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굽니까? 너는 누구냐? 질문을 받을 때 나는 누굽니다 분명하게 대답하기는 어렵다. 내가 누구이며, 왜 살고, 지금 살고 있는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 앞에 우리는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어느날 세상을 떠나는 순간이 다가오면 지나간 나날들을 후회하며 이럴 줄 알았으면 실컷 먹고, 마시고 놀아나 볼 걸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사람들이 의사에게서 마지막 선고를 받고 나면 별안간 여행을 떠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눈에 넣고 가려는 듯 돌아 다니지만 죽음이라는 불안의 그림자를 지울 수는 없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지 않고는 알 수 없다.
다음의 말씀을 통해 살펴보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이 된지라(창 2:7) $.인간은 하나님이 흙으로 지으신 존재이다. 먼지와 같이 보잘 것 없는 존재이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신 존재이다. 생기를 불어 넣으셨기에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할 영역을 가진다. 바람만 불어도 날아가 버릴 연약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무한히 존귀한 존재가 되었다. 인간만이 우주 속에 그 어떤 것과도 비교가 되지 않으며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 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도록 창조되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의식주가 필요하다. 그러나 시간의 영원성을 놓고 볼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의식주보다 훨씬 더 필요한 존재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4) 이 말씀은 창 2:7에서 하나님이 인간이 누구인가를 가르쳐 주신 것을 기준으로 해서 하신 말씀이다. 고전 15:45 이하에서는 생령인 인간에게는 살리는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이고 기본적으로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창세기 1장과 2장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내용이 다르다. 왜 다를까? 어떻게 다른가? $.1장에서는 인간에게 문화 생활의 분위기를 가르쳐 주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지으셔서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 필요한 자원과 많은 식물을 제공해 주셨다. 해와 달도 주셨다. 창세기 1장은 인간이 이 땅위에 살 수 있는 조건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창조하셨는가를 말해 준다. 지상 생활에 촛점을 맞추어 기록한 것이다. $.2장에서는 영적 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2장은 영적 생활을 중심으로, 영적 생활을 부여하신 하나님의 뜻과 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사람이 이 땅 위의 문화 생활로만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사실과 영적 생활의 필요성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성경의 주춧돌이라고 할 수 있는 창세기 1,2장에 문화 생활과 영적 생활에 대해 쓰기 시작하셨다. 인간이 아무리 수고하고 힘써 경영하고 먹을 것을 가지고 육신을 위해서 살고 있을지라도 실지로 인간에게 생명을 공급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없이는 참되게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에덴 동산의 네 개의 강이 지닌 의미 창세기 2:10부터 에덴 동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1장에서는 말씀하시지 않았던 생명나무, 인간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나무가 거기에 있었다. 이 생명은 인간의 목숨을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영역, 바로 그분의 영역으로 창조한 부분이 영원히 존재할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줄 수 있는 하나의 생명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고 또 네 개의 강이 있었다. 우리는 수고해서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다. 남보다 노력하고, 수고하고 애쓰면 문화 생활을 할 수 있다. 밤잠을 줄이고 일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육신보다 귀중한 하나님이 주신 영적 생활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신 대로 믿음 생활을 따라가야 한다. 그러할 때 믿음 생활에서 승리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모습을 그대로 이루어서 문화 생활 뿐만 아니라 생명에 관련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할 수 있다. 에덴 동산에 있던 네 개의 강은 인간에게 영적으로 필요한 최소한의 네 가지를 말씀해 준다.
비손강 [비손]은 풍요, 부요이고 히브리어로 강은 흘러 넘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풍요가 넘친다는 뜻이다. 이는 물질적인 풍요가 아닌 영적인 생활의 풍요를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부요가 넘치는 삶, 그것은 곧 믿음 생활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요한복음 6:63에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기록되었다. 하나님이 주시는 부요가 참 부요이다. 풍요롭고 부요한 생활,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그것이 바로 영적인 생활, 믿음의 생활이다. 영적인 빈약이란 바로 심판을 가져오는 것이다. 마지막 날에 육신적인 부요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인정도 받을 수 없다. 오직 영적 부요를 가진 자라야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영적 부요가 넘치는 사람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 영적 생활의 부요라는 것은 주인이 되는 것이다. 조금만 어려워도 낙심하고, 자살하는 사람들은 영적인 빈곤이 원인이다.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몫이던 축복도 받아가지고 도망쳤다. 20년 만에 큰 부자가 되어 되돌아 올 때에 그것을 형이 빼앗으면 한 순간에 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순간에 이 땅 위에 있는 것은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릴 수 있는 것이고 영적 부요가 참된 복임을 깨달았다. 그는 영적 부요를 구하여 후일에는 애굽의 왕까지도 축복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가졌던 것이다. 영적 부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영적 부요가 흘러 넘칠 때 우리의 생명을 영원까지 연장시키고 우리에게 건강을 주는 것이며 우리를 평안으로 인도해 주는 것이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리도 해받지 않는 삶이 가능하다.
기흔 강 이것은 은혜란 뜻이다. 성경에서 은혜라는 것은 죄를 용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은혜받았다는 것은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이요, 죄를 용서받은 자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성경은 동에서 서가 먼 것같이 내가 이제는 너희 죄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며 바다 속의 깊음과 같이 이제 다시 너희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죄에서부터 용서받은 기쁨이 우리의 매일의 삶을 지배하고 인도하고 이끌어 가는 것이다. 인간의 죄, 이 우주 안에는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사람도 제도도 없다. 율법의 약점은 은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 생활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용서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용서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에게 선물로 주셨다. 인간은 누구나 죄를 두려워 하고 미워하고 버리고 싶어 하지만 그러나 스스로 처리할 능력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를 내어 놓는 자마다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용서가 흘러 넘치겠다고 약속하셨다. 용서는 돈을 내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행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용서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는 자에게 선물로 은혜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영적 생활! 이것은 곧 은혜와 용서가 넘치는 생활이다. 죄를 내어 놓고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생활이 기흔강의 생활이다.
힛데겔 강 힛데겔은 [결실]이라는 뜻이다. 성경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본다면 농부의 이야기와 같다.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농부의 하는 일이 각각 다 다르다. 겨울이 오면 알곡을 창고에 드리는 것처럼 하나님이 인생들을 수확하실 것이다. 계절의 변화는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지만 성경이 말씀하고 진행하는 방향은 바로 결실의 목적을 위해서 진행되고 있다.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막 4:26-29) 갈라디아서에서 싹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을 때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겠다는 구체적인 약속을 시작하시더니 그 다음에 싹이 나오고 이삭이 피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를 감당하며 걸어오시더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결실하였다고 하셨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 추수하고 계신다. 이 결실이라는 것은 이렇게 역사적으로 시작이 있고 끝이 있듯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되어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끝이 난다. 결실이란 히브리어의 원뜻은 축복이라는 것이다. 축복이란 복을 지속시켜 주는 능력이다. 죄라는 것은 결실을 얻지 못하고 엉컹퀴를 낸 것이며, 불순종한다는 것, 하나님을 거부한다는 것은 결실이 없다는 것이다. 진실로 삶을 바로 유지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약속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결실이 흘러 넘치는 생활을 구해야 될 것이다. 하나님이 결실케 하셔야만 우리의 것이 되어서 우리는 그 결실의 풍족함을 누리고 살 수 있는 것이다.
유브라데 강 [유브라데]는 능력이라는 뜻이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는 능력과 능력의 연속이다. 창세기 1장에는 말씀으로 빛을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궁창을 만드시고 말씀으로 물과 땅이 분리되게 하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성경에서 능력을 빼고 나면 남는 것이 하나도 없다. 사람이 구원받고 용서받고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 영생하는 것, 병든 자가 일어나는 것,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두가 능력이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물질이나 소유를 구하기보다는 이 능력을 구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인간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어느 순간에 자기 몸 하나가 빠져 나가야 되는 어려운 날이 올지도 모른다. 세상은 분명히 종말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다. 그때 만약 우리가 우리가 부자라기보다는 부요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나 하나가 가는 곳에 부요가 일어난다면 내 손길이 스치는 곳, 내 생각이 머무는 곳, 내 발길이 닿는 곳에 부요가 일어날 수 있다면 저금통장에 돈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 참으로 용기있고 자신있고 평안하고 행복하고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명예를 탐하기보다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 능력을 구해야 한다. 능력있는 개인, 능력있는 가정, 교회, 사회, 국가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능력이 넘치는 교회가 된다면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 용서의 능력, 부요의 능력, 결실의 능력, 평화의 능력이 그대로 흘러 넘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참으로 감사하며 기쁘게 승리로 살 수 있다.
결론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네 개의 강의 이름을 주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이 어떤 삶이 되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셨다. 약속으로 주신 삶을 우리는 살아야 한다. 그가 보증하시고 그가 곁에서 도우신다.
내가 누굽니까? 너는 누구냐? 질문을 받을 때 나는 누굽니다 분명하게 대답하기는 어렵다. 내가 누구이며, 왜 살고, 지금 살고 있는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 앞에 우리는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어느날 세상을 떠나는 순간이 다가오면 지나간 나날들을 후회하며 이럴 줄 알았으면 실컷 먹고, 마시고 놀아나 볼 걸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사람들이 의사에게서 마지막 선고를 받고 나면 별안간 여행을 떠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눈에 넣고 가려는 듯 돌아 다니지만 죽음이라는 불안의 그림자를 지울 수는 없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지 않고는 알 수 없다.
다음의 말씀을 통해 살펴보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이 된지라(창 2:7) $.인간은 하나님이 흙으로 지으신 존재이다. 먼지와 같이 보잘 것 없는 존재이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신 존재이다. 생기를 불어 넣으셨기에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할 영역을 가진다. 바람만 불어도 날아가 버릴 연약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무한히 존귀한 존재가 되었다. 인간만이 우주 속에 그 어떤 것과도 비교가 되지 않으며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 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도록 창조되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의식주가 필요하다. 그러나 시간의 영원성을 놓고 볼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의식주보다 훨씬 더 필요한 존재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4) 이 말씀은 창 2:7에서 하나님이 인간이 누구인가를 가르쳐 주신 것을 기준으로 해서 하신 말씀이다. 고전 15:45 이하에서는 생령인 인간에게는 살리는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이고 기본적으로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창세기 1장과 2장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내용이 다르다. 왜 다를까? 어떻게 다른가? $.1장에서는 인간에게 문화 생활의 분위기를 가르쳐 주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지으셔서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 필요한 자원과 많은 식물을 제공해 주셨다. 해와 달도 주셨다. 창세기 1장은 인간이 이 땅위에 살 수 있는 조건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창조하셨는가를 말해 준다. 지상 생활에 촛점을 맞추어 기록한 것이다. $.2장에서는 영적 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2장은 영적 생활을 중심으로, 영적 생활을 부여하신 하나님의 뜻과 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사람이 이 땅 위의 문화 생활로만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사실과 영적 생활의 필요성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성경의 주춧돌이라고 할 수 있는 창세기 1,2장에 문화 생활과 영적 생활에 대해 쓰기 시작하셨다. 인간이 아무리 수고하고 힘써 경영하고 먹을 것을 가지고 육신을 위해서 살고 있을지라도 실지로 인간에게 생명을 공급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없이는 참되게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에덴 동산의 네 개의 강이 지닌 의미 창세기 2:10부터 에덴 동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1장에서는 말씀하시지 않았던 생명나무, 인간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나무가 거기에 있었다. 이 생명은 인간의 목숨을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영역, 바로 그분의 영역으로 창조한 부분이 영원히 존재할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줄 수 있는 하나의 생명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고 또 네 개의 강이 있었다. 우리는 수고해서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다. 남보다 노력하고, 수고하고 애쓰면 문화 생활을 할 수 있다. 밤잠을 줄이고 일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육신보다 귀중한 하나님이 주신 영적 생활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신 대로 믿음 생활을 따라가야 한다. 그러할 때 믿음 생활에서 승리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모습을 그대로 이루어서 문화 생활 뿐만 아니라 생명에 관련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할 수 있다. 에덴 동산에 있던 네 개의 강은 인간에게 영적으로 필요한 최소한의 네 가지를 말씀해 준다.
비손강 [비손]은 풍요, 부요이고 히브리어로 강은 흘러 넘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풍요가 넘친다는 뜻이다. 이는 물질적인 풍요가 아닌 영적인 생활의 풍요를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부요가 넘치는 삶, 그것은 곧 믿음 생활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요한복음 6:63에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기록되었다. 하나님이 주시는 부요가 참 부요이다. 풍요롭고 부요한 생활,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그것이 바로 영적인 생활, 믿음의 생활이다. 영적인 빈약이란 바로 심판을 가져오는 것이다. 마지막 날에 육신적인 부요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인정도 받을 수 없다. 오직 영적 부요를 가진 자라야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영적 부요가 넘치는 사람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 영적 생활의 부요라는 것은 주인이 되는 것이다. 조금만 어려워도 낙심하고, 자살하는 사람들은 영적인 빈곤이 원인이다.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몫이던 축복도 받아가지고 도망쳤다. 20년 만에 큰 부자가 되어 되돌아 올 때에 그것을 형이 빼앗으면 한 순간에 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순간에 이 땅 위에 있는 것은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릴 수 있는 것이고 영적 부요가 참된 복임을 깨달았다. 그는 영적 부요를 구하여 후일에는 애굽의 왕까지도 축복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가졌던 것이다. 영적 부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영적 부요가 흘러 넘칠 때 우리의 생명을 영원까지 연장시키고 우리에게 건강을 주는 것이며 우리를 평안으로 인도해 주는 것이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리도 해받지 않는 삶이 가능하다.
기흔 강 이것은 은혜란 뜻이다. 성경에서 은혜라는 것은 죄를 용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은혜받았다는 것은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이요, 죄를 용서받은 자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성경은 동에서 서가 먼 것같이 내가 이제는 너희 죄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며 바다 속의 깊음과 같이 이제 다시 너희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죄에서부터 용서받은 기쁨이 우리의 매일의 삶을 지배하고 인도하고 이끌어 가는 것이다. 인간의 죄, 이 우주 안에는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사람도 제도도 없다. 율법의 약점은 은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 생활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용서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용서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에게 선물로 주셨다. 인간은 누구나 죄를 두려워 하고 미워하고 버리고 싶어 하지만 그러나 스스로 처리할 능력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를 내어 놓는 자마다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용서가 흘러 넘치겠다고 약속하셨다. 용서는 돈을 내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행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용서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는 자에게 선물로 은혜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영적 생활! 이것은 곧 은혜와 용서가 넘치는 생활이다. 죄를 내어 놓고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생활이 기흔강의 생활이다.
힛데겔 강 힛데겔은 [결실]이라는 뜻이다. 성경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본다면 농부의 이야기와 같다.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농부의 하는 일이 각각 다 다르다. 겨울이 오면 알곡을 창고에 드리는 것처럼 하나님이 인생들을 수확하실 것이다. 계절의 변화는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지만 성경이 말씀하고 진행하는 방향은 바로 결실의 목적을 위해서 진행되고 있다.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막 4:26-29) 갈라디아서에서 싹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을 때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겠다는 구체적인 약속을 시작하시더니 그 다음에 싹이 나오고 이삭이 피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를 감당하며 걸어오시더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결실하였다고 하셨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 추수하고 계신다. 이 결실이라는 것은 이렇게 역사적으로 시작이 있고 끝이 있듯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되어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끝이 난다. 결실이란 히브리어의 원뜻은 축복이라는 것이다. 축복이란 복을 지속시켜 주는 능력이다. 죄라는 것은 결실을 얻지 못하고 엉컹퀴를 낸 것이며, 불순종한다는 것, 하나님을 거부한다는 것은 결실이 없다는 것이다. 진실로 삶을 바로 유지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약속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결실이 흘러 넘치는 생활을 구해야 될 것이다. 하나님이 결실케 하셔야만 우리의 것이 되어서 우리는 그 결실의 풍족함을 누리고 살 수 있는 것이다.
유브라데 강 [유브라데]는 능력이라는 뜻이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는 능력과 능력의 연속이다. 창세기 1장에는 말씀으로 빛을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궁창을 만드시고 말씀으로 물과 땅이 분리되게 하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성경에서 능력을 빼고 나면 남는 것이 하나도 없다. 사람이 구원받고 용서받고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 영생하는 것, 병든 자가 일어나는 것,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두가 능력이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물질이나 소유를 구하기보다는 이 능력을 구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인간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어느 순간에 자기 몸 하나가 빠져 나가야 되는 어려운 날이 올지도 모른다. 세상은 분명히 종말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다. 그때 만약 우리가 우리가 부자라기보다는 부요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나 하나가 가는 곳에 부요가 일어난다면 내 손길이 스치는 곳, 내 생각이 머무는 곳, 내 발길이 닿는 곳에 부요가 일어날 수 있다면 저금통장에 돈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 참으로 용기있고 자신있고 평안하고 행복하고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명예를 탐하기보다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 능력을 구해야 한다. 능력있는 개인, 능력있는 가정, 교회, 사회, 국가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능력이 넘치는 교회가 된다면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 용서의 능력, 부요의 능력, 결실의 능력, 평화의 능력이 그대로 흘러 넘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참으로 감사하며 기쁘게 승리로 살 수 있다.
결론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네 개의 강의 이름을 주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이 어떤 삶이 되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셨다. 약속으로 주신 삶을 우리는 살아야 한다. 그가 보증하시고 그가 곁에서 도우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