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에
정 영 선
오월에 시집가는 조카는
혼수 시장을 돌며
향기로운 꽃송이 무더기무더기 피워낸다
생의 봄날이다
어제는 일산 가구단지를 돌며
노란 개나리 화르르 쏟아내더니
오늘은 동대문 포목점에서 한복을 맞추고
이불을 고르며
연분홍 복사꽃을 분분히 피워낸다
내일은 하이마트 전자상가에서
들뜬 벚꽃 잎들 하롱하롱 날릴 것이다
180리터 금성 골드 스타 냉장고와
14인치 삼성 이코노 컬러 텔레비전과
노란 양은 냄비를 샀던 나의 봄날이 아득하다
어지럽도록 화사한 봄
조카의 신혼 밭에는
계절을 잊은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날 것이다
진화하다
나이 마흔 넘어서야 장가간 닭집 사내는 늘 싱글벙글이다 닭을 손질하는 그의 옆에는 베트남에서 온 망초꽃 같은 어린 새댁이 껌딱지처럼 붙어 있다
재래시장에 생닭집이 그 집 한집만 있는 건 아닌데 나는 무슨 연유인지 꼭 그 집에만 간다 특별히 더 물건이 싸거나 주인이 친절하지도 않다 그저 마음이 앞서가니 발길도 따라간다
처음 새댁은 손님을 보고 멀뚱거리며 샐쭉하더니 점점 눈치로 때려잡더니 언제부턴가 어눌했던 말투가 제법 또렷해지더니 이제는 천 원만 깎아달라는 손님에게 깜짝 놀라는 시늉까지 하며 남는 게 없다고 손사래 친다
어제는 간만에 그 집에 갔다 새댁 배가 남산만하다 내가 주문한 닭을 상처투성이 통나무 도마 위에 눕히고는 거침없이 칼을 내리치는 솜씨가 닭집 각시로 손색이 없다
벌레 먹은 채소를 찾습니다
금쪽같은 자슥들 입으로 쏙쏙 들어갈 것인디 어찌 독한 농약 함부로 뿌리겄냐 때깔은 이리 풍신나도 요런 것이 몸에는 이로운 것잉께 이파리 하나도 버리지 말라시며 구멍 숭숭 뚫려 벌레들이 먹다 남긴 채소들을 봉다리 봉다리 풀어 꺼내 놓으시던 어머니
당신 덩치보다 큰 마대 자루에 고향 텃밭 가득 담아 버스에 싣고 와서 전라도 사투리 집안 가득 쏟아내면 불품 없던 푸성귀는 맛있는 나물 되고 구수한 국이 되어 자식들 입속으로 들어가고 합죽한 어머니 입에서는 보름달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백화점 마트에는 매끈하고 잘생긴 채소만 진을 친다 벌레 먹은 채소는 어디 없나요, 하고 외치고 싶어진다
<당선 소감>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팔월 오후‘신인상 당선’통보 전화를 받고 매우 기뻤습니다. 제가 시인이 되다니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제가 시인이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던 저를“앞으로 이 길이 네가 가야 할 길이다.”라며, 알 수 없는 운명이 슬그머니 다가와서 시의 길로 데려온 것만 같습니다.
저는 유년 시절 서쪽 하늘에 뜬 노을을 바라보다가 까닭 모를 서러움에 자주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후에도 그때 그 눈물의 의미를 가끔 생각해 보곤 하였는데, 그것은 외로움과 쓸쓸함, 아득함과 망망함이 혼재된 감정의 소산이었습니다.
어린 날, 상고머리 계집아이가 마루 끝에 쪼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바라보던 불그레한 노을빛, 머물던 노을이 떠난 자리는 항상 헛헛했고 아직도 아련하게 미지의 세계로 제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저는 이제 그곳에 시가 사는 밭을 일구고 싶습니다. 긴 시간 저와 동행했던 희로애락을 심고 가꾸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겠습니다. 꿈을 꾸는 듯 느지막이 걷게 된 시의 길, 창작의 길은 결코 비단길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부단한 노력 없이 어떠한 결실도 볼 수 없다는 것 또한 절실히 느꼈습니다. 열심히 하는 것으로 보답하겠습니다.
부족한 제게 시인의 길을 터 주신《불교문예》심사 위원들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의 영광이 있기까지 많이 가르쳐주신 선생님들께도 고개 숙여 감사를 전합니다. 몇 년 동안 같이 공부하며 정이 듬뿍 든 친정 식구 같은‘살구나무 아래에서’여러 문우와도 기쁨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더불어 아내가 시 쓰는 것을 흐뭇하게 지켜봐 주는 남편과 시 쓰는 엄마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두 아들에게도 지금 이 기쁨 함께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영선| 전북 장수 출생.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