에서 지내며 죽음이 앗아간 실연의 아픔을 달랬다. 김우진은 도쿄음악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으로 돌아온 윤심덕에게 동생들과 함께 목포로 놀러 오라며 편지와 차표 석 장을 보냈다. 윤심덕은 윤성덕, 윤기성을 데리고 목포로 내려와 김우진의 집에서 조촐한 가족음악회를 열었다. 윤성덕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소프라노 윤심덕과 바리톤 윤기성이 노래를 불렀다. 김우진은 아내와 함께 윤심덕 남매를 극진히 대접했다.
1924년 도쿄 유학을 마치고 금의환향한 윤심덕은 성악가로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윤심덕이 독창자로 나서지 않는 음악회가 없을 정도로 출연요청이 쇄도했다. 하지만 독창자로 나선다고 수입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관비유학생이 귀국하면 관립학교 교사로 임용되는 것이 관례였지만, 몇 달을 기다려도 교사 발령이 나지 않았다. 윤심덕은 조선 최고의 성악가로 이름을 날리면서도 정작 생계를 걱정해야 할 만큼 어려운 지경에 내몰렸다.
이용문 스캔들
윤심덕의 나이도 어느덧 스물여덟이었다. 혼기가 꽉 차다 못해 넘긴 상태였다. 도쿄 유학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남성이 윤심덕에게 구애했지만 혼처가 마땅치 않았다. 재산이 있는 남성은 죄다 기혼자였고, 그에게 구애하는 미혼자는 재산이 없었다. 한때 함경남도 대부호의 아들 김홍기와 혼담이 상당히 진전됐지만, 신랑 집안에서 뚜렷한 이후 없이 혼담을 파기했다. 비슷한 시기 윤심덕은 엄청난 스캔들에 휩싸였다.
이용문은 대한제국 내장원경과 대한천일은행 은행장을 지낸 이봉래의 아들이었다. 이용문 자신도 대한제국 정삼품 장례원 전례를 지냈다. 을지로 일대 3만여 평의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였고, 소문난 호색한이었다. 이용문과 부적절한 관계가 세상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자 윤심덕은 더 이상 조선에서는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어 하얼빈으로 도피했다.
하얼빈으로 도피한 윤심덕은 반 년 동안 배형식 목사 집에서 은거했다. 1925년 6월 윤심덕은 형부의 사망 소식을 듣고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언니를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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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 1932년 5월호 ‘이태리 총영사가 조사한 윤심덕씨 생사’. |
윤심덕이 이용문과 스캔들을 일으켰을 때 김우진은 와세다대를 졸업하고 목포로 돌아왔다. 귀국 이후 김우진은 문학과 연극 운동을 하고 싶었지만 부친의 강요로 상성합명회사 사장에 취임했다. 상성합명회사는 김우진 집안이 소유한 막대한 토지를 관리하는 회사였다. 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떠맡은 김우진은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낮에는 회사 일을 돌보고 밤 시간을 이용해 작품을 읽고 썼다. 부친에게 자신을 풀어달라고 간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스캔들에 휩싸여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윤심덕보다 나을 것이 없는 처지였다. 김우진과 윤심덕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처지를 위로했다.
배우가 된 성악가
1926년 김우진은 윤심덕에게 광무대에서 상설 공연을 하는 토월회에 입단할 것을 권했다. 조만간 집을 나온 후 극장을 차려 윤심덕과 함께 운영할 생각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선사회는 여배우를 기생처럼 여겼다. 여배우가 되는 것은 신세를 망치는 일처럼 인식됐기에 극단들은 여배우를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 시절, 한때 악단의 여왕으로 명성을 떨치던 윤심덕이 여배우가 되겠다고 자원해서 나서자 토월회는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윤심덕은 집안의 만류를 피하기 위해 대구 일갓집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집을 나와 여관에서 기거했다. 윤심덕이 공연에 출연한다는 광고가 나가자 이용문과 염문을 뿌려 하얼빈까지 달아난 뻔뻔스러운 여자 얼굴이나 보자고 관객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일갓집에 간다고 집을 나간 윤심덕이 여배우가 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모친은 열흘 동안 매일같이 광무대를 찾아와 그를 무대에서 끌어내리려 했다. 모친이 찾아왔다는 연락을 받으면 윤심덕은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뒷문으로 도망치듯 광무대를 빠져나왔다.
윤심덕은 여배우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의 몸짓은 둔하고 부자연스러웠고, 발음이 부정확해서 대사가 객석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가끔 오쿠다 사진관 2층에 마련한 자신의 거처에서 상경한 김우진과 만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1926년 6월 김우진은 2년 동안의 목포 생활을 청산하고 집을 나왔다. 가업을 더 이상 돌보지 않고 예술에 전념하겠다고 선언하자 부친은 잘 가라는 말조차 하지 않고 맏아들을 내쫓았지만, 모친은 생활비에 보태 쓰라고 3000원을 마련해주었다. 집을 나온 김우진은 윤심덕에게 알리지도 않고 도쿄로 건너갔다. 김우진이 도쿄로 떠난 지 한 달 후 윤심덕은 음반 취입과 미국 유학을 떠나는 동생 배웅을 위해 오사카로 건너갔다. 닛토레코드에서 27곡을 취입한 후 도쿄에 있는 김우진에게 전보를 쳤다.
‘당장 달려오지 않으면 죽어버리겠소.’
1926년 8월3일, 윤성덕이 미국행 배를 타기 위해 요코하마로 떠나자, 윤심덕은 도쿄에서 황급히 달려온 김우진과 함께 시모노세키로 가서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에 탑승했다. 그 후 아무도 윤심덕과 김우진을 보지 못했다.
윤심덕 생존설의 진상
1930년 12월 김우진의 동생 김철진과 김익진은 총독부에 수색원을 제출함으로써 한동안 잠복했던 윤심덕·김우진 생존설은 또다시 수면으로 떠올랐다. 생존설은 ‘윤심덕과 김우진이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에서 현해탄에 몸을 던져 정사했다는 것은 한낱 연극일 뿐이고, 실상은 도쿠주마루 일등선실 급사를 매수해 정사한 것처럼 위장한 후 나가사키를 거쳐 상하이로 가서 중국인 명의로 다시 이태리로 건너간 후 로마에서 악기점을 경영하면서 단란한 가정을 꾸몄다’고 설명한다.
1930년 제기된 윤심덕 생존설이 놓치고 있는 한 가지 의문은 두 사람이 과연 정사할 만큼 사랑하는 사이였는가 하는 점이다.
윤심덕은 김우진만 사랑한 순간이 단 하루도 없었다. 언제나 동시에 여러 사람과 사랑을 나눴다. 김우진은 유부남이었고, 일본인 간호사를 사랑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어도 윤심덕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두 사람이 살림을 차린다고 손가락질하거나 뜯어말릴 사람도 없었다. 1920년대 조선사회에는 ‘제2부인’이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로, 유부남과 처녀가 살림을 차리는 것이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드문 일도 아니었다. 두 사람이 정사할 이유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가장해 로마에서 신분까지 속이고 함께 살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1931년 11월, 이탈리아 주재 일본영사관은 김우진의 유족에게 “로마에는 김우진과 윤심덕이라는 이름을 가진 조선인이 살지 않으며, 동양인이 경영하는 악기점도 없다”고 공식적으로 통보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생존설에서 제기한 것과 같이 중국 여권으로 신분을 가장하고 살 경우에 대해서는 확인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윤심덕과 김우진이 1926년 8월4일 현해탄에서 동반자살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두 사람의 동반자살이 정사라는 믿음은 언론이 만들어낸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死(사)의 찬미>...
루마니아 작곡가 Iosif Ivanovich(요시프 이바노비치)의 작품인
<도나우 강의 잔물결>에 가사를 붙인 곡...
<死의 찬미>(윤심덕, 김우진 작사/Iosif Ivanovich 작곡/윤심덕 노래)
윤심덕 [尹心悳/1897~1926.8.4]
여가수, 작사가, 성악가, 연극배우.
호 수선(水仙).
평안남도 평양 출생.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성악가.
[데뷔] 1920년 소프라노 성악가.
[학력]
-평안남도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 수료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일본 우에노 음악학교 성악학과 졸업
[주요 곡] <死의 찬미>
[주요 연극 출연작] <死의 승리>
김우진 [金祐鎭/1897~1926.8.4]
시인, 극작가, 연극인, 연극이론가, 번역문학가, 평론가.
호 초성(焦星), 수산(水山).
전라남도 장성 출생.
-1911년부터 시를 쓰기 시작.
-1920년 극예술협회 조직.
-1921년 동우회순회연극단 조직.
[학력]
-일본 구마모토 현립 농업중학교 졸업
-일본 와세다 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주요 작품(시)]
<죽엄>, <死와 生의 이론(사와 생의 이론)>, <죽엄의 이론>
[주요 작품(희곡)]
<難破(난파)>, <두덕이 시인의 환멸>, <산돼지>, <李英女(이영녀)>, <正午(정오)>
요시프 이바노비치 [Iosif Ivanovich/1845~1902.9.28]
루마니아의 작사가, 작곡가, 편곡가, 군악대장.
첫댓글 아 이런 자료 이젠 국립 도서관이나 종합 박물관에서 볼수있는 자료 들인데 정리되어 한눈에 볼수 있다는건 운영자의 의지와 부단한 열정이십니다. 감사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