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 후의 제자들이,
절을 지킨다고 하는 명목으로 만든 승병에 대해서는
" 자업자득, 악인(惡因)이 초래한 결과,
지(智)와 뜻(意)의 학문으로 마음을 잃은 결과이다."
라고 나에게 설명했다.
이처럼 내가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까지 가르쳐주는 것은
불가사의한 것이기도 하며,
생명이 불멸이라면 당연한 결과라고도 말할 수 있다.
나의 수호령, 불공삼장은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 어떤 시대에 있어서도,
역사적인 물적 증거라고 하는 것이 우선되기 쉬운데,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신리에 관해서 너무 과거의 일에 구애되면,
지(智)와 의(意)가 앞서서, 자기를 잃기 쉽다.
자신(自身)을 잃으면 신리를 깨닫는 것은 불가능하다"
확실히 과거의 사실(史實)에 사로잡혀,
문헌을 의지하고 있으면 학문적 탐구로 치우치게 되고 말아서,
마음이라고 하는 자기 자신의 개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가 있다.
자연과학의 분야에 있어서는 문헌도 크게 참고가 되고 있으나,
신리에 대한 문제는,
그 시대의 양심 없는 권력자에 의해, 왜곡되고 마는 일이 많다.
불교도 각국을 거쳐서 전래되고 있기 때문에,
그 나라마다의 종래의 사상이 섞여 있다.
그 때문에, 불교에 있어서도 그리스도교에 있어서도,
원전(原典)으로 돌아가는 것이 대단히 곤란한 것이다.
신리(神理)는, 대자연의 법칙이므로,
연대의 신구(新舊) 등과는 관계가 없다.
오래된 것도, 새로운 것도, 없다.
불변의 것이다.
어느 누구의 마음에도, 엄연히,
신불의 자식으로서의 신리(神理)는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신리는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 있고,
자기 자신의 마음에 바르게 충실히 생활하고,
항상 중도에 따라 아욕(我欲)을 버린 생활을 계속해 가면,
누구든지, 신불의 자식으로서의 가치를 자각할 수 있다."
라고 하는 것도 덧붙여 주신다.
또 홍법대사의 인도 시대는,
붓다에게 베르베나를 기증한 가란다라고 하는 분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사위가, 실재계로 돌아가 대일여래로 된 것이다.
붓다가 사랑에 대해 그다지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일여래는 그 신리를 설명하였던 것이다.
홍법대사는 심안(心眼)을 갖고 있어,
환자에 빙의한 빙의령을 잘 알았기 때문에,
가지기도(신불에게 가호를 빌어 재앙을 면함)를 하였던 것이다. 반야심경 비건 속에
" 나는 인도 당시, '리요쥬센'으로 석가모니불의 설법을 들은 적이 있다."
고 써서 남겼다.
일연은, 5세기의 중국 시대에,
오장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불교를 넓혔던 분이며,
거듭 12세기, 육체를 갖고 법화경을 설법했던 분이다.
신리는 변하는 것이 아닌데,
설명하는 사람의 지(智)와 의(意)에 의해 변해지는 경우는 많다.
그러나 변화한 신리로는, < 본래의 힘>을 잃는 것이고,
인간의 마음은, 자기 보존의 관념에 의해 불성을 잃어 가는 것이다.
'신란'의 과거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바우로이다.
인도 시대는, 가야다-나에 있던 부루나 가사파의
막내동생 구난다라고 하는 이름으로 불교를 배웠던 사람이다.
그러나 타력본원만으로 일체(一切) 부처에게 맡기고 만, 사고방식은,
자기 자신을 잃고 만,
인간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력 노력(自力努力)의 속에야말로, 신리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 당시, 전란의 시대의 사람들을 구하는 데는,
이와 같은 방법이 아니면,
죽음의 세계를 믿는 것도,
죽음의 공포를 탈출하는 것도 불가능하였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빛의 천사가 육체를 갖고 나와도,
생존 중에 자신을 안다는 것은 곤란한 것이었다.
근년에는, 학자 중에 복전정치라고 불렸던 분이,
인도 시대 나라쥬르나 라고 불렸던 과거세의 사람이다.
또, 18세기의 스웨덴 보르그라고 불리는 사람은,
예수의 제자로, 요하네라고 불렸던 분이었다.
육체를 가지면, 이처럼 자신도 과거세를 알 수 없게 되고 만다.
예를 들어 상단계 빛의 지도령이라도 깨닫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이 현상계는,
수행장으로서의 가치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사명을 다한다고 하는 것은,
성인(聖人)이 되는 것도 아니며, 생신(生神)이 되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의 양심을 마음으로 한,
인간의 본래 자연의 도(道)를 구하기 위한 노력,
이것이 필요한 것이다.
헤매는 사람들에게 주는 수행의 양식(糧),
그것은 사랑이며, 자비로서,
태양이 만생(萬生)에게 열, 빛의 에너지를 평등하게 주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리고 신(神)은, 그 대가를 구하는 것은 없다.
음덕(陰德), 이 행위야말로 진실의 그것이다.
저 세상, 즉 실재계로 돌아가서야
'저렇게도 했으면 좋았다.' ' 이렇게도 했으면 좋았다'
라고 생각해도 지난 시간을 되돌릴 수가 없다.
학문에 대해서도 그렇다.
욕심이 생기고 나서,
< 아~, 어릴 때 조금만 더 해두었으면,>
라고 해도 이미 늦은 것이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매일의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알고 있지만,
그만 소홀히 하여 보내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우리도 현상계에서의 육체 수행이 끝나고 저 세상으로 돌아갈 때,
대다수는 반드시 좀 더 많은 사람을 구했으면 좋았다고 유감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육체를 버린 우리는,
지상계에 있었을 때와 완전히 똑같은 의식상태로서,
광자체라고 하는 몸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인간생활의 과거가,
그 당시의 일체의 상념과 행위가 명백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범한 죄는 자신이 갚지 않으면 안 되는 법칙이 있으니까 아쉽게 생각한다.
자기 스스로를 재판하는 것이다.
유계(幽界)의 입구에서 재판을 한다.
신불(神佛)은 재판 같은 것은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를 재판하는 것은
신불의 자식으로서 오히려 당연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