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말, 대선 패배 1년이 지났지만 한나라당은 여전히 어수선했다. 그런 가운데 소장파 의원들 주최로 당의 진로를 고민하는 토론회가 열렸다. 토론자들의 발제가 끝난 뒤 주최측 인사가 방청석에 앉은 윤여준 의원에게 ‘당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처방해 달라’며 코멘트를 요청했다. 윤 의원이 마이크를 잡고 딱 한 마디를 했다. “지금 환자 자신이 중병에 걸렸는지도 모르는데 뭘 진단하고 처방합니까?” 방청석에선 웃음소리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윤 의원의 촌철살인이 한나라당이 처한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씁쓸한 표정을 짓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적어도 윤여준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당을 이끌고 있던 최병렬 대표의 측근이자 당 싱크탱크 여의도연구소의 소장이었다. 자신이 책임져야 할 현실이었지만 시니컬한 말 몇마디를 던져놓고 그 뒤로 숨어버렸다. 한 관계자는 “윤여준이 어떤 사람이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했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
윤여준은 보수진영의 책사로 불렸다. 적어도 2004년까지는 그랬다. 보수 진영의 수장(首長)들은 ‘대를 이어’ 그를 썼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청와대 공보수석으로 그를 썼고,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가 여의도연구소장으로 그를 곁에 뒀다. 윤여준은 최병렬 전 대표를 거쳐 2004년 총선 때 박근혜 대표를 도왔다. 그런 경력은 윤여준을 ‘당대의 책사(策士)’로 등극토록 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는 ‘보수의 장자방’으로 불렸다.
김영삼 대통령의 공보수석 시절의 윤여준
하지만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여권 인사들의 얘기는 달랐다. 적극적으로 손사래를 치지는 않았지만 세간의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굳이 윤여준의 탁월한 점을 꼽으라면 유연한 사고를 할 줄 아는 점”이라고 한 인사는 말했다.
윤여준은 자신의 하루 일과를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새벽 뉴스전문채널의 첫 뉴스를 시청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어 조간신문을 탐독한다. 공직(公職)에 나온 이래 아침 신문 스크랩을 거르지 않았다. 관심있는 기사를 뜯어내 노트에 붙여놓는 식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스크랩북들이 방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다.”
그의 호기심은 고희를 넘긴 나이에도 왕성해보였다. 백수 시절 그의 손엔 늘 책이 들려 있었다. 그는 67세가 되던 2006년에 골프채를 처음 잡았다. ‘그 나이에 무슨 골프를 배우냐’는 주위의 타박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고 했다. 그는 젊은이들을 가까이 하려 했다. 주위엔 늘 젊은 기획통들이 있었다. 새정치연합 이태규 기획팀장은 그의 보좌관 출신이다. 진영·남경필 의원, 원희룡·권영진·정태근 전 의원 등과 친했다. 젊은이들의 얘기를 들어주는 품이 넓었다.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지 않았다.
자신이 고리타분한 늙은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그는 어린 기자들과의 밥 자리에서도 상석에 앉기를 마다했다. 70대 노정객이 아들뻘 기자들을 부르는 호칭은 ‘김형’,‘이형’이었다. 젊은 기자들보다 TV인기 드라마를 더 잘 꿰고 있었다. 한 여권 인사는 “유연하면서도 중도적인 윤여준의 사고는 보수 진영 수장들에게 신선하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라며 “그들이 대를 이어 윤여준을 곁에 둔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자기 아이디어 내는 것을 본적이 없다.”
이회창 전 총재 시절 비례대표 의원으로 여의도연구소장을 지낼 당시의 윤여준.
윤여준은 한나라당이 탄핵 후폭풍으로 휘청대던 2004년 17대 총선에서 선대위 부본부장을 맡아 선거를 실무지휘했다. ‘어려운 상황에서 한나라당이 그나마 선전할 수 있었던 것은 책사 윤여준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후 평가도 있었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렇지도 않다”는 반론도 적지 않다. 그 당시의 얘기다. 선거일이 임박해 TV에 내놓을 선거광고를 놓고 한나라당 천막당사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젊은 홍보 실무진은 ‘어머니의 회초리를 맞는 아들’을 콘셉트로 한 광고를 제작해 회의석상에 올렸다. 당료들이 반발했다. “우리가 죄인이냐?”,“광고가 너무 과장됐다.”
하지만 젊은 실무진들은 “지금은 무조건 엎드려야 한다”며 강행을 주장했다. 논쟁은 1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결국 회의 흐름이 ‘회초리 광고’를 내보내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회의 내내 한마디도 않던 윤여준이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이걸로 갑시다.”
당시 상황을 잘아는 A씨는 “윤여준은 매사 이런 식이었다”며 “일견, 남의 얘기를 잘 들어주는 것 처럼 보이지만 그는 결국 책임을 지지 않으려 했다”고 말했다.
계속되는 A씨의 얘기다.“나는 윤여준의 머리에서 전략이나 아이디어가 나온 것을 본 적이 없다. 그 사람은 자기 얘기가 없다. 다만 귀가 열린 사람이다보니 주위의 좋은 의견을 들을 줄 알았다. 판이 어떻게 흘러가는 것을 지켜본 뒤 대세에 편승했다.” 당시 총선에 관여했던 또다른 관계자는 “젊은 기획통이 윤여준에게 올린 기획안은 늘 윤여준으로 저자가 바뀌어 대표에게 보고됐다”고 말했다.
책사로서 그의 능력에 대한 물음표는 사실 2002년 대선 때부터 달렸다. 그는 당시 이회창 전 총재의 측근이었다. 하지만 그해 대선에서 패했다. 윤여준은 그 때의 패배에 대해 이렇게 해명하곤 했다. “2000년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승리하면서 이 전 총재는 대통령이 다 된 듯 오만해졌다. 더 이상 내 조언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나이든 영남출신 의원들에게 둘러싸였다. 뒤늦게 내게 손을 내밀었지만 이미 늦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잘 알는 한 인사의 얘기는 다르다. 그는 윤여준을 강하게 비판했다. “윤여준은 이회창 총재가 위기에 처하자 가장 먼저 현실을 회피하고 도망가버렸다. 그에게는 책사라는 말을 들을 머리도 없었고, 어려움을 헤쳐갈 용기도 없었다. 번지르르하게 말만 잘 하는 평론가일뿐 진정한 책사는 아니라는 게 그때 이미 드러났다.”
박근혜와 이명박이 치열하게 맞붙은 2007년 대선전에선 윤여준은 어느 캠프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2012년 대선에서 그는 진영의 경계를 넘어 민주당 문재인 후보 쪽으로 갔다. 그리고 또 졌다. “그는 가는 곳마다 패배한 실패한 책사”라는 평가가 여권에서 나오는 이유다. “윤여준은 안됩니다.”
박근혜 대통령과 윤여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주일한국대사관 공보관으로 공직을 시작한 윤여준은 전두환·노태우·김영삼 대통령 3대에 걸쳐 청와대 비서관을 지냈다. 그리고 야당이 된 보수진영에서 이회창 전 총재를 도왔다.
하지만 보수진영에서 그의 쓰임은 2004년으로 끝이었다. 보수진영의 책사로 일컬어지던 그는 2011년에 안철수라는 신인을 발굴해 보수진영을 두려움에 떨게 하더니, 이듬해 대선에선 민주당으로 가버렸다. 그는 안철수를 발굴하면서 ‘새정치’를 얘기했고, 민주당으로 갈 때는 ‘통합’을 얘기했다. 그의 행보는 나라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받아들여주는 곳을 찾아가 자기 사상을 펼치는 춘추전국시대의 유세객을 연상케 했다.
윤여준과 친했던 여권 인사 B씨는 그런 행보가 “그가 기본적으로 이상주의자이기 때문”이라며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해왔고 그 연장선상에서 움직인 것”이라고 했다. 여권 인사 C씨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는 자신의 논리에 갇혀있지 않고 항상 유연하고 탄력적이었다. 새로운 비전을 항상 고민했다. 자리를 탐했다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보수진영 내에선 “윤여준이 보수진영을 떠난 것은 더 이상 그를 써주기 않았기 때문”이란 얘기가 많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나 박근혜 대통령은 모두 윤여준을 쓸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명박 정부 때 윤여준은 늘 비서실장이나 총리 하마평에 오르곤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윤여준 카드는 늘 당내의 강한 비토에 부딪혀 사라졌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비대위를 꾸릴 때의 일이다. 박 위원장은 측근들에게 ‘윤여준을 비대위원에 임명하면 어떨까’라고 물었다. 돌아온 답들은 완강했다. “김종인은 몰라도 윤여준은 안됩니다.” 결국 윤여준은 이명박 박근혜, 근래 보수의 양대 정권으로부터 낙점 받지 못했다. 한 관계자는 그 이유를 “2000년 총선과 2002년 대선을 거치면서 윤여준에 대한 강한 비토그룹이 보수 내에 형성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윤여준은 2000년 총선 당시 이회창 전 총재의 측근으로 선거를 기획했다. 김윤환, 이기택, 이수성 등 거물급 중진 의원들을 대거 낙천시킨 공천개혁이 그의 작품이다. 한나라당은 그해 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노태우ㆍ김영삼 정권 시절 윤여준을 여러 모로 도왔던 김윤환이 윤여준의 손에 날아갔다는 사실이 부각됐다.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은 자신의 칼럼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이회창은 2000년 총선을 앞두고 자신을 대선후보로 두 차례나 만들어준 김윤환을 전격 낙천시켰다. 그 배경은? 이른바 ‘살생부’의 기획자 중 한 명이 바로 윤여준! 자신의 정치적 대부인 김윤환의 목을 내려친 것. 윤여준은 직접 김윤환의 지역구인 경북 구미에 내려가 딴 후보를 물색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김윤환은 나에게 ‘윤여준이 그 놈아는 내 사람이었는데, 아무리 정치라고 하지만 어떻게…’. 말을 잇지 못했다.”
2000년 이후 윤여준에겐 ‘능력도 능력이지만 의리와는 담을 쌓은 못 믿을 사람’이란 ‘악풀’이 달려버렸다.
“내 인생의 마지막 봉사”
안철수와 윤여준
쓰이지 못하면 보따리를 싸는 것이 유세객의 운명이다. 박근혜와 이명박에게 쓰임을 받지 못한 윤여준은 안철수라는 대안을 발굴해 내며 30여년을 머물러 온 보수 진영을 떠났다. 청춘콘서트를 기획해 안철수를 발굴해내는 그에게서 ‘나를 버린 보수에 복수하겠다’는 의지가 읽혔다는 여권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
진보로 간 윤여준의 행보는 보수에서의 그것보다 훨씬 불안해 보인다.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그는 안철수와 결별했다. 그리고는 2012년 대선에선 민주당 선대위 국민통합추진위원장을 맡아 문재인 후보를 도왔다. 2013년엔 다시 안철수로 돌아왔다. 그 과정에 식언도 잦았다. 신당 창당을 준비하던 윤여준은 안철수가 김한길 민주당 대표와 합치기로 했다는 소식을 기자들과 함께 들어야 했다. 윤여준과 안철수의 관계는 여전히 불안해 보인다. “윤여준이 언제 다시 보따리를 쌀 지 모른다”는 얘기가 적지 않다.
여권 관계자의 얘기다. “보수 진영에선 윤여준의 중도개혁적인 주장만으로도 존재의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민주당이나 안철수 쪽으로 간 윤여준에게는 그 공간이 크지 않을 것이다. 그 쪽으로 간 윤여준의 실패는 예정돼 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윤여준으로선 마지막으로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큰 것 같다. 그러다보니 자꾸 무리수를 두는 것 같다”고 했다.
윤여준은 최근 “(안철수 의원과 함께 하는 것이) 내 인생의 마지막 봉사”라고 말한적이 있다. 올해로 75세이니 허언은 아닌 듯 싶다. 늙은 유세객의 마지막 행보는 과연 어떤 그림을 그리며 끝을 맺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