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움 덩이 가슴에 품고 가면 쓰고 살았던 할머니의 긴긴 세월을 말씀으로 소설 쓰시던 할머니의 인생사, 입담이 얼마나 구수하고 감칠맛 나는지 쉴 새 없이 지난 세월을 소환하시는데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듣다 보니 어느덧 심중으로 파고 들어와 내 삶의 일부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평생을 불운 속에 사시면서도 자칭 복노인이라 하셨던 세월 속에 묻어놓은 할머니의 애환을 손녀인 내가 다시 부활시켜 보고자 한다. 놀부 심술에 버금가는 심보를 달고 남 씨 문중으로 시집오셨던 할머니는 그 심통으로 주변 사람들 모두가 힘들고 특히 맏며느리신 내 어머니는 수난의 세월을 겪어야 했는데 그 심술보는 언제부터 할머니의 얄궂은 인성이 되었을까? 귀복이라 불렸던 어린 시절, 갑작스러운 토사 광란으로 아버지는 눈을 뜬 채로 요절하시고 귀복의 할머니께서는 고사리 같은 손녀의 손을 이끌어 마지막 가는 장남의 눈을 감겨 주셨는데, 다섯 살 무남독녀는 이후로 과부가 된 어머니의 화풀이 대상이 되었고 전에 없이 매를 자주 대시던 귀복의 어머니는 모진 시집살이를 견디지 못해 야반도주하시고 급기야 엄마 잃고 보릿고개에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게 되자 장남의 하나뿐인 혈육을 지키기 위해서 할머니는 양자로 보낸 둘째 아들에게 맡아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을 한다.
"우리 귀복이 좀 살려다오 이러다가 귀복이 굶어 죽겠다"
마지못해 허락하셨지만 삼촌 역시 살림이 변변 찮은지라 마음이 무거웠다. 폭설로 온천지가 하얗게 덮여 길인지 밭인 지 구분이 안 되는 수십 리 길을 삼촌 따라가던 길은 어린 소녀 귀복이에게는 수난이었다. 앞서가는 삼촌의 뒤를 뛸 듯이 바삐 걸어도 자꾸만 멀어지는 작은아버지는 마치 버리기라도 할 듯이 빠른 걸음으로 가시는데, 뒤를 따라 억척같이 따라가던 그 길은 귀복이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인생 역경을 예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수북이 쌓인 눈에 버선발은 축축하게 젖었고 매서운 칼바람에 손발이 꽁꽁 얼고 귓볼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으나 엄살은커녕 필사적으로 삼촌의 뒤를 쫓아 가는데, 어린 조카가 안쓰러웠던지 한참 앞서 가시던 삼촌은 나무 밑에서 모닥불을 피워 기다리고 계셨다. 귀복이는 모닥불을 향해서 달렸고 눈치 없이 좋아라 하니 삼촌의 안색은 더 어두워졌다. 조가비 같은 작은 발로 수십 리 길을 걸어왔지만 문간채에 들기도 전에 날아오는 칼날 같은 욕설,
"이년아 뉘 집 망쳐 먹으려고 왔냐 썩 나가거라 "
보릿고개에 본집 식구들도 소나무 껍질 죽으로 연명하는데 난데없이 불청객이 된 귀복이는 오들오들 떨면서 한참 동안 욕설을 들어야 했다. 흉년에 멀건 산나물 말린 죽으로 살아가는 작은집에서 그나마 연명하게 되었으나 하인처럼 물 길러 나르고 밥 짓고 쉴 새 없이 온갖 허드레일을 하면서도 천성이 밝고 왈가닥 기질이 있는지라 기가 죽기는커녕 오히려 사촌들에게 큰소리 "뻥뻥" 치며 모진 세월에 적응하고 있었다. 그러나 워낙 먹성이 좋은 귀복이로 인해 양식이 곱빼기로 축이나니 보릿고개에 접어들자 어른들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고 한식구라도 입을 덜어야 할 지경이었다.
흉년이 계속되던 어느 해, 열두 살의 어린 나이지만 체격이 말 만한 귀복이는 결국 머리에 족두리를 쓰게 된다. 연지곤지 찍고 색동옷 입은 12살 귀복이는 훌쩍훌쩍 눈물을 흘리며 가마에 오르고 38살 검은 수염을 늘어뜨린 신랑을 따라 남 씨 문중의 며느리가 되지만 결국 돈 100냥에 비단 한필, 삼베 10 필에 재취자리로 팔려 온 것이었다. 소꿉동무 남겨 두고 쫓기듯 울면서 시집온 박복한 12살 귀복이는 하얀 앞치마 두른 새댁이 가 되어 그나마 죽이 아닌 밥을 양껏 먹을 수 있으니 내심 신이 났으며 친어머니보다 연세가 많은 동서와 사촌 시동생, 검은 수염 길게 늘어 뜨린 낯선 신랑과 신접살이가 시작된다.
아직 어린 아이라 잠버릇이 고약한 귀복이는 사방구석을 헤매이며 신랑 얼굴을 발로 차며 난리 법석이지만 이른 새벽 첫닭 울음소리에 거침없이 일어나 물 길러 나가는 새댁이었다. 동네 우물가에는 머리 쪽진 어린 새댁을 바라보며 측은지심에 혀 차는 아낙들도 있었지만 손놀림이 익숙하고 물양동이 거뜬이 이고 가는 귀복이는 또 다른 운명에 서서히 순응하기 시작한다. 면에서 가장 명문가였던 남 씨 문중의 며느리가 되기는 했으나 떵떵거리고 사는 큰댁과는 달리 보증채무로 몰락한 시댁인지라 면장이신 큰댁에 빌붙어 살면서 큰집 일이라면 열일 제처 놓고 거들어 주다 보니 시집 못 간 사촌 시누들에게 이만 저만 괄시를 받는 것이 아니었지만 당돌하고 저돌적이며 반항적인 사춘기의 새댁은 결코 지는 법이 없었다. 다섯 살에 부모 잃고 고아가 된 천덕꾸러기의 삶은 스스로 강해져야 했고 구차한 삶이지만 누구보다도 당당해야 했을 것이다. 악에 바친 눈빛, 심통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 표정에 막무가내인 거친 말, 지고는 못 사는 귀복이는 나이는 많지만 항렬로 따지면 아래인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큰댁 시누들과의 끝없는 전쟁이 시작된다.
할머니 16세 되던 해 첫아들인 나의 부친을 출산하신다. 이미 마흔이 넘어선 할아버지는 손주 보실 연세에 첫아들을 얻으니 세상을 다 가진 듯 기쁨에 넘친다. 첫 부인이 산고 끝에 유명을 달리하신지라 걱정이 이만 저만 아니었거늘 아들을 쑥 낳아 준 나이 어린 신부가 얼마나 이쁘고 기특한가? 남 씨 문중 사람들은 모두 어린 새댁을 칭찬하고 축복해 주었지만, 이미 스므살이 넘도록 시집을 못 간 사촌 시누들은 죽을상이었다. 급기야 아들까지 출산했으니 노처녀들의 시기와 질투가 얼마나 심했을까? 여인네들이 아들을 낳으면 기세가 당당하고 오만해진다 하였던가? 위풍당당한 어린 새댁은 아들을 업고 동네방네 다니면서 은근히 과시를 한다. 그러나 덩치만 컸지 아이가 아이를 낳아 기르다 보니 아기가 오히려 수난이었다. 등에 혹하나 달고 높은 산을 기어오르며 산나물을 채취하는 못 말리는 새댁은 등에 업힌 아이가 울면 큰손으로 엉덩이를 철썩 치면서 울음을 멈추게 했다.
양반 가문에 갑부집 규수로 자란 큰집 시누이들은 천방지축 낮도깨비 같은 어린 올케가 눈꼴셔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었고 일가친척 모이는 자리마다 흉허물을 늘어놓으니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고 동네에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 구경꾼들이 몰려들기 시작하고 식칼을 든 사촌시누가 살기찬 눈으로 그 입 찢어 놓겠다고 "씩씩 "거리고 등에 아이를 둘러업은 귀복은 시퍼런 눈을 번뜩이며 찢어 보라며 대들고 있다. 흔히 있는 여인네들의 소소한 싸움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도대체 그동안 얼마나 많은 갈등과 한이 맺혔길래 식칼이라는 무기까지 들고 사생결단을 할 지경에 이르렀을까? 입을 찢어 놓겠다고 악을 쓰는 사촌시누 앞에 아이를 업은 채 입을 떡 벌리고 찢어보라고 악을 쓰며 덤벼드는데, 되려 겁먹은 시누가 식칼을 버리고 도망가는 것으로 승패가 결정되었고 이후로는 산적두목보다 무서운 귀복을 얕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채 오분도 예기 못하고 싸움으로 번지는 괴팍한 성격을 버리지 못하고 갈수록 기고만장한 귀복은 아기가 첫걸음마를 시작할 즈음 외가로부터 방문해 달라는 기별을 받게 된다. 실로 오랜만에 외할머니를 뵙게 된다는 설레는 마음으로 그날 당장 구천동네에서 오리 떨어진 외갓집으로 향하는데 유난히 눈빛이 초롱초롱한 두 살배기 아들을 업고 신바람이 난 귀복이는 등에 업힌 아기의 엉덩이를 들썩이며 흥얼거린다.
"둥개 둥개 우리 계수 얼렁얼렁 커서 나무 한 짐 해와야지!"
돌곡의 외갓집에 도착하자마자 응석받이가 된 귀복은 외할머니를 부르며 안방으로 들어서는데 낯선 아주머니가 와락 귀복을 껴안는다.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여섯 살 때 자신을 버리고 가신 어머니라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꿈인가 생시인가! 등에 업힌 외손주를 빼앗아 안고 하염없이 우시는 어머니! 얼떨결에 아기를 건네주었지만 예기치 못한 상황이 믿어지지가 않았는지 귀복은 넋을 잃고 서 있었다. 어머니! 얼마나 그립고 보고 싶었던 분이신가? 그러나 엄마라는 존재를 받아들이기에 귀복은 너무 상처가 컸다. 험난했던 지난 세월의 아픔이 원망으로 쏟아지고, 안고 있는 아기를 막무가내로 빼앗으며 울분을 터뜨리며 미친 듯이 쏘아 붙인다. "죽은 줄 알았는데 뭣 때문에 나타났어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다시는 날 찾지 마" 하룻밤이라도 자고 가라는 외가 식구들을 매몰차게 뿌리치고 아이를 들춰 업고 황급히 나서는 귀복의 눈에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린다. 엄마만 있었어도 작은집 종노릇은 하지 않았을 텐데, 열두 살에 아버지 같은 남자에게 시집오지도 않았을 것인데. 오리길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강물 같은 눈물을 쏟았지만 집안에 들어서는 귀복의 얼굴에는 어떠한 역경이라도 이겨 낼 수 있을 듯한 강인함이 서려있었고, 그것은 눈물을 감추기 위한 철가면 같은 것이었다.
여주이 씨 증조할머니께서 꽃가마 타고 남 씨 문중으로 시집오실 때는 지참금으로, 소 열 마리에, 비단 10 필, 모시 20 필, 쌀 열가마니를 싣고 머슴과 나이 든 하녀가 뒤따르고 가마 안에는 어린 몸종도 함께 탔다고 하는데 그 화려한 혼인 행렬로 동네가 떠들썩했었고 맏동서인 정 씨도 양반이라 일컫는 명문가에서 예물을 바리바리 싣고 시집을 왔지만 둘째 며느리인 12살 귀복이는 지참금은커녕 돈 100냥에 남 씨 문중으로 팔려 오게 되었다. 이미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빚보증으로 날리고 몰락한 시댁은 과거급제하여 금이환양 할 때 산천초목을 떨게 하셨다는 시할아버지의 기개는 흔적도 없이 세월 속에 묻혀버리고 쓰러져 가는 누추한 움막집에서 얼마 되지 않는 농토로 간신히 생계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양반집 도령으로 귀하게 자랐던 남편은 면장 어른이신 사촌의 도움으로 우체국 배달부로 일하고 있었으며 형님이신 시아주버님은 이미 황천길로 떠나셨고 나이 많은 맏동서 역시 양반가 규수로 시집왔지만 언젠가부터 찌들고 궁색한 과부가 되어있었다. 양반가에서 학문을 배운 맏동서는 농사를 지으면서도 시골 아낙네 답지 않게 밤에는 호롱불 밑에서 책을 읽으니 그 덕분에 일자무식인 귀복이도 서서히 글을 깨우치게 된다. 맏동서가 늘 읽는 춘향전 심청전 , 흥부전 같은 고전책을 읽으며 점차로 학문 쪽으로 흥미를 얻는다. 귀복은 이제 남편이 배달한 이웃들의 편지를 대신 읽어 주며 글을 모르는 아낙네들을 모아 안방 야학을 만들어 글을 가르치기도 한다.
귀복할머니 18살에 둘째 아들 익수를 낳고 21살에 딸 수연이를 낳는다. 날로 날로 번창하는 큰댁에 비해서 식구만 늘어나고 궁색한 살림은 펴지지가 않았다. 큰댁의 후광을 받으며 그나마 구천동네에서 큰소리치고 살고 있었으나 문중에서는 하인들보다 못한 푸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었다. 눈에서 호랑이불이 번뜩인다는 첫아들 계수 역시 큰댁에 가면 괜한 기세에 눌려 사촌들보다 오히려 머슴들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나이 든 머슴들은 왜소한 꼬마 계수에게 먹던 밥상에 숟가락을 얹어주며 넉넉하게 배를 채워 주었다.
큰댁에 제삿날이 되면 남 씨 문중 사람들은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제사에 참여하고 꼬마계수도 늦은 밤까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반듯하게 앉아 있었다. 면장 어른이신 오촌당숙께서 계수를 남달리 보고 계셨다. 이 많은 아이들 중에 후일에 인간 될 사람은 계수밖에 없느니라. 덕담을 아끼지 않았던 오촌 당숙 말씀대로 계수는 자라면서 보통 아이와는 달리 비범함이 보였다. 우체국 배달부로 생계를 연명하던 남편이었지만 일본으로 돈 벌러 가게 된 후 아이들과 살림을 꾸리면서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되었지만 효성스럽고 착한 계수는 큰 힘이 되어 준다. 하지만 귀복의 버리지 못한 다혈질적인 심통은 여전히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화풀이 대상은 늘 어린 계수였다.
남편이 일본으로 떠난 지 일 년이 채 안되어 중병에 시 달린다는 기별이 왔고 눈앞이 캄캄해진 귀복은 들것에 실려온 남편을 한숨과 눈물로 맞이한다. 살림은 점점 더 궁핍해지고 국민학교 4학년인 계수가 월사금이 없어서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되었을 때 일본교장이 귀복의 남편을 학교로 호출한다. 교장 앞에 불려 가서 자초지종을 말하며 자퇴서를 제출하지만 일본인 교장은 자퇴서를 거부하며 오히려 설득하기 시작한다. "우리 일본인들은 가문에 영특한 자가 나타나면 8촌까지 도움을 주는데 난 쪼스(계수)의 오촌당숙이 면장이지 않습니까?" 한숨을 쉬며 힘없는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는데 일본교장에게 불려 갔다는 소문을 들은 면장이신 사촌형님이 급히 부른다. "뭐라 하던가 일본교장이 " "계수가 공부도 일등하고 특별히 영특한데 왜 중퇴를 시키느냐고 하길래..." "킁 " 제까짓 것들이 쪽발이 주제에 이제부터 계수 월사금은 내가 낸다 "
일본교장으로 인해 자존심이 심히 상한 오촌당숙은 다행히 아들 계수의 월사금을 책임져 준다. 그러나 월사금 받는 날이면 떳떳한 직계후손 6촌들과는 달리 이 눈치 저 눈치를 보아야 하니 어린 계수에게는 여간 곤욕스러운 일이 아니었고 담벼락에 기대어 머뭇거리다 보면 눈치를 챈 오촌당숙이 불러서 월사금을 건네주신다. 허나 월사금만 있다고 해서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데 학용품이나 책값도 문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날 일본교장이 계수를 사택으로 부른다. "난 쪼스 이제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하거라 너는 수업이 끝나면 매일같이 물을 길러서 내 목욕탕에 가득 채워라 단 하루도 거르면 안 된다." 계수는 그날 이후로 학교 운동장 우물에서 퍼올린 한양동이 물을 교장사택의 욕탕에 나르기 시작했고 그 일은 꼬마계수에게는 힘겨운 노동이었다. 한 달 후 일본교장은 계수에게 수고비를 지불하게 되는데, 돈을 받고 눈이 휘둥그레진 계수는 옷섶에 흘린 얼음물 주렁주렁 달고 황급히 엄마에게로 달려간다. 진눈깨비가 휘날리는 매서운 날씨에 아들계수가 키만 한 양동이로 사택에 물을 퍼 날라는 고충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귀복은 물레를 돌리며 혼자 중얼거린다.
"다른 집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와서 따뜻한 아랫목에서 삶은 고무마도 먹고 곶감도 먹을 텐데 우리 계수 불쌍해서 어쩔꼬~ 불쌍해서 어쩔꼬!"
그때 문을 화들짝 열고 계수가 싱글벙글 웃으며 들어와서 돈이 든 봉투를 쓱 내미는데, 봉투 속에는 자그마치 쌀 한 가마니 값이 들어 있었고 그 돈으로 학용품은 물론 옷도 장만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이후로도 노동의 대가로 매달 쌀 한 가마니의 값을 교장으로부터 받았고 물양동이를 들어 날랐던 오른팔이 약간 길어지기는 했으나 배움의 길을 열어 주었던 학구열에 불타던 일본인 교장은 계수가 평생토록 잊지 못할 스승님이었고 일본이 패망하자 본국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오촌당숙과 일본교장의 도움으로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으나 더 이상 진학을 할 수가 없게 되자 농사일을 도우며 독학을 시작한다. 그 무렵 큰댁은 첩의 자식들까지 서울로 유학길을 떠나고 방학이면 교복을 입은 6촌들의 화려한 귀향 행렬이 구천동네 서민들의 눈길을 끌었고 계수 역시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가슴에는 용광로처럼 타오르는 열정과 꿈이 자라고 있었다.
먼 훗날 큰댁의 후손들이 내리막 길을 걸을 때 자수성가한 계수는 5촌 당숙의 자녀들을 따뜻하게 대접하며 도움의 손길을 주기도 한다. 그토록 영특하고 효성스러운 계수를 후일 외아들을 잃고 실의에 빠진 맏동서의 양자로 보내라는 남 씨 문중의 청천벼락같은 결정이 떨어지고 귀복의 장남은 맏동서의 아들로 호적이 바뀌어지는데 귀복은 늘 혼자 중얼거린다.
"아들은 내 아들인데 며느리는 남의 며느리, 손주도 남의 손주~"
귀복할머니는 우리가 자라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며 서러워하셨다. 할아버지도 첫 며느리를 멀리서 흘깃흘깃 지켜보며 안타까워하셨다고 했다. 귀복 할머니 칠순이 가까워지던 어느 해 할머니의 옛적 소꿉친구가 등장하고 자주 우리 집에 놀러 와 며칠 기거 하는 동안 그분들의 과거 여행 속으로 손녀인 나도 끼어들었다. 그분은 할머니의 사촌이자 소꿉친구였다. 예기로만 듣던 전설 속의 한 인물이 현실로 오셨으니 나름대로 극진히 모셔가며 상상도 못 할 만큼의 실화를 들으며 점점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었다. 할머니의 사촌은 이모할머니라 불려졌고 귀복 할머니와는 다른 여성스러움이 있었다. 일제와 6.25 동란을 겪으며 살아있는 화석 같은 두 분의 과거는 슬프고도 애틋하니 뼛속까지 아픔이 느껴졌다. 남편이 먼저 세상 떠나고 피난길에 어린 외아들 마저 잃으니 오가는 길에 아이 매장한 산을 바라보니 억장이 무너지고 재혼을 해서라도 아들하나 얻고 싶었던 이모할머니는 순경의 첩으로 들어가 기어이 아들을 얻었고 전남편 두 딸은 고아가 되니 귀복할머니는 그 꼴 못 본다고 수년을 등지고 살았다. 빨래터나 우물가, 들과 산, 봉선화 꽃잎 손톱에 물들일 때도 그녀들의 삶은 함께였다. 친딸이라 해서 잘난 사위를 고른 것도 아니고 대장장이에게 시집간 이모의 한도 이만저만 아니었다. 기억이 쇠퇴한 뇌와 심장은 슬픔과 한을 희석시키고 더 이상 아픔이 아닌 옛이야기로 더디 기억을 소환하는 그녀들의 이야기에 아픔은 내 몫이었고 나의 전생인 듯 빙의되어 갔었다. 슬하에 자녀 5남매를 키우셨으나 어린 나이 16세에 낳은 첫아들 계수에게 만정을 붙이며 살았으나 맏동서에게 넘겨주고 마흔에 홀로 되어서 불치병자 셋째 아들과 여생을 함께하시다가 92세 되던 해, 삼 년 미리 가신 셋째 아들 옆 양지바른 곳에 나란히 묻혔고 큰아들 계수는 후손들의 이름을 일일이 비석에 새긴 후 망부석과 함께 화려하게 친모의 무덤을 장식하였다. 첫아들인 나의 부친(계수)은 모시지 못한 죄책감으로 생전에 지극한 효성으로 할머니를 보살펴 드렸고 할머니는 늘 그 아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다. 눈물은 호사스러운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지 처음부터 비운으로 태어난 사람에게는 사치스러운 것이라 여기며 스스로 복노인이라 칭하며 누구보다도 웃음이 헤프셨던, 여장부의 철가면을 손녀인 내가 벗기고 보니 그분의 삶 전부가 슬픔 덩어리였던 것을 알게 되었다.
거실 바닥에 앉아서 늘 기도 하시던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누구보다도 낮은 자의 모습이었으니 오랜 신앙생활로 빚어진 성품이었다. 밥한술에 일 한 되, 눈칫밥으로 살아온 인생, 이미 정형화된 할머니의 손은 어느 집에 가더라도 일손을 멈추지 않으니 누군들 반기지 않을까? 모난 돌 둥글게 만드시고 어진 삶으로 이쁘게 하늘나라 가셨는데, 미리 가신 젊은 아빠는 만나 보셨는지요? 무엇이 그리 급해 눈도 감지 못하고 가셨는지, 고사리 손으로 눈 덮어 줄 때 편안히 가셨는지 물어나 보셨나요? 다섯 살 상주아이 영문 모르고 소리 질러 울 때, 동네 사람들 따라 울고, 살림 밑천 우리 첫딸, 귀한 복덩이라 이름 지어 무릎에서 키우더니 , 그 아이 산전수전 얄궂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나 떠나셨는지요? 검은 수염 늘어 뜨린 상처한 홀아비 대문으로 들어설 때, 부모 없는 설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종으로 부리고 늙은 신랑 짝지운 작은아버지, 당신 친동생이 그랬다고 한풀이는 해 보셨는지요? 90 넘어가셨으니 모두들 호상이라 무덤덤하게 보냈었는데, 저승과 이승 갈라진 세상에서 살아생전 할머니의 넋두리가 글이 되어 태어나니 모질고 세찬 세월 어찌 견디었나요 ,그 삶에 방관하며 살았던 지난날이 후회스럽고 죄송합니다. 검은 수염 울할아버지 수염이나 깎으시고 신부 맞이 하실 일이지 12살 귀복이 얼마나 놀랐을꼬! 그래도 혈혈단신 귀복에게 유일한 내편이 되었으니 동네방네 큰소리치며 살았겠지요. 어릴 적 사진에서 보았던 백발수염 그분이 나의 할아버지였다니 제나이 황혼에 비로소 당신들의 의미가 가슴깊이 느껴집니다. 태어 난 줄도 몰랐을 둘째 손녀는 좋은 유전자로 천재화가라는 소리를 들으며 후한 말년을 맞이하고 있는데 꿈에 한번만 나타 나시면 안될까요? 정겨운 귀복할머니 다시 불러 보고 싶은 우리 할머니~ 손등에 움푹 파인 흉터 자국을 매일 보면서도 그때는 왜 몰랐을까?. 깨어지고 갈라지고 시련과 고난이 일상이었던 수난의 세월, 상흔의 그 아픔을 왜 이제야 알게 되었는지. 할머니가 되어 가는 황혼의 나이에 비로소 당신들께 마음으로나마 큰절 올려 드립니다. 잊지 않을께요! 안평댁 ,장씨 귀복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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