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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구
( 언약교회/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기독교학문연구회)
서론
이 글에서 다룰 네 가지 주제들을 질문 형식으로 미리 제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기독교 학교란 무엇인가?", 둘째는 "기독교 학교의 존재 근거는 무엇인가?" 셋째는 "기독교 학교를 제대로 설립하고 운영하기 위해서 우리는 과연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가?" 그리고 넷째는 "우리 나라의 상황 가운데서 아이들을 기독교 학교로 보내는 것과 비기독교 학교에 보내는 것과의 장단점은 무엇인가?" 이 네 가지 주제들을 차례대로 간단히 생각해 보기로 하자.
1. 기독교 학교란 무엇인가?
기독교 학교와 비슷한 학교가 한국에 상당수 있어 왔는데, 그것은 미션 스쿨(mission school)이다. 그러나 미션 스쿨은 엄밀한 의미의 기독교 학교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미션 스쿨과 기독교 학교와의 차이는 무엇인가? 미션 스쿨은 피선교지에서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를 말한다. 선교사들이 학생들을 모집할 때 그들은 학생들이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상관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에는 비기독교인을 모아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목표는 비기독교인을 데리고 와서 기독교적인 방식으로 교육을 시키고 전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초기의 미션 스쿨은 그래도 기독교적 전도가 활발하게 수행될 수 있는 장(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에서는 이런 미션 스쿨과 비기독교 학교의 차이가 별로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세월을 지내면서 미션 스쿨이 사회적인 압박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선교적 학교를 처음 세웠을 때는 기독교의 관심을 온 세상에 널리 알게 하는 것이 제일 중요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일반적인 경쟁 사회에서 경쟁에 이길 수 있는 사람을 길러 내야 한다는 요구가 많아지고, 그 결과 나중에는 미션 스쿨이 일반 학교와 비슷해진 것이다.
그것에 비해 기독교 학교는 무엇이 다른가? 기독교 학교를 단적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그리스도인 교사와 학생들이 기독교적인 세계관과 기독교적인 교육 과정(curriculum)을 가지고 교수하고 학습하는 기독교적인 학습의 장(場), 혹은 기독교적인 학문 공동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여기서 몇 가지가 요구되어 지는데, 그 중 첫째는 교사나 학생이 모두 (혹은 거의 모두)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미션 스쿨과는 달리 이미 그리스도인인 학생들을 잘 양육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사와 학생이 모두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함께 만나게 된다. 그러나 만일에 교사가 표면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이면서도 내면적으로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결국에는 기독교 학교가 되지 않는다.
둘째는 학생들도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것을 전제로 한다.
셋째로 기독교 학교는 기독교적 교육 내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기독교 학교는 기독교적 교육 과정(Christian curriculum)을 가져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인 교사는 이 세상의 학문들을 무비판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독특하게 기독교적인 내용으로 해석하고 재구성해야 한다. 이런 사람들이 같이 모여서 나누는 학문 공동체, 이것이 기독교 학교의 기본적인 정의라고 할 수 있다.
2. 기독교 학교의 존재 근거
그런데 이런 기독교 학교가 있어야 할 근거는 무엇인가? 이 질문은 이 글의 두 번째 제목, 즉 기독교 학교를 위한 근거에로 우리의 논지를 옮겨준다.
성경에서 기본적으로 이것을 뒷받침해주는 틀이 있다. 이것은 기독교 학교뿐만 아니라 기독교적인 교육 전체와 관련된다.
기독교 학교의 존재 근거와 관련해서 첫째로 생각해야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인간에게 주셨던 명령이다. 창세기 1장 26, 27, 28절을 보면, 다른 동물들을 만들 때와는 달리 인간을 만들 때 아주 독특하게도 인간을 만드시는 목적을 분명히 천명하신다. 26절을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라고 하시고, 그 후에 사람을 만드신다. 여기에 사람의 독특성에 대한 인식도 들어있고, 그가 존재하는 목적도 들어 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이 세상을 잘 다스려 나간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들어 준 이 세상을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잘 통치해 나간다는 것은 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이 원하는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개혁 신학에서는 창세기 1장 26, 27, 28절을 문화 명령(culture mandate)이라고 불러왔다.
이 명령 속에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이유가 들어 있다.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인간은 큰 존재 의미를 가지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 세상을 잘 다스려 나가기 위해서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우리가 이른바 학문 분과라고 하는 모든 종류의 일들이 드러나야 되는 것이다. 정치학, 경제학, 교육학, 의학, 약학, 공학 등 각 학문 분과의 작업들이 있어야 되고 이런 것을 다음 세대에 잘 전달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이 땅위에 문화가 드러나도록 하는 일, 이것이 사람이 이 땅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이유라는 것이다. 이 근본적인 문화 명령 속에 교육적인 명령이 포함되어 있다. 교육이 없이는 문화 명령에 순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육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문화의 건설의 수단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 학교의 두 번째 근거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역을 다 하시고 승천하시기 얼마 전에 우리에게 주신 명령에 있다. 이 명령은 흔히 대위임령(the great commission)이라고 불린다.
이 대위임령은 대개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이라고 오해되고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28장 16절에 보면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님의 대위임령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승천하신 장소는 사도행전 1:12에 보면 벳바게 맞은 편 감람산이다. 그곳은 예루살렘에서 안식일에 걸어갈 수 있는 장소이다(행 1:12).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최후로 명령하시고 승천하신 곳은 분명히 갈릴리가 아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마태복음 28장 마지막의 이 말씀이 끝난 다음에 승천하셨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오해이다. 사실은 대위임령과 비슷한 말씀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도 여러 번 주셨다는 것을 우리는 이런 말씀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 대위임령의 내용은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가르친 것을 전하고 그들로 하여금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다. 이 말은 아주 폭넓은 뜻을 가진다. 제자를 삶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는 이 두 가지는 아주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자 삼는 것이 먼저 온다. 어떤 사람이 제자가 되었다면 세례를 주어 공적으로 그것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세례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한 것이다. 제자가 되면 벌써 하나님과 연합이 되어진 것이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공인해 주는 것이 세례이다.
믿는 이에게 세례를 베푼 다음에 해야 할 것은 주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께서 분부한 모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일차적으로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셨을 때 제자에게 하신 말씀을 뜻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라 과거 구약 시대에 그분이 하나님으로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과 신약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든 전승도 포함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풍성한 명령이다.
그러므로 이 대위임령을 전도를 위한 지상명령이라고 생각해서 전도만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전도도 분명히 포함되지만 전도를 통해 제자가 된 사람에게 가르쳐 지키게 할 풍성한 내용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수단 중에 하나가 바로 우리가 주제로 삼고 있는 기독교 교육과 기독교 학교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28장의 대위임령은 기독교 가정에서의 교육, 기독교 공동체(교회)에서 교육, 그리고 기독교 학교에서의 교육에 대한 의미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신약 시대인 지금은 문화 명령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고 대위임령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대위임령은 문화 명령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고 나면 이제야 비로소 문화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대위임령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문화 명령을 이루도록 하시는데, 그것의 한 부분이 주님이 원하는 교육인 것이다. 기독교 교육은 사람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모습으로 키워나는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 교육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사람을 키워나가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기독교 교육은 인간의 힘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 교육학자들은 자기들의 힘으로 아이들을 잘 키우면 그들이 장차 괜찮은 사람이 되고 훌륭한 사회가 세워질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을 길러내지 못한다고 본다.
이 일은 인간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교육을 하느냐하면, 결국 교육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 부모나 인간 교사는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그 일을 옆에서 도와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 의식이 철저하면 철저할수록 기독교 교육이 제 자리를 잡게 된다. 그러므로 기독교 교육은 이상한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불가능하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가능하다고 하기 때문이다. 다분히 역설적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을 가르치시고 성령께서 사람을 변화시키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이런 입장이 나온다.
기독교 학교를 위한 세 번째 근거는 부모가 하나님과 맺고 있는 언약 관계에 있다. 이는 부모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상황에서 출발한다. 기독교 교육의 출발점은 멀리는 문화 명령과 대위임령에 있지만, 가까이는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자녀 교육의 사명을 맡기셨다는 믿음에 있다. 이 말은 기독교 교육의 또 하나의 근거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맺어진 '은혜 언약'에 있다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의 언약적인 관계(행위 언약)에서 실패했을 때 사람들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힘이 없어졌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든 조건을 스스로 마련해 주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과의 은혜 언약 가운데로 들어오게 하셨다. 이런 상황에서 은혜 언약을 믿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들어온 사람을 언약 백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언약 백성에는 우리의 자녀까지 포함이 된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부르시고 언약 백성의 시조로 삼으시기 위해 할례를 명하셨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 뿐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속한 아이들도 모두 할례를 받게 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아브라함과 같이 언약의 백성이라면 아브라함의 자녀가 그랬던 것처럼 나의 자녀들은 자동적으로 은혜 언약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언약의 자녀들을 둔 부모들의 일차적 책임은 자녀들을 언약의 백성으로 잘 키우는 것이다. 이 사실을 밖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유아 세례이다. 이것은 믿음의 행위이다.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를 안 믿는 사람에게는 세례를 못 베풀게 한다. 그런데 아이들이 자기 입으로 신앙고백을 하지 않아도 유아 세례를 베푸는데, 그렇게 한 이유는 그냥 교회가 옛날부터 그것을 해 왔기 때문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이 아이들이 하나님의 은혜 언약 가운데서 우리에게 주어진 아이들이라는 것을 믿는 것에서 생겼다. 그러므로 이것은 굉장한 신학적 결단인 것이다.
또한 아이들이 언약의 자녀임을 믿고 그 증표로 교회가 유아 세례를 베풀었으면 교회는 그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 물론 첫 번째는 책임은 부모에게 있다. 그러나 부모의 서약 이후에 교회의 다른 성도들, 즉 회중들도 다 서약을 한다. 유아 세례를 받는 자녀를 회중 모두가 책임을 지고 양육하겠다는 서약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유아 세례가 의미 있게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는 한 공동체에 속하는 성도가 많아지면서 이것이 무시되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에는 누가 유아 세례를 받는지도 모를 뿐 아니라 유아 세례식이 있다고 하면 '야, 오늘 예배 시간 길어지겠네'하며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그 의미를 점차로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언약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바른 모습은 아닐 것이다. 유아 세례를 받은 언약의 자녀들은 교회 공동체가 같이 키워야 한다. 회중들도 부모와 더불어 이 아이들을 양육시킬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요약하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언약의 자녀를 받을 때 다음의 세 가지 책임을 갖게 된다.
첫째, 가정에서 부모들이 기독교적인 원칙에 따라서 아이를 잘 키워야 한다.
둘째, 교회에서 사역자들이 기독교적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 이때 주의해야 하는 것은 부모가 가르치는 책임을 교회에 전적으로 위임해 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부모가 자녀를 가르치는 일은 계속하면서 교회에서 신앙교육을 추가로 해야 한다.)
세째, 학교에서 언약의 자녀에게 어울리는 교육을 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기독교적인 학교를 세우는 노력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다.
기독교 학교를 위한 네 번째 근거는 서양의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역사적으로 경험한 내용이다. 그들은 언약의 자녀들을 한동안 세상의 학교에 보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언약의 자녀들을 이상한 곳에 방치해 두면서 그들에게 스스로 알아서 판단하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세상의 학교에 보내는 것이 때로는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것은 아이들에게 스스로 알아서 하게 하는 것이다.
서구의 공교육은 처음에는 기독교적인 기초를 가지고 실시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이 점차 인간 중심적으로 흘러가서 마침내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교육을 한다는 것이 그것의 중심 사상이 되었다. 그 영향을 받아서 우리 나라의 교육법 제1조도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 사상을 말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서구에서는 신실한 개혁파 교회들이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이렇게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된 것이다.
그들은 예수 믿는 사람은 삶과 교육에서도 인간 중심적 관점이 아니라 명백하게 하나님 중심적인 관점에서 출발해야 하며, 교육과정과 사제지간의 관계를 포함한 모든 것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은 개혁 신학 내에서의 전통적인 용어로는 반립(antithesis)이라고 한다. 인간 중심적 태도와 하나님 중심적 태도 사이의 대립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반립의 의식이 없는 사람들은 이 두 가지 관점을 섞어버린다. 마치 다른 종교가 들어오면 그 둘을 적당히 섞어서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한국의 전통에서도 샤머니즘적인 요소와 기독교적인 요소가 섞였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개혁 신앙에 있어서는 반립의 의식은 중요했다. 그들은 세상의 인도주의적인 관점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이와 같은 반립의 자세가 흐려졌던 전형적인 한 예가 있다. 여러분은 아마 이런 설교를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일생을 헌신한 이 시대의 성자, 알버트 슈바이쳐의 신앙을 본받읍시다!" 그런데 슈바이쳐가 예수를 어떻게 믿었는가? 슈바이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곧 오리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까 '내가 예루살렘으로 가서 죽으면 하나님 나라가 오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고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굳게 결심하고 결국 예루살렘에 가서 십자가에 죽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죽기 직전까지도 하나님 나라가 오지 않자 절망한 나머지 예수님이 "엘리엘리 라마사박다니",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쳤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이 절망하며 죽었는데 역사의 수레바퀴는 그런 절망한 청년의 시체를 메달고 그대로 돌아갔다고 말한다. 이것은 슈바이쳐가 쓴 『역사적 예수의 탐구』라고 하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가 말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슈바이쳐에 대한 정확한 평가 없이 무조건 존중하기만 하는 것은 반립에 대한 의식 없이 결국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모호한 생각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반립을 강조하는 개혁 신앙의 입장은 기독교 학교를 요구한다. 이세상의 모든 일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기 위해서이다. 이것을 보다 철저하게 생각을 했던 사람이 화란의 정치가요 교육자요 목사였던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이다. 그 분은 손봉호 박사님 등 여러 기독교 학자들이 공부하셨던 화란 자유대학의 설립자이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뒤를 이어 헤르만 도예벨트(Herman Dooyeweerd)가 기독교적 철학을 제시하면서 15개의 양상, 즉 15개의 학문 분과에 대해서 말한다. 이 양상들은 제일 위가 신앙적 양상, 그 아래가 도덕적 양상 등등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런 모든 노력들은 하나님 중심적인 태도에서 학문을 해 보려는 결과들이다.
3. 기독교 학교를 위한 준비
이와 같은 네 가지 근거가 기독교 학교가 이 세상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학교를 제대로 하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첫번째로 은혜 언약과 반립, 그리고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회중 전체가 이 신앙과 가치관을 공유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제자 됨의 한 부분이고, 엄밀하게 따지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세상을 다스리라고 하는 그 일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다음 것들에 비하면 비교적 쉽다. 목사님께서 설교를 통해 일관되게 이것을 가르치시면 회중의 의식이 점차로 변할 것이다.
두번째로 진정한 기독교 학교를 위해서는 기독교적인 교육 과정(curriculum)이 필요하다. 모든 학문 분과를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해석하여 교육 과정을 잘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을 위해서는 교육 전문가들이 신학적 기반을 가지고 작업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 일에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는 전문가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기독교 학교를 제대로 뒷받침 할 수 있다.
세번째, 기독교 교사들(christian teachers)을 양성해야 한다. 사실은 이것이 제일 힘든 일인데, 그 이유는 우리의 의식이 기독교적 세계관에 의해 충분히 변하기보다는 거룩한 일과 세속적인 일을 분리하는 이원론에 사로잡히기 쉽기 때문이다. 즉, 교회 다니는 교사는 많지만 가르치는 내용과 태도를 철저히 기독교적으로 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적기 때문이다. 교회 내에서는 신실한 직분자이면서도 학교에서는 비기독교적인 것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기 쉬운 것이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인간을 물질적 존재로 파악하는 현대 과학주의의 신념들을 마치 객관적 사실인 것처럼 가르치기도 하고, 또 성공 지향적인 기능 교육을 지나치게 강조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학교를 위한 신실한 기독교 교사의 양성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기독교 교육 대학원이나 기독교 사범 대학을 만드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된다.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 기독교 학교는 세워지기 어려울 것이다. 보통 대학을 설립하려면 최소한 120억원 정도 들지만, 합동신학대학원이나 국제신학대학원과 같이 학부가 없는 단설 대학원을 만들려면 30억-40억 정도면 할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기독교 교육 대학원에서는 일단 일반 교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을 2년 동안 재교육을 시키는 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철저한 기독교적 의식을 가지고 교육학을 가르치는 교수님들이 필요하다.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1세대 교수님들에 비해서 2세대 교수님들이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 더 강조하신다. 앞으로 이런 흐름은 더 발전하리라 본다. 그리고 돈이 많이 드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교사들이 미국이나 캐나다의 기독교 교육대학원에 유학을 가도록 돕는 것도 한 방법일 것 같다. 단기간 내에 좋은 기독교 교육대학원이 세워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사들이 기독교 학문 연구회 등의 단체에서 개설하는 세계관이나 신학에 관한 단기 강좌를 이용해서 훈련을 받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학교를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먼저 진정한 기독교 교사를 잘 양성하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기독교 교육 대학원의 설립과 효과적인 교육을 강조하고자 한다.
4. 기독교 학교와 일반 학교의 비교
마지막으로 언급할 한가지는, 도대체 우리 나라의 현실 가운데서 자녀들을 기독교 학교에 보내는 것이 과연 유익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자녀들을 기독교 학교가 아닌 일반 학교를 보내는 것도 유익한 점이 있지 않겠는가? 기독교 학교와 일반 학교의 장단점은 무엇인가?
기독교 학교에서는 우선 기독교적으로 일관된 교육을 받을 수 있다. 가정과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아이들이 양육을 받는다. 가치관의 혼란 없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선생님들이 다 철저한 그리스도인이라고 가정할 때 (엉터리 선생님이 있을 수도 있지만) 진실한 기독교적인 정신을 가지고 가르치는 교사들 밑에서 교육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학교에서 양육을 받는 아이들은 이 세상을 전혀 모르게 될 위험이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다. 온실 속에 자라 난 아이처럼 편협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적인 관점만 배우다가 나중에 세상 속에 던져지면 그때 가서 더 어려워지는 것 아니겠는가? 이에 비해 어릴 때부터 일반 학교에 보냈을 때는 혼란에 빠질 수도 있고 이상한 교사들을 만나서 고생할 수도 있지만 이것을 잘 극복한다면 더 강하게 성장할 수도 있다는 장점이 있을 수 있다.
기독교 교육의 근본은 사람을 바꾸는 것인데 편협해질 위험이 있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로 보이다. 오히려 주일학교를 강화하고 학교는 일반 학교에 보내는 것이 더 풍성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길러내는 방법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교회에서 하는 교육과 가정에서 하는 교육은 학교에서 하는 교육을 대치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주일학교를 강화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학교 교육을 기독교적으로 받는 것의 깊이와 넓이를 따라갈 수는 없다. 따라서 기독교 학교에서 세상에 대해서도 폭넓게 가르쳐서 아이들이 편협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해결책이다.
이를 위해 문학이나 영화를 이용하고, 비기독교인 아이들과 폭넓게 교류할 수 있는 기회들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상의 가치관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개방성을 교사가 늘 유지해야 할 것이다. 또한 어릴 때에는 기독교 학교에서 배우고 성장해서는 세상 학문을 배우면 편협성의 위험을 해결할 수 있다. 중학교 과정까지는 기독교 학교에서 보내고 고등학교와 대학교는 일반 학교에 보내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또한 기독교인 아이들이 모였다고 하더라도 사람마다 인격이 다르다. 그리고 기독교 학교에서도 인간 관계에 수반되는 갈등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세상과는 다를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학교 내에서도 폭넓은 교육이 가능할 수 있다고 본다.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 자체가 교육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일반 학교의 학생들 보다 기독교 학교의 학생들이 실력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다. 예를 들어 여러분 자녀가 공부를 잘 하는데 서울대학교에 보내야 하는가, 아니면 한동대학과 같은 기독교 대학에 보내야 하는가? 이런 것들을 잘 생각해야 한다.
이처럼 기독교 학교가 가질 수 있는 단점은 많다. 이런 것들을 잘 의식하고 있어야 그것들을 극복할 수 있다. 앞으로 기독교 학교의 단점들을 잘 극복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녀에 따라서 기독교 학교에서 훈련을 받아야 할 아이와 일반 학교에 가도 될 아이들이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자녀가 수원 중앙기독초등학교에 다니는 한 성도는 그 학교의 교사들이 폭넓은 지식과 인격으로 아이들을 가르치시기 때문에 매우 믿음이 간다고 간증하였다. 그러나 어떤 부모는 자기 자녀가 일반 학교에 다니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 학교가 아주 적다. 그러나 적어도 좋은 기독교 학교가 몇 개는 있어야 자기 자녀가 신앙적 훈련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그리스도인 부모가 자기 자녀를 그곳에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효성을 가지고 판단하더라도 일단은 이런 기독교 학교가 우리 주변에 많아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 학교를 세우는 일에 힘을 쏟아야만 할 것이다.
첫댓글 기독교학교는 교회와 교회에 속한 가정의 터위에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올바르게 성장해 감에 있어서 교회는 아이들의 교육을 책임져야 합니다. 학교와 학원에 보내는 것으로 부모의 역할을 다 한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현실에서 기독교교육은 힘든 점이 많습니다. 내 자식이 아니라 언약에 속한 교회의 자녀이다라는 분명
생각이 부모들에게 있어야 기독교교육이 시작이 될 것입니다. 교회는 학교교육과 학원의 교육이 어떠한 것인지를 말씀을 기준으로 올바른 해석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출세하기 위해 교회에서 아이들을 가르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제가 중,고 를 기독교 학교에 다녔지만 한국에 기독학교 문제 많지요 월요일날 땡빛에 운동장에 학생들 세워놓고 예배 드린다고 교목 설교 30분 하고 교장 기도5분(총45분) 학생들 잡았지요 비기독 학생에게 성경,체풀 떠들지 말고 학교의 투명한 행정과 교사의 품위로 교사의 삶으로 증거 해야지....
일반 학교랑 차이점 없는 기독학교는 오히려 장애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