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란 천국에 속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이 마당히 가져야 할 정체성을 가지고 그 정체성으로 세상에서 이기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하늘의 천국을 이 땅에서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국을 이 땅에서 누리지 못하면서 이 세상을 이긴다는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세상을 이길 수있는 비결의 마지막 단계는 이 세상에서의 천국 누림이다.
천국의 부유함을 누리자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특권으로는 천국의 부요함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있는 동안에는 일시적이며 불완전한 천국 누림이 될 것이다. 그래도 일시적일 지라도 천국의 부요함을 완전하게 누릴 수 있어야 이 땅의 부요함의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천국의 부요함이란 구체적으로 어떤것을 말하는 것인가? 이에 대해 천국에서 우리가 누려야 할 부요함의 완전함에 대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도요한의 증언을 들을 수 있다.(계21;3-4) 그 부요의 나라는 완벽, 완전 그리고 풍부함에 부요하기 짝이 없는 나라이다. 생명수가 흐르고 생명나무가 자라며 질병이 없고 저주가 없고 세상에서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다툼등에 의한 불미스러운 일 그리고 서로의 아픔 상처도 전혀 없는 곳이다. 삶에 필요한 에너지가 하나님이 되어주시므로 별도로 필요하지도 않고 구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모든것이 하나님 한 분으로 갖추어져있는 완벽한 미래의 나라이다.(계22;1-5)
위의 사도요한의 증언을 들어보았을때 천국의 부요를 누린다는 개념은 이 세상에서의 물질, 권세, 명예와는 전혀 무관한 사실임을 말해주고 있다. 천국의 부요함은 곧 영적, 심령적인 부요라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 처럼 신령한 부활체가 되지 않고는 천국의 부요를 전혀 누릴 수가 없다. 이는 곧 우리가 믿음으로 변화되어야 함을 뜻하는 것이고 그러기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연합하지 않으면 안돼는 것임을 뜻하는 것이다.(고후8:9)
그리스도의 부요를 누리자
우리가 천국의 부요를 맛볼 수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충만하게 해주신 온갖 종류의 부요를 지상에서 경험함으로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천국을 잘 아시는 분이시며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이 땅에서 천국을 완벽하게 누리신 분이였다.
그 보다 앞서 예수님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신 분이시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고 그러기에 하늘의 모든것을 알고계신 분이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요하심은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주인이신 하나님의 부요하심인 것이다. 이에 우리는 우리의 삶의 주관자되시는 그리스도께 온전히 맡기는 삶이 되어야한다. 그렇치 못하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요함을 누릴 수 없다.(요10:29)
그리스도의 충만한 사랑은 굶주리는 자, 소외된 자, 옥에 갇힌 자, 죄 지은 자, 상처 입고 힘들어 하는 자들 모두를 감싸 수 있을 만큼 무안하다.(엡3:18-19) 우리가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누리려면 그리스도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부요하심을 누리는 방법은 사도바울의 고백대로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파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의 부요하심을 실제적으로 누려야한다. 그것이 감동이 되고 기쁨이 넘쳐나 그 누군가에게 전달하지 않으면 답답할 정도가 되어야 할것이며 이것을 전할때(엡3:8) *이것이 곧 나의 간증이 되는것이다.
풍성한 은혜를 누리자
그리스도인의 내적인 특징중 가장 핵심적인것은 우리가 받은 은혜이다. 은혜란 보상이 아니며 아무것도 한 일 없이 받는 대가 없는 선물이다. 이 은혜는 절대적으로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죄와 관련된 은혜이다. 이것은 사함받는 것이며 우리가 받은 은혜의 규모와 풍성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며(엡1:7) 지극히 풍성한 은혜이며 죄 사함 곧 구원의 은혜이다(엡2:7)이것은 곧 십자가의 은혜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십자가의 은헤를 누리는 사람들이어야한다. 날마다 십자가에서 죽으며 오직 자랑할 유일한 것은 십자가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사도바울이다.(갈6:14) *오늘 주일예배 가운데 말씀으로 사도바울의 존재를 나타내는 말씀이 떠오른다(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풍성한 은혜의 누림의 삶은 십자가의 은혜속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은혜인 동시에 능력이다. 하나님의 능력 말씀의 능력을 의지하는것은 곧 십자가를 누리는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의 고난을 누릴 수 있는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방법이다. (*오늘 주일예배 말씀중 예수의 길: 고난→죽음→부활)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림으로써 그 능력으로 세상을 능히 넉넉히 이길 수 있는것이다.
지혜의 부요를 누리자
우리는 하나님의 도 다른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다.십자가의 은혜도 마귀에게 승리하기위한 하나님의 깊고 풍성한 지혜의 산물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과 세상을 이기기 위해서는 굳건한 믿음이 필요하다. 끝까지 참고 견뎌내는 인내가 필요하다. 이에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따른다. 세상을 이길 수 있게 하시는것도 하나님의 지혜이며 하나님의 지혜안에 거할때 가장 강한 모습을 보인다. 우리가 지혜를 의지하기 위해 하나님께 구하면 그것으로 지혜를 누리는 것이된다. 하나님의 지혜의 부요하심은 말씀의 풍성함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말씀을 가까히 하고 더 나아가서 실 생활에 적응하며 실천할때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하게 거하는 것이다.(골3:16) 또한 성령님께서 각자에게 주시는 각종 은사도 하나님의 지혜의 부요함을 누릴 수 있는 길이된다. 은사는 교회가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위하여 각자에게 주시는 것이다. 이 은사는 전적으로 교회를 유익하게 하라고 주신것이며 개인이 세상을 이기게 해주는 지혜가 된다. 은사를 통하여 교회와 성도를 유익하게 할 뿐 아니라 그 은사를 통하여 마귀의 모든 궤계를 이겨낸다면 그것은 바로 지혜의 부요를 누리는 것이 되는 것이다.(고전1:7)
삶의 부요를 누리자
부요함의 실질적인 누림을 위해서는 실제 신앙 생활에서의 누림이 가능해져야한다. 현실속에서의 누림이 될때 그 누림은 진정한 누림이 되는것이다. 이는 곧 그리스도인의 승리를 말하는것이다. 세상적인 부요함의 누림이 아닌 그리스도인에게 적합한 소유의 부요함의 누림을 말한자. 반면 그리스도인의 누림은 부족함이 없어야한다. 이는 부족함이 없는 부요를 넘어서 무엇인가를 더 얹으려고 할때 진정한 누림의 의미가 퇴색될 수 있기 때문이다.(시23:1, 시34:9-10)
하나님은 필요에 따라 양을 정하셔서 부어주신다. 중요한것은 하나님의 부요를 누리려면 모든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어야 한다.
따라서 그 부요를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버리는 습관을 가져야한다. 이는 세속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하나님의 부요는 전혀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딤전6:17)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신 예수님께는 모든것이 풍성하게 채워져있다. 그래서 당연히 우리도 그리스도의 누리심을 따라 하늘의 부요를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란 하늘의 것을 이 땅에서 누리는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먼저 우리가 누려야 할 것이 바로 하늘의 풍성함이요 부요함이다. 건강한 정체성의 그리스도인은 미래의 하늘나라에서 사는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이미 하늘나라를 사는 사람들이다. *이는 하늘의 소망 그리고 그 믿음이 확고할때 생기는 삶이라 생각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요한 삶의 기쁨과 감동이 주체 할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나서 주변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삶의 간증이 있기를 간절히 원한다.
*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나 부터 올바른 정체성으로 바로 서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