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詩, 나는 이렇게 썼다
산비둘기를 위하여
주경림(시인)
잿빛 산비둘기 어린 새끼,
오른 쪽 날개가 꺾인 채 쓰러졌다
날개 죽지 밑에서 핏방울이 점 점 점
수북이 빠진 깃털을 검붉게 물들인다
꿀물을 검지에 찍어 부리에 대어주어도
주르륵 흘러내려 목덜미 파란 깃털이 젖는다
통 받아먹지를 못 한다
부리는 꼭 멍들어 빠진 발톱색이다
그러기를 몇 차례,
자줏빛 산비둘기 눈과 내 눈이 딱 마주쳤다
내 가슴만 뭉클하지 그 눈은 유리구슬처럼 굳어있다
그러자, 그 조그만 입이 쫘악 벌어지며
어둠이 새카맣게 밀려나온다
목덜미를 움칠움칠
반은 흘리고 반 방울씩 받아먹을 때 마다
아, 살았구나
옳지, 옳지 하며 나는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꿀물 세 방울 받아먹더니 돌아앉아 버린다
아픈 걸 보여주고 싶지 않은 지
그러자, 묵직한 돌멩이에 눌린 듯
내 가슴 한 편이 뻐근해졌다
‘구구’의 다친 날개는 그렇게
내 속에서 아픈 날개를 파닥이기 시작했다
실컷, 혼자 앓고 일어나길 기다려 볼 밖에
-졸시 「산비둘기 ‘구구’」 전문
한 해가 다 저물던 12월, 바람이 몹시 불던 날 이었다. 군대에 간 아들에게 카드를 부치고 오니 문 앞에 산비둘기 한 마리가 웅크리고 꼼짝도 안했다. 검은색이 도는 잿빛 돌멩이처럼 보였다. 왜, 오이지나 짠지 항아리에 덧 누르는 그런 돌멩이 말이다. 부서진 깃털 조각이나 핏 자국이 없었으면 그냥 지나칠 뻔 했다.
오른쪽 날개를 심하게 다쳐 꼼짝도 못하는 것이다. 어린 것이 큰길가에 나왔다가 교통사고라도 당한 것일까. 도와주고 싶어 가까이 접근하자 소스라치게 놀라 경계했다. 아픈 몸을 푸드득 거릴 때 마다 핏 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산비둘기에게 고통만 배가 시키는 꼴이었다. 쌀 한 줌과 물을 갖다 주었지만 날이 어둑해 질 때까지 전연 입도 대지 않았다.
저녁 때 귀가한 남편에게 이야기하자 그냥 놔두면 도둑고양이가 물어간다며 덥썩 안고 들어왔다. 산비둘기는 야생이라 온갖 해충을 다 가지고 있고 조류독감이 걸려 있을지도 모르는데 장갑도 끼지 않고 맨손으로 아픈 아이 다루듯 조심스럽게 안고 들어온 남편이 비둘기보다 더 걱정이 되었다. 어설프게 접근한 나는 그렇게 경계하더니 그이에게는 저항 없이 온전히 몸을 맡겼다. 가축병원도 문 닫은 시간, 어찌해야 할까. 우선 꿀물을 먹여 보자고 했다. 남편이 붙잡고 내가 꿀물을 그 작은 부리에 대어주어도 반응이 없었다. 혹시 죽은 것은 아닐까.
나는 검지손가락에 꿀물을 찍어 부리 위에 갖다 대어 주었다. 그냥 꿀물이 부리를 타고 흘러 목덜미를 적셨지만 먹으려는 기색이 도무지 없다. 이렇게 답답할 수가. 서너 차례 그 일을 반복하다 내가 지쳐 버렸다. 제대로 잘하라고 남편이 큰소리로 핀잔까지 주는 바람에 말다툼까지 벌이기 시작했다. 그때, 소란스러웠기 때문일까, 박제된 자줏빛 유리구슬 같은 눈알이 또록또록 해지더니 부리를 쫙 벌렸다. 막무가내 꽉 다물었던 부리가 열렸다. 조그만 부리 속에서 갇혀 있었던 새까만 어둠 덩이가 쏟아져 나왔다. 내 손가락에서 떨어지는 꿀물을 반쯤은 받아먹고 반쯤은 흘리고, 그렇게 서너 차례 반복했다. 반 방울의 물을 받아먹기도 힘든지 목덜미와 가슴의 근육들까지 움찔움찔 떨고 있었다.
살아났구나! 제발 병신이 되지는 말아야 할 텐데. 화가 박항률의 ‘머리 위의 새’ 가 떠올랐다. 화가인 자신에게 그 새는 영혼의 상징으로 자유롭게 허공에서 머릿속으로 날아들어 상상의 여러 가지 씨앗들을 뿌려주고 그 씨앗들이 발아해서 신선한 이미지들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그렇다면 저 산비둘기는 내게는 날개 다친 영혼, 아픈 영혼의 상징이 된다.
산비둘기는 오른 쪽 날개가 부러진 것 같았다. 나무젓가락이라도 갖다 대서 깁스를 해줘야 되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가축병원에 데리고 가야할 텐데. 두 가지 방법 중에 나는 하나도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자지러지게 아픈 곳을 차마 만질 용기도 없을 뿐 더러 자줏빛 유리구슬 눈알에 어린 공포의 표정과 마주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두 손으로 안았다가 떨어뜨리기라도 하는 날이면 유리잔처럼 깨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남편의 도움으로 우선, 옥상의 물탱크 집 안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물탱크 집은 영업용이라 널찍하고 천장이 높고 창문도 있어 제법 환했다. 강아지를 기르던 봉제품 집을 찾았다. 버리질 않기를 참 다행이다 싶었다.
똘똘이가 자기 집을 보더니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킁킁거린다. 헌 스웨타로 바닥을 깔아주어 병실을 마련해 주었다. 좁쌀 한 줌과 물을 넣어 주었다. 아픈 만큼 실컷 아프고 일어나면 참 좋겠는데. 내게는 매일 아침 모이와 물을 갖다 주며 병문안 가는 한 가지 일거리가 더 늘어났다. 나는 이제부터 그 비둘기를‘구구’라고 부르기로 했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의 비둘기들은 턱이 없을 만큼 뚱뚱한데 비해 ‘구구’는 살집이 없고 바짝 말라 보기에도 애처로운 산비둘기 새끼였다.
‘머리 위의 새’는 차츰 내 가슴으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이미지로서가 아닌 실재하는 유정물로서 잿빛의 납작한 돌이 되어 가슴 한 편을 묵직하게 눌러주었다. 그 뻐근함은 갈비뼈가 부러졌을 때의 그 통증과 비슷했다. 기침을 할 때나 웃을 때, 심지어는 조금 크게 말할 때도 묻어나왔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 만져본 날짐승 ‘구구’의 다친 날개는 그렇게 내 속에서 아픈 날개를 파닥이기 시작했다.
己丑年, 새해 첫 날, 날이 밝자마자 옥상으로 올라가‘구구’를 들여다보았다. 발자국 소리를 들었는지 낮은 신음소리를 낸다. 뒤돌아 앉아 꼼짝을 안한다. 산비둘기, 그 어린 것이라도 아픈 모습, 약해진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은 거야. 혹시 죽기라도 하면 어쩌지, 병신이 되어 날지 못하게 된다면 어쩌지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모이 그릇과 물그릇이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싹싹 잘도 먹어 치웠네. 곧 일어날 것이라는 즐거운 예감이 들었다. 날씨가 추우니, 모이와 물을 갖다 주고 며칠 지켜보기로 했다. 글쎄, 어디선가 새들은 좁쌀을 잘 먹는다고 들은 것 같기도 했다. 실은 얼마 전에 노란 메조를 잘못 사서, 밥에 두면 식구들이 깔깔하다고 싫어했다. 그 메조가 아픈 산비둘기의 훌륭한 모이가 되어 주었다. 제발 다 먹고 날개에 힘 붙거라.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모이를 갖다 주자 앞을 향해 반드시 앉아 나를 맞이한다. 붓기가 빠졌는지 며칠 새 몸이 야위어 까칫해졌다. 죽도록 앓고 난 모양이었고 나를 믿기 시작했다. 보일러실 여기저기 비둘기 똥이 흩어져있는 것을 보니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았다. 날개에 힘이 붙으면 창문을 열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옥상에서 내려왔다. 혹시‘구구’의 부모나 친구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올라가서 창문을 열어주었다. 빛이 들어오자‘구구’가 움찔하며 날개를 털기 시작한다. 나는 헤어질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운 겨울이니 이곳에서 좀 더 요양하고 떠나면 좋으련만.
‘구구’가 보이질 않는다.‘구~~구~~’이렇게 큰 소리로 불러보았다. 파드득 물탱크 뒤쪽에서 날갯짓 소리가 들린다. 제 이름을 부르는지 알아들은 모양이다. 파이프와 파이프 사이를 조금씩 날며 비행 연습을 하고 있었다. 다행히 앉은뱅이가 된 것은 아니구나. 내심 기쁘고 감사했다. 깁스도 안하고 약 한 알도 얻어먹지 못하고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연 치유력으로 스스로 살 길을 찾아가는‘구구’가 신통방통했다. 다친 날개가 몸에 딱 붙지를 못하고 조금 쳐진다. 아픈 쪽이 무거워 보이지만 그만하기가 천만다행이다. 보일러실 문을 열어 놓았다. 언제든지 네 집으로 날아가거라.
이제 더 이상 내가 주는 모이 좁쌀과 물이 줄지 않았다. 옥상 정원에서 부리를 주억거리며 땅을 헤집어 모이를 찾고 열매를 따먹으며 라일락 가지에서 사찰나무로 그렇게 혼자 나는 연습을 했다. 설핏한 겨울 햇살이 아픈 곳을 어루만져주고 소독도 해주는 치유의 손길이었다. ‘구구’가 잿빛이 도는 보랏빛 날개를 아파도 참고 부채살처럼 활짝 폈을 때 햇살이 번쩍이는 침을 수없이 꽂아주었다. 나는 눈 이 시려 그 광경을 더 이상 쳐다볼 수 없었다. 어느 날은‘구구’가 물탱크 지붕 위에 훌쩍 올라 앉아 먼 곳을 쳐다보기도 했는데 아마, 자기가 가야할 먼 길을 미리 짚어본 것 같다. 옥상에서 제일 높은 곳, 안테나 끝에 앉아있는 ‘구구’가 내가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옥상에는 아직 산비둘기의 체온이 남아있는 것 같다. 붉은 다리로 앙증맞게 뒤뚱거리며 모이를 찾고 아픈 날개로 허공을 젓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1,000km나 날아간다니 산 속에 제 집을 찰 찾아갔겠지. 혹시 또 찾아올까 몰라 모이는 당분간 그냥 두기로 했다. 언제든지 들르렴.
야생의 힘은 대단하다. 혼자 죽도록 앓고 스스로 회복해서 나는 연습을 해보더니 제 갈 길을 가 버렸다. 옥상 난간에는 물똥이 얼룩져 있다. 아마 여기서 잠시 멈추고 망설였음에 틀림없다. 보장되는 먹이와 편안한 안식처를 버리고 자유를 택한 것이다. 두려움을 이기는데 시간이 좀 걸렸던 것 같다. 새벽 빛 속을 헤치며 "푸드득", 발목이 휘도록 멀리 날아갔을 것이다.
아마, 이제는 아픈 날개의 힘으로 살아갈 게다. 우리가 상처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듯이 말이다. 열흘이라는 짧은 인연이지만 오랫동안 함께 지낸 듯 서운했다.
주경림 시인
* 서울 출생
* 이화여대 문리대 사학과 졸업
* 1992년《자유문학》시 부문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
* 시집으로 『씨줄과 날줄』『눈잣나무』가 있음
* 시 아카데미 동인
* http://www.jookyunglim.pe.kr
* jookyunglim@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