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29일 토요일
25회 정도전
이성계는 사불가론을 내세우며 결사반대를 하지만 우왕과 최영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요동정벌을 위해 오만의 대군을 이끌고 반드시 승리할 것을 장담하는 최영, 그때 우왕은 자신의 신병상의 위협을 느끼고 최영에게 자신의 곁에 남아있을 것을 명하는데...
한편 조민수(좌군도통사)와 이성계(우군도통사)를 앞세워 출정한 요동정벌군은 억수 같이 퍼붓는 비를 뚫고 위화도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성계의 사불가론
1. 소국이 대국을 치는 것은 옳은 행동이 아니다.
2. 농번기인 여름에 군대를 일으키는 것은 옳은 행동이 아니다.
3. 지금 군대를 일으켰다가는 왜구에게 틈을 보일 수 있다.
4. 장마철이 다가오는데, 그렇게 된다면 활의 아교가 풀릴 수 있고 전염병이 돌 수 있다.

사불가론은 내세운 이성계의 반대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서기 1388년 음력 4월 초순 요동을 정벌할 공요군이 편성되었다. 최형을 총사령관으로 조민수와 이성계가 좌군과 우군을 담당하는 공요군에는 이지란, 변안열, 배극렴, 정지, 박위등 당대에 내로라하는 장수들이 총 막라되어 있었다.




서기 1388년 음력 4월 18일 공요군이 요동으로 향했다. 조민수와 이성계의 좌우군을 합처 전투병이 3만6천명에 지원병력이 만2천명 도합 5만이 넘는 대병이 었다. 동원된 말의 숫자만 2만 2천필에 달하였으며 고려의 국력을 모두 쏟아부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2014년 3월 30일 일요일
26회 정도전
이성계는 정도전의 조언을 받아 개경에 회군할 것을 주청하지만 우왕와 최영은 결사반대 하며 계속 전진할 것을 명한다. 조민수는 이성계에게 이 상황에서 회군하는 것은 반역행위라며 그를 조아오고, 최영은 우왕에게 자신을 위화도로 보내달라고 요구한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정도전, 서둘러 개경에 있는 이성계의 일가를 피신시키고자 하는데...





남은 이성계에게 " 도통사 장군. 장군께 긴히 전해드릴것이 있습니다."
이에 이성계 "뭐요 그게"
남은 "삼봉 영감이 보낸것입니다. " 전도전이 미리 써준 서찰을 이성계에게 전한다.


그리고 남은 "폭우에 막혀 한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지금이 기회입니다. 속히 회군하십쇼. 장군. 이는 하늘이 장군께 내리신 절호의 기회입니다. "
이에 이성계" 하늘은 무슨느무게 하늘"이라며 대노를 한다.
그리고 "어명없는 회군은 무슨뜻인지 몰라서 이러시오. 반역질이고마"
이에 남은" 이대로 요동땅을 넘으면 파국이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회군만이 위화도의 병사들과 백성을 살리는 길입니다."


이성계 "어명없이 회군도 없어. 베버리기 전에 당장 나가시오."
이에 무릎을 끓으며 남은 "베십시오. 소장 삼봉영감과 더불어 역상의 대업에 목숨을 바치기로 결의한 사람입니다. "
이에 이성계 "남장군이"
남은 " 부디 회군의 용단을 내려주십옵소서"



이성계는 조민수에게 좌우군 합좌회의를 청하여 회군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그것은 반역행위라 말한다. 이에 이성계는 우왕에게 회군의 윤호를 받아낼 것이며 어명으로써 회군할 것을 제안한다. 우왕에게 회군의 윤호를 청하였으나 요동으로 전진할 것을 재차 명한다.
이성계의 예하장수들과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장수들이 회군할 것을 다시 청하니 이성계는
회군을 결심한다.




우왕14년 서기 1388년 음력 5월 22일 2차례의 회군요청을 거부당한 이성계는 마침내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진군한다. 이름하여 위하도 회군 훈날 조선왕조창업의 기점이 된 이날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고려는 거센 역사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게 된다.
이미지 : kbs 정도전 영상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