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장 십팔계와 촉 - 분별심의 발생
지난 시간은 육근과 육입처의 차이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육근은 보고 듣고 생각하는 우리의 삶을 의미합니다. 육입처는 욕탐으로 인해 보는 것을 자아로, 보이는 것을 세계로 생각하게 하는 허망한 생각입니다. 그리고 멸진정은 이러한 육입처를 멸함으로써 육입처에서 비롯된 허망한 사유와 지각을 멸한 경지입니다. 오늘부터는 육입처에서 어떤 허망한 사유와 지각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봅니다.
지난 시간에 보았듯이 육근은 우리의 몸에 붙어 있는 감각기관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면서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하는 인식활동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인식활동은 곧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삶을 잘 관찰해 보면 거기에는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분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본다는 것은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이 따로 존재해서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눈이 있어도 보이는 것이 없다면 볼 수 없습니다. 반대로 보이는 것이 있어도 눈이 없으면 볼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본다는 삶의 현상은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타납니다. 박쥐는 눈이 없습니다. 그래서 박쥐의 삶은 본다는 인식화동이 없습니다. 우리는 박쥐가 보이는 것은 존재하고 있으나 보는 눈이 없으므로 못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는 색은 빛의 파장입니다.
우리는 빛의 파장을 눈을 통해 인식하므로 그것을 색으로 인식합니다. 박쥐는 우리와 다른 인식기관으로 빛의 파장을 인식하는지도 모릅니다. 박쥐는 눈이 없지만 낮에 활동하지 않고 밤에만 활동하는 것을 보면 박쥐가 빛을 전혀 지각하지 못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박쥐는 소리로 사물의 형태를 지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리로 사물의 형태를 지각하지 못합니다. 소리는 공기가 진동하는 현상입니다.
공기의 진동이 우리의 고막을 자극하면 우리는 그것을 소리로 인식할 뿐입니다. 박쥐에게는 우리의 귀가 감지하기 불가능한 초음파의 공기 진동을 감지하는 특수한 기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진동으로 사물의 형태를 지각합니다. 박쥐는 소리로 사물을 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보는 눈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빛으로 사물을 보는 우리의 눈과 달리 소리로 사물을 보는 눈이 박쥐에게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식현상을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이 서로 개별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나타나는 삶의 현상입니다. 이러한 삶의 현상에는 ‘자아와 세계’가 분별될 수 없습니다. 박쥐는 박쥐의 삶은 통해 박쥐의 세계가 나타나고, 사람은 사람의 삶을 통해 사람의 세계가 나타납니다. 우리의 자아와 세계는 이렇게 삶을 통해 나타난 것입니다. 자아가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삶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삶’이 ‘존재’에 선행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삶이 먼저이고 존재는 그 다음에 생긴 것입니다.
불교의 무아나 공은 이것을 의미합니다.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는 [제일의 공경]의 말씀은 삶은 있으나 삶보다 먼저 존재하여 살아가는 존재는 없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업을 지으면 그 과보로서 자아와 세계가 나타난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면, 도둑이 있어서 도둑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둑질을 하면 그 과보로서 도둑이 되고, 그 도둑에게는 도둑의 세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삶을 통해 나타나는 자아와 세계를 없다고 부정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부정하신 것은 삶과 무관하게 존재하고 있는 자아와 세계입니다. 부처님은 삶을 떠나서 자아도 세계도 없기 때문에 그러한 자아와 세계를 문제삼고 있는 외도들의 논쟁을 무의미한 희론에 지나지 않는 사견이라고 비판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자아와 세계는 삶을 통해 나타나는 삶의 과보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그 짓는 업에 따라 반드시 과보를 받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무아설은 이렇게 업보를 부정하는 사상이 아니라 오히려 업보를 인정하는 사상입니다. 우리의 삶은 자아와 세계가 분별될 수 없는 업보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욕탐이 있으며, “보는 것은 나의 눈이고 보이는 것은 외부의 색이며, 듣는 것은 나의 귀이고, 들리는 것은 외부의 소리다”라고 하며 자아와 세계를 분별하는 근원인 십이입처가 집기합니다. 그리고 십이입처가 집기한 마음은, 볼 때 보이는 것을 분별하는 마음이 생기고, 들을 때 들리는 것을 분별하는 마음이 생기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하는 삶을 통해서 모든 것을 분별하는 마음이 생깁니다.이렇게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해서 생기는 분별심을 육식이라고 합니다.
십이입처가 집기해 있는 사람은 육식이 이와 같이 십이입처에서 연기한 허망한 생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몸 안에 있는 식이 눈을 통해 색을 보고, 귀를 통해 소리를 듣는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식을 영혼이라고 부르면서 그것은 죽지 않고 다음 생을 받는 영원한 존재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육체가 죽으면 사라지는 일시적인 존재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도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중아함 [다계경多界經]을 보면, 사티라고 하는 비구는 현재 우리의 몸 속에 있는 식識이 죽어서 다음 세상에 왕생 할 때 변함없이 존재하면서 다음 생을 받는 자아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불교를 공부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다른 비구들은 이같이 주장하는 사티에게 그것을 세존을 비방하는 잘못된 생각이라고 꾸짖었지만 사티는 고집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비구들은 부처님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부처님은 사키를 불러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티는 “나의 세존의 가르침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부처님은 사티에게 그가 식이라고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사티는 “세존께서는 이 식이 지각하고, 업을 짓고, 가르침을 실천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선업과 악업을 지어 그 과보를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부처님은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너는 누구에게 그런 말을 듣고서 나에게 들었다고 하느냐면서 크게 꾸짓고, 다음고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식은 인연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고 이야기했다. 식은 인연이 있으면 생기고, 인연이 없어지면 멸하므로, 식은 연이 되는 것에 따라서 생긴다고 이야기했다. 안과 색을 연하여 식이 생기는데, 식이 생기면 그것을 안식이라고 말했다. 이.비.설.신.의도 마찬가지여서, 의와 법을 연하여 식이 생기는데, 식이 생기면 나는 그것을 의식이라고 말했다. 비유하면 불은 연이 되는 것에 따라서 생기는데 그 연이 나무를 연하여 생각 불이면 나무불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사티가 불멸의 자아라고 생각한 식을 부처님은 이렇게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해서 생긴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입처를 연으로 해서 생긴것이므로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라고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식은 십이입처가 있을 때 우리의 마음에 발생하는 의식현상이지 눈. 귀. 코. 혀 등을 통해 외부의 사물을 인식하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각각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라고 부르고 이것을 육식이라고 합니다. 멸진정에서 멸한다고 하는 지각과 사유는 이렇게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해서 생기는 육식과 같은 허망한 인식입니다. [반야심경]에서 공 가운데는 안식 내지 의식계가 없다고 할 때에도 이렇게 십이입처에서 생긴 허망한 육식이 없다는 것이지 육근의 인식작용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중생들은 이렇게 허망하게 생멸하는 무상한 것들을 마음에 모아놓고 있습니다.
이것을 마음에 모아놓는 것이 욕탐입니다. 욕탐이 있을 때 십이입처가 집기하고,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생긴 허망한 분별심을 다시 욕탐이 취하여 자아와 세계를 제멋대로 꾸미는 것입니다. 따라서 욕탐에 따라 중생들은 각기 다른 자아와 세계를 갖게 됩니다. 이렇게 욕탐에 의해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일어난 분별심으로 자아와 세계를 꾸며놓고서 이 자아가 세계에 태어나서 죽어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멸진정에서 소멸한다고 하는 상과 지(즉 사유와 지각)는 이와 같이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해서 생기는 허망한 분별심, 즉 식입니다. 식은 범어로 vijnana인데 ‘분별한다’는 의미의 동사 vijna에서 파생된 명사입니다. 나와 세계를 분별하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별하고, 사랑과 미움을 분별하는 모든 분별이 식입니다. 불교는 이것을 없애도록 합니다. 그래서 선종의 제4조가 되는 도신 선사는 [신심명]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지극한 도에 어려움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분별하여 선택하는 일을 피해야 한다.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대낮처럼 뚜렷하게 드러나리라. 밖에 있는 인연을 좇지도 말고 안에 있는 허망한 것 속에 머물지도 말라 사물과 하나되어 평안한 마음을 지니면 밖의 인연과 안의 망상이 저절로 사라지리라. 보이는 대상은 보는 주관으로 말미암아 보이고, 보는 주관은 보이는 대상으로 말미암아 보나니 보이는 놈과 보는 놈을 알고 보면 원래 이들이 하나이며 공이니라.
지금까지 설명한 것을 도신 선사는 이렇게 아주 간단하고 명쾌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부처님의 말씀과 선사의 말씀은 감발의 차이도 없습니다. 선을 하시는 분들이 교를 비난하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이는 그 근본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우리는 허망한 분별을 떠나기 위해 불교를 공부한다고 명심해야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렇게 허망한 육식이 분별을 떠난 인식과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봅니다.(계속)
첫댓글 윗글에 의하면.. 12연기법의 식은.. 이미 (12처가 집기한) 식이 되겠군요?
"업보는 있으나(윤회) 작자는 없다(무아)"... 저도 언젠가.. 이 가르침을 기반으로 윤회와 무아애 대한 논(문)을 쓴 적이 있는데...^^
이해하신 본질의 뜻이 다르네요 업보는 있으나 (고통은 있으나) 작자는 없다( 고통을 자아낸자가 없다고 아는것) 반대로 업보가 없으면 작자는 무아이다 라고 알고 있는데요 경전의 뜻은 밑바탕의 본질을 이해하고 알아들어야 하는걸요 그래서 해석하시는 분들의 기준도 얼마나 실증을 근거로 쓰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더이다
그렇다면.. 자운행님 말은.. "업보(고통)는 있으나 또는 없어도 작자는 없다(무아이다)" 라고 하는 말처럼 보이는데요?
윤회에서 보면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 (고통이 생겼는데 내가 한것이 아니라고 부정한것)작자는 없다 무아에서 보면 업보는 있으나 (지은것을 소멸함) 작자는 무아이다 라는 것이지요 윤회는 고통이 있고 무아는 고통이 없자나요 이언덕은 고통이 있고 저 언덕 무아는 고통이 없는 것인데 지금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는 전자의 경우를 뜻하여 설법한 것입니다
ㅎㅎㅎ^^()...
잘 보았습니다 그런데 " 업보가 없으면 작자는 무아 이다 " 는 말이 이상합니다 업보는 항상 존재하는것 입니다 작자가 무아이지 업보는 없을수 없습니다 항상 밝은 미소 보내며
십이 연기법에서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면 식이 멸하고 에서 이것이 멸하면 업보는 없겠지요 무아일때는 업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원망도 미움도 갈등도 없는 마음이 되였기에 오는것 거절말고 가는것 맞지 않아 오는이 가는이 인연의 도리에 따라 열반으로 가는 길로 중생을 인도합니다 그것뿐 아무것도 없는 공심의 세게에서 유유적적 하니 업보가 없다고 말합니다 말을 따라가면 이상하고 뜻을 해료하면 이해가 되는 것이 의근과 법경이지요 ..합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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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좋은 글 잘 담아갑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