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보의 시세계에 나타난 광기의 양상
광기(folie)`라는 개념이 랭보의 시세계에서 어떤 양상을 보이며 나타나는지를 주된 랭보의 시집인 『지옥에서의 한철』에서
고찰하였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광기는 정신병의 일종으로 간주해서 그 현상을 주로 정신 분석학이나 심리학 등의
관점에서 접근하곤 했는데, 이런 일반적인 접근 방식과는 달리 일단의 작가들에게 있어서 광기는 정신병이나 심리적 이상
현상만이 아닌, 의식적인 광기의 양상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예술 세계의 창조적 원천이 된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들의 예술적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일반적 가치관이나 이성(raison)으로는 성취할 수 없을 때, 오히려
이성의 의도적인 반작용으로 다양한 광기의 모습을 작품 속에 드러냄으로써 작가 고유의 정신 세계와 예술 세계를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광기는 바로 이성과 깊은 관련을 지니고 있다.
플라톤은 크게 네 가지로 광기 또는 착란의 형태를 나누고 있다.
≪선견적 광기≫, ≪신비적 광기≫, ≪시적 광기≫ 그리고 ≪사랑적 광기≫가 그것인데, 랭보에게서는 이 네 가지 중 뒤의
두 가지가 그의 작품에서 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지옥에서의 한철』 시집에서 랭보는 `광기`, `죽음`, `착란`, `파괴` 등의 시어를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그때까지
자신이 추구해온 시적 경향을 다시 고찰하고 반성하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랭보의 정신적 그리고 예술적 상태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주된 시어들이다.
「견자의 편지」,에 나오는 `나는 타자이다(Je est un Autre)`라는 명구를 통해 랭보는 데카르트적 사유 체계를 부정하며 주체의
다양성과 상대성을 강조한다. 이런 랭보적 코기토(Cogito)를 바탕으로 「착란 I,「착란 II」등의 시에서는 기존의 시적 경향을 부정
하고 랭보 고유의 환상적이고 착란적인 시 세계를 보여 주고 있는데, 이런 과정에서 랭보는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분열적 경향
과 고찰을 드러낸다. 이런 내적 갈등의 양상이 바로 광기나 착란적 이미지로 빈번히 그의 시 세계에 등장하고, 또 새로운 시 세계를 끊임없이 추구하려는 시인의 예술적 갈등과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기도 한다. 따라서, 랭보에게 있어 광기는 단순한 심리
적 이상이 아니라, 시적 창조를 위한 존재 자체의 위기 의식을 보여주는 시적 방편으로 간주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랭보의 시
세계에서 광기라는 개념은 정신병이나 심리적 이상 형상이 아닌,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시적 과정이며, 이를 하나의 `의사 광기
(folie simule′e)` 또는 `놀이적 광기(folie-jeu)`로 보면서, 랭보가 부단히 추구하는 새로운 시적 세계에 대한 열망의 관점에서 이해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