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世 남계(南溪)공 휘 병목(炳穆) 유사(遺事)
1975년대 수몰 직전 용산리의 사진으로 계천(溪川)<옛이름 호계(虎溪)>의
오른쪽이 인구마을이다.
삼휴공(18世)께서 영천 석동마을에서 인구마을로 살림나 일생을 사신 마을이며,
모재공(21世)께서도 귀미마을에서 인구마을로 살림나 일생을 사셨다.
그 후 증조부께서 농와고택에서 살림나신 후 조부 남매분이 나셨고,
다음 대에 부공(父公) 3남 3녀,
또 대를 이어 우리 5남 2녀가 태어나 살았던 마을이다.
댐건설로 수몰되었던 증조부 경암공(휘 진우 27世)께서 농와고택에서
살림나 사셨던 집터가 나타났다.
이 터에서 조부 용헌공 남매분이 태어나셨고,
부공(父公) 송당공 3남 3녀분께서도 그 집에서 태어나 성장한 곳이다.
그리고 대를 이어 송당공 자녀 4남 2녀가 그 집에서 태어났다.
남계형님도 이 터에서 나서 자랐다.
송당공께서 심혈을 기우려 지은 새집이 1950년 6.25전쟁으로 불타벼린
그 자리가 댐건설로 용궁이 되었다가 물이 줄어 담과 주춧돌이 나타났다.
이곳은 남계형님이 자라 결혼하여 신행을 한 집터이다.
1939년 3월 23일 (昭和14년 3월 23일) 자양공립심상소학교 제2회 졸업사진
앞줄 한복 입으신 분은 울산할배(휘 淵夏) 자양면장이고
셋째 줄 왼쪽 셋째 남계 형님(휘 炳穆)‘
네째줄 왼쪽에서 셋째 한복 입으신 아버님(휘 勳植) 40세 때의 사진이다.
학무의원으로 참석하셨다.
송당공의 40세 때 존영 남계형님의 졸업 때의 모습
1953년 설날 고향에서 어머니 7남매 중 6남매의 가족사진(포항누나 부재)
1947년부터 1954년 까지 자양면사무소 서기로 근무 할 때의 직원사진.
앞줄 왼편 첫째가 남계형님이시다.
영천 창구동에 살던 시절 어머니께서 둘째아들 병목, 둘째 딸 병숙과
그리고 어린 손자 형기, 윤기와 즐거운 한때. 동계형님이 찍은 사진.
1957년 동계형님의 주선으로 경주불국사관광 때
다보탑 앞에서 우리 6남매와 어린 태기, 형기 형제의 모습.
청송주왕산 관광에 사용한 동계형님의 911호 자동차.
이 차를 남계 형님이 끝까지 운영하셨다.
관광 가서 찍은 남계형님의 사진이다.
북당골의 남계형님의 묘소이다. 배위가 후에 모셔져 왼쪽이다.
공의 휘는 병목(炳穆 30世), 자는 복언(福彦) 호는 남계(南溪).
남계형님의 20대 후반의 존영 양동형수님의 50대의 존영
1.가계(家系) : 시조공의 29세손이며, 호수공 휘 세아(世雅 16世)의 14세손 이고, 삼휴공 휘 호신(好信 18世)의 12세손이다. 모재공 휘 중교(重喬 21世)의 9세손이며, 자언공 휘 일필(一鉍 22世)은 8대조 되시고. 휘 하주(夏澍 23世) 농와공은 7대조이며. 6대조는 휘 성휴(性休 24世)이시다, 5대조는 휘 유명 (裕明 25世)이시며, 고조부는 휘 치선(致璇 26世)이시고. 증조부는
휘 진우 (鎭禹 27世)이시며, 조부는 휘 연석(淵錫 28世) 용헌공이시고, 부공 송당공과 어머니 남양 홍씨의 7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2.생몰(生沒) : 정묘1927년 1월 6일 생 - 경자1960년 6월 4일 졸 (향년 34세)
* 배위 : 여강이씨-정묘1927년 2월 26일 생- 1980년 7월 23일 졸 (향년 54세)
3.배위(配位) : 여강 이봉식(李鳳植). 父 이장원(李長源) 祖 이석희(李錫熺).
4.학력(學歷) : 창의성이 있어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대단하셨으나 가정형편상 상급학교
진학은 하지 못했다.
*1933년 4월 1일 - 1939년 3월 25일 자양공립심상소학교 6년 수학.
5.성품(性稟)과 특기(特技) : 다정다감하고 심성이 너무 고왔다, 매사에 호기심과 새로운 것
에 관심이 많았고. 손재주가 있어 무엇이든지 잘 만들었고. 노래에 능하여 영천읍을 내왕하
면서 유행가를 고향에 유행시키는 역할을 했다. 밤마다 우리 집은 우리남매들의 노래 소리가 화음이 되어 널리 퍼져나갔다.
6.경력(經歷) : 소학교 종업 후 머슴을 도와 농사에 종사하면서, 소달구지(牛車)를 몰았다. 그 소득으로 갖고 싶은 물건을 가졌다. 그 후 결혼하고 면사무소에 서기로 취직하여 안정된 가
정생활을 하셨다.
1)1940년 - 1947년 소학교 졸업 후는 농사를 도왔고. 그러다 우리 집 소달구지(牛車)로
죽당공의 배급용 유류 운반을 위해 영천읍 내왕을 많이 하였다. 그때 영천에는 같은 또
래인 물봉댁 연휘(남용)가 살고 있기에 항상 유행가는 그 길로 우리 마을까지 전달되었
으며. 하모니카는 전문가 정도로 잘 불었다, 운임으로 형님 필요한 물건을 잘 사셨다.
예를 들면 귀한 공기새총, 회중시계(나중에 나의 중학교 입학 기념으로 주심). 의복 등.
2)1947년 - 1954년 자양면사무소 서기로 근무하였다.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어 태교, 영
애, 숙자를 낳았다. 안정된 생활의 시기였다.
3)1954년 - 1960년 퇴직하여 동계형님 사업 돕기 : 면사무소 서기를 그만두고 형의 사업
을 돕기 시작하였다. 화물자동차의 운영을 맡아 운전기사와 같이 하였다. 그때는 동계
형님이 현직에 있어 화물이 많아 자동차가 2대 까지 불어났으나 퇴직하니 인심이 그렇지
않아 사업이 기울기 시작했다.
4)큰집 사업 정리 : 동계형님이 돌아가시자 모든 운영을 남계형님이 맡았다.
벌려놓은 사업은 화물차, 주유소, 정부도정공장이다. 사업을 시작하여 초기 단계로 애
로 사항이 많았다. 그래서 큰형수님과 협의하여 화물차는 남계형님이 운영하고, 주유소
는 권재호에게 팔았고, 정부도정공장은 동업자 조강환에게 넘겼다. 주유소, 도정공장을
정리하여 완산동에 주택을 구입하고 주남 들의 논 몇 마지기를 샀다. 화물차 운영은 경
기가 좋지 않아서 애로가 많았다. 모든 일의 처리가 남계형님에게 아주 무겁고 힘겨웠다.
6.묘소(墓所) : 삼귀리 북당골 산 쌍분. 처음에는 아래쪽 있었는데 수몰지로 편입되어 위쪽
으로 이장하였다. 배위는 묘지 형편상 좌측에 있다.
7.후손(後孫) 1남 3녀.
o장남 수진(守珍) 配 삼척 김순덕(金順德) 父 김진태(金鎭泰).
*장손자 현근(鉉根)
*차손자 현철(鉉澈)
o장녀 태교(胎嬌), 夫 인동 장덕수(張德守). 父 병술(炳述).
*외손자 장종렬(張鍾烈).
*외손녀 장선옥(張仙玉)
*외손녀 장선교(張仙敬)
o차녀 영애(英愛). 夫 현풍 곽충섭(郭忠燮), 父 병옥(秉玉).
*외손자 곽재걸(郭在杰)
*외손녀 곽재희(郭在姬)
o삼녀 숙자(淑子). 夫 경주 이성태(李成泰). 父 만석(萬石).
*외손자 이대흔(李大欣)
*외손녀 이영주(李英珠)
8.택호 : 양동 (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자료정리) 아우 병극(炳極)
첫댓글 양동숙부님의 생애를 자양초등학교 졸업후 짧은기간에 영천살고 있을때 기역이나고 별세하시면서 서문통 저근댁
빈소에 수진(세살)어려서 상주 노릇한 지도 58년이 되여가네요,
해마다 6월 제사때면 엄마께서 쌀을 주시면서 자양 강호정 포사에 제사지내려 자주가기도 했지요,
무슨 운명인지 형제분께서 일찍 돌아가시니 어린나이에 큰 시련을 주셨는지 지금도 우리집 어러운 시절 잊고싶은 심정입니다,
양동숙모님도 고생 많이 하시일을 기역하고 있습니다,
내외분 편히 영면하시고 극락왕생 드립니다,,
기울어진 집안 사업을 감당하시다가 일찍 세상을 떠나신 양동숙부님과 혼자 남겨져 고생하신 숙모님을 생각하니 애통합니다.
극락장생하시길 기원합니다.
집안의 어려운 시절 고생하신 내용은 어렴픗이들어 알고 있었습니다만 새삼 마음이 아파 옵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주유소 운영을 맡아 하실 때 명절 전날 수금하셔서 오실 때까지 기다리다 늦은 시간에 어머님과 염매 시장 가서 명절 옷 하나 얻어 입고 좋아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운영이 어려운 사업을 맡으셔서 너무나 힘들게 고생만 하시다가 젊으신 나이에 돌아 가셔서 남은 식구들도 고생이 많았는데 그래도 수진이가 어려운 환경에서 아들 손자 거느리고 잘 살고 있는 것을 보면 대견할 따름입니다.
부디 극락왕생하시길 빌겠습니다.
병목형님 저와 이름이 비슷하여 햇갈리기도 하였지요
형님과는 함께한 시간이 적어도 노래하면 양동형님 술 실력도 형제중에 최고였지요 큰형님의 배려로 우리 형제 함께노력해서 돈 많이 벌어 재미있게 살아보자시며 니꺼 내꺼 구분 없이 함께 앞만 보고 일을 하시다 큰대들보가 꺽어지면서 큰형님께서 해놓으신 일들 마무리 하시고 불행이도 생을 마감 하시어 집안에 먹구름이 드리워 졌습니다
다행이 수진이가 역경을 딛고 일어서 주어 너무 고맙고 반가워 더구나 두 형제가 효심이 지극 하다니 하늘에 계신 부모니께서 무척 반가워 하실꺼야 부디 오손 도손 말년 행복하게 살길 빌께 고 마 워^^
수진형의 얼굴모습이 아버님의 어린사진에서 그대로 나타나네요
일찍 돌아가셨단 이야기는 들었었는데 수진형 3살때 인줄은 몰랐고
댓글들을 봐도 이후 가족들의 어려움이 절절히 느껴져 마음이...
뵙지 못하여 항상 어르신들 추엌속에서만 존재하셨던 작은아버님의 삶을 글을 통해서 느낍니다
다들 건강하셨음 지금도 살아 계실 나이인데 일찍 가신게 안타깝네요
양동 적은 아버지 적은 엄마. 늘 고생만 하시고 돌아 가셔서 항상 가슴이 아픕니다...
적은 아버지랑 형제간 모여서 옛 노래 같이 부르시던 모습이 지금도 훤합니다...
모두 사랑합니다...수진이 열심히 잘 사는 모습도 대견합니다..
수진아 건강하게 잘 살아~~~
동인동 민생금고에서 일할때 작은엄마가 이웃에서 일하고 있어서 장시간 대화를 나누적이 있었습니다.
살아오면서 겪었던 고초를 말씀하셨고, 원망의 말씀도 있었습니다. 저도 너무 어려서 더 살갑게 해드리지 못해서 죄송했습니다. 흩어진 누이들도 살아있는동안 한번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