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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자고 나를 데려가지 않는 거요. 저 아이 때문이요....”
고종은 고개를 들어 경운궁 쪽을 바라봤다.
그 곳에 조선왕가의 마지막 핏줄이 잠들어 있었다.
그는 그 어린 것의 운명이 가여웠다. 망국의 옹주로 때어난 것은 축복이 아니었다.
고종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소설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에서 옮겨 온 글이다.
덕혜옹주는 1912년 첫 울음을 터트렸다. 아버지 고종이 환갑때다.
그의 어머니는 복녕당 양씨로 후궁이 아니었다. 그래서 옹주이다.
고종이 늦둥이 덕혜옹주를 얼마나 걱정했는 지 그 소설을 통해 살핀다.
“아름답고 고귀하게 지켜주고 싶소.
그 일을 위해서라면 나는 어떤 일도 감내할 작정이오.“
고종의 마음은 온통 옹주를 염려하고 자애하는 심정으로 가득하였다.
고종은 옹주를 위해 즉조당에 유치원을 설치하였다.
하루 종일 눈앞에 두고 보기 위해서였다.(중략)
어머니인 양 귀인의 무릎에 싸여 어리광을 부리던 어린 아이었다.
그의 나이 8살 때이다. 일본인들이 옹주마저 볼모로 데려가려는 낌새가 보이자
부랴부랴 가까이 있는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을 시도하였다.
고종은 시종 김황진에게 아들이 있는가를 물었다.
시종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그래서 왕은 시종의 사내 조카 중에서
하나를 양자로 들여 놓으라고 어명을 내렸다. 옹주와 정혼시켜서 옹주의 일본행을
막아 보려는 의도였다. 물론 이 일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시종 김황진은 왕 대신 총독부 경무부에 끌려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시종은 이듬해 봄 덕수궁에서 독살되었다.
“마마, 황제께서 승하하셨사옵니다. 흐흑.... 마마...”
옹주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어젯밤 늦게까지 아바마마 곁에 있었는데.
자애롭게 나를 업어주시기까지 했는데.“
고종은 전날 저녁에 감주를 들었다 했다. 일본인들이 나인을 매수하여
독을 탔다는 말이 궁 안을 떠돌았다.(중략)
<국민대회성명>은 고종의 죽음에 친일파의 개입을 주장하였다.
“친일파들은 윤덕영, 한상학 두 역적을 시켜 식사당번을 하는 두 궁녀를
하여금 밤참에 독약을 타서 올렸다. “
그렇게 옹주를 애지중지했던 고종은 결국 1919년 죽음을 맞이하였다.
어린 덕혜는 그렇게 소중한 사람들을 하나둘씩 잃게 된다.
그의 방어벽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일본 황족이 되면서 교육을 받기위해 일본으로 끌려간다. 새 이름도 얻는다.
그는 곁에서 돌봐주던 나인에게 들려주던 푸념을 그 소설은 전한다.
“나는 덕혜라는 이름을 지어 받았다. 그것도 얼마 전에야.
그런데 이름을 얻은 대가로 일본에 가야 하는 것 같구나.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구나.
이름을 얻으면서 정식으로 황족이 됐는데 이름이 없던 때가 더 나았던 모양이다.
이름을 얻은 것이 오히려 화가 되었구나......"
옹주는 열세 살 꽃보다 아름다운 ]나이에 강제로 일본에 끌려갔다.
그는 ‘조센징’이라는 노골적인 급우들의 비아냥에도 반듯한 자세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학교를 방문한 일본 황녀를 향해서 절하기를 거부하던 덕혜는
“나도 대한민국의 황녀다”라고 말하며 총명한 기개를 잃지 않았다.
1929년 5월 30일 옹주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식을 들었다.
그의 나이 17세 때 일본생활 5년째 그녀의 생모 양씨가 유방암으로
죽었다.
그는 그 소식을 들은 날 온종일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 배를 타고 조선으로 왔다.
그녀는 어머니 장례를 마치고 돌아와서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침대에 누워 지냈으며 한밤중에 정원으로 나가 몽유병 환자처럼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녀의 병명은 신경쇠약이나 몽유병보다도 더 무서운 조발성 치매로
진단되었다. 끝없이 입원과 요양 생활이 반복되었다.
옹주는 정신병이 깊어져 갔다. 어떤 때는 영친왕 내외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그의 병이 악화된 1930년 가을, 대마도 번주의 아들인 소다케시 백작과 옹주의
결혼 이야기가 나왔다. 이듬해 봄 덕혜옹주의 병이 조금 나아지자
두 사람의 결혼식이 열렸다.
약혼하려고 했던 김장한이 일본에 잠입, 결혼식장에서 그녀를 구출해 조국으로
모시기를 시도하다 실패하고 만다. 덕혜옹주는 결혼하기 싫어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울기만 했다. 하지만 강제로 시키는 결혼을 피할 수가 없었다.
망국의 한과 일제의 감시에 지친 그녀의 마음은 세월이 흐를수록 허물어져 갔다.
일본인 남자와 강제로 결혼한 이후엔 더 심해졌다. 결혼 전부터 정신분열증을 앓았던
그는 자신의 외모를 꼭 빼닮은 딸아이가 태어나면서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정혜’와 ‘마사에’라는 두 가지 이름을 갖고 태어난 딸은 반은 ‘조선인’이라는 성장기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 불만을 어머니에게 쏟아냈다.
딸과 조국에 같이 돌아가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었던 덕혜는 이 일 후 정신병원에 갇히게 됐고,
평생을 미친 여자처럼 살아가게 됐다.
기자 김을한이 옹주를 정신병원으로 찾는다.
김을한은 옹주와 약혼하려고 하였던 김장한의 형이다.
그때 상황을 소설은 전한다.
그 신사는 병실로 들어서자마자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마마, 이 불충을 용설하지 마시옵소서.”
그는 덕혜를 붙잡고 펑펑 울었다. 울음소리가 너무도 구슬펐다.
김장한의 일행은 옹주를 병원에서 구출해 조국의 땅을 밟게 한다.
소설이 전하는 그의 구출장면이다.
그들은 덕혜를 억지로 차에 태우고 그 곳을 빠져 나갔다.
차는 빗속을 헤집고 달렸다. 뒤따르는 차는 없었다.
“마마, 이제는 창덕궁에 가실 수 있게 됐습니다.”
박무영(김장한의 또 다른 이름)이 감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옹주를 태운 비행기가 꿈에도 그리던 조국에 도착한다.
그 마지막 옹주가 조국을 찾았을 때의 장면이다.
“마마, 소인을 죽여주시옵소서.”
덕혜가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자 머리가 하얗게 센 늙은 여인이 땅바닥에
엎드려 통곡했다. 유모 변복동이었다. 덕혜는 숨을 들이켰다.
조선의 공기가 그녀의 폐부를 가득 채웠다. 그것만으로도 다시 태어난 기분이다.
“마마, 이제 조선에 오셨나이다.이제는 아무 걱정 마시소서.”
그는 창덕궁 낙선재에서 삶을 마감한다. 의식이 있을 때 간간히 메모를 남겼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총기가 돌 때마다 이런 글을 남겼다는 그녀이다. 그는 비극적인 운명 앞에서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저항하고, 때로는 체념했지만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대한민국 우리나라”를 잊지 못했다. 낙선재에서 삶을 마무리한 그녀이다.
“내가 조선의 옹주로서 부족함이 있었더냐.”
“아니옵니다.”
“옹주의 위엄을 잃은 적이 있었더냐.”
“그렇지 않았나이다,마마.....”
유모의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나의 마지막 소망은 오로지 자유롭고 싶었을 뿐이었느니라...”
덕혜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그 숨이 천천히 잦아들었다가 공기중으로 흩어졌다.
소설은 소설 밖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감옥과 같이 음산한 공기가 떠도는 중환자가 있는 병실은 감방 모양 쇠창살이 들창을
막고 있었다. 안내해주는 간호부의 뒤를 따라갔는데 한 병실 앞에서 간호부의 발이
멈추었다. 그 안을 들여다보니 40여세의 한 중년부인이 앉아있는데 창백한 얼굴에
커다란 눈을 뜨고 이쪽을 바라보는데 무서울 지경이었다.
그 부인이 바로 덕혜의 후신인 것이다.
아무도 없는 독방에서 여러 해동안 우두커니 앉아 있었던 옹주를 생각하니
어찌나 가엽고 불쌍한지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만일 고종황제가 이 광경을 보신다면 얼마나 슬퍼했을까.“ (기자 김을한의 말)
“덕혜옹주를 조국으로 모셔가기 위해 이승만 정부에 귀환을 요청했다.
그러나 왕정복고를 두려워한 이승만은 왕실 재산을 국유화하고 왕족들을 천대했다.
이씨 왕가의 자손들은 해방이 되고도 아무도 돌아오지 못하였다.
다시 박정희를 만나 덕혜옹주 이야기를 청했다.
박정희가 물었다.“덕혜옹주가 대체 누구요?”
나는 대답했다.“조선의 마지막 왕녀입니다.” (기자 김을한의 말)
이 소설의 작가 권비영은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라고 말했다.
“고종황제의 막내딸로 태어났지만 황녀로서의 고귀한 삶을 살지 못하였던 여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흔적도 없이 잊혀져버린 그 삶이 너무 아파 도저히
떨쳐낼 수 없었습니다. “
고종황제의 막내딸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다.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의 괴롭힘과 감시로 사춘기를 보낸다.
그는 대마도 도주의 후예인 소 다케유키와의 강제 결혼해 딸을 출산하나
행복과는 거리가 먼 괴롭고 힘든 생활이었다.
정신이상이라는 이유로의 7년간의 병원에서의 감금생활을 한다.
"오로지 다시 조국으로 돌아와 덕수궁에서 지내며 선생님이 되고 싶다"
소박한 꿈을 가진 그녀는 평범한 자유와 소박한 행복을 꿈꾸었다.
그는 일본 황후 사다코의 간계로 1931년 5월 8일 도쿄에서 일본의 벽촌인 쓰시마섬 도주인
소오 다케유키(宗武志)과 정략 결혼한다. 그 이듬해 8월 14일 딸 마사에(正惠)를 낳았으나
출산 후 그녀의 지병은 악화된다. 옹주는 산후조리가 시원치 않아 정신병이 재발,
도쿄 부립 마쓰사와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1953년 덕혜옹주는 정신이 이상하다고 하여 이혼을 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혼한 덕혜옹주는 일가를 창립, 일본 호적에 어머니 이름을 따서 양덕혜라 올렸다.
물론 평민 신분이었다. 이 무렵 덕혜옹주는 그 동안의 시련으로 인한 우울증에 실어증까지
겹쳐 끝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남편의 학대가 아주 심했다고도 한다.
그는 일방적인 이혼통보를 받고 황실의 이씨도 일본인의 성씨인 소씨도 아닌
어머니의 성을 따른 양덕혜로 살아야 했다.
조국은 해방되었지만 조국에서조차 황실 사람들을 외면하고
일본에 방치해 두어 37년만에 간신히 다시 되돌아왔다.
그리고 낙선재에서 쓸쓸하게 힘겨운 삶을 마감한다.
덕혜옹주는 결국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 21일 낙선재에서 한 맺힌 생애를 마쳤다.
덕혜옹주의 묘이다.
그는 아버지 고종의 홍유릉 곁으로 가 묻혔다.
그의 묘는 왕릉도 아니다. 원(園)도 아니다.
홍유릉 근처 영친왕의 영원(英園) 가까운 곳에
잠든다.
영친왕의 원 부근에는 덕혜옹주의 묘가 홀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봉분 옆으로
'대한 덕혜옹주지묘(大韓 德惠翁主之墓)'라고
새긴 묘비가 서 있다.
어느 시인의 시 '덕혜옹주'다.
"나라 잃은 설움 달래듯
달빛고운 옹주마마 탄생했다.
위엄한 아바마마 덕수궁 즉조당에
유치원 개설하고
망국의 한을 달래본다.
이름없는 황녀로 일곱 해 동안
아바마마 품에서 따뜻했다.
하늘이던 아바마마 죽으시고
이덕혜 이름 짓고 볼모의 땅에 입성한다.
조센징이라고 멸시하고
빗장 걸어 화장실에 가두어 버리고
참담한 모습 보고 싶은 원수들 앞에서
서릿발 서린 눈빛으로
흔들림 없는 몸짓으로
우렁찬 목소리로 외치는 한 마디
"나는 대한 제국의 황녀다."
고운 꿈 간데 없는 소녀시절
고국에서 복녕당 어머니 죽으시고
몹쓸법이 복상도 못하게 했다.
원수의 땅에서
하늘이던 아바마마 그리워서
땅이신 어마마마 보고파서
아픈 마음 차마 말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소덕혜로 살아온 세월 이십여년
사랑은 일장춘몽이었다.
사랑하는 아이 가슴에 묻고
남편과의 이별에도 의식이 없다.
이혼한 황녀는 왕가에 다시 갈 수 없어서
양덕혜가 된 기막힌 사연.
지천명에 고국 땅 밟으니
총기 넘치던 옹주마마 간데 없고
원수의 나라에서 겪은 서러움만
이덕혜가 소덕혜가 되고
소덕혜가 다시 양덕혜가 된 사연이
설령 하늘의 명이라 해도 원망스럽다.
모든 기억이 하얗게 지워졌어도
"나는 대한 제국의 황녀다."
덕혜옹주 당신은
잃었다 찾은 대한제국입니다.
당신의 아픔이 대한제국의 고통이고
당신의 몸부림이 대한제국의 부활입니다.
한 번도 영화로운 황녀로 살지 못했으나
오늘이 역사는 말합니다.
"당신은 영원한 대한제국의 황녀입니다."
귀국 후에는 의민태자비 이방자 일가와 유모 변복동 여사와 함께 창덕궁에 기거하며 노환으로 고생한다.
결국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 21일 낙선재에서 한 맺힌 생애를 마쳤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金谷洞)에 있는 홍유릉(洪裕陵)에 묻혔다.
그렇게 가슴 저미는 한을 안고 살다간 조선의 마지막 황녀 <양덕혜>다.
경운궁 즉조당 창덕궁 낙선재 후원 부용정 성북동 성락원 등이 그의 애절한 삶이 서려있는 곳이다.
가슴 저미게 하는 그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 이제 그 의미를 함께 곰씹게 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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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의친왕의 무덤은 덕혜용주와 마찬가지로 '묘'입니다. 영(친)왕은 황태자였기 때문에 '원'을 썼고요. 영원은 영(친)왕과 의민태자비(이방자여사)의 합장무덤입니다.
잘 바로 잡아주셨습니다.의친왕은 영친왕의 오기였습니다.
귄비영님의 '덕혜옹주'를 보면서 소설같은 현실이야기에 마음이 많이 아팠었는데... 다시 가슴이 아려오는듯...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