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葆光의 수요 시 산책 31)
녹아들다
녹아들지 않으면
그럴듯하지 않고
즐겁지도 않다.
마음은 특히 그렇다.
(지금의 세계는
마음이 만드는 세계가 아니거니와)
녹아들지 않으면
마음은 필경
삶의 전부인 저
진실의 순간을 만나지 못한다.
그런 순간이 없으면
삶은 깡그리 허탕이다.
녹는 일에는
물과 기름과 바람이 있고
삶과 피와 무슨 그런 게 있지만
그러나
마음이 녹아들지 않으면
(지금의 세계는
마음이 만드는 세계가 아니거니와)
삶은 잿더미요
삶은 쓰레기 더미이다.
- 정현종(1939- ), 『어디선가 눈물은 발원하여』, 문학과지성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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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세계는/마음이 만드는 세계가 아니거니와”. 그렇죠, 그러니 마음이 아니라면 명분이라도 그럴듯했으면 하는 게 요즘의 마음입니다. 물론 마음마저 다 녹아들어 있다면 이런 말은 쓰잘데기가 없지요. 모르는 게 아닐 겁니다. 알면서도 자꾸 뒤돌아보는 걸 겁니다. “지금의 세계는/마음이 만드는 세계가 아니거니와”. 사전을 검색하니 명분名分은 ‘일을 하기 위해 겉으로 제시하는 이유나 구실’이랍니다. 이건 제가 생각한 것과 같은 뜻이고 애초의 뜻은 ‘신분이나 이름에 걸맞게 지켜야 할 도리’ 한 가지였던 모양입니다. 오래전부터 쓰던 (종이책) 사전에는 이 한 가지 뜻만 나와 있습니다. 말은 변하거니와 쓰임 또한 변하지요. 그 쓰임이 줄기도 하고 늘기도 하다가 때를 잘못 타면 사라지기도 합니다. 모든 것에는 역사가 있습니다. 사람만이 아닙니다. 사물에도, 말에도 역사가 있습니다. 앞의 뜻으로 풀건대 예시로 나온 문장의 명분은 ‘그럴듯한’ ‘허울만 좋은’ ‘추상적’이라는 부정적으로 들리는 수식어를 매달고 있습니다. 그럴듯하고, 허울만 좋고, 추상적인 명분이라도 있으니 그나마 낫지, 하는 명분도 있습니다. 요즘은 이런 명분마저도 안 달고 나오는 막무가내의 태도와 말이 난무합니다. ‘이런 명분마저도’라고 말하는 건 행동하고 말하는 이의 ‘신분이나 이름’을 그나마 고려해서입니다. ‘도리’는 행동하고 말하는 이에게만 있지는 않습니다. 보거나 듣는 이에게도 있습니다. 잘 보고 잘 들어야 하는 건 보고 듣는 이의 도리입니다. 명분은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애초부터 있었던 것이라면 내세우면 그만인데 만든다고도 하고 이를 바로잡겠다고도 하니까요. 만들려면 아마 고심은 했을 것이니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쉬 마음을 들키는 명분을 보노라면 좀 어이가 없습니다. 어떤 명분이라도 일관성은 필요합니다.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클레어 키건 소설 『맡겨진 소녀』 73쪽, 허진 옮김, 다산책방, 2023) 일관성을 놓쳤다면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나을 것입니다. 하필왈리何必曰利!(『맹자』 양혜왕 상편) 맹자의 대답은 단호해도 왕의 질문에는 그나마 공리가 있었을 수도 있겠다 싶지만, 일관성이 없어 쉬 마음을 들키는 명분에 공리는 없습니다. 사리私利만 가득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그 섬에 가고 싶다”(정현종 시선집 『섬』, 열림원, 2009). 정현종 시인, 하면 떠오르는 시가 「섬」입니다. 이 섬은 어떤 섬일까 종종 생각합니다. 선입견과 편견 같은 편향된 사고는 없는 섬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파블로 네루다 「시」 일부, 『네루다 시선』, 정현종 옮김, 민음사, 2000) 제게 시인은 파블로 네루다의 이 「시」라는 시를 번역한 번역자로 더 친숙합니다. 제가 읽은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은 거의 시인이 번역했습니다. “지금의 세계는/마음이 만드는 세계가 아니거니와”. 그래도 사는 건 누가 어찌했든 무엇이 어찌 되었든 “가장 낮은 곳에/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그래도라는 섬이 있”(김승희 시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일부, 시집 『희망이 외롭다』, 문학동네, 2012)어서일 겁니다. 이 "그래도라는 섬"에는 마음이, 그래도 녹아드는 마음이 많을 것입니다. (20240131)
첫댓글 정현종 시인의 시가 아포리즘처럼 읽히네요!
이미 정현종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그 섬에 가고 싶다”라 하였으니까요.
클레어 키건, 맹자, 파블로 네루다, 김승희 - 다 좋으네요!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칠레 민중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시>)도 다시 음미해 봅니다. 소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