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세기초 신라 조분왕 때 이찬(伊飡) 우로(于老)를 대장군으로 임명해서 공격을 가해 멸망시켰다. 이 지역은 신라가 소백산맥 이북으로 진출하는 데 전략적으로 중요하여 557년(진흥왕 18) 군주(軍主)를 파견한 적이 있고, 661년(문무왕 1)에 감문군(甘文郡)이 되었다가 경덕왕 때에 개령군으로 고쳤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조선 중기의 개령현(開寧縣)에는 감문산(甘文山)이 있고, 고적조(古跡條)에 궁궐 옛터와 함께 감문국 금효왕(金孝王)의 것이라 전하는 금효왕릉, 감문국 장부인(獐夫人)의 것이라 전하는 장릉이 있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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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하우한국사의 시대구분
작성자: 용지니요 (레벨6) 추천: 0 조회: 254 등록일: 06.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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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대구분의 극복과제
서-1 서구중심적 단선론
사적유물론에 기초해서 한국경제사를 파악할 경우 봉착하는 가장 큰 문제는 서구중심적 단선론이다. 단선적Unilinear 역사 인식은 모든 민족의 역사가 단일한 과정을 거쳐 발전한다고 보기 때문에, 각 민족이 처한 역사적 현실의 차이는 진화 단계의 선후(先後) 관계로 서열화된다. 사회적 진화론과 인종 차별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단선적 역사인식은 서구자본주의의 세계 침략을 합리화하는 논리적 도구로 이용되어 왔다. 마르크스가 영국의 인도 지배를 정당화한 것이라든지, 일본의 관변 사학자들이 일제의 조선 지배를 뒷받침하기 위해 조선의 역사적 낙후성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킨 것들의 배후에는 단선론의 독선적인 역사의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단선론이 갖는 독선적 성격은 서구중심주의Western-centrism와 결합함으로써 더욱 강화된다. 서유럽 세계는 인류 진화과정의 최정점에 도달해 있으며, 여기에 이르지 못한 비서구 여러 국가는 서구사회가 이미 경과한 과거의 어느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단선론을 내장한 서구중심주의이다. 따라서 비서구 사회의 역사적 과제는, 제국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서구의 지도와 보호 하에, 서구가 밟아온 역사적 노정을 따라서 서구의 현재 단계로 이행해 가는 것으로 된다. 또한 비서구 사회의 역사에 대한 연구는 비서구 사회가 서구의 과거 어느 단계에 해당되는가, 비서구 사회의 진화가 지체된 원인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식민사관에 입각해서 최초로 한국사의 시대구분을 시도한 일본의 후쿠다(福田德三)는 독일 람프리히트(K. Lampreht)의 발전모형인 '상징시대-모형시대-가설시대-개인시대-주관시대'의 단계설을 한국사에 적용하면서 1904년 당시의 조선은 모형시대에서 방황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조선의 역사가 이처럼 원시사회를 갓 벗어난 미개 상태에 처하게 된 원인을 봉건제의 결여에서 찾았다. 마르크스가 제시한 아시아적 생산양식Asiatic mode of production 개념을 둘러싸고 전개된 논쟁에서도 논쟁의 중심은 AMP 단계가 서구의 노예에 해당되느냐, 혹은 봉건제에 해당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또한 아시아가 장구한 기간 동안 AMP 단계에 머무르게 된 원인으로는 마르크스의 아시아적 정체성이론, 아시아적 전제주의론 등이 널리 인용되었다. 일본 내 사회주의 계열의 역사학자들 중에서도 아끼쟈와(秋澤修三)같은 사람은 마르크스의 정체론에 기초하여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합리화하기도 했다.
스탈린이 정식화한 5단계설은 AMP 개념을 폐기하고 인류사의 발전과정을 '원시사회-노예제사회-봉건제사회-자본제사회-사회주의' 단계로 설정함으로써 서구와 비서구의 역사적 우열관계를 부분적으로는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5단계설이야말로 단선적 역사 인식의 결정판으로서 마르크스조차 주저했던 '모든 민족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일반적 발전 경로(the general path of development prescribed fate to all nations)'를 확정하는 교조적 조치였다. 사적유물론에 기초한 역사 연구에서는 시대구분에 대한 논쟁조차 소멸되어 버렸다. 북한사학은 이른바 '주체사관'을 표방하는 지금까지도 한국사의 발전과정을 5단계론에 기초하여 서술하고 있다.
한국사에서 서구중심주의의 극복은 한국사회가 서구사회와 동일한 과정을 동일한 속도로 밟아 왔다는 것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선론 자체를 폐기하고 한국사의 독자적 발전을 인정할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2. 한국사 시대구분의 실제
서-2 일제시대의 시대구분
한국 역사에 대한 근대적 서술은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역사연구는 직간접적으로 일본의 조선 지배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조선사의 정체성은 합의된 전제였고, 이 전제를 기초로 자력에 의한 근대화가 무망(無望)하다는 식민사관(植民史觀)이 관변 학자들을 중심으로 폭넓게 형성되었다. 조선사에 봉건제 단계가 결여되었다는 후꾸타의 언급은 와타(和田一郞)에 의한 사적 토지소유제도 결여론, 모리타니(森谷克己)의 노예제 및 봉건제 결여론으로 이어졌다.
식민사관에 대한 비판은 주로 사적유물론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백남운(白南雲)은 1933년 [조선사회경제사]에서 "한 민족의 발전사는 그 과정이 어찌하여 아시아적이라 하더라도 사회구성 내면의 법칙 그 자체는 완전히 세계사적인 것"(1933, 20쪽)이라는 인식 아래 스탈린의 발전 도식을 한국사에 적용하여 '원시씨족사회-원시부족국가(고조선, 삼한)-노예국가(삼국시대)-동양적 봉건국가(통일신라, 고려, 조선)-이식자본주의(일제하)'라는 시대구분을 제시했다. 백남운은 한국사의 발전 과정을 일본은 물론 서구사회와 동일하게 파악함으로써 식민사관과 정면으로 대립한 것이다. 이청원(李淸源) 역시 1937년 [조선역사 독본]에서 같은 방법으로 '원시사회(신석기, 고조선, 부여, 삼한)-노예사회(삼국-고려)-봉건사회(조선)-자본주의 침략기(병자수호조약 이후)-이식자본주의(일제하)'의 단계설을 제시했다. 백남운의 기계론적 시대구분에 반대해 온 전석담(全錫淡)은 1948년 [조선사 교정]에서 한국사를 '원시조선-봉건조선-이식자본제'의 3단계로 구분했다. 그는 봉건조선을 '고대 아시아적 국가(삼국시대)-관료적 집권봉건제의 성립(통일신라)-同발전(고려)-同완성(조선-대원군)-同몰락(대원군 이후)'의 제 단계로 세분하고 있다.
서-3 남한 역사학계의 시대구분
해방 이후 남한의 역사학계는 실증적 연구가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에 시대구분에 대한 논의는 활발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경제사학계를 중심으로 5단계설과 관련된 여러 수준의 논쟁이 산발적으로 전개되었을 뿐이다. 60년대 이후의 가장 큰 쟁점은 고대와 중세를 구분하는 문제였다. 사회인류학적인 관점에 선 역사학자들은 주로 혈연관계를 중심으로 고조선에서 후기신라까지를 고대사회로, 고려와 조선을 중세로 구분했다. 이에 대해 사회경제적 관점의 학자들은 잉여수취방식을 중심으로(가령, 강진철, 고려토지제도사 연구, 1980) 삼국시대에서 고려전기까지를 노예제사회로, 고려중기 이후에서 조선시대를 봉건제사회로 구분하기도 하고, 토지소유제도 및 토지소유자와 직접생산자 간의 관계를 기준으로(가령, 김용섭, 한국사연구입문所收, 1983) 삼국시대를 노예제사회로, 후기신라 이후를 봉건제사회로 구분한다. 경제사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스탈린의 5단계설을 채용하고 있으나 구체적 시대구분에 대해서는 합의를 도출하지 못한 상태다. 대체로 '원시사회-고대사회(고조선-삼국)-중세사회(후기신라-조선)-근대사회(개항이후)'의 구분이 통용되고 있다.
서-4 북한사학의 시대구분
북한사학은 1962년에 간행된 [조선통사]를 계기로 이른바 '주체사관'을 확립하여 1977년의 [조선통사]와 1979년에 간행된 [조선전사(33권)]에서는 주체사관에 의한 시대구분을 제시했다. 주체사관은 (1) 역사는 인간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 과정이며 그 과정은 자연개조투쟁, 계급투쟁, 반침략투쟁, 인간개조투쟁으로 구성된다. (2) 역사의 주체는 근로인민대중이다. (3) 역사의 원동력은 자주성을 옹호하기 위한 근로인민대중의 투쟁이다, 라는 내용을 그 골자로 한다. 그리고 주체사관에 따른 시대구분은 스탈린의 5단계론을 기초로 '원시사회(고조선 이전)-고대노예제사회(고조선, 부여, 진국)-중세봉건제사회(삼국시대-조선시대)-근대사회(1860년대-1926년)-현대사회(1926년 'ㅌㄷ동맹' 결성이후)'로 제시된다.
원시사회는 다시 원시무리시기(전기-중기구석기, 60만년-10만년전), 초기 모계씨족사회(후기구석기-중석기, BC 4만년-BC 6천년전), 발전된 모계씨족사회(신석기, BC 5천년-BC 2천년), 부계씨족사회(청동기-초기 철기, BC 2천년- BC 6세기)로 세분된다.
고대노예제사회는 BC 2천경 이후 청동기 사용이 점차 확대되어 가축사용과 수공업의 발전 등 농업생산력이 증대하고 가부장적 가족 단위로 잉여생산물의 사적 축적이 가능해진 것을 성립 배경으로 한다. 이 과정에서 몰락한 공동체 성원과 전쟁을 통해 획득한 대규모 포로를 바탕으로 노예제 국가가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고조선은 늦어도 BC8-7세기 이전, 부여는 BC5세기 이전에 성립했고 진국은 BC4세기 이전에 성립한 것으로 보고 있다.
봉건사회는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의 약 2천년간 지속된다. BC 3-1세기경 철기의 광범한 보급이 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오고 이를 바탕으로 제후 국가들이 중앙권력으로부터 분리 독립함으로써 고대국가는 붕괴한다. 독립한 제후 국가들은 봉건국가를 창출하는 과정에서 정복지역의 주민을 외거노비 형태로 만들어 현물 및 노동지대를 부과하는 등 봉건적 관계를 발전시킨다. 서구 봉건제와의 차이점은 중앙집권적 권력구조, 영주소유제가 아닌 지주소유제, 노동지대로 매개되는 영주와 농노의 관계보다는 생산물지대 위주의 '지주↔소작인' 관계가 계급대립의 기본 축으로 되었다는 점등이다.
김일성이 1926년 화성의숙에서 결성했다는 'ㅌㄷ동맹'을 현대사회의 기점으로 설정하는 것은 주체사학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선진콤플렉스와 과잉주체로 구성된 주체사학은 한국사의 많은 부분을 왜곡하고 있다.
서-5 본 강의의 시대구분
본 강의는 자본제 이전 단계의 한국사를 '원시사회-공납제사회(소국-삼국시대)-국가봉건제사회(후기신라-조선)'로 설정한다. 이러한 시대구분은 물론 자본주의에 도달하는 경로는 모든 민족에게 다양하게 열려 있다는 복선론(Multi-linear)에 기초하고 있다.
제1장 공납제사회
1. 공납제의 기초이론
1-1 공납제의 개념
공납제는 농업공동체 단계의 계급분화 공동체 정복과정을 통해 수립된 공동체 지배를 기반으로 공동체 수장 및 정복국가가 경작권자인 공납농민으로부터 잉여생산과 잉여노동을 공납의 형태로 수취하는 체제이다.
1-2 공납적 수취의 이중구조
공납적 수취관계는 공납국가-공동체, 공동체수장-공동체구성원 사이에 2중적으로 설정된다. 이같은 2중성은 공납국가가 공동체(=공동체수장)를 통해서 공동체구성원을 지배하는 고대국가의 지배방식에 조응하는 것이다. 정복국가가 공동체를 해체하지 않고 온존시키는 것은 정복국가의 지배 및 수취기구가 발달하지 않았고, 피정복공동체의 혈연적 유대 또한 강하게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복국가로서는 공동체수장의 공동체 지배를 인정하고 수장에게 공납 부담의 책임을 지우는 이외의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체로 정복에는 세가지 경우가 가능하다. 정복민족이 피정복민족에게 자신의 생산양식을 따르도록 강요하든가(자본제), 아니면 종래의 생산양식을 그대로 존속시키고 공납으로 만족하든가(예를 들어 터어키에서의 로마인), 아니면 상호작용이 시작되어 그것에 의해 하나의 새로운 것, 하나의 총합이 이루어지든가(부분적으로는 게르만인의 정복)이다."
그러나 국가의 공동체에 대한 지배방식으로 성립한 공납적 수취는 국가의 지배기구가 발달함에 따라 소국 공동체 등의 중간 매개 과정을 차례로 위축시키고, 공동체 성원과 직접 대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공납제를 단순한 지배방식으로 파악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동체 내에서 수장과 구성원 사이에 설정되는 공납관계는 농업공동체 단계에서의 계급분화의 결과이다. 공동체 내부에서 성장한 수장계급들은 공동체 기능이 확대 강화되는 과정에서 '공동체 그 자체'로 現身하고, 공동체에 대한 구성원들의 납부도 수장에 대한 납부로 전화하게 된 것이다. 공동체 성원들에 대한 수장의 지배권은 정복을 당한 이후에도 부분적으로 존속한다.
1-3 공납제의 사회구성
공납제 단계에서는 국가와 공납농민 간의 대립구도가 전면적으로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기본적인 계급대립 역시 국가-공납농민, 수장-공납농민이라는 복합적인 형태를 취한다. 후자의 대립관계는 공납제의 초기 단계와 정복을 통하지 않고 국가에 복속(服屬)된 경우에 주로 나타난다. 국가 영역에서는 지배기구가 발전함에 따라 국왕과 중앙귀족, 그리고 중앙관료들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형성된다.
이처럼 공납제사회의 계급분화는 후기읍락 단계의 계급분화 양태를 토대로 그 상부에 국가기구, 즉 군주와 중앙귀족 및 관료계급이 설치되는 것을 기본골격으로 한다. 그러나 후기읍락에서는 '수장-구성원'의 대립을 기본 축으로 '호민-하호'의 대립이 부차적으로 형성되었으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공납국가에서는 '국가-공납농민', '수장-구성원'의 대립을 기본 축으로 '호민-하호', '귀족-노예'의 부차적 대립이 보다 적극적이고 다양하게 형성된다.
국가와 대립하는 공납농민은 수장을 통해 국가에 예속된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점유권을 보유한 자영농민을 주축으로 호민과 하호를 모두 포함한다. 공동체 망실자로서의 노예는 공납농민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부차적 관계인 '호민-하호'의 대립이 보다 활성화되는 것은 수장 권력의 약화 및 토지점유권의 강화와 직접 관련되어 있으며, '귀족-노예'의 대립은 전쟁노예의 증가로 설명될 수 있다.
1-4 토지에 대한 권리의 중첩
공납국가의 지배 하에서 전국의 토지는 원칙적으로 국가가 소유권을 갖는다. 토지국유제는 정복국가가 피정복공동체를 존속시키는 대가, 즉 국가의 공동체 지배를 근거로 한다. 국가는 공동체 수장들의 토지에 대한 권한을 약화시켜 토지처분권을 행사하고 토지소유권에 기초한 공납 징수권을 행사한다.
국가가 공동체를 파괴하지 않은 상황에서 수장은 여전히 공동체를 지배하고 대표한다. 그러나 토지처분권을 상실한 수장은 국가에 대해 토지의 하급소유권자로서 국가에 대한 공납 부담의 책임자로 그 지위가 하락한다. 그때까지 공동체 구성원에 대해 행사해 온 수장의 상급소유권은 국가를 대리하여 공납을 징수하는 권한으로 축소된다. 그러나 공납국가 하에서도 공동체 수장과 소국 주수(主帥)는 공납의 일부를 분취(分取)한다.
토지에 대한 공동체 구성원의 권한, 즉 토지경작권(=하급소유권)은 국가의 보호 아래 보다 강화된다. 이는 국가가 재정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공동체 구성원들에 대한 수장의 직접적인 지배를 위축시키고 공납농민들의 지위를 강화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토지경영에 있어서도 공납농민의 자율성이 향상된다.
1-5 참고 : 공납제의 이론적 문제
공납제를 하나의 사회구성으로, 즉 역사의 한 발전 단계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공납제는 외부적 지배체제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1-2에서 인용한 마르크스의 '정복에는 세 가지가 있다...'는 언급을 근거로 공납제는 고대 정복국가의 보편적인 지배방식일 뿐이며, 이 경우 사회구성의 성격은 정복 및 피정복 국가의 내부적 구성에 달려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내부 구성은 '노예제 또는 농노제이거나 그 아시아적 변형인 국가노예제 또는 국가농노제여야 한다'(가령, 나까무라中村哲)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언급을 논거로 삼는다면 "노예관계, 농노관계 및 공납관계 하에서는 노예소유자, 봉건영주 및 공납수령국가가 생산물의 소유자이고 따라서 생산물의 판매자이기도 하다"는 자본론 2권, 4편 20장의 언급은 공납제를 적대적 계급관계, 독립적인 생산양식으로 인정하는 더욱 확실한 근거가 될 수 있다.
정복국가 및 피정복 공동체의 내부구성이 관건이라는 주장은 정당하다. 그러나 그 내부구성이 노예제나 농노제 되어야 한다는 것은 사실과는 다른 교조적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아시아적 공동체의 직접생산자는 노예나 농노와는 그 성격을 전혀 달리 하는 공납농민이었다. 이 공납농민을 노예의 범주 속에 포함시키려는 노력은 가령 '토지점유 노예'(中村)와 같은 기괴한 개념을 도출케 한다.
공납제는 외부적 착취양식으로서는 보편적일 수 있으나, 생산양식으로서는 농업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지역에서만 발생하는 '아시아적 특수성'이다. 그리고 국가는 공납농민에 대한 지배권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공동체 내부의 공납제와의 결합을 심화함으로써 점진적으로 그 외부성을 제거해 나간다. 그 결과 공납제는 국가와 공동체를 포괄하는 고대아시아사회의 대표적인 재생산체제로 확립되는 것이다.
2. 전기 공납제사회의 전개과정
본 강의에서는 농업공동체로서의 읍락(邑落)에 수장계급이 대두하는 후기읍락 단계에서 경제연합적 小國 단계(BC7세기-BC1세기)를 전기 공납제사회로 분류한다.
남한 역사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삼국의 성립 이전을 원시사회로 설정하고 특히 삼한소국사회는 군장사회(君長社會, Chiefdom society)로 분류하는 경우가 많다. 진국과 삼한을 모두 국명으로 인정하는 북한사학은 삼한사회를 고조선, 부여 등과 함께 고대노예소유자사회로 구분한다.
(1) 전기Ⅰ: 후기읍락 단계
1-6 분묘형태와 후기읍락의 유형
한국사에서 후기읍락의 존재는 수장의 무덤으로 간주되는 지석묘를 통해 확인된다.한반도 전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이 지석묘系의 후기읍락은 전기읍락에서 토착적으로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기원전3세기경부터 마한지역을 중심으로 삼한 전 지역에서 지석묘를 대신하는 석관묘系, 변한지역에서 기원전 2세기경부터석관묘와 교대하는 옹관묘系, 그리고 진한 지역에서는 기원전 1세기경부터 석관묘를, 변한지역에서는 옹관묘의 뒤를 이어 나타나는 토광모系 들의 후기읍락은 이주세력의 읍락으로 간주된다.
1-7 토착적 후기읍락
인류사회에 최초로 성립하는 정치권력은 거석문화(巨石文化)로 표상된다. 특히 지석묘는 그 축조과정이나 부장품의 내용으로 볼 때 일정 규모의 정치체를 지배하는 자의 무덤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지석묘를 축조하기 위해서는 평균 10톤에 이르는 상석(上石)을 운반하는데 70-100명의 인력을 동원했어야 했다는 점에서 지석묘의 등장은 곧 세습적 권력의 대두를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기원전 7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에 걸쳐 지석묘를 축조한 읍락들은 한반도에서 전기읍락 단계를 경과했을 것으로 간주된다. 이들의 지석묘에서는 마제석검과 무문토기, 그리고 소량의 요녕식 청동기 유물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러한 유물들은 수장의 권력을 과시하는 권위재(Prestiage goods)로서 교역을 통해 입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일반적으로 후기읍락은 청동기문명이 본격화되기 이전에 성립하기 때문이다. 이 무문토기인들은 그 이전 단계의 한반도 원주민을 구축하고 들어선 우리 민족의 직계 조상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1-8 이주계 후기읍락
후기 읍락 단계의 북방종족이 읍락 단위로 삼한지역으로 이주해 온 사실은 기록으로 확인된다.
고조선계 ; 準王이 도망하여 韓地에 거하면서 스스로 韓王이라 하였다 (삼국지
衛滿조선계 ; 조선유민이 산간에 분거하면서 六村을 이루었다 (삼국사기)
부여계 ; 백제의 경우(삼국사기등)
중국계 ; 秦役을 피해 韓國으로 오자 마한이 동쪽 땅을 떼 주었다 (삼국지)
이주읍락들의 삼한지역 진출은 주로 북방지역 국가들의 정치적 변동에 따른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진한(秦漢) 교체의 정치적 격동기를 맞아 중국 동북지역의 조(趙) 연(燕) 제(齊) 주민들의 집단적 이주가 발생했고, 한반도 북부지역에서는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멸망이 유민들의 파상적인 남하를 가져온 것이었다. 이들은 토착읍락과는 달리 청동기나 철기 문명을 동반하고 있었다.
1-6 그림의 마한지역 석관묘계 읍락은 청동기를 직접 생산하여 사용한 흔적을 보이고 있다. 기원전 3세기 이전의 이 지역 지석묘에서는 요녕식 동검 등이 소량 출토되는데 비해 기원전 3세기 이후 기원 1세기까지의 석관묘에서는 고조선계 細形동검 등이 다량 출토되고 있다. 또 경기도 용인, 전남 영암 등지에서 발굴되어 각종 청동기 鎔范(=거푸집, 鑄型)은 이들의 청동기 제작을 뒷받침해 준다.
토광묘계가 이주한 진한지역에서도 기원전 2세기말에서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하여 출토유물이 급격히 변화한다. 그 이전에는 마한 지역의 기원전 3세기 이전 수준으로 극히 소량의 청동기가 나왔으나 그 이후의 분묘에서는 다량의 조선계 청동기와 철기 유물 이 출토된다. 위의 삼국사기 기록과 위만조선이 철기문명 단계였다는 것, 그리고 토광목곽분(土壙木槨墳)을 사용한 것 등으로 보아 이들은 위만조선계 이주집단으로 추정된다.
변한 지역에서도 기원전 2세기를 전후한 옹관묘에서 다량의 청동기 유물이 출토된다. 그 이전에의 김해 지역 지석묘에서는 세형동검등 괴정동(槐亭洞)계 청동기가 소량 출토되는 수준이었다. 옹관묘는 주로 김해중심의 狗邪國 영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기록(삼국지)에는 진한의 언어가 마한과 같지 않았으나, 진한과 변한은 잡거(雜居)했으며, 변한의 의복과 거처가 진한과 같았고, 언어와 법속이 서로 유사했다고 되어 있어 馬韓과 辰弁의 두 지역 주민이 서로 다른 종족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2) 전기Ⅱ: 경제엽합체로서의 소국
중국의 사서(史書)에 의하면 마한지역에 50여 나라가 있었고 그 중 큰 나라는 만여家, 작은 나라는 수천家였으며 총 10여만 호였다고 한다. 진한과 변한지역에도 모두 24국이 있었고 대국은 4,5천가 소국은 6,7백가였으며 총 4,5만 호가 있었다.
1-9 읍락연합으로서의 소국의 형성
토착읍락들이 산재해 있는 삼한지역에 선진문명을 동반한 이주읍락이 진출함으로써 이 이주읍락을 중심으로 국지적인 교역권으로서의 읍락연합이 형성된다. 한 연구 결과(이종욱)에 따르면 소국의 영역적 범위는 사로국의 경우 직경 30-40Km, 중심부까지의 거리는 20Km 이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주읍락은 주변의 토착읍락들이 요구하는 동검 동부 세문경 등 주로 권위재 용도의 청동기를 제작 공급하고, 이들로부터 일정량의 생필품을 공급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연합소국의 후기에는 철을 매개로 하는 교역권도 형성되었을 것이다. 변한 관련 기록에 "나라에서 철이 나매, 韓濊와 倭가 얻어 갔고 모든 시장에서 철을 중국의 화폐처럼 사용하였다"고 한 것은 선진문명을 중심으로 교역권이 형성된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이주읍락들은 북방사정과 교역통로에 대한 정보를 소지하고 있었으므로 삼한지역의 북방 교역을 주도했을 것으로 보인다. 삼한 지역 읍락들의 북방교역에 대한 관심은 위만조선에 관한 기록, "손자 우거에 이르러.... 眞番주변의 나라들이 글을 올려 천자에게 알현코자 하는 것도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사기, 조선열전)는 데서도 알 수 있다. 또 후한서 동이전 한조의 "그 뒤 중국의 상인과 접하고 점차 상국과 교역하더니 이에 그들도 따라서 나빠지게 되었다"는 기록은 중국상인들이 이미 삼한지역에서 활동했음을 입증한다.
1-10 국읍과 읍락의 관계
경제연합체로서의 소국의 중심인 국읍(國邑)이 주변의 읍락들에 대해서 정치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즉 수장 지배하의 읍락들은 단일한 교역권을 구성하고 있었지만 읍락의 독립성은 유지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국읍에 비록 主帥(=국읍의 수장)가 있으나, 읍락이 잡거하여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다"(삼국지)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또, 소국이 이미 전투동맹으로 전환한 단계인 사로국 남해왕 시의 기사에 "왜가 병선 백여 척을 보내 해변의 민호를 약탈하므로 6부의 勁兵을 보내 막았다"(삼국사기)고 한 것은 소국을 구성하는 읍락들이 자체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현재의 김해시 지역에 국읍이 위치했던 구사국의 경우, 그 방계 읍락 지역으로 추정되는 김해군 주촌면에서 후한경을 포함한 청동기와 철기 유물이 다량 출토된 것은 그 지역을 다스리는 읍락 수장의 권력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역시 다량의 유물이 출토된 대구 만촌동과 두산동 일대도 소국의 주변 읍락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1-11 소국간의 관계
북한사학은 삼한소국사회가 진국(辰國)의 진왕을 정점으로 하는 '진왕-삼한왕-소국왕'의 지배체제 하에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설득력이 약하다. 그렇다면 삼한사회는 통합국가-통합국가의 해체-삼국에 의한 재통합의 과정을 밟게 되는데, 논리적으로 볼 때 통합 국가의 해체가 불과 6,7백家 규모의 소국 수준, 또는 읍락 수준으로까지 전개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본 강의에서는 삼한을 국가명이 아닌 지역명으로 간주하고 고대국가의 성립과정을 '읍락-소국-삼국'으로 단순하게 파악한다.
1-9의 변한 관련기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삼한 내부의 소국간에도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경제연합 단계의 소국 사이에는 군사적 긴장관계는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잠정적 평화관계는 주로 크고 작은 소국들 사이의 사대지례에 의해 유지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가령, 부여계 이주집단을 국읍으로 하는 백제(伯濟→百濟)은 그 국수인 온조가 目(月)支國 국왕에게 각종 예물을 바치고 있다. 또 목지국왕은 사로국(斯盧國→新羅)의 사신 호공(瓠公)에게 "진변 두 나라는 우리의 속국인데 매년 職貢을 보내지 않고 사대지례가 없다"고 질책하는데 여기서의 직공 납부는 그야말로 사대지례에 지나지 않는다.
3. 전기공납제 하의 사회적 분화
1-12 [호민-하호]의 분화
농업공동체 단계에서 할체제도에 기초해서 발생하는 계급분화의 기본 과정에 대해서는 일반경제사 1-3, 4, 5의 내용을 참조하기 바란다. 여기서는 한국고대사에 나타나는 호민과 하호의 개념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중국 '한서(韓書)'에 나타나는 호민(豪民)과 하호(下戶)는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개념이다. 호민은 漢代의 기층사회의 유력계급(=豪强者)을 지칭하고, 하호는 호민 지배하의 소작빈민(小作貧民)을 지칭하는데 이들 "貧人은 자신의 토지가 없어 豪富家의 토지를 경작하고 수확의 절반을 바친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의 옛 사서(史書)들은 대체로 위의 규정에 기초해서 한국 고대사회의 모습을 묘사했을 것이다.
<부여> 읍락에는 호민이 있었고 민은 하호로서 노복과 같았다.
<고구려> 그 나라의 大加는 농사를 짓지 않는 坐食者로서 만여 구가 있었고 하호는 멀리서 쌀과 고기 소금을 져다 바쳤다.
<신라> 沙道城을 개축하고 沙伐州 호민 80여 호를 이주시키다.
부여와 고구려 관련기사에서 호민과 하호는 대립적인 구도 속에 있다. 부여 기사에서는 호민과 하호가 기층사회인 읍락 내부에서 분화한 것으로 나타나 '한서'의 규정과 일치하는데, 고구려 기사의 하호는 평민 자영농민 피정복 공동체의 구성원 등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신라 관련 기사를 보면 호민이 비록 기층사회의 유력계급이기는 하지만 중앙의 사민정책의 대상으로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하호를 자영농민으로 해석하면 호민은 지배계급 일반을 지칭하게 되고, 하호를 자영농에서 탈락한 소작빈민으로 보면 호민은 하호를 소작적으로 착취하는 계급이 될 것이다.
한편 삼한지역의 하호에 대해서는 "그 풍속이 衣 (일종의 머리 장식)을 좋아하여, 하호들이 한사군에 조알할 때 모두 의책을 빌렸고 스스로 의책을 착용한 자도 천여인이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는 하호와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계급은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하호 중에 '스스로 의책을 착용한' 자들과 빌려 쓴 자들이 구분되고 있어 '自服하호'를 자영농민으로, '假服하호'를 자영농에서 탈락한 소작적 피지배계층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을 토대로 본 강의에서는 이미 전기읍락 단계에서 토지점유권자(=자영농)로서의 농민들 사이에 호민-하호의 분화가 발생하여 [호민-자영농-하호]의 초기적 계층분화가 발생했고, 이 분화는 수장이 대두하는 후기읍락 사회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파악한다.
1-13 수장지배의 일반적 성립
1-6,7에서 본 바와 같이 삼한 지역에서는 최소한 기원전 7세기경부터는 토착읍락 내부에서 수장들이 대두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사로국의 촌장(=6村長), 구사국의 간(=9干), 읍루의 대인(大人)으로 나타나고 동옥저에서는 장수(長帥) 거수(巨帥) 삼로(三老)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수장은 점유권을 매개로 하는 기본분화 과정에서 호민으로 상승한 자가 점유권의 다점을 통해 마침내 실질적 할체권을 행사함으로써 성립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개인의 점유권 축적이 할체권을 장악할 수준까지 진행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에 호민형(豪民型) 수장은 단지 이론적인 상정으로 그칠 가능성이 높다.
엥겔스가 지적한 것처럼 공동체 기능 담당자들이 그 기능의 발전에 편승하여 수장으로 전화하는 경로가 더 설득력을 갖는다. 이들 수장의 성격은 공동체가 처한 환경에 따라서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가령, 토착읍락의 경우 농경의례나 종교의식의 주관자들이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농경의 사회적 중요도가 높아짐에 따라 그 기능을 강화하여 수장으로 상승할 수 있다(天君型 수장). 이는 소국 단계 이전의 읍락들이 정교일치 사회였으며, 수장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다량의 祭具가 발굴되는 것으로도 뒷받침된다. 농경보다는 타 읍락과의 갈등관계가 문제로 되는 읍락에서는 군사기능 담당자가 수장으로 상승할 수 있다(軍長型 수장). 군장형 수장들은 수장으로 상승한 후 각종 공동체 의례를 주재했을 것이다.
수장의 구성원에 대한 지배력의 크기 역시 읍락에 따라 고르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수장이 공동체 기능 대부분을 장악함으로써 전기읍락 단계에서 공동체 기능의 수행을 위해 납부했던 공납이 수장이 대두한 이후에는 수장 개인에 대한 납부로 전화했을 가능성이 크다. 수장의 권력이 지석묘의 무게만큼 전제적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지석묘에서 출토되는 동경(銅鏡) 동검(銅劍)과 같은 각종의 권위재(Prestiage goods)들도 수장과 공동체의 관념적인 일체화가 현실로 구현되지 못하는 데 따른 물신적(物神的) 보완장치로 해석할 수 있다. 이들의 권력은 민회(民會)와 같은 원시 민주주의에 의해 견제되었을 것이다.
1-14 국읍의 주수
이주읍락을 중심으로 읍락들의 경제연합체로서의 소국이 성립하면 이주읍락의 수장은 곧 소국의 주수(主帥)로 된다. 그러나 주수는 단지 읍락 수장 중의 1인으로서 주변 읍락에 대해서는 별다른 영향력을 갖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國邑雖有主帥 不能善相制御"의 형편이었던 것이다. 또 단군설화의 "國人이 임금을 세웠다"라든가, 박혁거세설화에서 6촌장이 閼川에서 회의를 열어 혁거세를 임금으로 추대했다는 것은 주수, 즉 소국왕이 읍락 수장들에 의해 선출되었을 가능성도 보여준다. 주수들은 소국의 크기에 따라 다른 명칭으로 기록되고 있다. 마한 지역에서는 "大者自名爲臣智, 其次爲邑借"라 했고, 변한의 주수들은 '신지-험측(險側)-번예(樊穢)-살해(殺奚)-읍차'의 순으로 불리고 있다. 어떤 경우든 경제연합체로서의 소국 단계에서는 주수는 내부적 계급분화에 포함될 수 없으며, 그 자신이 속한 읍락에 한해서만 공납수취자로 된다.
1-15 노예계급의 발생
농업공동체사회에는 노예계급도 창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노예의 출처는 내부적으로는 범죄노예(가령, 用刑嚴急 殺人者死 沒其家人爲奴婢)가 일반적이었고, 외부적으로는 약탈노예와 전쟁노예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들은 노동노예가 아닌 가내노예의 범주이다.
4. 후기공납제 사회의 전개과정
(1) 소국의 전투동맹으로의 전환
1-16 철기사용의 일반화
한반도에서의 철기사용은 기원전 1세기경부터 보편화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것은 한무제가 철 전매제(專賣制)를 폐지한 것(BC119년)을 계기로 철기문명이 동북아 전지역에 급속히 파급된 사정과 관련되어 있다. 1-9에서 본 것처럼 특히 변한 지역에서 생산된 철은 한반도와 일본열도에 산재한 소국들에게 널리 보급되었다. 철기 제작이 이 본격화되기 이전에는 중국 漢나라나 한 지배 하에 있던 군현(郡縣)들과의 조공 또는 교역을 통해서 입수했을 것이다. 철제도구의 제작기술이 보급됨에 따라 철광석 부재 지역이나 이주집단이 아닌 소국, 읍락에서도 원산지의 철정(鐵鋌)을 입수하여 각종 철기를 제작할 수 있었다. 이 철정은 그 자체로서 화폐로도 사용되었다.
1-17 생산력의 발전
철제농기구의 본격적인 사용은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비약적으로 증대시켰다. 청동기의 경우에는 무기, 의구, 장식용 등으로 주로 지배계급에 의해 사용되었지만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해서 철기가 보급되자 농업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괭이 낫 등의 철제농구가 사용되고, 철제 보습을 사용함으로써 우마 경작도 본격화되었다.
당시의 주요 작물은 기장, 피, 조, 보리, 콩, 벼, 목화 등이었는데 벼농사의 경우 "토지가 비옥해서 5곡과 벼농사가 잘 된다"(삼국지, 진한전) 는 기록이 보인다. 한 유적조사에 따르면 영산강 유역에서는 이미 B.C. 1,500년경부터 이미 도작(稻作)이 실시되고 있었으며(金元龍, 1992, 22쪽), 피 조 등의 잡곡은 그 이전부터 재배되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또 소 말 돼지, 닭 등의 가축도 널리 사육되었다. 닭 중에서는 꼬리가 아주 긴 장미계(長尾 )가 삼한 지역의 토종으로 유명했다.
수공업은 의류중심의 가내 수공업이 성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한 주민들이 "누에를 칠 줄 알고 綿布를 만들었다"는 기록이나 진한과 변한에서 폭이 넓고 올이 가는 면포(廣幅細布)가 생산되었다는 기사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또 마한 지역 사람들은 "가죽 신을 신고 빨리 달린다" "옥구슬은 재보로 삼았으나...금은과 비단은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등의 기록을 볼 때 의류 이외의 수공업 분야도 상당 수준 발전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이 시기에는 철제를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용도의 무기가 개발되어 이전 시기와는 단절적인 수준의 강력한 무기체제가 수립된다.
1-18 읍락 내부사회의 변화
농업생산력의 발전은 내부적으로 빈부의 차이와 사유재산제도를 낳는다.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와 부여에서는 물건을 훔친 자는 12배로 배상토록 했고(삼국지), 타인의 우마를 죽인 자는 노비로 삼았다(북사 고구려전). 경제적 불평등의 확대와 사유재산 보호를 위한 법적 장치의 등장은 읍락 내부에서 성립한 '호민-하호'의 분화(1-12)를 더욱 심화시키고 사회적 긴장을 강화한다. 공납수취자로서 그 자신 최대의 사유재산가인 읍락 수장은 읍락사회의 지배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권력을 더욱 강화하고, 강화된 권력을 기반으로 증대하는 잉여생산의 전유(專有)를 추구한다. '계급지배로서의 국가'는 바로 이 과정에서 배태되는 것이다.
1-19 소국의 전투동맹화
잉여생산의 증대는 내적 긴장과 함께 외부적 갈등관계를 초래한다. 읍락간, 그리고 소국간에 발생하는 일상적 갈등은 영역이나 농경과 관련된 분쟁이 주류를 이루었겠지만, 타 읍락 또는 소국에 대한 침략의 경우에는 생산물의 약탈과 포로 획득이 주된 목적이었다. 특히 영구 지배를 위한 정복전쟁은 수장계급이 자신의 잉여 수취 영역을 확대하려는 동기에 의해 수행된다. 당시 삼한사회에 산재했던 70여 개의 소국들과 그 이하 규모인 소별읍들 사이에 문화적 군사적 낙차(落差)가 컸다는 점, 철제무기가 급속하게 발달하고 있었다는 상황이 소국간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삼국지 濊조의 "읍락을 함부로 침범하면 벌로 생구와 소·말을 부과하는데 이를 責禍라 한다"는 기사의 책화(責禍)제도는 당시의 외부적 갈등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외부적 갈등에 대처하기 위해 소국 내의 읍락들은 그 내부적 결합도를 강화함으로써 소국은 경제연합체에서 침략과 방어를 위한 전투동맹으로 전화한다. 즉 소국의 군사적 기능이 강화되는 것이다. 우선 소국의 주수는 유사시에는 병력을 통합하고 이를 지휘할 권한을 확보한다. 1-10의 남해왕 관련 기사에는 "6부의 경병을 발하다"고 했고, 탈해왕 시에는 "왕이 기병 2천을 보내 격퇴시켰다"고 되어 있다. 방어를 위한 책(柵)과 성(城)의 축조도 소국 단위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마한 지역에서는 "馬韓無城郭"의 단계에서 벗어나 "주요 지점과 관가에 성곽을 축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伯濟國의 경우는 온조 시부터 이미 성, 책의 축조 기사가 빈번히 나타난다. 진한지역의 사로국의 경우에도 혁거세 21년에 "京城을 축조하고 金城이라고 불렀다", 파사왕 8년에 "加召(가초)城과 馬頭城을 축조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2) 정복사업의 전개
기원1세기부터 3세기에 걸쳐 삼한사회 및 왜에서는 전쟁이 끊이지 않는 '相伐歷年'의 상황이 전개된다. 본 강의에서는 경제연합체에서 방어적 군사동맹체로, 다시 정복 군사동맹체로 성장해 가는 사로국(斯盧國)을 중심으로 살펴 본다.
1-20 주변소국의 정복과정
사로국은 5대 파사왕(婆娑王, AD80-112년)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정복전쟁을 전개한다. 즉위 후 상당 기간 수세적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해 가초 마두 두 성을 쌓으면서 '德不能綬 威不足畏'라고 자탄했던 파사왕은 즉위 23년에 실직(悉直, 삼척), 압독(押督, 경산) 두 나라의 항복을 받고 이어서 동해안 안강 지역으로 추정되는 음벌집국(音汁伐國)을 평정함으로써 주변 세력들에 대한 본격적인 정복전쟁을 시작한다. 또 29년에는 그 위치가 명확하지 않은 비지구(比只國), 다벌국(多伐國), 초팔국(草八國) 등을 정벌하고 울산지역의 읍락으로 굴아화촌(屈阿火村)을 복속시켰다.
이후 아달라왕(154-184)은 즉위 3년에 백제와의 육로인 계립령( 立嶺, 영주, 봉화)을 개통하고 다시 5년에 낙랑과의 육로인 竹嶺을 개통함으로써 그 부근의 소국들을 평정했음을 보여준다. 벌휴왕(184-196) 2년에는 소문국(召文國, 의성)이 정벌되고, 조분왕230-247)은 즉위 2년에 감문국(甘文國, 개녕군) 토벌하고 7년에 골벌국(骨伐國, 영천)의 來降을 받았다. 첨해왕(247-298)은 사벌국(沙伐國, 상주)을 정벌했으며 유례왕(284-298) 14년에 이서고국(伊西故國, 청도)의 침범을 격파함으로써 사로국은 3세기 후반기에 진한지역의 대부분을 통합했다.
1-21 정복지역의 통제방식
정복전쟁의 기본 목표가 공납 수취에 있는 한, 정복지역에 대한 지배방식은 그 지역의 공동체를 파괴하지 않고 읍락이나 소국의 수장을 매개로 지배한다는 원칙이 관철된다. 고구려의 동옥저 지배 방식이 그 전형적인 경우이다.
동옥저는 나라가 작고 큰 나라의 틈바구니에서 핍박을 받다가 결국 고구려에 신속케 되었다. 고구려는 동옥저 사람 중에서 大人을 두고 使者로 삼아 함께 통치하게 했다. (삼국지 동이전, 동옥저)
조분왕(230-247) 2년에 "우로(于老)가 감문국을 토벌하자 그 지역을 군(郡)으로 삼았다"거나 동 7년에 골벌국 역시 군으로 삼았다는 기록으로 볼 때 정복 지역들에 대한 재편성작업이 어떤 형태로든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지방조직인 '주-군-현'체제는 지증왕(智證王, 500-514)시기에 완성되기 때문에 위 기사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정복지역에 대한 통제체제는 약 250-300년에 걸쳐 완비된 것으로 된다.
실제로 피정복 지역의 소국들은 사로국에 의해 정복 당한 이후에도 상당 기간 본래의 모습대로 존속된다. 해당 지역 소국왕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총고분(高塚古墳)이 발견되고, 고분에서는 왕관 등 4세기까지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가령, 185년 벌휴왕이 정복한 소문국(의성지역)의 塔里 고분(AD4-5세기 추정)은 고분 규모가 거대하고 금제관모, 금동제관식 등이 출토된 바 있다. 이는 소국왕의 권력과 권위가 소국 내에서 그대로 유지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골벌국왕 아음부가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므로 저택과 전장을 주어 안거케 하고 그 곳을 군으로 삼았다 (신라본기 조분왕조)
그 결과 일단 정복된 소국들이 재기를 시도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파사왕 25년에는 "실직이 반란을 일으켜 토벌하고 그 무리를 남쪽변방으로 옮겼다"고 하고, 유례왕 시의 이서고국(청도)이 침공했다는 기사는 이서고국의 위치가 경주부근으로 추정되므로 사로국 지배에 대한 반란사건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정복국가의 피정복 지역에 대한 통제력은 그다지 강하지 못했으며, 정복국가가 공식적으로 표방하는 '국왕-군주-촌주'의 체제는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내용적으로는 '국왕-주수-거수'로 유지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공동체 수장을 매개로 하는 지배'의 원칙이 항상 지켜졌던 것은 아니다. 치열한 전투를 수반한 정복에는 통해서 정복된 경우에는 공동체가 파괴나 해체가 뒤따르기도 했다.
왕이 친히 개마국을 정복하여 그 왕을 살해하고 그 곳 백성을 위안하고 약탈하지 않았으며 다만 그 곳을 군현으로 삼았다. (고구려본기 대무신왕조)
숙신이 래침하여 우리의 변민을 살해하매....達賈는 기병을 내어 불의에 적을 쳐 단로성을 빼앗아 추장을 죽이고 적 6백여가를 부여 남쪽의 오천에 옮기고 적 부락 6, 7개소를 항복받아 부용으로 삼았다.(고구려본기 서천왕조)
1-22 왕권의 강화
읍락 거수 중의 1인에 지나지 않던 국읍의 거수는 정복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소국왕으로 상승하고 점차 그 권력을 확대해 나간다. 그러나 지방 주수들의 영향력이 건재하고, 중앙의 의사결정 역시 귀족들의 합의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공납국가의 왕권은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국왕의 권력은 우선 증강된 병력에 대한 지휘권을 장악함으로써 강화된다. 국왕은 소국 내의 기존 병력은 물론이고 정복과정에서 획득한 병력에 대해서도 지휘권을 확보했으며, 주요 지휘관에 대한 임면권도 행사했다. 가령, 벌휴왕 2년 2월에 "구도(仇道)와 구수혜(仇須兮)를 左右軍主로 삼고 소문국을 정벌했다"는 기록의 군주는 침략과 방어 등 대규모 군사행동이 있을 때 임명되는 군사령관에 해당된다. 또 파사왕 27년 8월 "馬頭城主로 하여금 가야를 정벌토록 했다"는 기록의 성주는 군사요충지에 상주하는 군대의 책임자로 보인다. 국왕은 자신의 군사지휘권을 열병식 등을 통해 과시하고 있다. 파사왕 15년 8월에는 '알천에서 열병이' 있었고, 백제 仇首王(214-234) 역시 '한강 서쪽에서 대규모 열병'을 실시하고 있다.
왕권의 강화는 중앙통치기구의 발전과 이에 따른 신료(臣僚) 집단의 형성으로도 나타난다. 신료집단은 왕실세력과 유리왕 대에 6부로 편성된 촌장세력 위주로 구성되며 직무중심이 아닌 서열중심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다만, 군사부문에서 이벌찬과 이찬은 內外兵馬使의 임무를 맡고, 유사시에는 大將軍으로 임명되고 있다. 재정부문에서도 1-21의 물장고 설치 기사에서 보는 것처럼 구체적 직무가 나타나고 있다. 정복(=군사부문)과 수취(=재정부문)라고 하는 공납국가의 2대 근간이 타부문에 비해 일찍부터 발전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이 시기의 신료체제는 일시에 정비된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그 지위를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유리왕 시에 17관등이 설치되었다는 기록은 신빙성이 없다.
왕권은 왕실집단의 형성을 통해서도 강화된다. 사로국의 경우 왕족 왕비족 왕모족 등으로 구성되는 왕실집단은 주로 이주세력들로서 6촌장 세력의 상부에 형성된다. 그러나 지마(祗摩王, 112-134)의 즉위기에서 보는 것처럼 토착세력들도 부분적으로 왕실집단에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5. 고대공납국가의 잉여수취체제
신라의 경우는 진한지역을 통합한 3세기 이후부터 고대국가로 진입하며 이에 따라 정복지역에 대한 잉여수취체제도 고대국가의 수준으로 정비된다.
1-23 토지에 대한 지배력의 강화
공납의 수취가 공동체 지배에 근거하고 있는 한 공납은 '복종을 확인하고, 보호를 보장받으며 평화를 구입하기 위해 지불하는'(브리타니카 백과사전) 비용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토지에 대한 지배는 공납의 수취의 직접적인 근거가 될 수 없으며, 고대국가들이 표방하는 토지국유론 또는 왕토사상(王土思想)은 공납 수취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분식(粉飾)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고대국가의 성립기간 동안 농업생산력이 꾸준히 증대되고 토지의 중요성이 점증하면서, 또한 지배 영역 내의 토지에 대한 파악이 구체화되면서 고대국가는 잉여수취의 기반을 토지로 이동해 간다. 그리고 그것은 1-4에서 본 것처럼 토지에 대한 공동체 수장의 권리가 쇠퇴하고 국가의 토지처분권과 공납농민의 경작권이 추세적으로 강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토지지배에 근거한 잉여수취는 국가봉건제에서 완성된다.
국가는 정복을 통해 획득한 토지를 중심으로 그 처분권을 행사한다. 왕실 재정의 기반인 왕실전과 국가기관의 운영경비 조달을 위한 관유지(官有地)를 설치하고 전공자 등 국가 유공자들에게 사전(賜田)과 식읍(食邑)을 하사한다. 賜田의 경우에는 그 규모로 보아 조선시대의 공신전(功臣田)과 같이 私田으로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식읍의 경우에는 "한나라의 침공을 격파한 명림답부에게 坐原과 質山을 식읍으로 주었다(신대왕8년)"든지, "金官國主 金仇亥에게 그의 본국을 식읍으로 주었다(법흥왕19년)"는 것과 같이 그 규모가 방대하기 때문에 이를 私田的 지배의 대상으로 볼 수는 없다. 명림답부와 구해왕에게 주어진 것은 영구적인 토지소유권이 아니라 그 지역과 인민에 대한 제한적인 지배권이었을 것이다. 식읍은 부용(附庸), 겸통부락(兼統部落) 등으로도 불린다.
이미 본 바와 같이 공납국가의 개입에 의해 공납농민의 토지경작권은 강화되고 이에 따라 경작권을 처분할 수 있는 자유도 확대된다. 토지국유가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고 공납수취가 토지지배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하면 경작권에 대한 처분권의 확대는 토지를 농민의 사실상의 사적소유지(Allod)로 전환시키는 의미를 갖는다. 고구려 온달전에는 "보석을 팔아 田宅과 노비 우마 기물을 매득했다"는 경작권의 매매기사가 나오고, 고국천왕 10년(190년) 기록에는 "어비류(於卑留)와 좌가려(左可慮)가 왕후의 친척임을 이용해서 백성의 자녀와 전택을 약탈하여 국인이 분노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토지에 대한 농민의 처분권 확대는 위의 두 기록에서처럼 호민 세력의 買入田土와 권세가들의 토지 침탈 가능성을 높혀 준다.
1-24 피정복 지역에 대한 잉여 수취
이 시기의 공납수취에 대해서는 고구려의 동옥저에 대한 수취 방법이 대표적이다. 고구려는 피정복 지역인 동옥저의 공동체들을 파괴하지 않고 그 수장으로 하여금 공납 납부의 책임을 맡게 한다(1-21, 句麗復置其中大人爲使者 使相主領). 중앙 관료는 수장의 납부를 감독할 뿐이다(又使大加 統責其租稅). 고구려의 중앙수취기구는 국가적 수취일 경우 大加가 총책임을 맡았고, 왕가 및 대가의 사적 수취는 사자(使者) 조의(早衣) 선인(先人)에게 맡겨졌다. 신라의 경우에는 중앙재정기구로서 물장고(物藏庫)를 설치하고 첨해왕 5년(251년)에 "한지부 사람 夫道가 가난하지만 아첨하지 않고 문서와 산술에 익숙하여 아찬으로 삼아 물장고 사무를 맡겼다"는 기록이 보인다.
공동체에 부과하는 공납의 양은 공동체 구성원의 수를 기준으로 했는데, 이는 정복국가가 피정복지역의 실태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 빈부차이에 따른 차등과세 등의 문제는 수장에게 일임된 것으로 보인다.
공납은 생산물과 노동력으로 구성된다. 생산물의 납부, 즉 물납(物納)에는 인세(人稅)와 인세를 보완하는 호조(戶租) 그리고 風土所産(=특산물)이 있었으나 담세자의 조건과 구체적인 양은 알려지지 않았다. 고구려 관련 기록 중에 "人稅는 布 5匹, 穀 5石이었으며, 遊人들은 3년에 한 번씩 10인이 공동으로 세포 1필이었다"(수서 고구려전)는 잘 알려진 내용이 있는데 그 세액은 상당히 과장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납부강제가 엄격하여 공납 미납자는 그 자녀를 노비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사로국의 피정복소국에 대한 공납수취 방법은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노동력 제공, 즉 신역(身役)은 삼국전쟁의 후기부터 부과된 軍役과 축성, 농업기반시설의 건설 및 수리를 포함한 각종 力役이 있었는데 대체로 15세 이상의 정남(丁男)이 부담했던 것으로 보인다. 노동력 동원의 시기는 春三月 秋九月에 집중되어 농번기를 피했으며 신역 부담일은 1년에 약 2개월 정도로 추측된다. 사로국의 경우 일성왕(134-154) 11년조에 "먹는 것은 백성이 하늘로 여기는 것이니, 제 郡縣은 堤防을 수리하여 廣闢田野 하라"는 저수지의 공사의 중요성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1-25 참고 ; 고대일본의 공납국가
(1) 소국의 형성 ; 일본열도에서도 기원 전후 시기, 즉 야요이시대(彌生時代, BC3천년경-AD3세기) 중기부터 후기에 걸쳐서 키타큐슈北九州 세토나이瀨戶內 기나이畿內 지역을 중심으로 소국들이 형성된다. 야요이시대는 주로 한반도로부터의 이주민들이 선주민인 죠몬인(繩文人, BC1만3천년-3천년)들을 변방으로 내몰면서 농경문화를 주도해 간 단계이기 때문에 소국이 성립되기 이전에 농경에 기반한 토착적인 후기읍락들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이들 후기읍락들은 한반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청동기나 철기문명이 유입되는 과정에서 한반도로부터 건너간 이주읍락을 중심으로 하나의 소국으로 재편되어 갔다. 소국으로의 통합은 대체로 정복에 의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야요이시대 중기부터 고지성(高地性) 集落들이 출현하고, 그 부근에서는 대형 석촉, 석창, 석검 등의 무기가 다량으로 발견된다. 그것은 천일창(天日槍) 전설에서 보는 것처럼 토착세력들의 배타성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2) 지역국가의 성립
한반도와는 약 백년의 時差가 있는 AD2세기 후반부터 3세기에 걸쳐 일본열도에서는 소국들 사이에 相伐歷年(후한서)의 전란 상태가 전개된다. 그리고 이 전란을 통해서 지역국가들이 형성되는데 3세기 중엽에 성립하는 히미꼬(卑彌呼)의 야마타이(邪馬臺)국이 그 중 가장 큰 나라였다. <히미꼬를 神功武后로, 야마타이국의 위치를 기내, 즉 나라(奈良) 지역으로 간주하는 사가들에 의해 야마타이국은 야마토大和=나라)조정으로 인식되어 왔다. 야마타이국이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라는 데는 이론이 없다.>
지역국가들과 지역국가에 통합되지 않은 각지의 소국들은 히미꼬를 왕으로 共立함으로써 일본의 서부지역은 야마타이국을 중심으로 공납적 지배관계가 성립한다. 야마타이국은 중앙에 초기적인 관료기구를 두고 지배지역의 각 요충지에 관리를 파견하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공납적 지배였기 때문에 지역국가들과 소국들은 자신의 독자성을 유지한다. 그것은 히미꼬의 사후 서일본 지역은 다시 전란상태로 돌아갔고, 4세기 후반부터 5세기에 걸쳐 지역국가 왕들의 무덤으로 보이는 거대한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출현하는 것으로도 입증된다.
(3) 공납 지배의 강화
야마타이국이 채택한 보다 적극적인 지배방식인 국조제(國造制), 미야게(ミヤケ)제, 부민제(部民制) 등은 한반도의 공납국가들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하, 鹽澤君夫등, 경제사입문, 1995, 참조> 국조제는 1-24에서 본 '大人爲使者'와 같은 맥락으로서 소국 왕들에게 관명을 부여하여 공납의 납부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들을 형식적인 중앙관료 즉 국조로 임명하고, 臣 君 公 直 등의 성(姓)을 부여하고 있다.
보다 강력한 지배방식인 미야게제는 대체로 세 형태로 구분된다. 첫째는 피지배 소국 전체나 소국 내의 읍락을 직할지로 지정하여 그 지역의 곡물 창고를 야마타이국이 직접 관리하는 방법이다. 둘째는 피지배지역의 양전(良田)을 국왕의 둔전(屯田)으로 지정하고, 그 지역 농민들의 부역노동으로 경작케 한 후 생산물 전부를 국가에 납부케 하는 방법이다. 셋째는 피지배 읍락의 농민들을 집단 이주시키거나 (주로) 한반도로부터의 渡來人들을 정주시켜 전부(田部)를 형성하고, 이들의 노동력으로 둔창(屯倉=みやけ)을 경영하는 방법이다. 전부는 일단 형성된 이후에는 다른 읍락과 동일한 촌락공동체로 편성된다는 점에서 노예제 대경영과는 다르다.
부민제는 공납국가의 지배가 소국 내로 침투하는 형태이다. 소국 지배 하의 공동체를 국가나 왕실의 부(部)로 지정하고, 그 부민들은 공물을 납부하거나 교대로 궁전에 들어가(=上番) 수공업제품의 제작 또는 잡역에 종사하게 된다.
제2장 국가봉건제사회
1. 국가봉건제의 기초이론
2-1 국가봉건제의 개념
국가봉건제는 유일의 토지 소유자인 국가 또는 군주가 직접생산자에게 경작권을 이양하는 대가로 잉여생산물 및 잉여노동을 지대형태로 수취하는 생산양식이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직접적인 토지소유자로서 동시에 주권자로서 그들과 대립하는 자가 사적 토지소유자가 아니라, 아시아의 경우처럼 국가라면 지대와 조세는 일치한다.…국가는 여기에서 최고의 영주이다. 주권은 여기서는 국가적 규모로 집중된 토지소유이다."(CapitalⅢ 47장 2절)
국가봉건제의 지배체제는 다음과 같은 재생산 구조를 갖는다.
2-2 국가 봉건제의 모순
국가봉건제의 기본적인 대립은 봉건지주와 봉건농민 사이의 대립이다. 봉건지주는 국가 군주 귀족 관료 등으로 구성된다. 이 기본 대립은 농민보유지인 민전(民田)에 대한 농민들의 처분권 확대라는 형태로 전개된다. 처분권의 확대는 민부의 축적과 농민적 계급분화를 촉진하며, 민전 다점자(多占者)로서의 서민지주를 형성한다. 그것은 사회적 잉여의 분할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편으로는 봉건재정의 위기를 가져와 봉건제의 재생산을 위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부의 축적에 기초한 자본제적 발전을 가져온다.
봉건제국가의 현실적인 모순은 봉건지주 내부의 대립에서 발생한다. 이들의 대립은 정치적으로는 군주와 귀족관료 사이의 항상적 갈등으로 나타나고, 경제적으로는 토지국유제와 토지에 대한 사적지배의 갈등으로 나타난다. 이 경우 군주는 토지국유제의 관철자인 동시에 스스로 사적지배를 추구하는 이중성을 드러낸다. 토지에 대한 봉건지주들의 사적 지배는 수조권(收租權)을 이양받은 관료전의 사유화, 국유지(=농민보유지)의 침탈과 겸병으로 나타난다. 봉건지주들의 토지 사유화는 봉건농민들을 사민화(私民化)하고 농민들의 각종 납부를 차단함으로써 봉건재정의 위기를 초래한다.
2. 국가봉건제의 성립Ⅰ
국가봉건제의 성립과정을 공납제에서 국가봉건제가 성립하는 과정(=후기신라의 성립과정)과 왕조교체를 통해서 국가봉건제가 재정립되는 조선 봉건주의의 성립과정으로 나누어 살펴본다.
(1) 중앙집권적 봉건국가의 성립
2-3 왕권의 전제화
신라 왕권의 전제화는 외부적으로는 지배영역을 확대하여 권력의 영역적 기반을 넓히고, 내부적으로는 지방세력 및 중앙귀족의 권력을 제압함으로써 달성된다. 왕권의 강화는 중앙집권적 관료체제의 정비와 함께 진행된다.
화백회의로 상징되는 귀족세력의 권력은 공납제 말기까지 지속된다. 그 중의 하나가 王權을 근본적으로 제약하는 왕의 입폐(立廢)기능의 행사였다. 아래의 두 번째 기사는 무열왕조차도 화백의 추대 절차를 거쳤음을 보여준다. 그 외에도 전쟁 등 국가의 중대 사항에 대해서는 반드시 귀족들의 합의를 얻어야 했다.
眞智大王으로 추존된 舍輪王은… 御國四年에 政亂荒淫하여 國人이 廢하였다.
군신이 이벌찬 알천에게 섭정을 청하였으나 알천은 사양하면서 춘추공같은 이가 가위 濟世英傑이라 하였다. 춘추공을 왕으로 추대코자 했으나 세 번 사양하고 부득이 취임하였다.
무열왕은 김유신을 중심으로 하는 무장세력과 함께 삼국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권력을 강화해 나간다. 신라 뿐만이 아니라 고구려나 백제의 경우에도 삼국전쟁은 내부적 권력투쟁과 연관되어 있다. 신라의 신흥세력은 진덕여왕의 퇴위를 요구하는 화백세력의 쿠테타를 진압하고, 진덕여왕 사후 김춘추가 왕위를 계승함으로써 구세력을 최종적으로 무력화시킨다. 김춘추는 즉위 후 갈문왕(葛文王) 제도를 폐지하고 왕비계 귀족세력의 발호를 막기 위해 김씨가 왕비를 독점케 했으며, 화백 대표인 상대등(上大等)의 권한을 축소하는 한편 행정부수반격인 중시(中侍, 또는 侍中)의 권한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후기신라의 전제왕권은 무열 문무왕을 거쳐 신문왕 대에 이르러 확립된다. 31대 신문왕(神文王, 681∼92)은 즉위와 함께 왕비의 아비인 김돌흠(金欽突)을 포함한 구귀족의 대부분을 모반 혐의로 처형한다. 또한 중앙의 관료조직을 보강하고 지방조직을 9주체제로 확정했으며, 토지국유제의 관철을 위해 관료전을 설치한다.
2-4 중앙 행정조직의 정비
봉건제국가의 중앙행정의 기본조직은 '6전(典)체제'로서 吏(인사), 戶(재정), 禮(의례), 兵(군사), 刑(법률), 工(토목·제조)으로 구성된다. 신라의 경우에는 법흥왕 3년(516년)에 병부(兵部)를 설치한 이후 신문왕 6년(686)의 예작부(例作府)가 설치될 때까지의 170년에 걸쳐 필요에 따라 부서를 설치하여 최종적으로 14部(府)체제를 확정한다. 중앙행정조직의 정비는 중앙 귀족들의 신료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재정부문(戶)의 주요 부서는 調府(진평6, 584년), 倉部(창고보관업무, 진덕5, 651년)가 있었고, 녹봉 사무를 전담하는 左司祿 (문무17, 677년), 右司祿 (문무21, 681년)이 별도로 설치되었다. 집사부(執事部)는 왕명출납과 국가 주요사를 처리하는 기관으로서 중시가 책임을 맡았는데, "改稟主爲執事部 仍拜波珍浪竹旨爲執事中侍 以掌機密事務"(진덕여왕 5년)라 하여 그 전신(前身)이 공납 관리기구인 품주(稟主=租主)였음을 알 수 있다.
2-5 지방 행정조직의 확립
지방 통치조직이 완비된다는 것은 지방관(=外官)의 파견을 통해 토착적인 지방세력을 제압하고 국가 권력을 전국으로 확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기신라는 삼국전쟁이 전개되는 동안 불안정하게 운영되던 지방행정 조직을 신문왕 7년(687년)의 9州5小京制를 중심으로 [州-郡-縣-村]체제를 확정한다.
각 주(州)에는 총관(摠管) 또는 도독(都督)이 책임자로 파견되었는데 주로 이찬에서 5등 대아찬까지의 진골(眞骨)출신이 임명되었다. 그 휘하에 주조(州助, 행정), 장사(長史) 또는 사마(司馬, 군사), 외사정外司正, 사법), 소수(小守) 등의 관리를 두었다. 주에 최초로 지방관을 파견한 것은 이사부(異斯夫)를 실직주(悉直州)의 군주(軍主)로 임명한 지증왕 6년이었다. 소경에는 역시 진골 출신의 사신(仕臣)이 파견되었다. 후기신라 정부는 수도 금성의 지역적 편재성(偏在性)을 보완하기 위해 중앙귀족들을 5소경으로 대거 이주시키고 있다.
군(郡)에는 6두품 계층을 태수(太守)로, 현(縣)에는 현령(縣令)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縣은 촌주(村主)가 지배하는 村과 천민들의 집단거주지인 향(鄕)·소(所)·부곡(部曲) 등으로 구성되었다. 현 단위의 지방관까지 중앙에서 파견했는지는 의문이다. 보다 상급의 외관(外官)들이 首長 豪民 등 잔존 토착세력을 지명했을 가능성이 크다. 후기신라가 운영한 상수리(上守吏) 제도는 지방 토착세력에 대한 견제장치로서 村主 및 토착세력 중에서 선발된 州·郡·縣의 吏職者들을 그 대상으로 한다.
(2) 토지국유제의 확립
토지국유제의 확립은 토지에 대한 권리의 법제적 2원화를 의미하며 권리 주체가 상급소유권자로서의 국가(=군주)와 하급소유권자로서의 농민으로 단순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급소유권은 봉건지대의 수취로 실현되고 하급소유권, 즉 경작권은 소농경영 전개의 기반이 된다.
2-6 농민보유지의 국유화
토지국유화는 국가가 농민에게 토지를 지급하는 형식, 즉 '給丁田', '受有田畓' 등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일정한 면적기준(烟當10∼15結)을 설정하고 농민들이 이미 보유하고 있는 민전이 이 기준 면적에 부족하거나 초과할 경우 가감하는 방법을 취했을 것으로 보인다. 북위(北魏)나 당(唐)이 균전제(均田制)를 실시할 때처럼 농민의 기존 보유지를 전면 회수하여 재분급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토지국유제의 실시를 의미하는 정전(丁田) 지급은 "聖德王二十一年 始給百姓丁田"이라고 하여 722년에 최초로 이뤄진다.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시기적으로 볼 때 당의 균전제를 도입했을 가능성이 크다. 당의 균전제는 토지의 지급 대상을 丁男(21세∼59세)과 中男(18세∼20세)으로 하고, 지급면적은 정남의 경우 田1項 (=100畝)이었다. 그 중 20畝는 永業田으로서 세습적 보유가 가능하고, 나머지 80畝는 口分田으로서 본인이 사망할 경우 국가에 반납토록 했다. 다만, 정남의 나이와 관련해서 고려의 정남이 16세∼59세였고, 삼국시대의 力役 부담 연령이 15세 이상이었으므로 후기신라의 정남도 당의 기준보다는 연령이 낮았을 가능성이 크다.
2-7 장적문서에 나타난 민전의 실태
1933년 일본 정창원(正倉院)에서 발견된 후기신라의 장적(帳籍) 문서는 토지국유제의 운영실태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 문서는 서원경(西原京, 청주) 부근의 4개 촌락에 대한 봉건적 지배 자료로서 현·촌의 명칭, 영역, 戶·口數, 토지종목·면적, 牛馬數, 주요유실수 等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토지종목 중 '연수유전답(烟受有田畓)'은 烟이 국가로부터 받아 가진 전답이라는 의미로 농민보유지에 해당된다. 이 수유전답의 총면적이 564結(?)을 차지하고 있어 전체 토지 면적 586結(?)의 86%에 이르는데 이는 국가의 직접적인 토지 지배가 확립되었음을 보여준다.
戶數 口數 丁數 연수유답 戶평균 口당 평균
沙害漸村 10 142 29 156結여 15결 61負 2束 1. 09. 9
薩下知村 15 125 32 179結여 11 93 6 1. 43. 2
失名村 8 69 17 126結여 15 84 2 1. 83. 6
西原京內 10 106 17 102結여 10 21 8 0. 96. 3
(000村)
위 내용 중 烟當 토지 면적이 10∼15결에 이르는 것은 1결의 크기가 당의 경우 1만5천평, 고려의 경우 6천8백평이라는 연구 결과(강진철)를 고려할 때 지나치게 큰 면적이므로 여러 가지 해석을 낳게 한다. 우선 烟이 자연호(自然戶)가 아니라 작호(作戶)일 가능성이 있다. 일반적으로 호당 평균 가족수는 5인 정도인데 위의 표에는 戶당 口數가 10인 남짓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호당 정수는 2.2명으로 자연호에 가깝기 때문에 어느 쪽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당시의 토지이용 방법이 격년휴경제(=2포제) 또는 2년씩 묵히는 격격년 휴경제일 가능성이 있어 농민들이 실제로 경작하는 면적은 보유 토지의 절반 이하일 수도 있다.
장적 문서에는 민전 이외에도 관청의 비용 조달을 위한 관모전답(官謨田畓), 내시령답(內視令沓)과 국가직영지로서 농민부역으로 경작되는 麻田, 그리고 수조권 이양토지로서 연수유전답에 포함되어 있는 촌주위전(村主位畓) 등이 나열되어 있다.
2-8 귀족·관료의 토지에 대한 직접지배 차단
국유제 하의 봉건지주들은 공신전과 같은 예외적인 사전(私田)을 제외하고는 특정의 농민보유지에 대한 국가의 봉건지대 수취권, 즉 수조권(收租權)을 이양받은 자들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들 봉건지주들은 2-2에서 본 것처럼 자신의 수조지(收租地)에 대해 국가에서 정한 이상의 사적 지배권을 행사함으로써 토지국유의 기본 틀을 위협한다. 따라서 국가는 봉건관료들에게 물적 기반을 제공하고 동시에 이를 통제하는 2중적 정책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후기신라 정부는 687년(神文王7年)에 문무 관료의 등위에 따라 관료전을 지급함으로써 직전제(職田制)를 실시한다. 이 관료전 역시 토지 소유권의 지급이 아니라 수조권의 이양일 뿐이다. 그런데 불과 2년 후인 689년에 신문왕은 내외 모든 관료의 관료전을 혁파하고 정부가 직접 수조하여 녹봉(祿俸)의 형태로 지급한다는 교서를 내린다. 그 원인이 관료전에 대한 관료들의 사적 지배였음은 물론이다. 관료전에서 녹봉제로의 이 전환은 조선정부의 직전법에서 직전세로의 전환으로 다시 나타난다. 신문왕 대에 성립한 녹봉제는 약 70년 후인 757년(景德王16年)에 "除內外群官月俸 復賜祿邑"라 하여 職田制로 복귀하는데 관료계급의 반발에 의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위의 기록에서 月俸은 祿俸, 祖(歲租)와 같은 의미로 쓰이고, 祿邑은 官僚田, 職田과 같은 뜻이다. 봉건신라의 농민보유지 관리 및 수취체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2-9 小農경영의 확보
소농경영은 농업생산력의 증대에 따라 단혼소가족이 생산의 기본단위로 되는 경영이다. 농민의 입장에서 소농경영의 전개과정은 생산력의 증대를 통해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를 획득하는 과정, 즉 독립자영농으로 상승하는 과정이다(일반경제사 4-12 참조). 그러나 봉건국가는 봉건지대 징수의 기본단위로서 소농경영을 확보하고 보호한다. 국가가 소농경영의 토대인 농민보유지의 침탈을 방지하고 농민의 사민화(私民化)를 적극 억제하는 정책을 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소농경영의 확보를 위한 권농정책과 농업기반시설의 확대는 후기신라 이전인 5-6세기부터 추진되어 왔다. 그것은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물질적 기초로서의 농업의 중요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특히 수전(水田)에 의한 도작(稻作)이 일반화됨에 따라 저수지를 비롯한 수리사업이 일찍부터 국가에 의해 시행된다. 이같은 기반시설의 신축과 개수(改修) 사업은 후기신라 정부에 의해서도 계속 추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 후기의 농민들은 수장 지배의 약화로 공동체에 대한 예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4-5세기부터는 삼국전쟁에 참전함으로써 그 사회적 지위가 크게 향상되었다. 봉건국가 역시 담세자로서의 경작농민에 대한 보호정책을 추진한다. 삼국전쟁 종료 후 문무왕은 농민들의 안정을 위해 "兵器를 녹여 農具를 만들게 하고 백성을 仁業의 터전에서 살게 하라. 賦稅는 가볍게 하고 稅을 덜게 하여 집집마다 人口가 늘고 民生이 안정되어… 변방지역과 州縣의 과세는 필요치 않거든 폐하라"는 유훈을 남긴다. 자연재해로 인해 기근이 발생할 경우에는 해당 지역의 조세감면과 구휼 조치가 취해졌다. 이와 함께 취해진 농민의 토지긴박 정책은 농민보호의 2중성을 보여준다. 5세기부터 나타나는 어식자( 食者, 토지이탈농민)들에 대한 강제적 귀농 조치("驅內外 食者歸農" 백제무녕왕10년)는 국가봉건제 하에서는 더욱 강화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2-10 봉건지대의 수취체제
후기신라 정부의 구체적인 수취체제는 명확하지 않다. 신라 정부가 도입했을 것으로 보이는 당의 조용조(租庸調)체제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전조(田租)의 수취량은 불명이지만 고려 태조가 즉위 직후 발표한 조서(詔書)에 "최근 착취가 심해 1경의 토지에 6석을 빼았으니 백성이 살아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내가 이를 걱정하여 이제부터 (舊法에 따라) 什一制를 실시하니 一負의 땅에 三升의 租를 받도록 하라"고 되어 있어 신라봉건정부는 대체로 1/10 租에 해당되는 結당 2∼3石을 수취했을 것으로 보인다. 서양의 경우에도 봉건지대율은 보통 십일제(什一制)였다. 唐나라는 1/40, 漢나라는 1/30을 표방하고 있다. 조용조체제는 均田制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定量制가 원칙이다.
호조(戶調, =貢賦)는 각 지방의 특산물 납부이다. 공납제 하에서는 지방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을 그대로 수취하였으나, 국가봉건제 하에서는 먼저 지배계급의 수요를 파악하고 이에 따라 각 지역과 향·소·부곡에 특산물의 내용과 수량을 하달하여 납부케 했다. 신라 정부는 당의 9등호제(九等戶制)를 차용했는데 당이 재산의 다과에 따라 차등 부과한데 비해 신라는 각 호의 人丁수를 차등 부과의 기준으로 삼았다. 특산물은 州·郡단위로 부과되어 지방관들이 수취 책임을 맡았다. 진성여왕(眞聖女王) 3년(889년)에 "國內諸州郡 不輸貢賦 府庫虛竭 國用窮之 王發使督捉"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인두세에 해당되는 力役( 役)의 내용도 확실치 않다. 징발 대상은 15-59세의 정남(丁男)이었을 것이며 징발기간은 농한기의 20日∼30日 정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농민들은 주로 山城, 제방, 궁전, 관아 등의 토목·건축 노동에 동원되었다. 당의 경우에는 취역 기간이 年20日이었고 30日을 더 추가할 수 있었는데 가역(加役)에 대한 보상으로 15일이 추가되면 調를 면제하고, 30일일이 추가되면 租와 調를 모두 면제했다.
2-11 참고 ; 삼국전쟁의 동인
삼국전쟁은 민족통일 전쟁이 아니다. 민족통일은 전쟁의 원인도 결과도 아니었다. 후기신라의 부분적 한반도 통합에 대한 부정적 시각, 즉 영토상실론과 외세의존론은 삼국전쟁을 민족통일 전쟁으로 파악하는 데서 비롯된다. 삼국전쟁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전쟁의 동인, 전쟁기간, 전쟁의 국제전적 성격 등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때만이 가능하다. 삼국전쟁은 소국들의 경합(1세기-4세기)이 마무리된 4세기부터 6세기까지와 국제전으로 돌입한 6세기-7세기의 두 단계로 전개된다. 여기서는 전쟁의 동인에 대해서만 간단히 정리한다.
(1) 경제적 동기
삼국의 지배계급들은 소국 단계의 정복사업의 연장선상에서, 즉 기존의 물질적 기반을 방위하고 새로운 공납수취 지역을 획득하기 위하여 전쟁에 참가한다. 국왕은 정복지역에 王室직할토지를 넓힐 수 있고, 귀족들 역시 賜田이나 食邑 또는 附庸의 형태로 수취 기반을 확대할 수 있다. 토지뿐만이 아니라 전쟁은 포로를 비롯한 각종 전리품을 획득하는 기회가 된다. 광개토대왕의 백제 침공 시에는 生口 一千과 細布 一千匹을 획득했으며, 이러한 전리품은 진흥왕이 사다함(斯多含)에게 良田及虜二百口를 주었다는 것처럼 전쟁 공훈자들에게 배분되었다. 방어전쟁의 경우에도 고구려의 명림답부가 對漢전투에서 승리하고 질산·좌원을 식읍으로 받은 데서 보듯이 그 공로가 물질적으로 보상되었다. 따라서 경제적으로 열세였던 삼국의 신흥귀족들에게는 전쟁이야말로 자신들의 경제력을 보강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에 이들이 대외강경론을 주도하게 되는 것이다. 삼국전쟁 과정은 국가봉건제로의 이행과정이기도 하다. 전투기간 동안에는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일사불란한 군사적 지휘체계가 성립되기 때문에 왕권의 전제화 및 지방세력의 위축으로 인한 소농경영 확보의 가능성이 전쟁기간에 성립하는 것이다.
(2) 정치적 동기
수장출신 구귀족의 기득권에 대한 신흥세력들의 도전은 정치 영역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고구려에서는 광개토대왕 때부터 신흥귀족들이 성장한다. 특히 백제와 가야를 침공할 때는 황해도(낙랑·대방) 지역의 토착세력들이 南進에 적극 협력하여 새로운 귀족세력을 형성한다. 장수왕(413∼492)의 평양천도(427년)는 남진정책 외에도 國內城에 근거한 구귀족을 무력화시키려는 의도 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백제 개로(蓋鹵]王이 北魏에 보낸 請兵문서에 의하면 장수왕(王連=新連)은 472년 구귀족들에 대해 "國自魚肉 大臣强族 戮殺無己 罪盈惡績"의 탄압을 가하고 있다. 실제로 이 전후시기에 고구려 귀족들이 北魏와 倭로 망명했다는 기사가 다수 나타난다. 대외강경론을 주도한 대표적인 신흥귀족 으로는 北周 및 신라와의 전쟁을 수행했고 특히 한강유역의 수복에 집념을 보였던 溫達, 對隋전투로 널리 알려진 乙支文德 등이 있다. 고구려의 신·구귀족 간의 항쟁은 안장왕(519∼531), 안원(531∼545) 시기에 최고조에 달해 일본서기에 "高麗大亂被誅殺者衆" "高麗大亂 凡 死者二千餘人"라는 기록이 보인다. 구귀족들은 영류왕(榮留王) 시에 권력을 장악하고 당과의 포로교환 등 대당 유화정책을 전개한다. 그러나 신흥귀족들은 연개소문(淵蓋蘇文)을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 및 구귀족(大臣) 100여명 살해하고 對唐 강경노선으로 선회한다.
신라의 경우는 김유신家를 중심으로 하는 신흥귀족들이 주전론을 주도했다는 것은 이미 본 바와 같다. 백제는 의자왕이 즉위한 이후 15년 동안은 윤충(允充) 의직(義直) 은상(殷相) 등 對신라 강경논자들이 세력을 잡아 왕제를 포함한 구귀족세력 40여명이 섬으로 추방당한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王庶子 40명이 좌평(佐平)으로 임명되는 등 왕족세력이 득세하여 대외 화평노선을 추구하게 된다.
(3) [복수·명예]등 왕실의 권위 고양
삼국전쟁에는 왕실의 존엄과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동기도 작용한다.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는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이 3萬의 병력으로 고구려의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전사시킨 평양성전투(371년)로 고구려의 원한을 사게 되어, 장수왕은 475년 漢城을 함락시키면서 개로왕을 살해하고 남녀 8천명을 잡아가는 보복적 조치를 취하게 된다. 백제와 신라 사이에도 한강 유역 쟁탈을 둘러싼 백제 성왕의 죽음, 642년의 대야성 전투에서 김춘추의 사회 사위 품석(品釋) 부부의 살해, 이로 인해 백제 멸망 시 신라 太子 法敏(文武王)이 부여융에게 가한 모욕적인 행동 등은 삼국전쟁의 많은 국면이 복수전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말해 준다. 또 중국의 수나 당이 고구려에 대해 취한 적대적 태도의 원인은 고구려가 사대(事大)하지 않는다는 대국의식에 있었다.
3. 국가봉건제의 성립Ⅱ
(1) 고려적 토지국유체제의 와해
2-12 고려의 전시과체제
태조23년에 설치된 역분전은 귀족 관료 등 지배계급에게 공식적으로 토지를 분급함으로써 나말 극도로 문란해진 토지 및 수취체계를 개선하고 농민에 대한 불법적인 착취를 예방하려는데 주 목적이 있었다. (三國末經界不正 賦斂無藝 高麗太祖卽位 首正田制 取民有度) 그러나 역분전은 勿論官階 視人性行善惡 功勞大小 給之有差라 하여 주로 충성도에 따른 자의적 기준에 의해 지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시과(田柴科)제도는 4대 광종에 의해 왕권이 안정되고 봉건정부의 관료체제가 일단 정비되자 관료들에게 물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관료들에게는 토지에 대한 수조권이 이양되었을 뿐이므로 토지 처분권이나 경작자에 대한 사적 지배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976년(경종원년)의 시정(始正)전시과는 이른바 四色公服制에 의한 관료체제의 정비와 함께 설치되었다. 직관과 산관이 모두 토지 분급의 대상이었고, 분급 규모는 최고가 田110/柴110결(紫衫1품), 최하가 21/10결(綠衫10품)이었다. 이 시정전시과는 그 모태가 되는 사색공복제가 紫衫18품, 丹衫10품(문반, 무반, 잡업 총30품), 緋衫8품(문반 잡업 총16품), 綠衫10품(문반, 잡업 총20품)으로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어 토지 분급 자체도 불철저하게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다.
改正전시과(998년 목종원년)는 관계가 18등급으로 정비된 따른 전시과의 보완이었다. 1등급에 해당되는 내시령 시중에게는 전100/시70결이 지급되고, 18등급에게는 20결의 전지만 지급되어 전반적으로 하향 조정되었다. 또 무반에 대한 문반 우위의 원칙이 전시과에 반영되어 무반들은 자신의 품계보다 1등급 낮은 품계의 전시를 지급받았다. 更定전시과(1076년, 문종30년)는 전시과 토지의 확대(약10만결로 추정됨, 강진철)로 인한 지급토지의 전반적 감축을 위해 시행되었다. 그 결과 산관들에 대한 토지 분급은 중단되었다. 이와 함께 개정전시과에서의 무반들에 대한 차별이 역전되어 문반들보다 1등급 높은 품계의 전시가 지급되었다.
이 전시과체제는 인종24년(1126년)의 이자겸의 난을 계기로 왕권이 약화되고 의종 24년(1170년)에 발생한 정중부의 난 이후 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 위기를 맞게 된다. 또한 원나라가 침공한 이후에는 친원 귀족세력이 형성되어 귀족관료에 의한 대토지소유가 전개됨으로써 전시과체제는 사실상 해체되고 만다.
2-13 여말, 민전의 처분권 강화
고려 정부는 건국 초 均田制의 원칙에 입각하여 민전 경작권에 대한 농민의 처분권을 불허하고, 표준적 소농경영을 확보하기 위해 민전의 長子 상속을 법제화한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후 주로 봉건지주들에 의해 위로부터 공전제가 붕괴되자 민전에서의 처분권 행사도 관행으로 이루어졌다.
·장자상속의 완화 ; 예종17년의 "文契가 없는 父祖田(=民田)은 嫡長子에게 우선 지급한다"는 규정은 文契(분할 상속 문서)가 있을 경우 장자 이외의 상속도 허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매매관행의 묵인 ; 신우 3년 도평의사사 상소문 "군인으로 징발 당한 閑散子弟들이 말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경작지까지 판다." 한산은 한관(무관)과 산관.
·대여(전대소작)의 허용 ; 정도전의 삼봉집에 여말 지방 勢强者(토호)들이 耕地를 多占하고 無田貧民層에 借耕하여 半收하므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생긴다는 기록. ※고려 借耕制는 반수제 관행의 始發. (신라후기의 田制문란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기도 함)
·증여 ; 충렬왕11년 "外方人吏等(지방관청의 잡역) 以所耕田 賂諸權勢 于請別常" 인리(지방관청의 잡역) 의 역을 면제받기 위해 소경전을 뇌물로 받침.
서구봉건제의 경우 하급소유권의 강화는 반(半)봉건적 지주제, 혹은 기생지주제를 거쳐 근대적 토지소유로 나아가는 기반이 된다.(일반경제사 5-17 참조) 그러나 민전의 처분권 강화가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이에 따른 지대형태의 변화 및 지대율의 경향적 저하'라는 경제적 경로를 밟아서 성립한 것이 아니라, 봉건지주들에 의해 국가의 토지 지배력이 약화된 사정을 성립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민전의 처분권 강화는 다시 봉건지주들의 민전 침탈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2-14 고려말 대토지소유의 발달
민전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고려후기의 권문세가들은 민전 침탈을 기반으로 대토지소유를 전국적 규모로 확대한다. 김준(金俊)과 같은 자는 "列置農莊 以家臣文成柱管全羅 池濬管忠淸"의 지경이었고, 왕실마저 농장 확대에 나서 "其料物庫屬 三百六十莊處之田"의 형편이었다. 토지국유체제가 사실상 붕괴된 것이었다. 귀족관료들의 농장은 공신전 등을 기초로 합법적으로 이루어진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매입, 침탈(=奪人土田), 投託 등을 통해 불법적으로 형성되었다. 또한 농장의 형성은 정치적 권력에 의존하는 것이므로 귀족관료들 사이에는 치열한 권력투쟁이 전개된다.
농장의 경영 역시 봉건국가의 규정에 위배되는 방법이 동원되었다. 직접경영의 경우에는 귀족에 속한 사노비를 사역했으나 사노비 중에는 양민을 押良爲賤하여 私奴化하는 일이 적지 않았고, 공노비까지 불법적으로 동원했다. 또 양민 노동력을 강제로 징발하기도 했다. 농민들에게 소작을 주는 전호(佃戶)경영도 보편적으로 이루어졌다. 농장 관리를 위해 장두(庄頭) 또는 창두(蒼頭)를 두었는데 이들은 신분은 가노(家奴, 외거노비)였지만 농장관리자로서 농민들을 지배하고 고리대 등을 이용하여 사적으로 착취했다. 이들의 주 임무는 토지관리, 전호와 노비의 감독, 지대징수, 생산물 수송 등이었다.
고려정부가 귀족 관려들에게 지급했던 과전(=兩班田柴)에서는 수조자가 일정액의 조세를 국가에 납부했으나(顯宗四年十一月... 文武兩班宮院田 受三十結以上 一結例收稅五升), 농장의 소유자들은 조세를 일체 납부하지 않았다. 또 과전의 경우에는 국가가 정한 조율에 의거해서 수취했지만 농장주들은 임의로 결정한 납조율을 경작자들에게 강요했다. 과전을 경작하던 농민들은 收租者에게는 租만 납부하고, 공부 역역 잡세 등은 국가에 납부했으나 농장주들은 농민의 모든 부담을 자신이 수취했다. 그것은 농장을 소작 경작하는 전호라 할지라도 농장주의 사민으로 전락했음을 의미한다. "時權貴多聚民 謂之處干 以逋三稅 其弊莫甚"
농장은 농장주의 정치적 권력을 기반으로 하는 소농경영 지배라는 점에서 노예노동에 기초한 로마의 라티푼디움Latifundium경영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국가봉건제 하에서 농장의 존재는 국가봉건제의 2대 근간인 중앙집권적 권력체제와 토지국유제의 균열을 표상한다. 다만 국가봉건제 하의 대토지소유가 봉건지대의 범주 내에서 봉건지주들에 의해 주도되는 한, 그것은 국가봉건제 자체를 해체하는 힘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대토지소유는 봉건정부의 재정을 약화시키고 봉건지주들 사이의 권력투쟁을 야기함으로써 새로운 봉건정부의 탄생, 즉 왕조교체로 나아간다.
(2) 과전법의 성립
2-15 성립과정
귀족관료들에 의한 토지의 사적 지배가 확대되자 고려말에 등장하는 신흥사대부를 중심으로 하는 개혁파들은 토지국유제를 재확립할 목적으로 공양왕 원년(1389년) 전국적으로 양전사업(量田事業)을 실시한다. 그것은 신진사대부 세력이 훈구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붕괴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개혁파들은 양전사업 추진기구인 급전도감(給田都監)을 설치하고 기존의 모든 공사전 토지대장 불살라 버림으로써 훈구파들의 토지 소유권을 폐기했다. 또 양전사업을 실시한 결과 공양왕 3년(1392년)의 전국 토지 규모가 종전의 50∼60만결에서 실전 623,097결과 황원전 175,030결로 총 798,127결로 확대되었다.
왕조교체를 주도한 개혁파들은 양전사업을 토대로 새 왕조 창건의 물적 기반을 확립하기 위해 공양왕 3년(1391년) 토지국유를 강화하는 과전법체제를 수립한다. 개혁파들의 명분은 "革私田於諸道 拯民湯火之中"으로 집약되고 토지국유론의 대의는 다음의 상소문에 잘 드러나 있다. "古者 田在於官 而援之民 民之以耕者...天下之民 無不受田者 無不耕者 故貧富强弱不甚相過 其田之所出 皆入於公家 而國亦富"
2-16 과전법체제 하의 토지 분류
과전법 하에서의 토지는 수조권의 귀속에 따라 공전(公田)과 사전(私田)으로 구분된다. 수조권이 개인에게 이양된 토지는 사전으로 분류되는데, 사전은 다시 공신전(功臣田)과 같이 세(稅)가 부과되지 않고 세습까지 인정되는 형태[=사전1]와 과전(科田)과 같이 세가 부과되고 수조권의 행사가 원칙적으로 현직에 있을 때만 부여되는 형태[=사전2]로 구분된다. 따라서 사전1은 토지국유의 원칙에서 이탈한 토지이나 사전2는 토지국유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조선의 최초의 공신전은 45인의 이른바 회군(回軍)공신에게 지급되었는데 1등공신 중 1급은 토지 220결, 노비 30명을 받았고 4급은 150결의 토지에 15명의 노비를 받았다. 또 2등공신에게는 100결과 10명, 3등공신에게는 60결에 7명이 지급되었다. 과전은 문무시산관(文武時散官)에게 150결에서 10결까지 차등 지급되었고, 역시 관료수조지에 속하는 군전(軍田)의 경우에는 지방유력자나 한량들에게 본래 토지에 10∼5결을 가급(加給)했다. 관료수조지의 조세납부체계는 다음과 같다.
사전을 제외한 모든 토지는 공전(公田)으로 분류된다. 농민보유지 즉 민전(民田)이 공전의 일반적인 형태이고, 국가나 관청이 수조권을 행사한다. 이 경우에는 稅가 따로 부과되지 않으므로 이른바 '지대=조세'체계가 성립한다. 그런데 공전의 개념은 고정적이지 않다. 가령 토지국유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될 때는 국가의 모든 토지가 공전에 속하게 되어 사전1도 공전에 포함되며, 사전2로 분류된 토지도 때로는 공전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과전법체제 하에서는 분류가 곤란한 토지들이 상당수 존재하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또, 다음 2-17의 조세규정을 적용하면 다음과 같이 재분류할 수 있다.
2-17 조세 및 토지 관리 강화
조선 봉건정부는 대토지소유의 재발을 방지하고 담세자로서의 농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조세 납부량을 비롯한 각종 토지관리 규정을 제정한다. 租는 논의 경우 결당 쌀(=半搗米) 30두, 즉 2석이었고 밭은 결당 잡곡 30두였다. 다만 흉년에는 수확율의 감소 정도에 따라 조율을 8할에서 전액까지 면제했다. 조율은 일반적 봉건지대율인 1/10이었으므로 결당 수확은 20석 정도였을 것이다. 稅는 논이 白米 2두, 밭은 黃斗 2두로 규정되었다.
또한 조선 정부는 봉건지주들의 공전잠식을 방지하기 위해 과전과 공신전을 경기도 내에 설치했다. 고려 말기에 대토지소유가 확대된 이유 중의 하나가 개인수조지를 지방에 설치하여 제대로 감시를 할 수가 없는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전호(佃客)의 지위를 강화하여 전주, 즉 봉건지주가 전호의 경작권 빼앗으면 처벌하는 한편, 고려 후기부터 일반화된 전호의 경작권 매내나 양도 행위도 일체 금지함으로써 민전에 대한 봉건적 통제를 강화했다.
(3) 민전 및 민전농민에 대한 통제
2-13에서 본 '처분권이 강화된 민전', 즉 경작권의 매매나 양도가 가능해진 농민보유지를 점전(占田)이라고 한다. 여말의 대토지소유가 점전의 집적을 통해서 성립한다는 것은 이미 본 바와 같다. 그런데 권문세족이 아닌 중소관료나 지방관리들도 소규모의 점전을 보유하고 있었고, 자영농민 내부의 분화에 의해서 농민이 점전주로 되기도 했다. 조선 정부는 권문세족들의 대토지소유는 해체할 수 있었지만 소규모로 산재해 있는 占田들까지 회수할 수는 없었다. 점전의 발전은 자영농민의 몰락을 동반하여 봉건적 잉여수취의 기본단위를 축소하며, 이들 몰락농민들이 권세가들에 투탁(投託)하여 신량역천(身良役賤)의 처간(處干)으로 될 경우 신역(身役) 조차 부과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조선 봉건정부는 점전의 발전을 엄격히 통제하고 처간들을 농민으로 복귀시키는 한편, 농민들을 호패법 5가작통법 등으로 토지에 긴박하게 되는 것이다.
2-18 양전사업의 지속
조선 봉건정부의 민전 지배는 양전사업을 토대로 한다. 이미 공양양 3년에 1차 양전사업을 완료한 조선 정부는 과세 대상에서 누락된 은결(隱結)과 여결(餘結)을 추적하고 민전의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건국 이후에도 양전사업을 계속한다. 1차 양전사업 결과 798,127결로 집계된 전국의 토지 규모는 태종4년 경기도를 제외한 7도에 대한 조사 결과 782,543결로 되어 여기에 경기의 140,142결(1차사업결과)을 보태면 총922,685결로 증가한다. 또 태종 6년까지 30여만결의 토지가 새로이 파악되어(=剩出田) 총1백22만여결로 늘어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1430년 전후의 전국의 총 토지규모는 1,655,234결이다. (북한의 조선통사에는 1,719,860결)이다. 도별 토지면적은 다음과 같다. 경기200,347 충청236,300 전라277,588 경상301,147 황해104,772 강원65,916 평안308,751 함경130,411
2-19 民田에 대한 국가지배의 강화
먼저 民田에 대한 봉건적 이해를 보기로 하자. 민전은 대체로 다음의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상속받은 토지, 농민이 대대로 점유해 온 토지 (累代耕作之田, 父子相續之田, 祖業田, 父祖田, 祖上傳來之田, 父祖永業田)
·현재 경작, 생계유지하는 토지 (所耕田, 窮民所耕食之地, 耕田, 民間耕食之地, 農民所耕之地.)
·농민보유토지, 농민이 관습적으로 점유 경작하는 토지 (民結, 民畓, 平民田)
조선 봉건정부의 민전에 대한 통제는 귀족관료들의 민전 침탈을 금지하고 농민들의 처분권 행사를 제약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과전법과 함께 공포된 민전 관련 규정에는 "수조권자인 田主가 관료收租地의 경작자인 佃客의 소경전(所耕田)을 빼앗지 못한다"고 명기되어 있다. 이를 위반할 때는 侵奪公私田者 依律決罪라 하여 침탈한 토지면적이 1부∼5부일 때 笞20에 처했고, 매5부마다 加刑한다고 되어 있다. 그 목적인 借耕制의 부활을 방지하고 소농경영을 확보하는데 있음은 물론이다. 농민들의 처분권에 대해서는 "佃客의 소유권 이전, 매매행위를 금지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여기서의 소유권이란 경작권을 의미한다. 또 민전수조율의 최고한도를 1/10로 설정하여 수조지에서의 병작반수 관행을 금지한 것은 이미 본 바와 같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대토지소유의 혁파에만 급급하여 이미 광범위하게 전개된 민전의 불균등 집적상태를 방치함으로써 표준농민(=안정적 稅源)의 확보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2-20 民田農民의 부담
조선 봉건정부는 "有田有租 有身有役 有戶則有貢物"(세종실록 권32, 8년4월)이라 하여 국가봉건제의 전통적인 수취방법인 '조용조'체제를 채택하고 있다. 국가봉건제 하에서의 봉건지대는 현물지대(租, 調)와 노동지대(=庸)의 총합이다. 위의 규정은 이른바 王土王民사상을 조용조 부과의 근거로 삼고 있는 것이다.
전조에 대한 초기 규정에는 손실답험법에 따라 그 해의 수확량을 조사하여 부과하되 畓에서는 結當 쌀30斗(=半搗米, 2石), 田에서는 結當 잡곡30斗를 초과할 수 없었다. 실사의 결과 수확량이 감소했을 때는 최고액의 8할에서 전액까지 감면했다. 이 초기규정은 1444년에 貢法체계로 전환된다. 수조권을 이양받은 관료는 白米2말(논)과 黃斗2말(밭)의 전세를 납부했으나 세조12년 과전법이 직전법으로 바뀐 이후에는 전세가 폐지되었다.
농민들의 노동력 부담인 庸은 요역( 役, =戶役)과 신역(身役)으로 구분되고, 요역은 다시 국역(國役)과 잡역(雜役)으로 분류된다. 국역은 소경전 每 8結에 1丁씩 징발되었고 부역일수는 年6日이었으며 초과 시에는 초과분을 다음 해에 면제해 주었다. 당시 대부분의 농가가 8결 이하였으므로 다수의 농가를 합해서 8결이 되도록 作戶하여 그 중 한 명을 出丁하는 방식을 취했다. 雜役은 지방관청에서 부과하는 부역으로 특별한 규정이 없었고 수시로 동원되었다. 身役은 양인의 경우 주로 군역(軍役)에 동원되었다. 군역의 부담 의무자는 양반과 공사천(公私賤)을 제외한 丁男(16∼60세)이었다. 봉족제도(奉足制度)라 하여 3丁을 1군호(軍戶)로 편성하고 그 중 당번 1丁이 군역을 부담할 때 비번(=奉足, 補人)들이 그 비용을 충당토록했다. 비용은 대체로 1개월에 무명1필이었다. 군역기간은 1년에 2개월(水兵은 1개월씩 2회)였다.
농민들에게는 또 호세로서의 調(=貢物)가 부과되었는데 지방수령의 책임 하에 그 지방의 특산물이 징수되었다.
민전농민들은 위의 전세, 요역, 공부를 납부하는 외에 雜稅라고 하여 중앙 각사나 지방 관부에서 경상비 부족이 발생하거나 임시 재정지출이 요구될 때 수시로 부과하는 각종 부담들을 납부해야 했다. 이러한 초기규정들은 대동법 시행으로 전면 개정된다.
2-21 민전농민에 대한 「경제외적 강제」체제
국가봉건제 하에서 '경제외적 강제' 체제(일반경제사 4-13 참조)는 주로 세원으로서의 표준적인 소농경영을 확보하기 위해서 성립한다. 이미 관습적 보유농으로 성장한 조선의 농민들을 국가봉건제 유지를 위한 재정기반으로 묶어두기 위해서는 엄격한 강제 체계의 수립이 필수적이었다.
조선 봉건정부는 직접생산자들을 신분적으로 구속하였다. 양인과 노비는 토지의 처분권과 재산 소유를 제한 당하고, 결혼 의복 주거 등 일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양반들과 차별을 두도록 강요당했다. 또한 농민들을 토지에 긴박하기 위해 ("一以均賦役 二以禁流移") 호적을 제정하여 매 3년마다 정리했다. 이 법은 태종12년에 호패법으로 발전하여 16세 이상의 모든 남자는 신분에 따라 각기 다른 호패를 차도록 했다. 각 도의 요충지에 설치된 防護所에서 통행인들의 호패를 조사하여 만일 토지를 이탈했을 경우에는 '論罪還本'하는 이른바 유민추쇄(流民推刷)가 뒤따랐다. 단종3년에는 五家作統法을 만들어 범죄나 流亡이 발생했을 경우 연대 책임을 물었다.
2-22 정리 ; 토지국유제의 재성립 과정
4. 국가봉건제의 동요
(1) 토지관리체제의 균열
2-23 과전법의 해체
건국 초 조선정부는 관료들에 의한 토지 침탈을 엄격히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관료들은 관료수조지인 과전에 대해 사적 지배를 강화해 나갔다. 규정에는 공신전, 수신전(守信田, 관료의 미망인에 지급), 휼양전(恤養田, 관료의 유자녀에게 지급)만이 세습이 인정되었으나 과전의 대부분이 상속되었다. 매매와 기증 등 처분권의 행사도 일반화되고, 병작반수(竝作半收)가 관행으로 되어 국가수조지로까지 파급되어 갔다.
과전의 세습과 사유화로 관료수조지가 확대됨으로써 기내의 토지만으로는 신진 관료들에게 과전을 지급할 수 없게 되었다. 새로 임명된 관료들 중에 從仕久而未受科田者가 늘어나자 태종17년(1417년) 과전을 충청 전라 경상의 하삼도(下三道)로 이급한다. 그러나 이 이급 조치는 과전의 사적 지배를 더욱 촉진하게 되고, 인근 공전의 침탈로까지 이어진다.
세조는 과전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1466년(세조12년) 과전법을 페지하고 職田法을 도입한다. 관료수조지를 축소하는 것을 기본방향으로 하는 직전법에서는 散官에 대한 과전 지급을 중단하고 그동안 불법으로 세습되어 온 과전을 몰수하여 현직 관료에게만 지급함으로써 '미수과전자'를 해소했다. 또 최고 지급 면적을 150결에서 105결로 낮췄다. 세조의 이같은 조치는 양반 계급 특히 현직에서 물러난 관료들의 강력한 반발을 샀으며, 현직자들은 퇴직 후를 대비하기 위해 농민 수탈을 일층 강화했다. 관료지주들은 수확량 조사를 불공정하게 실시하여 전조를 過徵하고, 땔감, 나물, 채소 등 조외잡물(租外雜物)의 납부를 강요했다.
직전법이 성종12년(1471년) 직전세(職田稅)로 전환된 것은 전호에 대한 관료의 직접 수탈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른바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로 불리는 직전세법은 농민이 전조를 정부기관인 경창(京倉)에 납부하고 이를 정부가 수조자에게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조외잡물은 여전히 전주에게 직접 납부케 함으로써 농민에 대한 가렴은 중단되지 않았다.
2-24 民田의 지주제경영 확산
조선 초의 토지개혁이 占田의 불균등 집적을 방치함으로써 균전법의 시행으로까지는 확대되지 못했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민전 및 민전농민에 대한 통제' 서론 참조) 민전에 대한 조선정부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고려 후기부터 발전해 온 농민의 민전 처분권은 조선 초기부터 사실상 정부에 의해 묵인되었다. 그리고 세종 6년에 농민이 토지 매매 내용을 관부에 등록하고 입안(立案, 국가승인서)을 받을 때는 매매 사실을 공인하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민전의 처분권을 허용했다. 凶作, 長利, 잡세부담, 관혼상제 등으로 경제적 파탄 상태에 몰린 농민에게 매매를 금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토지 매매는 임란 이후 私文記(=전답매매문기)만으로도 공인되었다가, 현종∼정조 대에 다시 公文記로 바뀌고, 그 후 다시 私文記로 대체되는 변화를 겪는다.
이처럼 민전 처분권이 국가에 의해 공인되자 占田의 불균등 집적은 더욱 심화된다. 주로 내외 관료들이 점전주로 되었고, 농촌의 부농들도 점전의 집적에 가담했다. 그 결과 세종 18년 강원도 관찰사의 장계에 따르면 강원도내의 농민들은 다음과 같은 심각한 분화를 보이고 있다.
大戶 (50결 이상) 10호
中戶 (20결 이상) 71호
小戶 (10결 이상) 1,641호
殘戶 (6결 이상) 2,043호
殘殘戶 (5결 이하) 7.773호
위의 통계는 5결 이하 농가를 잔잔호로 통합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1결에도 미치지 못하는 농가가 허다했다. 점전의 이같은 불균등 집적을 바탕으로 소작관계가 발전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또 "品官鄕吏 壙占土田 招納流亡 竝作半收(태종6년 12월 河崙의 상소)"에서 보는 것처럼 고려 이래의 병작반수 관행 역시 지속된다. 실제로 병작반수제는 초기부터 과전에서만 금지되어 왔다. '竝作半收'의 竝作은 지주와 전호가 모두 국가에 대해서는 作人이라는 의미이다.
민전에서의 지주제 확산은 국가직영지로 파급되어 15세기 후반부터 정부는 직영지의 노비경작을 포기하고 지주제경영으로 전환한다. 점전을 토대로 발전한 농장에서 지주제경영을 채택한 것은 물론이다. 수조권자로서의 田主와 경작권 보유자로서의 佃客으로 구성되었던 초기의 토지경영체제는 경작권 다점자로서의 地主와 경작권 망실자로서의 佃戶가 결합하는 형태로 변모한 것이다.
2-25 민전農莊의 확대
조선시대에 발달한 민전농장은 토지국유에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不輸私田으로서의 고려후기의 농장과는 성격이 다르다. 민전농장은 국가의 상급소유권과 그 실현형태인 봉건지대를 존치시키면서, 하급소유권 즉 경작권의 집적을 통해 성립한다. 민전농장의 발전은, 서구봉건제 하에서 성립하는 반봉건지주제와 마찬가지로 상급소유권의 상대적 위축을 전제하는 것이므로 민전농장 역시 토지국유제를 해체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중앙 귀족관료들의 농장은 주로 민전의 매입에 의해 형성된다. 이들은 국가로부터 받는 막대한 수입으로 장리(長利)를 운영하고 토지를 매입하여 대규모의 토지를 형성한다. 이들의 연간 수입은 공신전과 賜田, 그리고 科田이나 녹봉으로부터 쌀을 기준으로 년간 총 500석에서 1500석에 이르기 때문에 농장 형성의 경제적 기반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경기, 하삼도에 朝士의 농장이 많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며, 가령 成三問 父子는 경기 충정 전라 3도에 11개의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중앙 관료들의 농장 소유가 확대되면서 이들의 물적 기반도 관료전이나 녹봉에서 농장으로 전환되었다. 관료전에서의 수조량이 1결당 기껏해야 3-4석인데 비해 절반지대를 수취하는 농장에서는 수십에서 수백결을 수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관료전의 폐지나 녹봉의 감소에도 의연할 수 있었던 것도 농장 수입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농장의 획득 또는 보호가 관료출사의 한 목표가 되었으며 지배계급의 분열과 권력투쟁의 배후에도 농장을 둘러싼 경제적 갈등이 개입되어 있었다.
지방 관리나 향리(鄕吏) 閑良 등의 지방 士族들은 주로 불법침탈의 방법으로 농장을 형성했다. 鄕吏계층의 농장경영에 대해서는 "凡鄕吏 置農莊于村落 以良家女及官婢爲妾 誘引無賴之徒 使之如奴婢者(단종실록9권 12月丁未)"라는 기록이 보인다. 대표적인 在地농장주로는 세조時의 함경도 이시애(李施愛)를 꼽을 수 있다. 그는 토호들을 세력 기반으로 하여 會寧 府使에 올라 流亡民들을 초납(招納)하여 대농장을 경영한다.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킨 데는 호패법을 함경도까지 확대하는 것에 대한 반발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왕으로부터 사여(賜與)된 私田을 농장으로 경영하는 경우도 많았다. 세조 조의 정난공신 洪允成은 막대한 토지를 사급(賜給) 받아 홍산(鴻山)농장으로 만들었고, 수빈(粹嬪)은 세조로부터 고양의 두 농장과 온산농장을 사급 받았다. 이 경우는 民田이 아니라 內需司의 토지를 노비와 함께 사여하는 것이 통례였다. 드물기는 하지만 王命에 의해 황무지 개간권을 부여받아(=折受) 이를 농장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지주제를 기반으로 형성된 농장경영은 민전에만 국한되지 않고 국가기관의 수조지인 屯土(=官田농장), 왕실소유지인 司宮庄土(=宮房田농장), 사원의 수조지인 寺田(=寺田농장) 등으로 파급되었다.
조선 왕실은 건국 초기부터 대토지소유에 집착했다. 함경도 영흥의 대지주 출신인 태조 이성계는 여말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토지를 더욱 확대하고, 과전법이 수립되기 직전 360개소의 장처전(莊處田)을 몰수하여 사유화했다. 왕실 토지와 재산은 本宮에서 관리하다가 후에 內需司로 넘겼는데 15세기경 대략 1만결의 토지와 1만명의 노비가 내수사에 속했다. 내수사는 또한 고리대를 운영하여 전국적으로 560여개소의 장리소 설치했다.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1427년 공해전 3,000결을 지급받는 조건으로 325개소를 폐지했으나 1483년 모두 부활시켰다. 내수사는 토지 이외에 산림, 초원, 어장, 하천 등도 침탈했다.
2-26 지주경영 및 농장의 발전에 따른 지대수취의 변화
지주경영과 여기에 기반한 농장의 발전은 국가봉건제의 '지대=조세' 체계를 와해시킨다. 2-20에서 본 바와 같이 표준적인 봉건농민은 전조, 요역, 공부와 잡세를 납부하도록 되어 있다. 이 네 가지 부담을 합해서 '표준지대'라고 할 때 지주제경영은 표준지대 내의 田租를 왜곡한다. 즉, 전조의 부담의무자는 전호로 전락한 농민이 아니라 경작권 소유자인 지주로 되고, 전호는 전조 대신 소작료('소작지대')를 지주에게 납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주제로 경영되는 토지에서 국가가 수취하는 표준지대는 지주가 납부하는 전조와 전호가 납부하는 요역 공부 잡세로 구성된다. 또 전호는 소작인으로서의 소작지대와 공민으로서의 요역 공부 잡세를 부담하게 되는 것이다.
(2) 농민에 대한 수탈 강화
봉건국가의 농민 보호정책은 재정기반으로서의 표준적 소농경영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불철저한 토지개혁으로 점전의 불균등한 집적이 방치되고 이를 토대로 지주제경영이 발전하게 됨으로써 소농경영의 확보에 기반한 농민보호정책의 파탄은 시간문제였던 것이다.
2-27 전조율 인하의 2중성
2-20에서 본 초기의 전조율은 1444년의 공법(貢法)체계에 의해 조정된다. 공법은 과세의 형평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로서 토지를 비옥도에 따라 여섯 등급으로 나누고(=田分6等) 수확량을 그 해의 豊凶에 따라 아홉 등급으로 구분하여(=年分9等) 차등적으로 과세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전분6등법은 '수등이척(隨等異尺)의 법'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법에 따라 토지 1결은 1년(상상년 기준)에 400말을 소출해 낼 수 있는 면적의 토지로 규정된다. 1등전은 3000∼4000평, 6등전은 1만3천평 정도가 1결로 되었다. 또 년분9등법에 의해 전조율이 전반적으로 인하되어 최고 상상년(上上年)의 전조가 20두로 정해졌다. 이는 수확량의 1/20에 해당된다. 하하년(下下年)의 전조는 4말이었다.
16세기 초에 공법이 폐지되면서 전조율은 다시 인하되어 1결당 4말로 통합된다. 租率의 이같은 引下는 2-26에서 본 전조부담자의 변화를 주요 배경으로 한다. 즉 봉건 지배계급인 지주가 전조 납부자로 됨으로써 전조의 인하를 압박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전조율 인하에 따른 재정 손실분은 각종 부가세의 형태로 전호를 포함한 농민들에게 이전되었다.
조율의 인하는 또한 자영농민에 대한 과징(過徵)을 일반화시켜 농민들은 초기의 결당 20말을 초과하는 전조를 납부했다. 실제로 공법이 시행되기 이전에는 세수가 60만석 정도였으나 공법 시행 이후인 성종 대에는 백만석으로 증가하고 있다. 또 전조율의 인하를 구실로 재해 구제조치(=給災)가 폐지되어 쭉정이만 남은 흉년에도 '볏짚은 사료로 쓸 수 있다'는 이유로 과세했으며, 묵밭(=陳田)도 과세대상으로 되었다.
2-28 군역에서의 착취
요역 중에서 농민에게 가장 큰 부담은 軍役이었다. 봉건국가의 군역은 農兵一致의 원칙 위에 있었고, 군역비용을 위해 土地를 지급하는 것(=府兵制)이 상례였다. 가령 고려정부는 3丁으로 구성된 1軍戶에게 田17結을 지급하여 1정이 당번을 설 때 비번 2丁이 그 땅을 경작하여 당번에게 지급했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군역 부담에 따른 보상을 마련하지 않고 농병일치만을 제도화했던 것이다. 따라서 군역은 처음부터 농민들에게 큰 고통을 주고 있었다. 만일 농민이 군역을 피하기 위해 도주하면 인징(隣徵)과 족징(族徵)의 연대처벌이 이루어졌다.
당시 농민들의 군역은 직접 부담, 가포의 납부, 고립 등의 방법으로 수행되었다. 고립(雇立)은 농촌의 유력자들이 대역자(代役者)를 세우는 것으로서 보병의 경우 2개월에 포 17-18필, 수병은 20여필을 지불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대역자는 보통 양반의 가노들이었고, 그 수입은 양반이 차지했다. 그러나 군역에서의 착취는 가포 납부에서 조직적으로 이뤄졌다. 가포(價布)제도는 납포(納布)로서 군역을 면제해 주는 대신 군역 희망자에게 가포를 지급한다는 것이 본래 취지였다.
그런데 국가재정의 악화로 수조지와 녹봉을 제대로 지급받을 수 없게 된 지방 무관들이 가포 수탈에 혈안이 된 나머지 직접 군역에 나온 농민들을 귀가시키고 대신 가포를 납부케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를 방군수포(放軍收布)라고 한다. 이 경우 각 군영에 등록된 군인수에 따라 무관의 가포수입이 증가했으므로 무관의 지위가 등록군인수로 결정되는 것이 관행으로 되었다.
1537년의 군적수포법(軍籍收布法)은 방군수포를 현실화한 것으로서 병역의무자는 2필의 군포를 납부하고 정부가 이를 지방의 병영에 이송하면 각 병영들이 현지에서 군인을 고용하는 것을 말한다. 이로써 조선의 농병일치제(=府兵制)는 무너지고 용병제가 도입되는 것이다.
2-29 공납의 수탈
공납 즉 貢賦는 관청의 수탈이 가장 심한 부문이었다. 공납은 지방특산물, 수공업제품, 진상품과 공납품의 운반비 부담으로 구성되었다. 각 도별 특산물 가지 수는 다음과 같다. 경기191, 충청229, 경상283, 전라258, 황해272, 강원228, 평안138, 함길131. 수공업제품에는 직물, 문구용품, 가구, 종이 등 지배계급의 일상용품들이 망라되어 있다. 그리고 진상품은 본래 지방수령이 납부하는 것인데 모두 농민에게 전가되었다.
공납의 기본적인 문제는 공납품의 임의 지정이었다. 중앙 관료들의 수요에 맞춰 품목을 정하다 보니 지방의 특성과는 맞지 않는 품목이 부과되기도 하고, 가령 황해도에 부과된 '어금니가 난 늙은 노루'와 같이 납부하기 어려운 품목이 들어있기도 했다. 납부 수량도 적지 않았고, 납부 시기가 불합리하게 정해지는 경우도 많았다.
공납은 그 수집 책임이 지방관에게 있었기 때문에 지방 관청들의 농간과 횡포가 심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방납(防納)과 인납(引納)인데 인납은 1-2년치 공물을 한꺼번에 징수하는 것을 말한다. 방납은 두 가지 형태로 이뤄진다. 하나는 관리들이 상인들과 짜고 농민들의 납부품에 대해 트집을 잡아 불합격 판정을 내려서 농민들로 하여금 상인들이 미리 준비해 놓은 공납품을 구입해서 납부케 하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주로 그 고을에서 생산되지 않는 貢物이 지정될 경우 상인 등 방납인(防納人)이 이를 대납하고 농민들에게 쌀과 布로 그 비용을 받는 것을 말한다. 이 경우는 그 자체로서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문제는 농민에게 터무니없는 가격을 요구하는 데 있다. 가령 1601년 9월의 경우 호피 한 장의 가격이 무명 2백필이었고, 배 1개가 무명1필이었다. 관료들과 한 통속이 된 방납인은 주로 상인과 양반지주들의 하인들이었고, 관찰사나 현령 등이 가명으로 참여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2-30 환곡의 고리대 착취
환곡(還穀)은 주로 춘궁기의 빈민들에게 정부가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 후에 갚도록 하는 대표적인 구휼(救恤)제도이다. 따라서 이자가 붙지 않는다. 그런데 조선정부는 환곡 운영상의 자연 손실분(=耗穀)을 보전(補塡)한다는 명목으로 쌀 한 가마에 1말5되 정도의, 약 10%에 해당되는 이자(=植穀)를 부과했다.
환곡 운영이 지방관청에 맡겨졌으므로 지방관리들은 환곡을 이용해서 각종 불법적인 수탈을 자행했다. 이들은 植穀을 증징하기 위해 비축량의 절반만 방출하기로 되어 있는 규정을 어기고 비축환곡 전량을 농민에게 방출했다. 중앙에는 허위보고를 한다고 해서 이 폐단을 허류(虛留)라고 부른다. 반백(半白) 또는 분백(分白)은 두량을 속이거나, 半은 겨를 섞어서 半石 이하의 환곡을 1石으로 대출하는 수법이다. 농민들은 보통 5-6두의 환곡을 빌리고 15두(=1석)의 元穀과 1두5승의 植穀을 합해 16두5승을 갚아야 했다. 돈으로 환산하여 대부하는 경우에도 갖가지 명목으로 60∼70%에 달하는 고리대를 징수했다. 지방관리들은 또 환곡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강제로 대부(=늑대, 勒貸)하기도 했다.
환정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원곡의 소진으로 15세기 말에 환곡 운영기구인 의창(義倉)이 일단 폐지되었으나 곧 상평창(常平倉)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한다. 상평창은 쌀값 안정을 위해 구매와 판매를 조절한다(=常平)는 본래의 설치 목적에서 벗어나 환곡을 통한 고리대 수탈을 계속했다.
2-31 정리 ; 조선전기 국가봉건제의 동요과정
5. 국가봉건제의 전반적 위기
(1) 양란 이후의 사태 진전
2-32 왜란과 호란의 영향
두 차례에 걸친 倭亂(1592-1598)과 역시 두 차례에 걸친 胡亂(1627, 1636-1637)은 동요하는 조선의 봉건적 지배기구에 큰 타격을 가했다. 가장 큰 문제는 재정 파탄이었다. 전란 중 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이탈했고, 양반지주들의 토지를 중심으로 면세전과 탈세전이 급증했다. 왜란 이전에 170만여결이었던 농토가 전란으로 황폐해져서 전후에는 50만여결로 축소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전란 이전에도 만성적으로 재정부족에 허덕이던 조선정부는 전쟁 수행과정에서의 막대한 전비 지출과 전후의 세원(稅源) 격감으로 최악의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봉건사회를 지탱하던 신분제도 역시 크게 흔들렸다. 천민과 양인들 중 전공을 세우거나 전비(戰費)를 부담한 자들의 신분상승이 이루어져 신분적 구속력이 약화되었다. 천민은 적 1명을 베거나 5백석 이상을 납부하면 면천(免賤)되었고, 양인은 돈으로 벼슬을 사거나(=納粟補官), 양반의 지위를 얻었다(=空名帖). 전란을 틈타 도주하는 노비가 속출했고, 아예 노비문서를 불태우기도 했다. 왜군이 서울에 입성하기 이전에 경복궁이 불탄 것은 노비들이 노비문서를 관장하는 장예원(掌隸院)에 불을 질렀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란을 통해 천민과 양인의 수는 줄어들고 양반의 수가 증가함으로써 봉건적 사회 기강이 급속하게 무너졌다. 특히 전란 중 여실히 드러난 지배계급의 무능과 民兵으로 각종 전투에 참가한 민중의 저력이 대비된 것은 조선후기 민중의식 고양의 계기가 되었다.
2-33 전후 위기에 대한 지배계급의 대응
조선 정부는 극도로 악화된 재정과 사회적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봉건적 질서의 회복에 나선다.
문란해진 토지제도를 바로잡아 田租 부과의 기초자료로 삼기 위한 양전사업이 1601년부터 1604년에 걸쳐 실시되었다. '수등이척(隨等異尺)'을 폐하고 단일한 척(尺)을 사용한 이 양전사업은, 그러나 양반지주들의 비협조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도리어 양반지주들이 양전사업을 이용, 토지문서를 조작하는 방법으로 농민들의 토지를 수탈하는 경우까지 발생했다.
사회기강을 회복하기 위한 조치도 취해졌다. 전란 중 도주한 노비 검거에 나서고 관노비에 대한 관리를 엄격히 한다. 왜란 이전에도 신분을 속이고 양인으로 행세한 노비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노비관리는 전후 조선정부의 시급한 현안이었다. 노비의 전국적 실태를 파악하기 위한 대대적인 추쇄 작업(=奴婢推刷)은 1655년에 이루어진다. 또 1608년 즉위한 광해은 농민을 토지에 긴박하기 위해 실시와 보류를 거듭하던 호배법(號牌法)을 일부지역에서 실시한다.
조선정부의 위기 수습 노력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가운데 지배계급은 전란 이전의 행태를 되풀이했다. 양반관료와 토호들은 전후에도 지속적으로 국유지를 침탈하여 대토지소유를 확대해 나갔다. 왕족들까지 궁방전 확대에 나섰다. 또한 중앙재정이 고갈되자 관아와 군영 등 국가기관에서는 필요경비를 자체 조달한다는 명목으로 국가수조지를 침탈하여 관청수조지(=屯田)를 늘렸다. 그 결과 가령, 경기도 양지현의 경우 4개 면 중 2개 면의 토지가 둔전으로 변했다.
중앙관료들의 분열은 전후 더욱 치열해졌다. 왜란 전 東西 분열과 동인들의 南北 분열까지 진전되었던 당쟁은 임란 후 한층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당쟁이 치열하게 전개된 데는 농장의 획득과 보호라는 경제적 배경이 있었다는 것은 이미 본 바와 같다(2-25 참조).
·성종(1470∼94)의 훈구 세력 견제, 士林등용
·1498(연산)무오사화 훈구-사림, 김일손의 史草문제
·1504(연산)갑자사화, 연산-훈구, 폐비윤씨문제
·1519(중종)기묘사화, 훈구-사림, 조광조의 개혁, 공신책봉문제
·1545(명종)을사사화, 사림-사림, 대윤과 소윤의 권력 투쟁
·1575(선조8) 사림 내 동서분당
·동인 집권, 南人-北人 분열
·임란 후 北人 집권, 大北-小北으로 분열
·대북 집권, 骨北-肉北-中北-皮北-淸北-濁北으로 분열
·인조반정으로 西人 집권, 功(勳)西-淸西, 老西-少西로 분열
·공서 집권, 山 -漢 , 原黨-落黨으로 분열
·숙종 등극, 南人집권, 淸南-濁南으로 분열
·숙종6년(1680) 西人집권, 老論-少論으로 분열
·老論, 64년간 장기집권 (⇒1801년 安東 金間의 세도정치 수립)
2-34 大同法의 실시
전후 조선정부가 거둔 중요한 성과는 대동법을 제정하고 그 실시에 들어간 것이었다. 대동법은 광해 원년(1608년), 이원익 한백겸 등이 수미법(收米法)을 일부 수정하여 제시한 공납제도의 개혁방안이었다. 즉, 공납 납부자와 정부 사이에 개재한 중간 착취를 제거함으로써 농민의 부담을 경감시키고 봉건재정을 확대한다는 취지였다. (공납의 폐단에 대해서는 2-29를 참고).
대동법은 과세단위를 戶에서 토지, 즉 결수(結數)로 바꾸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공납을 쌀로 납부하는 수미(收米) 관행은 대동법에서도 채용되었다. 전통적으로 戶稅에 속했던 공납이 토지의 크기에 따라 차등 부과됨으로써 농민들의 담세부담은 크게 경감된 대신 양반지주들의 부담이 늘어났다. 또 실질적인 과세량도 줄어들어 이전의 과세량을 토지면적에 따라 환산할 경우 대체로 결당 20두에서 100두에 이르렀으나 대동법에서는 결당 12두로 고정되었다. 과세량의 인하에도 불구하고 수취 방법을 단순화하여 중간 착취를 배제함으로써 재정수입은 더욱 증가했다.
대동법은 양반지주들의 부담 증대와 중간 착취에 종사했던 방납인 등의 반발로 그 시행에 많은 애로가 있었다.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실시된 것은 법이 제정된 지 꼭 백년 후인 1708년이었다. 대동법의 성립과정과 주요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6c초, 조광조에 의해 공물제도의 개혁주장
1569, 이율곡 收米法주장
1594, 유성룡 제의로 수미법 실시(8도에 1결당2말)
→서울 내 상품유통원활치 못하고, 방납인들의 반대로 조기 폐지
1608, 수미법 일부 수정한 대동법 제정
-경기도內 제한실시
-米納(=大同米)
-관할부서로 선혜청(宣惠廳) 설치
-부과량 ; 1결 16말 (10말은 중앙부서, 6말은 지방관서 사용)
1623, (仁祖元年) 조익 전국적 실시 주장하여 3도에 대동을 설치
-지주 관료들 반대로 강원도에만 확대
-수송 등 입지조건 고려하여 차등과세
1651, 충청도에 실시, 1결당 10말 부과
1658, 전라도 해안지방 27개 고을실시, 산간지방 26고을은 1660년
1667, 경상도에 실시, 1결당 13말
1708, 황해도에 실시, 결당 12말 + 별수미 3말 부과
⇒전국적으로 1결당 12말로 통일
(2) 봉건위기의 제국면
2-35 토지의 사적 지배에서 오는 재정 감소
전란 이전의 대토지소유가 전후에도 지속되었음은 이미 본 바와 같다. 매입, 고리대를 통한 압수 등의 전통적인 방법도 계속되었으나 권력을 이용한 직접 강탈이 점차 지배적으로 되었고, 농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황무지를 개간하는 방법도 널리 사용되었다. 중종 대에 20년 세도를 누린 윤원형 같은 권력자는 그 재산이 왕실보다 많았다고 한다. 조선 후기사회에서는 상품화계관계의 성장에 따라 토지의 상품화가 진전되어 상인계급들도 대토지소유에 가담했다.
봉건지주들의 농장경영이 국가 재정을 압박하게 되는 구체적인 요인은 다음과 같다. (1) 양반관료들은 전호 즉 소작농민들에게 半收지대를 수취하면서 자신이 부담해야 할 전조(田租)의 납부는 기피한다. (2) 권력을 이용하여 수확량을 임의로 낮춤으로써 전조의 경감 혹은 면제를 획책한다. (3) 노비가 경작하는 농장의 경우에는 양인들의 투탁(投託)을 유인함으로써 세원의 감소를 초래한다. (4) 양반지주들의 고율 소작료 부과로 농민의 토지 이탈을 부추킴으로써 역시 세원의 감소를 가져온다.
2-36 자영농민의 전세 부담 가중
소작농으로 전락하지 않은 자영농민은 국가 재정의 기반이었음에도 조선정부는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이들에 대한 착취를 강화한다. 또한 조선 후기의 자영농들은 양반관료들의 토지 침탈 위협과 지방 관료들의 중간 착취에 시달려야 했다.
이른바 '3政(=田政, 軍政, 還政)의 문란'에 의한 농민의 부담은 전후에 더욱 가중되는데 전정의 경우는 각종 부가세의 징수가 그 원인이었다. 자영농의 토지에는 1결당 전세 4두 외에 대동미 12斗, 三手米(=훈련도감 군사비용) 1두 2승, 結作米(=균역법 실시 후 군역 대체) 3斗를 포함한 11개의 부가세가 중앙정부로부터 부과되었다. 전세를 포함한 위의 네 가지를 토지세로 볼 경우 결당 20두 정도가 되는데 이것만으로는 결코 높은 세액이 아니다.
문제는 지방관아에서 부과하는 읍징, 이징(吏懲) 등 28종류의 부가세와 세곡 운반을 위해 전세에 부과되는 선가미, 人情米 등 4종류의 조세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결국 자영농민은 1결의 토지에 총 44개의 조세를 부담하게 되며 그 총액은 대체로 100두에 이르렀다. 전세수취가 결당 4말의 정량제로 전환된 이후에는 급재(給災)제도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농민들은 흉년에도 위의 조세를 모두 납부해야 했다. 지방관리들은 부가세의 임의 적용, 백지징세(白地徵稅, =陳田에 과세), 도결(都結, =公金 유용분 보충) 등으로 농민들을 착취했다.
2-37 군역의 폐단과 균역제의 성립
임란 이전(1537년)에 제정된 軍籍收布法은 모병제에서 용병제로의 변질이었고, 착취 대상이 노동력에서 현물로 바뀐 것이었다. 임란 이후 조선정부는 군대조직의 정비에 나서 중앙의 5위를 5군영(=훈련도감, 총융청, 어영청, 수어청, 금위영)으로 개편하여 상비군체제로 전환했으며, 지방의 진관(鎭管)체제는 천민출신도 포함된 속오군(束伍軍)제도로 바꿨다. 개편된 군대조직 중에서도 상비군체제로 된 5군영의 유지에는 막대한 재정이 소요되었다. 전세에 부가된 三手米는 훈련도감의 유지비로 사용되었다.
군적수포법 하에서도 군포의 수탈은 여전했다. 중앙의 각 군영과 지방의 병영 감영에서는 자신에게 할당된 군포를 독자적으로 징수했으며, 군포 징수에 지방수령과 아전들도 개입하여 이른바 백골징포(白骨微布) 황구첨정(黃口簽丁, 생후 3일이면 군적에 올림)의 불법수단까지 자행했다. 전란 과정에서 상당수의 양인들이 공명첩의 매입 등을 통해 양반으로 상승하여 군역 부담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농민들의 부담은 더욱 커졌다.
1751년의 경우 조선정부는 군포 납부 대상자를 50만으로 잡고 있으나 17세기 말의 대상자가 30만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이는 군포 과징을 위해 대상자를 임의로 확대한 것이었다. 당시의 함경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총호수가 134만호였는데 이 중 잔독호(=빈민) 72만을 제외하고, 나머지 60여만 중에서 4/5는 양반과 아전 등 비 대상자였기 때문에 결국 10여만의 양인들이 50만호에 해당되는 군포를 납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군포 납부를 피해 도주하는 농민이 발생할 경우에는 전란 이전과 마찬가지로 인징(隣徵)과 족징(族徵)으로 연대책임을 물었다.
이처럼 군역의 폐단이 심화되자 그 시정을 위한 방책이 논의되었다. 유형원은 농병일치제를 회복하기 위해 농민들에게 일정한 토지를 지급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토지개혁을 전제하는 것이므로 양반지주계급의 반발을 사게 되어 책택되지 못했다. 또 양반과 양인을 구별하지 말고 가호(家戶)를 대상으로 군포를 부과하자는 호포제(戶布制)도 제시되었으나 역시 양반불역론(兩班不役論)을 편 지배계급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군역으로 인한 농민의 토지 이탈과 극단적인 저항이 계속되자 정부는 1750년 균역법(均役法)을 제정하고 이를 시행한다. 균역법은 농민들의 군역 부담 일부를 지배계층인 왕실, 양반지주, 상인, 양인 유력층에게 분담시키는 것이었다. 즉 군포를 1필로 감면하는 대신, 전체적인 부족분에 대해서는 토지에 대한 결작미 징수(1결당 2두, 또는 5전), 해세(海稅, =어장과 염전에서 받는 魚鹽稅와 선박에 부과하는 船稅로 구성되며 왕족들이 수취해 옴)의 이관, 탈세전을 적발하여 부과하는 은여결세(隱餘結稅), 그리고 부유한 양인들에게 명색뿐인 선무군관(選武軍官)의 벼슬을 주고 매년 무명 1필을 부과하는 선무군관포 등으로 충당키로 했다. 이로써 농민의 과중한 군역 부담은 일시적으로 해소되었으나 이후 3정의 문란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다시 농민 부담이 가중된다.
(3) 농민저항의 전개과정
2-38 왜란 이전의 농민동향
15세기 중엽 이후 봉건적 지배체제가 동요하기 시작하고 농민에 대한 봉건적 착취가 강화되자 토지를 이탈하는 농민이 늘어난다. 농민의 토지 이탈은 토지가 봉건적 제수탈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이들 유민(流民)들은 다른 농촌으로 흘러 들어가 전호나 고공(雇工, =농업노동자)이 되기도 하고 도시로 유입되어 상공업에 종사하기도 했으며, 산간으로 도피하여 火田을 일구기도 했다. 또 유리걸식하거나 도적으로 변하는 농민들도 있었다.
조선정부는 농민의 유망을 막기 위해 호패법, 五家作統法 등을 시행했고, 특히 이징옥의 난(단종1, 1453년)과 이시애의 난(세조13, 1467년)에 함경도로 流入된 이탈농민들이 대거 참가한 사실이 밝혀진 후로는 농민 긴박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그러나 토지 이탈은 농민이 봉건적 착취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으므로 조선 봉건제 전 기간에 걸쳐 유민의 물결이 끊이지 않았다.
유민들 중에는 무리를 지어 도적질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 15세기 중엽이후 봉건정부의 치안력이 약해지자 산간지역을 중심으로 무장 초적들이 빈번하게 출몰했으며, 때로는 관아를 습격하고 정부군과 전투를 벌리기도 했다. 중앙의 양반관료들 중에는 이들을 권력 투쟁에 이용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또 흉년이 심할 때는 농민들도 무장 폭동을 일으켰다. 이들의 주요 활동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469년경. 지리산일대 장영기등 지방관청 및 토호 습격
·1506년 중종반정 시 반정일파들 김포일대의 무장단과 연계
·1519년 기묘사화로 귀양간 김식, 경상-전라 무장단과 연계 모색
·1530년경 경기-전라-충청에 농민 반란, 순식등 서울까지 진출
·1553년 경상도 영천지방 흉년으로 농민들 무장투쟁
·1557년경 이천 시흥 본거지의 오연석, 경상도-황해도와 연계활동
·1559년(명종) 황해도 본거지 임꺽정, 경기-강원-평안 등 전국적 연대
→임꺽정, 민중의 광범위한 지지, 정부군과 3년 전투 수행
→정부, 황해도 田稅 면제하고 평안도는 절반 감면 등 조치까지.
2-39 양란 이후의 농민 실태
왜란 이전에 이미 민전의 30-40%를 차지했던 지주제경영은 전란 이후에는 그 비율이 더욱 높아진다. 숙종16년(1690년) 1월의 승정원일기에는 "盖以三南農民 率多竝作 富人之民 而有自己田畓旣少 雖有之 滿一結者絶無"라 하여 17세기 후반의 삼남 지역 농민의 대부분이 전호로 전락했고, 적은 수의 자영농마저 1결에도 미치지 못하는 토지를 부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과장된 면이 없지 않지만, 자작농도 겸소작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당시의 농촌 현실을 잘 전해주고 있다. 또한 균역법이 시행되기 이전인 18세기 전기에는 군포 착취에 시달린 나머지 스스로 노비로 떨어지는 양인이 많았다. 빈민들은 5-6말의 쌀이나 30-40냥에 자신을 파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심청의 공양미 2백석은 결코 헐한 가격이 아니었다.
17세기 후반부터 농업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하자 봉건지주를 포함한 지배계급들은 증대된 잉여의 전유를 위해 봉건적 착취를 강화한다. 그러나 봉건적 착취기구는 생산력과 함께 성장하는 자본제적 생산과 날로 고양되는 민중의식을 완전히 제압하기에는 너무 낡아 있었다. 착취기구의 구조적 취약성은 착취의 강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대토지소유의 지속적인 확대와 지주제경영의 보편화로 인해 조선 후기의 농민의 일반적 존재형태가 자영농(=佃客)이 아니라 소작농(=佃戶)으로 되었다는 것은 이미 본 바와 같다. 정약용은 19세기 전반기의 농민 부담을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강만길, 한국근대사, P.43)
·1결당 수확량 600斗 (平作, 풍작; 800, 흉작; 400)
-공식적 結稅 22斗2승 (전세미,대동미,삼수미,결작미)
-기타 중앙부가세 5승8홉7작 (호조 作紙米 등)
-세곡운반비 4종 2두2승
-지방관아징수 28종 32두 8홉2작 (적을 경우 29두4승3홉2작)
-군포의 실제 부담 10두4승1홉 (←2.43필)
-환곡부담 12두∼18두
총 85두4승7홉9작
-소작료 300두
위 표에서 만일 지주가 결세를 포함한 토지세들을 소작농에게 전가할 경우 농민 부담은 수확량의 절반을 훨씬 넘는 385두 정도를 납부하게 되는 것이다. 또 3-2에서 본 것처럼 자영농의 경우에도 경작 면적이 1결에 미치지 못하는 농민이 태반이었으므로 소작농의 형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처럼 만성적인 궁핍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농민들은 18세기 전반기부터 봉건정부를 상대로 무장 폭동을 일으킨다.
·1703, 전국적으로 농민폭동
3月 천안, 갇힌 농민들 파옥해서 구출하고 빼앗긴 무명 탈취
3月 포천, 농민군 조총과 활로 투쟁
3月 서흥 농민들이 관아습격 무기탈취, 투쟁
·1708, 전라도 장흥지방 농민폭동
·1710, 전라도 노령지방 流民들 중심의 무장폭동
·1721, 4월 부터 서흥과 안악에서 조총으로 무장한 기마대 투쟁 발생
5∼6月에 전국적으로 잇달아 발생
·1727, 전라도 변산반도, 영암 등지 流民중심 봉기 (남원, 여주, 이천)
·1733, 전라도 연해지방 대규모 농민폭동
→ 섬에서 화폐를 주조하고, 밀무역선들과도 연계
·1738, 평안도 삼등현 중심 청나라에 보내는 수출품 약탈
·1741, 강원·황해·평안도에서 농민 폭동 발생
2-40 사회적 갈등과 대립의 전면화
한편, 아래로부터 성장하는 자본제적 관계는 비록 맹아적인 단계이기는 했지만 낙후된 봉건 수취기구와 경합하면서 증대되는 사회적 잉여를 흡수하고 있었다. 농민분화에 의해 성장한 서민지주 및 부농, 그리고 고리대를 운영하는 상인들이 일반 농민들과 대립했다.
사회적 갈등과 대립은 농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구지배세력과 신흥세력 간, 그리고 지배계급 내부에서도 심각한 수준으로 전개되었다. 기본적 대립은 아래 그림의 A계열과 B-C계열 간의 체제대립이었고 B계열과 C계열 사이의 대립은 자본제적 생산의 발전에 따른 계급분화의 범주였다. 대립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1)농촌사회
·봉건지주-전호 ; 봉건적 착취, 소작료분쟁, 항조운동
·서민지주-전호 ; 경제적 착취, 소작료분쟁, 항조운동
·부농-농촌 임노동자 ; 품삯 갈등 (雇主-雇工)
·상업자본-빈농 ; 고리대 운영
·봉건지주-서민지주 ; 토지 확대 경합
·지방士族(舊鄕)-신흥세력(新鄕, =부농, 서민지주) ; 농촌사회 지배권
(2) 상공업분야
·봉건적 특권상업-신흥상업
·봉건적 관청수공업-신흥 수공업 (민간수요중심, 농촌수공업등)
(3) 지배세력 및 이데올로기
·세도정치-탈락양반
·성리학 이데올로기-실학, 천주교, 민간신앙
2-41 민중의식의 고양과 농민저항의 일상화
국가봉건제의 전반적 위기는 민중의식의 고양을 가져왔다. 신분제를 포함한 봉건적 지배기구의 전통적 권위는 왜란 이후 급속히 위축되었고, 날로 심화되는 봉건적 착취는 민중들의 저항심리를 자극했다. 또한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기반으로 농민들 자신의 역량이 강화되어 갔으며 자본제적 생산이 생성되는 영역을 중심으로 반봉건적 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고양된 민중의식은 문학을 비롯한 민중예술의 발전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정감록이나 미륵사상 등 민간신앙의 형태로 표출되기도 했다.
18세기 후반부터 전개된 일상투쟁은 고양된 민중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정부의 부당한 조치에 대해서 농민들은 더 이상 봉건적 복종으로 일관하지 않았다. 집단적으로 관아로 몰려가 부당 조치를 조목조목 따져서 항의하고,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에는 조직적인 저항을 전개했다. 납세거부 운동을 벌이고 상급기관에 의송(議送)을 전달하거나, 왕에게 직소하는 방법들을 동원했다. 괘서(掛書)로 수령의 비리를 폭로하기도 하고 수령 면전에서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어 위신을 실추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또 벌목이 금지된 솔밭 등에 불을 질러 관청을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또한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소작농민들은 소작료를 낮추기 위해 볏단을 빼돌리거나 지대 납부 자체를 거부하는 항조(抗租) 운동을 조직했다. 고공들은 품삯 문제로 고주와 갈등을 일으켰고, 야반도주로 고리대 부담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봉건정부의 착취에 대해서는 피역(避役, =신분상승, 양반사칭, 투탁 등), 流亡과 같은 전통적인 방법과 집단 행동 이외에도 수령과 지주에 대해 악소문을 유포하는 와언(訛言), 산에 올라가서 관료의 비리를 크게 외치는 산호(山呼), 거화(擧化, =횃불시위), 관료나 지주 집에 요구사항과 욕설을 써서 투척하는 투서(投書), 역시 지배계급을 비난하는 글을 벽에 붙이는 괘서(掛書) 등의 일상투쟁이 동원되었다.
농민의 집단행동은 무력투쟁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세도정권이 수립된 직후인 19세기 초기에 발생한 주요 농민폭동은 다음과 같다.
·1808. 경상도 仁同지역, 농민 60명이 관아 습격
·1808. 함경도 단천부사, 농민에 쫓겨나고 북청부사도 곤욕을 치룸
·1809. 개성의 수백명 민중이 양반집을 파괴하고 관아에 투석
·1810. 춘천부사 농민들에게 곤욕
·1811. 황해도 곡산의 농민 수백명 관아 점거, 죄수 방면
부사를 가마니에 넣어 30리밖에 내다 버림.
2-42 서북 민중항쟁
1811년 12월18일부터 다음 해 4월18일까지 5개월에 걸쳐 전개된 서북 민중항쟁의 배경에는 조선봉건제의 제모순이 응축되어 있다. 우선 평안도는 전통적인 차별지역이었다. 경기도와 경상도 양반들이 중심이 된 조선정부는 평안도 출신의 중앙 진출을 억제해 왔다. 그 결과 이 지역에는 사족이 제대로 형성될 수 없었기 때문에 중앙관료와 지방관들의 집중적인 수탈 대상이 되었다. 외직(外職) 중에서 평양감사 자리가 인기가 높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서북지역에서는 대중(對中) 무역이 성행하여 대규모 밀무역 등을 통해 성장한 상인들이 많았다. 이들은 유상(柳商)으로 불리면서 서울의 경상(京商), 개성의 송상(松商)과 경합할 정도였다. 대상인들은 유기업과 광산업에도 진출하여 해당 부문에 공장제 수공업을 도입하는 등 자본제적 생산을 발전시켰다.
이처럼 농민들은 봉건적 착취에 시달렸고, 사족과 토호 및 지방 서리들은 지역차별에 묶였으며, 상인과 수공업자는 봉건적 특권상공업 체제와 대립하는 형편이었다. 서북항쟁이 농민저항에 머물지 않고 전민중적 투쟁으로 평가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실제로 봉기군의 지도부에는 토호 상인 수공업자 등이 참여하였고, 봉기군은 농민을 주축으로 하여, 유민 임금노동자 도시빈민 등으로 구성되었다. 서북항쟁의 전개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4. 3∼4. 18, 정부군 성 밑에 땅굴파고, 19일 새벽 1천8백근의 화약으로 성 폭파
·4. 18, 정주성 함락. 포로 2,983명 중 여자 및 10세 이하자 제외한 1,917명학살
(홍경래 전사, 홍총각등 처형, 우군칙, 이희저는 탈출)
서북 민중항쟁은 다른 농민봉기와는 달리 정권타도의 목표 아래 장기간에 걸쳐 조직된 투쟁이었고 봉건통치의 전복과 신분제도의 철폐를 표방하는 등 반(反)봉건적 지향도 선명했다. 봉기군의 지도부가 농민들의 구체적인 이해와 결합된 구호를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농민들을 동원하지 못한 전술적 결함은 있었지만 서북농민 항쟁은 농민들의 반봉건투쟁 의욕을 고취시키는 중요한 계기였다.
2-43 三南 농민항쟁
농업지대인 삼남지역은 전통적으로 봉건적 수탈의 근거지였다. 농민들은 봉건지주들의 소작료 압박과 봉건국가의 조세 착취에 시달렸다. 삼남 농민항쟁의 진원인 진주농민폭동(1862. 2)의 직접적인 원인은 경상 右兵使 백낙신의 가렴주구였다. 백낙신은 이미 관곡의 불법대여 등으로 4만-5만냥(=쌀1만5천석 분량)을 사취했으며, 농민들이 황무지를 개간하면 잠채(潛採) 누명을 씌워 이를 강탈해 온 전형적인 탐관오리였다. 폭동의 원인은 도결(都結=공금유용으로 발생한 적자) 2만8천석과 환곡 부족분 2만4천석을 일시에 해결하기 위해 농민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한 것이었다.
이에 반발한 진주부근 30개 리의 농민 수만 명이 죽창으로 무장하고 주변의 부호 집들을 파괴하면서 진주관아를 향해 진군했다. 2월18일 진주읍을 장악한 이들은 악질적인 아전들을 처형하고, 120여 호의 양반과 부호 집을 파괴하고 10만냥을 약탈했다. 인근 23개 면에서도 폭동이 일어나 3명의 아전과 그 자식들이 살해당했다. 스스로 초군(樵軍)이라 불렀던 농민들은 병마사백낙신과 진주목사를 체포하여 죄상을 따지고, 백낙신으로부터 도결과 환곡의 폐단을 시정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2월23일 해산했다. 정부는 이들이 해산한 뒤에야 안핵를 파견하여 병마사와 목사를 파면하고 원성의 대상이 되어온 지방수령들과 아전·향임들을 문책했다. 그러나 폭동을 일으킨 농민들에 대한 처벌은 더욱 가혹하여 적극 가담자들은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고, 폭동주모자인 유계춘·김수만·이귀제 등은 처형되었다.
그러나 진주민란에 자극된 삼남지역의 농민들은 경상도지역에서는 그 해 4월부터 단성, 함양, 거창 등 11개 고을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전라도에서는 3월 27일 익산에서 3천 농민이 봉기했으며 함평에서도 폭동이 일어났다. 또 충청도에서는 5월의 회덕 봉기 이후 공주, 은진, 연산, 문의로 폭동이 파급되었다. 삼남 농민들의 폭동은 그 해 말까지 지속되어 마침내 갑오농민전쟁으로 이어진다.
제3장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
3-1 봉건위기의 세 가지 계기
조선봉건제의 위기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계기에 의해 심화된다.
첫째, 건국 초 조선정부는 토지국유제를 철저하게 관철하지 못함으로써 고려봉건제의 위기구조를 그대로 계승했다는 점이다. 민전에서의 점전의 발전을 방치하여 표준적 소농경영의 확보에 실패했고, 귀족관료들의 사적인 토지 지배를 차단할 원천적인 장치도 마련하지 못했다. 그 결과 국가봉건제의 재생산에 요구되는 물질적 기반, 즉 봉건재정의 만성적인 결핍 상태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왜란 이전까지의 봉건위기를 주도한 이 태생적 결함은 조선봉건제의 전 기간에 걸쳐 작용하는 봉건위기의 기본적인 계기이다.
둘째, 두 차례에 걸친 전란 과정에서 봉건적 지배기구가 큰 타격을 받았다는 점이다. 전쟁을 통해 드러난 지배계급의 무능과 이에 대비되는 민중의 활약은 지배계급이 의지해 온 전통적인 권위를 위축시켰다. 또한 전란과정에서 천민과 양인의 신분상승, 또는 신분이탈이 광범위하게 이뤄짐으로써 봉건적 지배구조의 지주(支柱)인 신분제도의 동요를 가져왔다. 봉건적 통치력의 약화와 고양된 민중의식은 전란 이후 다양한 저항운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셋째, 조선후기의 사회적 변동을 추동(推動)한 것은 17세기 후반기부터의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이에 따른 자본제적 생산관계의 성장이다. 농민들은 봉건체제의 위기가 수탈의 강화로 귀결되는데 대해 직접적으로 저항하는(2-38 이하) 한편, 생산력 발전을 기반으로 봉건적 생산양식 자체를 지양해 나간다. 새로운 생산관계의 성장은 선행(先行)의 재정위기 및 통치위기와 결합하고 낡은 생산관계와 경합하면서 국가봉건제의 체제위기로 발전한다.
1. 생산력 발전과 상품생산의 성장
(1) 농업부문
3-2 영농법의 발전
조선후기의 농업생산력을 주도한 것은 영농법의 발전이었다. 17세기 중엽부터 보급되기 시작하여 18세기 중엽에 보편화된 모내기법(=移秧法)은 조선정부가 '가뭄에 농사 망친다' '병충해에 약하다'는 등의 이유로 조선 초기부터 금지해 온 파종법(播種法)이었다. 그러나 모내기법은 이전의 직파법(=水田直播)에 비해 단위 면적당 수확량이 높고, 노동력을 크게 절감할 수 있기 때문에 경작자들 사이에 급속도로 퍼져갔다. 숙종 20년(1694년) 7월의 승정원 일기에는 이앙법의 보급으로 농촌에서 직업을 잃은 사람이 많아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밭농사(=旱田)에서는 밭에 이랑(=壟, 보통 3자 정도의 두둑)이나 고랑(= , 1자 정도의 골)을 조성하여 작물에 따라 농종법(壟種法, 가령 배추나 마늘), 견종법( 種法, 가령 보리나 감자)으로 파종을 달리함으로써 수확량을 증대시켰다.
경지면적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농민들은 토지를 지속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윤작법(輪作法)을 확대해 나갔다. 논에서는 모내기법에 기초한 벼와 보리(밀)의 2모작이 이루어졌고, 밭에서는 가을보리와 콩(조)의 윤작이 성행했다. 윤작은 지력의 유지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조선후기에는 시비법(施肥法)이 발전했다. 조선 전기에도 객토(客土) 초목비(草木肥) 우마분(牛馬糞) 등의 비료가 사용되었으나, 후기에는 인분을 타 재료와 혼합하는 방식이 보급되어 비료의 종류와 양이 크게 늘어났다. 가령, 모판에 사용되는 비료는 볏짚지름, 망웃재(망우=논에서 나는 쇠귀나물), 닭거름, 개거름, 묵은 담벽흙, 누른흙, 잔디, 갈잎, 버들가지, 참깨묵, 목화씨 등 10여가지로 다양화되었다. 작물과 토질에 맞는 시비법도 개발되고 어촌에서는 어비를 사용하는 방법도 보급되었다. 시비법 개선의 효과와 관련하여 당시 농민들 사이에는 '거름이 약이다' '땅 사는 것 보다 거름 잘 쓰는 것이 낫다'는 인식이 퍼져갔다.
전란 이후 새로운 농작물이 도입된 것도 농민생활에 큰 도움을 주었다. 고추, 호박, 담배, 일년감(도마토)은 17세기에 유입되어 18세기에는 전국적으로 재배되었고, 1763년 일본에 통신사로 갔던 조엄이 들여온 고구마는 구황작물(=흉년의 대용식량)로 널리 보급되었다. 또 18세기 초에 개발된 인삼재배법은 19세기 조선경제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주었다.
그 외에도 농사관련 서적들의 간행으로 각종 식물의 재배법이 개량되었다. 가령, 목화재배에 있어서는 시비·파종·순자르기 등 각 재배 단계마다 새로운 방법이 개발, 보급되었다.
3-3 수리시설의 정비와 농기구의 개선
이앙법은 가뭄에 피해가 크다는 약점이 있었기 때문에 이앙법이 널리 보급되자 수리시설의 정비와 확대가 뒤따랐다. 관리가 부실했던 저수지 보수와 저수지 축조로 18세기 말에 국가에 등록된 저수지가 3,529곳에 이르렀고, 간단한 물막이 보는 2,265곳이나 되었다. 다음 표에서 보듯이 삼남 지방에서는 주로 경상도 지역에서 저수지 축조가 활발했다. ( )는 폐언(廢堰) 수이다.
당시의 큰 전수지로는 홍주 합덕제, 함창 공검지, 김제 벽골제, 연안 남대지 등이 꼽혔다. 수리시설이 정비는 이앙법을 더욱 확대시켰고, 밭을 논으로 전환하는 번작을 활성화시켜 수전의 비율이 점차 높아지게 되었다.
18세기에는 농기구의 종류가 다양화되어 농가마다 호미, 낫, 보습, 쟁기, 써레, 번지, 밀개, 곰배, 쇠스랑, 폐기, 가래, 괭이 등의 기본 농구가 갖추어져 있었다. 또 이들에 대한 개량도 수시로 이루어졌다.
써레 : 갈아 놓은 땅을 고르거나 흙덩이를 잘게 하는 기구
번지 : 씨를 뿌리기 전에 흙을 고르는 널판대기
땅에 떨어진 곡식을 긁어모으는 기구
고무래 : 흙을 긁고 펴고 고르는 기구, 아궁이 재를 긁어내는 기구
곰배 : 고무래의 방언 흙덩이 깨고 씨를 묻는데 사용
18세기 후반에 잠시 사용되었다가 자취를 감추는 풍고의 경우는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성장을 억제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풍고는 타작 후 낟알과 북데기를 분리하는 기구인데, 바람이나 부채질에 의존하는 것보다는 작업 능률이 훨씬 높았다. 그러나 풍고를 사용할 경우 낟알만 소롯이 남아 지대 납부 시 농민에게 불리했기 때문에 농민들은 그 사용을 꺼렸던 것이다.
18세기 후반부터는 경지면적도 확대되었다. 평안도 등을 중심으로 황무지 개간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강릉과 대관령 사이의 산간지대에도 마을이 형성되어 산림지역을 농토화했다. 개간과 번답에 의해 논 면적이 확대되어 '천일록'에 의하면 1720년에 밭은 84만5천결, 논은 50만9천결로 논의 비율이 37.6%에 이르렀다. 15세기에는 논의 비율이 30%가 채 되지 못했다.
3-4 농산물 수요의 증대
농업생산력의 발전은 농산물 수요의 증대와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농업부문에서의 상품생산의 발전, 즉 상업적 농업의 성장을 가져온다.
농산물 수요의 증대는 주로 도시인구의 증가와 비농업마을의 형성에 의한 것이었다. 봉건적 수탈과 만성적인 기근으로 농촌을 이탈한 농민들은 도시로 유입되어 상업 날품팔이 등에 종사했고, 혹은 천예(賤隸)마을로 흘러들어 새로운 수공업촌을 형성하기도 했다. 또한 금광 은광 등을 중심으로 광산촌이 넓게 조성되었다. '여유당전서'에 "풍년에도 쌀값이 내리지 않고, 고기와 소금 값이 오르는 것은 광산 때문"이라고 한 것은 광산유입인구가 적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수공업의 발전으로 수공업 원료가 되는 농산물의 수요도 크게 증가했다. 가령 무명 삼베 모시직조업의 발전은 관련 섬유작물의 재배를 확대시켰고, 죽세공업 돗자리공업 제지업의 발전은 대 왕골 닦나무에 대한 수요를 증대시켰다.
3-5 비전업 상품생산
농산물의 상품생산은 일반적으로 비전업(非專業) 상품생산으로 출발한다. 곡물류처럼 자가소비 후 남은 잉여분을 상품화하는 경우도 있고, 목화나 담배처럼 곡물생산과 병행하는 경우도 있다.
곡물의 상품생산은 한성 주민들의 곡물 수요를 겨냥한 여주 이천지역의 농민들에 의해 대체로 18세기부터 시작되었다. 대체로 여분의 곡물을 상품화했는데 지주가 지대 수취분의 일부를 내다 파는 것이 상품화된 곡물의 주류를 이루었다. 지주보다는 규모가 작았지만 부농과 중농들도 여분의 곡물을 상품화할 수 있었다. 일반농민들의 대부분은 채무나 조세의 납부를 위해 필요식량의 일부를 상품화했다. 또 보리나 밀로 바꾸기 위해 시장에 쌀을 내오기도 했다. 여주 이천 지역에서는 벼를 일찍 출하해서 고가를 받기 위해 올벼를 심는 농가도 있었다.
목화는 곡물에 비해서는 전업생산이 진전된 부문이었다. 그러나 면직업이 농업에서 분화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구매자도 농민이 주류를 이루었으므로 그 수요가 군포 납부나 자가소비를 위한 무명 직조로 제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목화의 상품생산은 대체로 곡물 재배와 병행되었다. 그러나 금산 옥천 양산 등 목화전업농가가 많은 지역에서는 목화재배로 인한 농가 수입이 "기름진 논의 소출과 맞먹는다"고 할 정도로 높았다. 또 목화는 다른 농사보다 재배가 까다롭고 품이 많이 들었으므로 부농들이 고용노동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17세기부터 자가소비용으로 밭모퉁이에 재배하기 시작한 담배는 18세기에는 상품생산 단계로 진입했고, 1730년대에 '기름진 땅에도 담배를 심어 생업화'하는 농민 대두할 만큼 전업생산이 진전되었다. 택리지에는 "진안의 담배, 전주 생강, 한산·임천의 모시, 안동·예산의 왕골은 부유한 자들의 이득의 원천이다"라고 전하고 있다. 18세기 말부터는 평안도 성천 지방에서 생산되는 담배가 질과 생산량에서 국내 최고로 인정받았다.
3-6 전업 상품생산
도시주변의 농촌에서는 18세기부터 채소농사에 전업하는 농가가 늘어났다. 채소는 작은 면적에서도 상품생산이 가능했으므로 무우, 배추, 오이, 가지, 마늘, 파, 고추, 미나리, 토란, 호박 등의 작물이 시장을 목표로 재배되었다. 서울 근교에서는 왕십리·이태원·청파·산고지·석교·연희동 등에 채소가 많이 재배되었으며 다른 대도시 주변에도 채소 재배지가 확대되어 갔다.
18세기 초에 인공재배가 시작된 인삼은 18세기 후반에는 그 생산량이 산삼을 앞질렀다. 인삼은 국내시장에서는 비싼 산삼의 대용(代用)으로 수요가 높았고, 중국과 일본에서도 수요가 급격히 늘어났으므로 인삼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전업생산 작물로 되었다. 특히 인삼은 대중국 수출에서 은(銀)을 대체하는 품목으로 성장하여 1798년-1810년까지 년간 120근에 지나지 않던 수출량이 1847년 이후에는 4만근으로 늘어났다. 당시의 인삼 총생산량을 최소 5만근으로 잡을 경우에도 그 총액이 7백만냥(5만근×140냥)에 이르는데 이는 쌀 140만섬(=현재 50만섬)에 해당된다. 따라서 재정부족에 허덕이던 조선정부가 인삼을 전매화한 것은 당연한 조치였다.
인삼재배는 전업생산 뿐만 아니라 자본제적 토지경영 방식인 차지농업(借地農業)을 발전시켰다. 지주와 포주(圃主)가 분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다른 작물에 비해 지력 소모가 심했기 때문에 일반 토지 소작료의 2∼3배, 많게는 5∼6배의 차지료를 화폐로 선불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 인삼은 파종에서 수확까지 5년-7년이 소모되는 복잡한 재배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삼포는 주로 고용노동에 의해 운영되었다.
(2) 공업부문
3-7 광공업 생산력의 발전
광공업은 17세기 중엽까지는 농민의 강제부역에 의존했으나 점차 전업화된 점꾼(광군, 연군)들을 고용함으로써 생산성 향상을 가져왔다. 특히 작업장내 분업이 발전되어 채광과 제련 공정이 분리되고, 채광의 경우에도 굴토자(채굴공)와 부토자(운반공)의 분업에서 역사군(채굴공) 구군(동발공, =광산 구덩이에 나무틀을 짜서 작업장化 하는 일꾼), 반수(=갱내의 물을 퍼내는 사람), 수운군(운반)으로 분화했다. 작업장내 분업의 발전에 따라 새로운 생산도구들도 등장했는데, 가령 도르레 원리를 이용하여 깊은 갱 안의 광석을 줄로 말아서 운반하는 유형소차는 채굴 작업의 안전도와 신속성을 크게 향상시켰다.
금속가공부문에서는 17세기 중엽 이후 상인계층들을 중심으로 대중수요가 크게 늘어난 유기(鍮器, 놋그릇)공업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유기공업에서도 작업장내 분업이 진전되어 양푼과 대야를 생산하는 양대점의 경우 대장(작업반장)을 필두로 곁대장(부반장 겸 용해공), 앞망치 . 곁망치 . 선망치, 가질군(선반공, 놋그릇을 곱게 깎는 일꾼)·네핌가질군·네핌앞망치, 안풍구.바깥풍구 등으로 세분화되었다. 또 생산도구도 망치 15종, 집게 21종, 가질도구 10종 등으로 다양하게 발전했다.
19세기 초에는 품종별 분업생산이 이루어져 경기도 안성지역에는 유점(압연제품, 양푼·대야), 시점(젓가락), 연죽점(빨뿌리, 대통)이 들어서고, 19세기 중엽부터 평안도 정주지방에는 양대점, 바리점(바리·합), 숟가락점(수저·주걱), 촛대점(촛대·향로·분통), 대통점(빨뿌리·대통) 등으로 전문화되었다. 당시 개발된 유명한 동광으로는 안면, 갑산 고진동이 있다.
3-8 관청수공업체제의 해체
국가봉건제 하의 수공업은 관청수공업과 민간수공업으로 대별되고 민간수공업은 다시 가내수공업과 공장과 사장(私匠)에 의한 장인수공업으로 구분된다. 민간수공업은 자가소비를 위한 가내수공업이 주류를 이루었고 장인수공업은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우수한 장인들은 공장(工匠)으로 선발되어 관청수공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민간수요에 응하기 어려웠고, 사장(私匠)들은 신역(身役)을 포함한 각종 요역에 동원되었다.
관청수공업은 공천(公賤)과 신량역천(身良役賤)의 공장(工匠)들이 담당했는데 중앙관청과 귀족관료의 수공업제품 수요를 조달하기 위해 129종 약2,800명의 경공장(京工匠)이 중앙 30개 관청에 배속되어 있었다. 또 지방관청의 관수와 진상품을 생산하는 27종 약3,800명의 외공장(外工匠)이 지방 각 관아와 군영에 소속되었다. 이들 공장들은 관청에 등록(=장인등록제)되어 봄 2개월, 가을 4개월의 부역에 동원되었다. 부역에 나오지 못할 때는 장세(匠稅)를 물어야 했다. 또 공역(公役)이라 하여 법정 부역일 外에도 양반들의 임의 강제에 동원되었다.
봉건적 수공업을 주도해 온 관청수공업은 17세기 전반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한다. 우선 대동법의 시행으로 관청수공업에 소요되는 각종 원료가 제대로 공급되지 못했다. 공물 대신 대동미를 받게 된 정부는 공인(貢人)들을 통해서 수공업 원료를 구입해야 했는데 한성시내 공인들의 조달 능력 부족으로 원료 공급에 애로가 많았던 것이다. 대동법에 의해 지방 관청의 진상품 납부가 대동미로 전환되어 外工匠의 부역노동이 중단된 것도 관청수공업을 위축시킨 큰 요인이었다. 또한 봉건적 통제력이 약화됨에 따라 공장들의 부역 기피가 늘어났고, 관청수공업 제품의 질도 점차 저하되어 갔다. 제품의 질이 저하된 것은 공장들이 점차 늘어나는 민간 수요에 열중한 나머지 부역생산을 등한히 했고, 공장끼리의 기술 전수를 기피했기 때문이다.
부역제에 기초한 관청수공업체제를 유지할 수 없게 된 조선정부는 군역제도에서 시작된 고용제, 즉 급가고립(給價雇立) 제도를 수공업부문에도 적용한다. 즉 良人들이 군포 납부로 군역을 대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장인들의 부역을 무명 2-3필의 장인가포(匠人價布)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정부는 이 가포로 관수품을 시장에서 구매하거나 품삯을 주고 장인을 고용해서 조달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 결과 17세기 중엽에 이미 무기와 특수사치품을 제외한 모든 관청수공업이 폐쇄되었다.
3-9 가내수공업의 발전과 상품생산
가내수공업의 발전은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상품화폐관계의 확대로 농민들이 시장을 위한 소생산자로 성장하는 것을 그 기반으로 한다. 또한 가내수공업에서의 상품생산은 수공업이 농업으로부터 분리되어 부분적으로 전업생산이 이루어지고, 제품 생산에 있어서도 자가소비용과 시장판매용으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
충청도 한산·임천지방의 모시직조업은 이 시기 가내수공업을 대표한다. 대동법이 시행되기 이전에는 주로 공물로 납부되어 왔던 이 지역의 모시제품은 대동법이 충청도까지 확대된 1651년 이후 부유층을 위한 상품생산으로 발전했다. 한산 임천 서천 비인 남포 홍산 정산은 '저산(苧産) 7읍'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견직업(絹織業)은 누에치기에 적합하고 시장수요가 많았던 평안도 지방에서 주로 발전했다. 견직업의 성장은 상인을 비롯한 부유층들의 비단 수요가 증대되고 이에 따라 양인들의 비단 옷 착용을 금지한 신분적 제약이 사실상 무너진 것을 배경으로 한다. 견직업의 지역적 전문화도 진전되어 평안도의 경우 성천의 분주(盆紬, 실을 모아서 짠 명주)와 견사석(명주방석), 영변의 합사주(실을 꼬아서 짠 명주), 덕천의 항라(亢羅, 구멍이 송송난 여름 옷감) 등이 유명했다. 양조업(釀造業)은 주로 도시를 지역에서 소주계통이 발전했는데 자본규모가 크고 고용노동에 의존했다.
3-10 장인수공업의 발전
관청수공업에서 해방된 장인들은 시전(市廛)체제의 동요로 생산물을 임의로 처분할 수 있게 되자 상품생산을 활발하게 전개한다. 시전체제 하에서는 봉건적 특권상인들에게 수공업제품에 대한 전매 특권이 부여되었으며, 시전상인과 결합된 일부 장인들이 일반 수공업자들의 생산과 판매를 제약하고 있었다. 이 시전체제는 1791년 신해통공(辛亥通共)에 의해 6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의 특권을 폐지함으로써 사실상 해체된다.
당시 장인수공업에 의해 발전된 부문은 자기업, 제지업, 나전칠기 등을 들 수 있다. 제지업(製紙業)은 주로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발전했는데 '지산(紙産)4읍'으로 불린 남원·순창·나주·함평과 경상도 의령이 유명했다. 남원의 종이는 희고 윤택이 좋아 서양종이를 능가했으며, 의령에서는 주로 두텁고 질긴 문창호지를 생산했다. 나전칠기(螺鈿漆器)는 15세기까지 京工匠에서만 생산된 대표적인 사치품이었다. 옻칠한 칠기에 연한 청홍색 조개 껍질로 그림과 글자를 새겨 넣어 만드는 나전칠기 제품은 제작기일이 일반가구보다 열 배 이상 소요되었다. 따라서 자본 규모도 컸고 자본제적 경영이 도입될 가능성도 높았다. 경상도 통영이 생산의 중심지였고, 평양과 태천에서도 발전했다.
자기(磁器) 생산은 17세기부터 사요(私窯)에 의해 주도된다. 15세기 초 136개소에 달했던 관요(官窯)는 궁정 수요를 조달하기 위한 광주의 분원자기소를 제외하고 모두 폐지되고 사기그릇에 대한 민간수요가 증대함에 따라 전국적으로 제조소 및 사기점촌(砂器店村)이 들어서게 된다. 점촌(店村)은 수공업자들의 집단촌으로 옹점촌, 유기점촌 수철점촌 등 생산제품에 따라 다양하게 존재했다. 자기 생산은 편수 청장 불편수 등 전문적 장인들의 동업형태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초기에는 상업자본이 이들을 지배했다. 자기공업의 작업장내 분업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 편수 : 녹로 사용, 백토로 자기원형 빚어내는 성형공
├ 청장 : 자기에 그림 그리는 화공
├ 불편수 : 자기 굽는 화부
├ 질굳장 : 백토를 부드럽게 만드는 일
├ 질받이꾼 : 앙금을 가라 앉히는 인부
└ 뒤일꾼 : 앙금 가라앉힌 백토를 편수에게 날라주는 인부
2. 상품 및 화폐유통의 발전
(1) 전국적 유통체계의 형성
3-11 지방 場市의 발전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수공업의 자립, 그리고 상품생산의 성장은 농촌을 중심으로 국지적(局地的) 형태의 교환경제를 발전시킨다. 이른바 소생자를 위한 '등가교환의 장'(일반경제사5-19 참조)으로서의 지방장시는 아래로부터 성장하는 자본제적 생산의 1차적 집결지이며 봉건적 자연경제를 해체시키는 거점이다.
17세기 초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지방의 5일장은 18세기에는 전국적으로 개설된다. 1830년대에 저술된 임원16지에 따르면 전국 1,052개소에 지방장시가 개설되고 그 중 5일장이 905개소, 10일장이 125개소, 15일장이 18개소, 그리고 한 달에 1∼2회 설시(設市)되는 곳이 4개로 되어 있다. 한편 1770년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에는 그보다 많은 1,064개, 19세기 초에 간행된 만기요람에는 1,061개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군 수준의 고을 수가 339개였으므로 1개 군에 약 3개소의 지방장시가 설치되고, 군마다 한 달에 평균 18일 동안 場이 개설된 셈이다.
3-12 전국 장시의 연계
군 내의 기초단위 장시들은 2일-7일, 3일-8일, 5일-10일의 방법으로 서로 다른 날짜에 개설됨으로써 일단 군내에서의 연쇄적인 상업행위가 가능하게 된다.
기초단위 장시 중 가장 큰 읍내장은 주변의 읍내장과 역시 개설 일자를 달리하는 방법으로 연계되어 지역단위로 묶이게 된다. 가령, 모시생산지역인 충청도 서부지역의 읍내장 4개소는 한산읍내장이 1-6일, 서천읍내장이 2-7일, 비인읍내장이 3-8일, 남포 대천장이 4-9일로 각각 개설되어 모시구입을 위한 지역 상인들의 연쇄활동을 가능케 했다. 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를 상기하라. 지역단위의 교역권은 객주(客主)들과 타 지역 상인들에 의해 전국적인 유통체계를 형성하게 된다. 전국적 시장권과 연계된 대장(大場)들은 다음과 같다.
경기도: 송파장, 사평장, 안성 읍내장, 고하 공릉장
충청도: 은진 강경장, 직산 덕평장
전라도: 전주 읍내장, 남원 읍내장
경상도: 창원·마산포장
강원도: 평창 대화장
황해도: 토산 비천장, 황주 읍내장, 봉산 은파장
평안도: 박천 진두장
함경도: 덕산 원산장
위의 대장 중 경기도 송파장은 시전상인들의 금난전권 행사로 한성 진입에 실패한 상인들이 모여들어 8도 산물의 집성지가 되었다. 전국 장시의 연계구조를 그림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3-13 場市 중심의 상인 성장
지방장시의 전국적 형성으로 군단위, 지역단위의 교역권을 무대로 민간상인들이 성장한다. 군단위에서는 4∼5개의 기초단위 장시를 연결하는 비전업 상업종사자들이 출현하는데 이들은 자연경제를 보조하는 수준에서 농촌과 수공업마을, 그리고 어촌 사이의 교환을 매개한다. 지역단위의 읍내장들을 순회하며 전업상인으로 독립하는 지방상인들, 이른바 장돌뱅이들 역시 '등가교환의 장'으로서의 지방장시의 범주 내에서 활동한다.
지역단위의 교역권을 기반으로 본격적으로 상업이윤을 추구하는 상인은 18세기부터 등장하는 객주(客主)와 거간(居間)이다. 객주는 '모시객주' '목화객주' 하는 식으로 주로 단일 상품을 취급하며, 지역의 분산적 소생산자로들부터 상품을 수집, 매점하는 도매상인 겸 중개상인이다. 이들은 소생산자들과 소상인을 지배하는 지역장시의 지배자들이며 전국적 유통체계의 지역 거점으로 활동했다. 거간은 중개에만 종사했다. 여관업과 창고업을 바탕으로 금융과 중개에 종사했던 여각(旅閣)상인들은 주로 연안지방의 포구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3-14 상공업 도시의 발전
중앙집권적 관료체제가 발달한 국가봉건제 하에서 도시는 귀족 관료 등 지배계급의 집단 주거지역(=royal camp)으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상인과 수공업자들은 국가기관과 지배계급의 생활자료를 조달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전국적인 유통체제가 형성되는 18세기 전반기부터 봉건도시는 상공업 중심지로 그 성격이 바뀌게 된다.
한성의 경우 남북 물산의 집산 및 재배분의 중심지로 되어 18세기 중엽에는 상인과 수공업자들의 수가 봉건관료를 추월했다. 거대 상업자본가들의 대부분이 한성에 거주했으며, 18세기 말에는 사상(私商)의 숫자가 특전상인보다 많았다. 평양도 봉건관료들의 거주지역인 내성(內城)보다 상공인들이 사는 외성(外成)을 중심으로 성장해 갔다. 전통적인 상업도시 개성은 18세기 이후에도 조선상업의 주도권을 유지했다. 개성상인들은 상품 수집능력에서 타지역 상인들을 압도했는데 그것은 오랫동안 특정 상품을 취급해 온 거간들이 많았고 송방(松房)이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개성이 놋그릇 생산과 인삼재배 및 교역의 중심지로서 자체적인 생산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송상(松商)들의 축재 배경이 되었다.
18세기 말에는 신흥 상업도시들도 성장하였다. 금강유역의 강경은 이전에는 작은 포구(浦口)에 지나지 않았으나 점차 충청 전라 두 지역의 생산물 집산지로 성장하여 18세기 말에는 1,500호가 거주하는 도시로 발전했다. 강경에는 금강평야에서 생산되는 농산물과 소를 중심으로 한 축산물, 그리고 서해안의 각종 어류들이 거래되었다. 마산은 1760년대부터 상업도시로 성장했다. 낙동강일대의 평야지역과 남해와 동해의 각 지역을 연결한 마산은 원산을 통한 남북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19세기에는 더욱 발전하여 배를 이용하여 중장거리 교역에 종사한 선상주인(船商主人)만 130명에 달했다. 이들은 3남지역의 선상들을 상대하는 남선상과 함경도지방의 선상만을 상대한 북선상으로 분리되었다. 남북교역의 북쪽 창구인 원산도 강경과 유사한 경로로 성장한 신흥 상업도시였다.
상공업 도시의 발전은 도시인구의 증가를 가져왔다. 한성의 경우 1420년대 18,794호, 1679년 26,000호, 1747년 34,725호, 1784년 40,000호, 1811년 45.27호로 증가하고 있다. 또 평양의 1855년 인구는 노비와 하급관리를 제외하고 23,050호에 70,804명이었다. 다른 도시들도 18세기 중엽에서 19세기 초에 급속히 증가하는데 이는 농촌이탈 인구가 영세 상공업자나 도시빈민으로 유입된 데 따른 것이다.
(2) 대외무역의 성장
3-15 국가봉건제 하의 대외무역
국가봉건제는 폐쇄적인 자연경제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대외무역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른바 공무역(公貿易)이라고 하는 것도 정부가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급 외교관료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교역을 정부가 묵인하는 것일 뿐이다. 17세기 초기까지 넓은 의미의 공식적인 대외교역은 통치자 사이의 예물교환인 조공(朝貢)과 사절 수행원인 역관(譯官)에 의해 이뤄지는 사행무역(使行貿易)이 있었을 뿐이다. 공무역은 후자의 경우를 말한다. 사행무역에서의 주요 수출품은 은과 인삼이었고, 수입품은 비단 명주실 약재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법에 금지된 무역을 사적으로 행하는 밀무역(密貿易)은 전체적으로 미미하여 公무역인 사행무역이 압도적 비중을 차지했다.
3-16 대중국 사무역의 발전
민간 무역업자들의 밀무역이 점차 늘어나고 무역에 대한 상인들의 요구가 높아지자 조선정부는 17세기 초부터 제한적으로 사무역(私貿易)을 허용하게 된다. 이른바 개시무역(開市貿易)은 양국 관리의 입회 하에 사상(私商)들이 일정한 장소에서 정해진 기간에 수행하는 무역을 말한다.
중강(中江)에서 매년 2회씩 열리는 중강개시는 임진왜란 중인 1593년에 식량난을 해소하기 위해 처음 열렸다가 이후 정기적으로 設市되었다. 중강개시에 참여하는 상인들은 막대한 이득을 취했는데 가령 면포의 경우 국내가격은 1필에 쌀 한 말이었으나 중강개시에서는 20말을 받았고, 은과 구리도 국내가격보다 10배정도 높았다. 1648년 가을의 중강개시 실태를 보면 서울상인 79명, 평안도상인 72명, 개성상인 51명, 황해상인 21명 등 모두 223명이 참여했고 주요교역품은 소(200마리) 면포(373필), 포(175필), 종이(8,400전), 소금(310섬) 등이었다.
중강개시가 이처럼 활성화되고 대중국 무역에 대한 욕구가 더욱 증대하자 회령과 경원에도 개시가 정기적으로 설치되었다. 또 개시무역으로도 충족되지 않은 대중무역 수요는 밀무역과 중강후시 등 후시무역으로 해소되었다. 17세기 중엽 이후에는 사행무역도 변질되어 무역규모가 더욱 확대되었다. 공식적인 역관 20∼30명 가운데 몇 명만이 통역을 담당하고 나머지는 교역에 종사했으며, 짐꾼등 기타 수행원 속에 연상(燕商, =중국무역에 종사하는 상인들로 주로 의주 평양 개성 만주상인들)이 끼어 들어 교역에 종사했다.
책문후시(柵門後市)는 17세기말 사절단이 중국 봉황성을 통과할 무렵 봉황성 책문 밖에서 교역이 이루어짐으로써 시작되었다. 사절단의 행차가 1년에 4-5회 있었으므로 후시무역도 년 4-5회로 정기화되었는데 사절단을 따라간 역관이나 무역상은 북경에서 무역에 종사하고, 수행원에 포함되지 않은 무역상들은 책문후시에 집결했다. 후시무역의 거래량이 북경의 사행무역보다 규모가 훨씬 커져서 점차 대청무역의 최대 교역시장으로 발전했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의 은 교역액이 10만냥에 육박했고, 보통 말 1천 바리分의 상품이 교역되었다고 한다. 후시무역의 통제를 위해 파견된 단련사가 도리어 무역에 앞장선다고 해서 '단련사後市'라는 이름이 붙기도 했다. 주요수출품은 금 은 인삼 면포 등이었고, 수입품은 비단 명주실 모자 각종 잡화류였다.
3-17 왜관개시
왜란 이후 잠시 중단되었던 대일 무역은 일본의 집요한 요청과 왜구 대책의 일환으로 왜관개시로 재개되었다. 매달 6회(3, 8, 13, 18, 23, 28日) 개설된 왜관개시는 정부가 승인한 공식적인 무역이었으므로 정부 차원의 공무역도 이루어졌다. 공무역의 수출품은 쌀과 무명이 주류였고, 주요수입품은 은. 동 . 납 등의 광물과 소목이었다. 광물은 국내가격과의 차이가 커서 사무역 수입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私商들의 주요수출품은 인삼과 중국산 명주실이었다. 사무역의 경우 17세기 중엽에서 18세기 중엽까지는 명주실을 비롯한 중개무역이 우위를 차지했다. 정부는 1717년 사무역을 규제하기 위해 인삼 수출을 년간 700근으로 한정했으나 실제수출량은 1천 수백근에 달했다. 왜관개시에서는 교역상품의 종류와 가격이 제한되고 무거운 세금이 부과되었기 때문에 밀무역도 성행했다. 일본과의 밀무역은 교수형에 처해졌음에도 부산의 '임소'라는 자는 밀무역으로 7만냥을 벌어 동래부사까지 부려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3) 화폐유통의 발전
3-18 국가봉건제 하의 화폐유통
화폐유통에 대한 봉건정부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부정적이다. 봉건경제는 농민들을 자급자족의 자연경제에 묶어둔 채 사회적 잉여를 부역노동과 현물조세로 직접 수탈하는 것을 원리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給價雇立이나 화폐지대와 같은 현상은 이미 봉건경제의 변질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17세기 이전에도 철 동 은으로 만든 금속화폐들이 사용되었으나 보조적인 역할에 지나지 않았고, 주로 국가에 납부하는 무명(=徵布)이 화폐(=布貨)로 사용되었다. 포화의 경우 정량은 5새(1새=올 80개)×1필(14.3m)이었으나 포화로 만들어진 무명은 대부분 정량을 지키지 않은 추포( 布)로서 옷감으로 쓸 수 없었다.
3-19 화폐유통의 발전과정
상품생산이 증대하고 국내외시장이 확대되면서 17세기 중엽 이후에는 화폐유통도 크게 발전하게 된다. 한성과 개성 등 주요도시의 대상인들 사이에서는 은자(銀子)가 많이 사용되었는데, 특히 대청무역에서 중국상인들이 銀貨를 요구했기 때문에 무역상들 사이에서 유통되었다. 또 상공업이 발전하고 은광개발이 성행했던 서북지방에서도 은자 유통이 활발했다.
17세기 말엽부터는 정부가 발행하는 동전(銅錢)이 국내의 지배적인 화폐로 유통된다. 동전은 본래 개성지방의 사주전(私鑄錢)에서 소액거래를 위한 은자의 보조화폐로 제조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정부는 1626년 처음으로 동국통보와 십전통보 1,100관을 주조했는데 호란으로 사용이 중단되었다. 1633년에 상평창에서 주조한 상평통보는 푼(문, 닢), 전(1전=10푼), 냥(1냥=10전), 관(1관=10냥)의 단위로 발행되었다. 상평통보는 이듬해인 1634년 전주, 공주, 대구, 개성, 해주, 수원 등지에서 대량 주조되어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1678년에는 평양과 전라 양도의 감영 및 병영에서도 다량 주조했다. 은화1냥은 상평통보 4냥으로 고정되었다. 당시 지역차이는 있지만 쌀 한 말은 대체로 4전이었다.
대상인들을 중심으로 신용화폐도 발전했다. 어음은 외상거래에 사용되었고, 환(換)은 멀리 떨어져 있는 지방으로의 송금에 편리했다. 가령 서울과 평양의 두 상인이 신용관계에 있을 경우, 서울상인이 발행한 환어음을 평양상인에게 제시하면 평양상인은 그 어음을 받고 어음에 적힌 액수의 현금을 지불한다. 환어음의 결제는 위의 역순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현금으로 직접 결제될 수도 있다.
3-20 화폐유통의 경제사회적 영향
화폐유통의 활성화는 농민 납부에 영향을 끼쳐 지대와 각종 조세의 금납화(金納化)를 가져왔다. 이에 따라 봉건정부의 재정수입에서도 금납의 비중이 증대하여 1730년 호조세입의 10%, 1759년 선혜청 세입(대동미)의 13%, 1807년 호조·선혜청 세입의 25%, 균역청(군포) 세입의 70%가 금납으로 대체되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3절 중 '화폐지대의 발생'에서 상세히 보기로 한다.
화폐유통은 또한 봉건재정의 화폐발행 의존도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화폐발행권을 독점한 봉건정부는 부족한 재정수입을 늘리기 위해서 화폐를 남발함으로써 장기적으로 '중량·품질 낮은 화폐 남발 →물가상승 →화폐구매력 감소 →재정지출 증가'로 이어져 결국은 재정 상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화폐유통이 활성화되면 화폐의 축장 기능이 강화되고 축장 대상이 쌀 . 포목 등 현물과 토지에서 화폐로 전환됨으로써 사회적 축재욕구가 비상하게 증대된다. 상품형태의 축장은 물리적 제한이 있으나 화폐형태는 제약이 거의 없으므로 축재 욕구 또한 무한히 상승하게 되는 것이다. 18세기에 몇 차례 일시적인 전귀(錢貴) 현상이 발생한 데는 동전의 원료난과 함께 화폐 축장도 원인으로 작용했다.
화폐유통은 화폐소유자들의 고리대운영을 활성화시킨다. 지주고리대는 낡은 생산양식에 의존해서 주로 농민들을 대상으로 했다. 당시의 법정이자율은 年20% 이내였으나 지주고리대는 월 20% 이상이었다. 이들은 주로 토지를 담보로 잡았기 때문에 지주고리대는 자영농민의 몰락과 지주의 토지 확대로 귀결된다. 도시상인들의 상인고리대는 영세상인, 농민 수공업자 등의 소생산자, 봉건지배층이 주 대상이었다. 양반들의 화폐수요가 증대한 것은 상품화폐관계의 확대와 수공업의 발전에 따른 사치재 수요에 기인한 것이었다. 상인고리대에 포섭된 양반들 중에는 파산하는 자들이 많았다. 또 소생산자에 대한 상인고리대는 소생산에 대한 상업자본의 지배로 귀결된다. 이처럼 상인고리대는 봉건체제에 일정한 타격을 가하고, 소생산과 결합한다는 점에서 지주고리대와는 그 성격을 달리한다.
화폐유통은 계급분화를 촉진한다. 양반계급 내부에서는 비관직 양반계층이 화폐 남발로 인한 물가상승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되었고, 이들 몰락 양반들은 부유한 상인이나 양인들의 실질적인 지배 하에 들기도 한다. 농민계급 내부에서도 자작농 이하 농민들의 궁핍화가 가속된다. 이들은 상품생산 및 지대와 조세의 금납화 과정에서 상인과 관료의 농간과 수탈에 직면했고, 지주와 상인들의 고리대 지배를 받았다. 화폐유통은 이처럼 기층 농민을 영락시켜 임노동자를 창출하고 중소 양반계급을 몰락시키는 한편, 상층 양반 및 상업자본의 지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4) 상업자본의 성장
3-21 국가봉건제 하의 특권적 상업체계
이미 본 바와 같이 자연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국가봉건제 하에서는 기본적으로 상업의 발전이 억제된다. 상행위를 합법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서울의 육의전(六矣廛)상인을 포함한 시전(市廛)상인, 공인(貢人), 지방의 시전 및 보부상(褓負商), 객주 여각(3-12) 등이었다.
일상용품을 취급하는 보부상은 조선 이전부터 존재했던 전통적인 상인들로서 부상(負商)과 보상(褓商)으로 구분되고 취급하는 물품도 서로 달랐다. 부상, 즉 '등짐장수'는 나무그릇·토기 등과 같은 비교적 조잡한 일용품을 지게에 지고 다니면서 판매했고, 보상은 값비싼 필묵, 금·은·동 제품 등과 같은 정밀한 세공품(細工品)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다니거나 질빵에 걸머지고 다니며 판매하였으므로 '봇짐장수'라고도 한다. 이들은 조선 초기에 조직화되고, 조선 건국에 기여한 공로로 합법화되었다. 보부상들은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고 봉건권력과 밀접한 관련을 맺음으로써 특권상인으로 성장했다.
봉건적 특권상업을 대표하는 것은 서울의 육의전을 비롯한 시전상인들이다. 시전상인들은 취급 상품을 서로 특화하여 동업조합형태로 체계화되었다. 봉건정부는 이들에게 국가나 왕실 수요를 국역(國役)으로 부담시키는 대신, 관납 전매권과 금난전권(禁亂廛權)을 부여했다. 금난전권은 시전상인들이 정부로부터 받은 독점권을 방어하기 위해 자신이 취급하는 물품에 대해 타 상인들, 특히 私商들이 접근하는 것(=亂廛)을 막을 수 있는 권리이다. 18세기부터 이들의 독점대상 물품(=전안물종, 廛案物種)이 점차 확대되어 도시민의 생필품 대부분이 시전의 전매품이 되었고 각 전매품에는 독점가격이 형성되었다.
貢人은 대동법 실시 이후 정부가 중앙관청의 관수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지정한 공납청부업자이다. 이들은 대동법 시행 이전에 방납을 담당했던 私主人 京主人 其人들과 시전상인 工匠들로 구성되었고, 공물을 납부하는 관청별, 물품별로 동업조직(=공계, 貢契)化되었다. 가령, '장흥고(長興庫)공계'는 돗자리와 종이를 관장하는 장흥고에 납품하는 공인들의 동업조직이며, '공조피물(工曹皮物)공계'는 공조에 피혁관련 물품을 납품하는 공인들의 조직이다. 이들은 특권적인 물품조달권과 해당 물품의 독점매입권을 가지고 공장들을 지배했으며, 특권적인 공장제 수공업을 발전시키기도 했다.
3-22 특권상업의 해체
봉건적 특권상업은 私商을 중심으로 한 난전세력의 성장으로 해체된다. 시전체제의 동요를 가져온 난전세력 중에는 봉건관료, 특히 영조이래 왕권의 비호를 받은 군문세가(軍門勢家), 궁방(宮房) 및 중앙의 각 관청 등 지배계급도 포함된다. 이들은 정치권력을 이용해서 가인(家人)들이나 하급관속들에게 난전을 대행시켰다. 또한 서울을 비롯한 각 도시 주변의 농어민과 수공업자들(3-5, 6, 9, 10)도 도시의 하층 주민들(3-4)을 대상으로 주로 행상(行商) 형태로 자신의 생산물을 직접 판매함으로써 난전세력의 일부를 구성한다.
17세기 후반기부터는 도시주변의 소생산에 기반을 둔 전업상인들이 대두하여, 아래로는 소생자들의 직접 판매를 차단하고 위로는 기존의 시전체계에 진입하여 금난전권을 교란한다. 즉 권력과 결탁한 상인들은 여러 가지 새로운 상품을 개발해서 독점권을 획득하고 수공업자의 경우에는 자신이 제조한 물품을 전안(廛案)에 올림으로써 일물일전(一物一廛)의 원칙을 붕괴시킨다. 또한 이들은 금난전권이 적용되지 않는 도시 외곽으로 상권을 확대해 나간다. 재정 수입을 늘리기 위한 봉건정부의 금난전권 확대는 이처럼 구시전과 신전(新廛) 상인의 대립을 격화시키고 봉건상업의 경쟁제한적 독점체제를 스스로 무너뜨린다.
그러나 금난전권의 확대로 시전체계에 편입되지 못한 사상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대부분의 일상용품에 독점가격이 형성되어 도시 주민들은 물가고에 시달리게 된다. 이에 정부는 신해통공(辛亥通共, 1791)과 갑인통공(甲寅通共, 1794)을 통해 6의전을 제외한 타 시전상인들의 금난전권을 몰수함으로써 사상들의 자유로운 상업을 사실상 보장했다. 금난전권을 박탈당한 시전상인들은 대자본을 바탕으로 시전체제 내부에서 성장한 도고(都賈, =買占)상업을 발전시켜 육의전 상인들과 대립하게 된다.
3-23 도고상업의 발전과 화폐자본의 축적
시전체제의 해체로 자유롭게 상업이윤을 추구하게 된 중앙의 부상대고(富商大賈)들과 지역 유통권을 중심으로 성장한 객주 여각 등(3-13)은 주로 도고상업을 통해 화폐자본을 축적한다. 도고는 買占에 의한 독점이기 때문에 그 폐해는 시전의 독점과 다를 바 없다. 통공 정책이 실시된 이후 도리어 한성의 물가가 상승했던 것은 당시 도고의 독점 수준이 시전에 뒤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상인들은 또한 도고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도고 및 가격 조작과정에서 서로 담합하기도 했다. 가령 1833년 서울에서 발생한 '쌀폭동' 때, 미곡상인들이 하층주민들의 주 공격 대상으로 되었던 것은 당시 미곡유통을 장악하고 있던 상인들이 연합해서 쌀에 대해 도고를 행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쌀 이외에도 수산물, 소금, 과일, 목재 등도 매점을 통한 가격 조작으로 막대한 독점이윤을 획득했다. 도고상인들은 권력자들의 비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의 도고 근절책은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축적은 상당 부분 봉건적 권력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점과 축적된 화폐자본이 주로 상인들의 토지 획득으로 나아가 반봉건적 지주제 경영으로 귀결되었다는 점에서는 봉건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3-20에서 본 것처럼 기층 농민들을 영락화시켜 임노동자를 창출하고, 상인계급의 사회적 지위를 높임으로써 봉건적 신분 질서의 해체에 기여했으며, 농업과 수공업의 상품생산을 촉진시켰다는 점에서는 자본제적 지향을 갖는다.
상품생산이 소생산인 수준에서는 상업자본의 소생산 지배는 필연적이다. 소생산자들은 원료와 자재 구입과정에서 상인들에게 자금을 의존(=先貸)하게 되고, 판매 역시 상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유통망에 의존(=買占化)하게 된다. 소생산 지배의 대표적 형태인 선대제(putting-out system) 하에서는 수공업자들이 상인들의 임금노동자로 전락하게 된다. 가령, 제지업의 경우 상인들이 선대제 경영으로 3남지방 종이의 대부분을 매점함으로써 18세기 말기에는 한때 공인들이 관수(官需)를 대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모시직조와 견직업에서도 상인의 장인 지배가 일반적이었다. 또한 공정이 복잡하고 자본규모가 큰 부문에서는 소생산 자체가 성립할 수 없으므로 상인이 공장제수공업(Manufacture)을 경영하여 스스로 산업자본으로 전화하기도 했다. 한성의 일부 대상인들은 조총과 탄알 등의 무기제조, 선박제조, 그리고 정부로부터 불하받은 금속화폐의 주조에 공장제수공업을 도입했다.
또한 조선후기 상인들은 아래의 그림과 같이 전국적인 유통체계를 구축함으로써 '상품유통-상품생산-화폐신용-운수체계'의 고리를 장악하게 된다.
3. 봉건적 토지소유의 변화와 농민계급의 분화
자본제적 생산관계의 성장은 봉건적 토지소유의 해체와 임금노동자의 창출을 핵심적인 내용으로 한다. 임노동자의 창출은 농민분화를 통해 기층농민이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되는 과정이며, 봉건적 토지소유는 서민지주층의 성장과 수취관계의 변화를 통해 해체된다.
(1) 토지의 상품화
3-24 봉건적 상급소유권의 위축
봉건적 토지소유에 국유와 사유의 대립이 내재하고 있음은 이미 본 바와 같다. 토지국유는 국가의 상급소유권이 봉건지대로 관철됨으로써 유지된다. 따라서 봉건지대율의 크기는 상급소유권의 크기 또는 토지국유의 강도를 표시하게 된다. 국가봉건제가 토지국유의 원칙 위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재생산할 수 있기 위해서는 봉건지대율이 사회적 잉여를 모두 흡수하는 수준으로 결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선 초기의 지대율이 사회적 잉여를 전유할 수준이었는가, 하는 문제는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즉 조선정부가 초기부터 재정 부족에 봉착한 원인이 양반관료들의 개입에 의한 것인지, 지대율 자체가 낮은 데서 기인하는 것이지는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경우에는 2-39의 내용을 기준으로 할 때 현물지대, 노동지대, 각종 부가세를 포함한 봉건지대율이 14.2%(85두/600두)에 지나지 않는다. 이 지대율은 지주제 경영에서의 소작료가 50%에 이른다는 것을 감안하면 분명히 '저강도 착취'이며, 토지에 대한 납부의 명칭이 전조(田租)에서 전세(田稅)로 바뀌는 데서 보는 것처럼 국가의 상급소유권이 조세의 수준으로 위축되었음을 의미한다.
하급소유권이 실질적인 소유권으로까지 성장하는 것은 상급소유권의 이같은 위축을 배경으로 한다. 2-24, 25, 26에서 본 하급소유권에 대한 각종 처분권의 강화와 지주제경영의 확대는 국가의 상급소유권을 형해화(形骸化)함으로써 봉건지대를 토지소유자에 부과하는 재산세또는 수익세로 전환시킨다. 따라서 토지점유권의 매매는 사실상 소유권의 매매이며 토지의 상품화를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3-25 토지 상품화의 진전과정
봉건지배계급의 전통적인 토지집적 수단은 농민보유지의 불법 침탈과 소액을 지불하는 강제 매수였다. 왕실의 궁방전은 절수(折受, =왕명으로 민전을 궁방전화)와 황무지에 대한 권리 행사를 통해 확대되기도 했다. 황무지의 경우 법적으로만 無主田일 뿐 실제로는 농민의 보유지였다.
1688년부터 실시된 급가매토제(給價買土制)는 국가 왕실 양반관료들의 토지 획득은 시가에 따른 매입의 방법에 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1424년에 승인된 사적인 토지매매가 국가수준으로 확대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토지의 상품화를 공식화한 것이다. 봉건국가 자신이 민전 매입에 나섰다는 것은 앞에서 본 상급소유권의 위축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것은 田主가 佃客으로부터 저율지대의 점유권을 매입해서 地主로서 佃戶에게 고율지대의 점유권을 부여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급가매토제 실시의 초기에는 억매(抑買) 특매(特買)로 불리는 반강제 매수가 근절되지 않았지만 18세기에 접어들면 서민지주의 주도로 급가매토가 일반화된다. '교활한 이속(吏屬)과 부유한 상인'들로 대표되는 서민지주들은 자유매매의 원칙에 따라 토지를 매입했으므로 빈궁한 농민들이 도리어 토지 판매에 적극적이었다. 매매는 주로 저당 형식을 빌었는데 채무자가 기한 내에 돈을 갚으면 저당된 토지를 반환해 주고 기한을 넘기면 채권자의 소유로 확정되었다. 서민지주들의 토지집적 대상은 민전에 한정되지 않고 역전(驛田)과 같은 관청수조지까지 미쳤다. 그러나 조선후기 서민지주의 토지집적은 '신분귀족의 최후적 전복과 화폐귀족의 최종적 완성'으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한다.
(2) 토지에서의 계약적 관계의 성장
3-26 봉건적 토지소유에 기초한 인신 지배
토지에 의해 매개되고 경제외적 강제에 의해 실현되는 봉건국가의 인신적 농민지배는 봉건지주들이 사적으로 지배하는 토지에서 더욱 심화된다. 그것은 봉건지주가 자신의 신분적 특권을 그대로 유지하거나 강화하는 반면, 봉건농민은 점유권 보유자로서의 자영농민, 즉 公民의 지위를 상실하고 봉건지주의 私民으로 전락한데서 오는 것이다.
13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발달한 고려의 장원에서 농민들은 노비이거나 농노적 예속농민, 즉 신량역천(身良役賤)의 처간(處干)이었다. 농장주인 권귀(權貴)들에 의해 압량위천(押良爲賤)된 경우든 스스로 投託한 경우든, 처간들은 국가부담에서 놓여나는 대신 '보호자'인 농장주에게 인격적으로 예속되어 있었다. 농장주들이 거느린 私兵과 가신단(家臣團)은 외부적으로는 권력 확대의 기반인 동시에 내부적으로는 경제외적 강제의 도구로 기능하게 된다. 조선정부에 의해 농장과 사병이 해체되고 처간들도 양인으로 복귀(1405년)했지만, 15세기 말까지 왕실소유지와 공신전 등에서는 농장적 지배방식이 지속되었다. 또한 조선 중기 이후 발달한 농장에서도 인신적 지배의 유제가 강하게 남아 있었다.
3-27 서민지주의 성장과 계약적 관계의 진전
상품화폐관계가 발전하고 토지의 상품화가 진전되면서 18세기부터 상인과 농촌부농을 중심으로 서민지주들이 성장한다는 것은 이미 본 바와 같다. 삼남지방에는 100결 이상의 토지에서 수천 석을 수확하는 서민지주들이 많았다고 하고, 풍덕군 내의 옥답지역인 서면과 북면 토지의 대부분이 개성상인의 소유였다고 한다. 경주 최부자와 호남의 왕부자는 4백결 이상의 토지에서 만석 이상을 거두어 들였다. 19세기 중엽에는 '각 고을의 상등 전답 태반이 부자들의 토지'로 되는 수준에 이른다.
이들 서민지주들은 봉건적 지주와는 달리 소작농민을 인격적으로 지배할 신분적 특권을 갖지 못했다. 이들의 주된 관심은 소작농에 대한 인신 지배가 아니라 투자로서의 토지 획득과 소작료 수취였기 때문에 이에 대응하여 작인(作人)들의 소작권도 봉건적 구속으로부터 벗어난다. 즉 서민지주와 작인들 사이에는 경제적 동기에 의한 자유로운 계약관계가 설정되고, 작인들은 주거 이동 및 직업선택의 자유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3-28 도지법 성립
도지법(賭地法)은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첫째는 지대수취방식으로서, 정율제(定率制)에 대립하는 정량제(定量制) 혹은 화폐지대의 경우 정액제(定額制)를 의미한다. 지대가 일정한 양으로 고정된다는 것은 토지경영에 있어 농민의 자주성이 강화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소농경영은 큰 진전을 이룬다. 둘째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물적 관계의 진전을 반영하는 도지법은 토지 이용권의 사유화(=永代小作)를 통한 소작권의 자립을 의미한다. 즉 지주가 소작인에게 소작권을 완전히 이양함으로써 작인이 그 소작권을 제3자에게 판매 또는 전매할 수 있도록 된다는 것이다. 하급소유권 내에서 지주-전호의 분화가 발생했던 것처럼 소작권 내에서 다시 중답주(中畓主)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분화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영대소작 혹은 영도지(永賭地)는 지주 소유의 황무지를 소작인들이 개간할 경우, 관개수리 공사 시 노력 또는 자금을 제공할 경우, 토지의 신규 구입 시 자금 일부를 부담할 경우에 지주로부터 도지권을 영구히 이양받는 데서 발생했다. 그리고 지주들이 도지권을 직접 판매함으로써 도지법이 널리 확대된다.
영도지의 경우 토지에 대한 지주의 권리는 전체소유권에서 도지권을 제한 부분이기 때문에 지주가 토지를 팔아도 소작인의 도지권은 그대로 유지된다. 도지권을 보유한 소작인(=永代小作人)은 도지권에 대해 매매, 저당, 상속, 전대(=재소작)등 임의로 처분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고 변동이 있을 경우 사후통고만 하면 된다. 즉 도지권은 토지소유권의 일부로 영대소작인의 재산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영대소작인은 소작지를 직접 경작할 수도 있고, 노동자를 고용하여 자본제적 차지경영을 할 수도 있으며, 제3의 소작인에게 전대할 수도 있다. 전대할 경우 이들은 도지주(賭地主) 또는 중답주로 불리는데 이 때 지주-도지주-소작인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수취 관계가 설정된다. 지주가 도지주에게 청구하는 소작로가 원지정(元支定)이며, 중지정(中支定)은 소작인으로부터 수취한 소작료 중에서 원지정을 제한 부분이다.
영대소작인의 도지권 강화는 그 자체로서 소작인의 지주에 대한 신분적 자립을 의미한다. 19세기의 도지권은 가격을 기준으로 할 때 토지가격의 10∼30% 수준이었다. 가령, 1846년(헌종12년)경기도 양주군의 토지 가격이 두락 당 12냥5전이었을 때 황해도 봉산군 도지 가격이 두락 당 2냥53전으로 약 20%에 해당된다.
(3) 화폐지대의 성립
3-29 화폐지대의 성립과정
화폐지대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상품화폐관계가 일정 수준 발전해야 한다. 최소한 지대납부 분에 해당되는 생산물은 화폐로 전환해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후기의 상품화폐관계의 진전은 화폐지대가 부분적으로 성립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해 낸 것으로 볼 수 있다. 화폐지대는 정량적 수취로서의 도지제(賭地制, 혹은 賭租制)와 결합하면서 지주와 소작농민 사의의 물적 계약적 관계를 더욱 심화시킨다. 화폐지대액은 대체로 정량 생산물지대(=도조)를 평년시가로 환산하여 결정하는데 해마다 시가에 맞춰서 지대를 조정하는 방식에서 일정한 액수를 지불하는 방식으로 고정되어 갔다.
3-20에서 본 것처럼 봉건정부는 18세기 초기부터 자신의 필요에 의해 조세의 금납화(金納化)를 실시한다. 즉, 정부는 1713년 신계·곡산·서홍·수안의 海西 4읍에 대해 쌀 1섬을 7냥으로 납부케 한 이래, 세미 운반이 어려운 지역이나 흉년으로 현물 납부가 곤란한 지역에 대해 금납을 요구하여 1803년에는 전세를 고정적으로 금납하는 지역이 37개 읍면으로 늘어났다. 고정적인 금납 지역에서는 상품화폐관계의 발전이 지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화폐지대의 성립을 위한 조건 자체는 18세기에 이미 전국적으로 갖추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사회에서 화폐지대는 일반적으로 성립하지 못하고 현물지대와 병행한다. 밭에서는 화폐지대가 상당 수준 발전했지만 논에서는 현물지대가 우세했다. 논에 화폐지대가 부과될 경우에도 일정비율은 현물로 수취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지주는 자기소비를 위한 식량 저장, 곡가가 상승할 경우의 양곡 판매, 현물 조세납부 등의 필요에 의해서 현물지대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도지제 하에서의 화폐지대는 도지錢, 돈도지, 錢도지, 錢지정 등으로 불린다. 정율제인 병작제(竝作制) 하에서는 화폐지대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대를 선납하는 화리(禾利), 즉 선도지(先賭地)에서는 화폐지대가 보편적으로 채택되었는데 년간 소작료는 과거 2∼3년의 평균수확량의 절반 정도였다. 선도지는 지주에게는 소작료 미납의 위험을 줄이고, 흉년 시에도 정상지대를 수취할 수 있으며, 지주의 화폐수요에 부응한다는 장점을 갖는다. 또 소작인들은 안정적인 소작권을 확보하여 자유롭게 토지를 경영할 수 있게 된다. 지대를 선납해야 하므로 선도지 작인은 부농이 대부분이었고 이들은 자본제적 차지인(借地人)의 성격을 갖는다.
(4) 농민계급의 분화
3-30 농민분화의 기본구조
국가봉건제사회의 기본계급은 봉건지주(=田主)와 봉건농민(=佃客)이다. 이 기본 대립이 하급소유권의 강화를 계기로 반(半)봉건지주(=地主)와 소작농민(=佃戶)의 대립을 파생시킴으로써, 대토지소유가 발달한 단계의 계급구성은 '전주-지주-전객-전호-노비'로 재편된다. 전객의 전호화를 핵심으로 하는 이 봉건적 분화는 조선 후기 사회에서도 농민분화의 주류를 이룬다. 국가봉건제의 표준적 농민인 전객, 즉 자영농민의 계급적 취약성은 건국 초 표준적 소농경영의 확보 실패와 봉건지주들의 착취와 압박에 의한 것이었음은 이미 본 바와 같다.
봉건적 분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조선후기 사회에서는 생산력의 발전과 상품화계관계의 성장에 따른 자영농민의 분화가 격렬하게 전개된다. 국가봉건제의 동요와 자본제적 관계의 생성을 바탕으로 이 시기의 자영농민의 진로는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열린다. 토지이탈의 경우 봉건적 분화에서는 토지 이외의 출구가 제한되어 있으므로 대부분 전호나 고공의 형태로 토지에 복귀하지만, 조선후기의 분화에서는 도시나 수공업촌으로 진출하는 인구도 적지 않다.
3-31 자영농의 실태
황해도 개성부 홍경里의 경우를 통해서 조선후기 사회의 자영농의 실태를 보기로 하자. 소유토지의 면적별 자영농 분포는 다음과 같다. (전석담外, '조선에서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생', 140쪽에서 발췌)
토지소유면적 소유자수(%)
20부 이하(빈농) 131(65%)
21∼60부(중농) 53(26%)
61부∼1결(부농) 13(6%)
1결 이상(지주) 7(3%)
20부 이하의 농민 65% 중에는 10부 이하 소유자가 38%( 63명), 1부 이하가 13%(27명)를 차지하고 있어 생계유지를 위한 최소면적이 약 25부(=15마지기)임을 감안할 때 자영농의 압도적 다수가 궁민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 25부의 토지를 소유한 농민의 가계 상태를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소출 ; 쌀 200말 (=현재의 대두 50말)
지출 ; 각종 조세(10말)
종곡 15말(15마지기)
순소득; 150말∼180말
위의 순소득은 5인 가족의 경우 모두 식량으로 충당되어야 할 분량이기 때문에 의복, 농기구, 염장(반찬 양념) 위해서는 식량을 줄이거나 잡곡으로 교환할 수밖에 없다. 이같은 상황에서 관혼상제와 같이 비용이 많이 드는 행사는 농민을 채무자로 만들고 농민 가계를 파탄시킨다. 따라서 20부에도 미치지 못하는 65%의 자작농의 영락은 시간문제로 되는 것이다.
18세기 초부터 토지를 이탈하는 농민, 즉 유민(流民)이 광범위하게 발생한 것은 농민들의 궁핍화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이다. 무토지민(無土之民) 무전지민(無田之民)으로도 불리던 이들의 수자는 1705년에는 8도를 합해서 3만9천250명이었으나 1717년에는 충청도에만 10만3천명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어떤 형태로든 농촌으로 복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도시로 유입되어 토지를 완전히 떠나기도 했다.
3-32 고용노동의 성장
농촌으로 돌아온 유민들이 토지로 복귀하는 데는 3-31에서 본 것처럼 기본적인 애로가 있었기 때문에 농촌지역에서도 고용노동이 증가했다. 또 당시 고용노동의 품삯이 하루에 2전5푼, 또는 쌀 3되에 1∼2전을 더해 주었으므로 소작을 부치는 것보다 나았다. 고용노동의 수요자가 봉건국가, 지주, 부농, 상인, 수공업자 등으로 확대된 것도 고용노동이 발전한 원인이 된다. 흥부전에 나오는 흥부의 고용노동을 보면 다음과 같다. 1월에 가래질하기, 3·4월에 부침질, 일등전답 무논갈기, 이집저집 이영엮기, 궂은날 멍석맺기, 시장갓에 나무베기, 식전이면 마당쓸기, 물긷기, 전주감영 돈짐지기, 술밥먹고 말짐지기, 오푼받고 마철박기, 두푼받고 똥재치기...
예속적 고용노동은 머슴과 같이 계약기간이 10년 이내인 장기고용과 주로 봉건정부에 의해 이뤄지는 단기고용으로 분류된다. 정부의 단기고용은 급가고립(給價雇立) 제도가 확립된 이후부터 본격화되어 토목건설·운수·관청수공업의 분야에서 노동자(=모군, 募軍)를 사역했다. 1711년의 모군들의 월삯은 대체로 쌀 9말에 천 20필이었다. 또 야장(冶匠), 석공, 목수와 같은 기술노동자들은 일당 최고 8전9푼까지 받았고, 막노동자들의 일당은 2전5푼 정도였다. 품삯은 대체로 매 5일 단위로 장날에 지급되었다.
농업부문에서의 고용노동은 김매기, 모내기, 추수 등에 단기간 대량 고용하는 계절노동이 우세했다. 주로 지주와 광작농민이 고용노동을 사용했지만 소작농들이 불가피하게 노동자를 고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령 충청도에서 열 마지기를 소작하고 있던 한 소작농민은 김매기, 가을걷이, 타작 등을 위해 매회 열 명씩 5회에 걸쳐 노동자를 고용하고 품삯으로 1인당 쌀 3되에 5푼을 지불한 결과, 20섬 수확에 지주에게 10섬을 주고 나머지는 모두 품삯으로 지출되어 "타작 마당에서 이미 남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3-33 고지제도
고지(雇只)는 빈농들이 춘궁기에 곡식이나 돈을 빌리고 그 대가로 채권자의 일부 농사 과정(김매기 등)에 노동력을 제공한 데서 발생한 제도이다. 이렇게 성립한 고지는 돈이나 곡식을 先貸하고 농번기에 노동으로 변상하는 채무적 고용노동으로 전화하여 17세기 말부터 경기도 일부 지역과 황해도 재령지방에서 널리 채용되고, 전북의 평야지방으로 확산되었다. 지주나 부농 등 雇主의 입장에서는 노임을 선불하는 대신 일반 고용노동보다 싼 임금으로 사전에 노동자를 확보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19세기부터 고지는 계약노동으로 발전하여 농사의 1개 과정 또는 몇 개 과정을 맡는 단고지(單雇只)와 1년 농사 전 과정을 맡는 통고지(通雇只)가 성립한다. 고지노동의 주체는 부업노동에 나선 빈농들과 농촌 무산자 계급이었다. 또 통고지는 주로 조직화된 고지꾼들이 참여하였고, 최고 80명의 고지꾼으로 구성된 조직도 있었다.
4. 광업과 수공업에서의 자본제적 관계의 발생
4절에서는 (제목과는 달리) 조선시대 광업의 발전과정 만을 살펴본다. 따라서 4절의 내용은 실제로는 3-8, 9, 10의 수공업의 발전과정에 대응한다. 광업과 수공업 분야에서의 자본제적 관계의 발생에 대해서는 당분간 3-7, 8, 9, 10의 내용을 참조하기 바란다.
3-34 봉건적 관영 광업
국가봉건제 하의 광업은 농민부역에 기초한 정부의 독점광업, 즉 관채(官採)에 의해 이루어졌다. 광업수요는 주로 화폐주조, 지배계급의 소비, 무기제조, 중국에 대한 공물(貢物) 등이었는데 금과 은에 대한 중국의 공물 요구가 과도하여 성종 시에는 금광과 은광을 폐쇄하기도 했다. 광산의 부역노동은 농한기에 인근지역의 농민들을 저렴한 삯으로 강제 징발했다.
16세기까지의 금은광산은 중국에 대한 공물을 위해 개발되었는데 15세기 말경의 사금광(沙金鑛)은 단천 영흥 안병 등 33개 지역, 은광은 태주 등 29개 지역에 분포했다. 1503년에는 鉛에서 銀을 분리하는 방법이 金甘佛, 金儉同에 의해 개발되기도 했다. 중앙정부는 금과 은을 광산이 위치한 지역의 貢物로 지정하여 지방수령에게 납부 책임을 맡겼다. 鐵도 공물 형태로 수취했는데 세종실록에는 27개소의 사철장(沙鐵場)에서 년간 15만여 근이 생산되었다고 한다.
봉건정부는 재정 수입을 위해서 민간업자에게 광산 경영을 부분적으로 허용했다. 주로 부상대고(富商大賈)들이 은광 개발에 참여했고, 정부는 이들에게 광부 수를 기준으로 1인 1일에 1냥 및 생산량의 1/10에 해당되는 은을 곡물로 바치게 했다. 한편 대중국 무역에 종사하는 역관(譯官) 등은 정부의 감시를 피해 잠채(潛採)에 종사하기도 했다.
3-35 설점수세제의 성립
설점수세제(設店收稅制, 1651년)는 기존의 관영광업을 일부 유지하면서 정부의 봉건적 통제 아래 민간업자를 광업에 참여시키고 세금을 징수하는 제도이다. 관채와 설점수세의 경영체계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관채 ; 정부-지방관(=都會官)-부역노동-貢物
·설점수세 ; 정부(호조)-別將-점인-고용노동-鑛稅
정부가 설점수세제를 도입한 것은 17세기 중엽 이후 대외적 긴장이 해소됨으로써 광산의 직접 경영에 따른 재정 부담이 부각된 것과 부역노동에 대한 농민의 저항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사금과 사철광산에 동원된 농민들은 겨울에는 심한 동상에 시달려야 했고, 채굴 시에는 시설 미비로 붕괴사고가 빈발하여 부상과 압사자가 속출했다. 따라서 정부가 광맥을 탐사하러 나오면 지역 농민들이 광맥을 은폐하거나 탐사 작업을 방해할 때가 많았다. 또 지방수령과 향리들도 광맥이 발견되어도 중앙에 보고하지 않는 실정이었다. 17세기 중엽 이후 戰後 재정복구와 대중국 외교 및 무역을 위해 호조에서 은광 개발에 주력했으나 위의 두 요인에 의해 난관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3-36 설점수세제의 이중적 성격
설점수세제는 아래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별장을 매개로 봉건적 규제와 민간경영이 결합되는 2중 구조를 갖는다.
정부는 우선 별장(別將)을 파견하여 광산경영과 수세(收稅)를 책임지게 했다. 또 농민의 광산 유입을 막기 위해 각 銀店의 노동자(=연군, 광군, 점군) 수를 10-30명으로 제한하고, 필요 시 광군의 타 광산 이동 및 토지로 복귀시킨다. 은점 당 연군 수의 제한으로 한 개 광산 내에 수십 개의 銀店이 설치되었다. 정부가 징수하는 점세는 연군 1인당 1년에 銀5전으로, 별장이 수세하여 호조에 납부한다. 그런데 은5전은 동전1냥에 해당되고 당시 군포 2필이 동전 4냥이었으므로 이 세금은 대단히 낮게 책정된 것이었다. 따라서 별장의 중간 착취 분이 막대했다. 해당 지역의 관아에서도 광산에는 풍로세(風爐稅)와 항세(亢稅), 상인들에게는 노세(路稅)를 부과했는데 그 총액수가 대체로 광군 1인당 年間 동전 10냥으로 중앙에서 징수하는 세금의 10배에 이르렀다.
설점수세가 갖는 민간경영의 성격은 별장의 지위가 형식적으로는 국가의 광산경영 대리인이지만 정규관료에서 차출된 것이 아니라 부상대고나 권세가의 사인(私人) 또는 세력가와 연줄이 닿는 상인이나 거간군 출신이라는 데서 잘 드러난다. 즉 별장은 특권적 민간경영인 혹은 징세청부인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다. 물주(物主)로도 불리는 점인(店人)은 점군들에게 필요자금과 생활자료를 제공하고 점군 몫에서 일정 부분을 할당 받는다. 주로 상인이나 상인지주 또는 그들의 대리인이 점인으로 되었는데 점차 이들이 별장을 대신해서 은점의 경영을 주도하게 된다.
설점수세제의 2중성은 고용부문에서도 드러난다. 점군들은 부역노동자가 아닌 고용노동자들이었고, 생산량의 1/3이 점군들에게 배당되어 각자 임금을 수취했다는 점에서는 자유로운 임노동의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생산량의 압도적 부분(2/3)을 수탈 당하고, 이동과 토지 복귀가 국가에 의해 강제되는 반자유 고용 상태이며, 임금 수취가 분익적(分益的)이고 생산도구를 스스로 소지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봉건적 통제 속에 있는 것이다.
3-37 수령수세제로의 전환
봉건정부가 1775년 별장수세를 혁파하고 수령수세(守令收稅)로 전환한 가장 큰 이유는 별장들의 농간으로 점세가 제대로 징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령, 성천 銀店의 별장 이욱이라는 자는 1702년 세금으로 은 400냥을 상납했으나 본인은 은 4,629냥을 착복한 것이 탄로나 물의를 빚었다. 거간꾼 출신으로 호조판서의 연줄로 별장이 된 그는 세금이 광군을 기준으로 부과된다는 허점을 악용하여 탈세와 횡령 등 모리배의 속성을 드러낸 것이었다. 광산 수입을 호조와 별장이 독점하는데 반발한 지방 관청이 앞에서 본 것처럼 각종 잡세를 부과해서 세원을 위축시킨 것도 원인으로 작용했다. 또 부상대고와 토호들이 지방 수령과 결탁하여 금광을 중심으로 잠채(潛採, 私採)를 확대함으로써 설점수세제로는 더 이상 광업을 장악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수령수세제는 설점수세 하의 별장의 기능을 분화시켜 수세 기능은 지방관에게 복귀시키고, 광산경영은 민간인인 物主와 亢主(=德大)에게 이양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설점 허가권, 즉 광세 수취권은 여전히 호조에 있었다. 수령수세제 하에서는 부상대고 뿐만 아니라 중소 상인들까지 물주로서 광산경영에 참여하게 된다. 이들은 광업전문가인 덕대와 동업 형태를 취하면서 과거 店人의 상업고리대 기능을 확대 발전시키게 된다. 물주들이 광산경영을 주도하게 되자 광산경영은 '물주-덕대-점군' 체계로 고정되어 갔다.
3-38 잠채의 성행
물주들은 은광보다 금광경영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19세기 이후 금수요가 증가하여 한 때 금1푼의 가격이 은4전-5전으로 폭등한 탓도 있지만, 금 생산과정이 은이나 동에 비해 단순한 것이 더 큰 이유였다. 砂金은 모래를 분리하는 작업, 石金은 분쇄하는 작업이 거의 전부였다. 따라서 지방 수령들과 결탁한 중소상인 및 상인지주들에 의한 영세규모의 금광 잠채가 성행하게 되었다.
김천시 금릉빗내농악이 전승되어 오고 있는 빗내마을은 삼한시대 감문국에 속했던 지역으로서 옛 감문국의 "나랏제사"와 풍년을 기원하는 "빗신제"가 혼합하여 동제(洞祭) 형태로 전승되었고 동제(음력 정월 6일)때는 풍물놀이와 무당의 굿놀이, 줄다리기 등의 행사가 혼합되어 진굿(진풀이)의 농악놀이로 발전하였다.
빗내농악은 전국 농악놀이의 대부분이 "농삿굿"인데 반해 빗내농악은 "진굿"으로 가락이 강렬하여 타 굿판과는 명확하게 차이가 있으며 모두 12가락(질굿, 문굿, 마당굿, 반죽굿, 도드레기, 영풍굿, 허허굿, 기러기굿, 판굿, 채굿, 진굿, 지신굿)으로 구성되었고 119마치로 세분되어 있다.
빗내농악의 정통성과 맥을 이어가고 더욱 발전시키기 위하여 빗내마을 입구에 2003. 11. 5 빗내농아건수관을 개관하여 체계적인 전수교육과 농악경연대회 등 운영호라성화를 기하고 김천농공고와 개령중학교, 개령초등학교를 전승학교로 지정하고 전수교육생을 육성하여 인재들을 양성하고 우리 고장 문화재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후손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주고자 한다.
1473년(성종 4년)에 개령 현감 정난원이 지금의 위치보다 남동쪽으로 떨어진 유동산 일명 관학산 밑 감천변에 창건했다고 하는데 조선 초기에 전국 군.현에 창설한 경위는 미상이다.
1522년(중종 17년)에 현감 태두남이 크게 수축하고 1563년(명종 18년)에 현감 윤희주가 중건했다.
임진왜란에 개령 주민들이 왜병을 영입했기 때문에 병화를 면했던 것이다.
개령향교는 소설로 5성 2현 및 우리나라 18현을 제향 한다.
석전은 공자탄신일에 지내다가 최근에는 춘추 중월 첫 정일로 정했다. 개령향교는 만인소(萬人疏)사건의 영남 중심지였다.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에 위치한 감문산 계림사는 신라 아도화상이 창건했다.
감주계림사개건기 또는 계림사사적기(1954년 현판 필사) 등의 중요 사적의 기록을 보면 계림사 일대의 지형은 호형이므로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계림사를 건립하였고 근세 계림사의 중건은 순조 4년(1840) 여러 계인이 중심이 되어 대웅전을 비롯하여 요사 즉 방랑과 공루를 확정하고 향연각 등을 건립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향인들이 스스로 절의 산내에서는 묘를 개설치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즉 묘를 쓰면 동리의 우물이 변하므로 동리 사람들이 서로 감시하여 밀장을 금하고 있다는 말이다.
마을 입구에 있는 쌍샘에서는 가뭄이 심할 때 기우제를 지냈는데 쌍샘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는 법이 없다고 한다.
서부동에서 감문으로 넘가는 서쪽길로 가다보면 우측 호두산아래 소릿길 고개너머에 6개의 탑편이 있다.
이 탑에서 북쪽 약 30m 지점이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감문국시대의 장부인능이 있는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주변에 일휘문 암막새기와 조각을 비롯한 고려시대의 기와조각, 조선시대 자기조각이 널려있어서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이 조선시대 중기까지 존속된 것으로 추측된다.
기단, 상륜부, 3층부의 각 부재는 없어지고 초층, 중층의 부재만 남아 있다.
초층 옥개석은 위에 2단의 괴임이 있고 낙수면의 반전은 심하지 않으며, 옥개석 두께는 얇고 받침은 5단으로 되어 있어 전형적인 3층석탑이다.
1959년 광덕저수지 확장공사 때 발굴되어 못아래 좌측 산밑에 세웠다.
광덕1리 문수산에 신라 고찰 문수사가 있었다고 전하고 문수사 터에서 일제 때 금동불상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화려한 영락으로 장식한 보관을 썼고 너그럽고 원만한 얼굴이 풍만하여 전식에 걸친 법의의 선이 뚜렷하고 보존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조성 수법으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1978년에 보호철책을 설치했다가 1990년에 보호각을 건립하여 관리하고 있다.
남면 오봉리 금오산 아래 위치한 오봉저수지는 김천에서 구미방향으로 가다가 대신 우회도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우회전하여 (차량이용시) 약 5분정도 거리에 있다.
147,000평의 넓은 면적에 농경지 700ha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하여 1989년 12월 준공하여 쓰이고 있으며 여름이면 수상스키를 즐기려는 행락객들이 많이 찾고 있으며 잉어, 향어, 붕어 등이 많아 인근 도시의 강태공들도 많이 찾아오고 있다. 작은 하천을 끼고 이어지는 진입도로와 고즈넉한 산책로등이 있어 데이트 코스로 좋으며 갈항사지와 갈항사지 인근에 있는 석조석가여래좌상 등 문화재도 있어 간단한 등산과 견학코스로 이용할 수도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승려 가귀(可歸)가 지은 심원장에 따르면 승전법사가 해골화석 80개를 초석으로 하고 화엄종의 갈항사를 지었다하고 그 화석의 무리를 거느리고 불경을 강론했다고 전한다.
이 갈항사(葛項寺)터에는 국보제99호로 지정된 삼층쌍석탑이 발굴되었다. 이 삼층쌍석탑이 1916년과 1921년에 서울 경복궁으로 옮겨지고 1942년에 국보로 지정되었고 남아 있는 석불은 1978년에 보호각을 건립하여 보호하고 있다. 두드러진 눈, 긴코, 작은입, 둥글고 풍요로운 얼굴에 신비스런 미소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파손이 심하여 오른쪽 엉덩이와 팔이 떨어져 나갔고 무릎 밑은 땅에 묻혀 있다.그러나 남아 있는 부분만으로도 이 불상이 우수한 조각품임을 알 수 있다.
백마산(또는 氣水山)에 있는 고방사의 창건에 대해서 절에 전래하는 현판기문에 따르면 아도화상이 직지사와 함께 418년에 창건했다고 하나 다른 기록은 없다.
기문에 의하면 1636년에 옥청산인이 적묵당을 현철상인이 설선당을 그리고 1656년에는 학능선인이 청원루 5간을 창건하였고 지금의 절은 1719년에 계현 수천대사가 중창했다.
유물로는 1.8m 지름의 홍고가 있었으나 파손되고 경판52장이 관음전에 보관되고 있다.
원래 고방사는 지금의 자리에서 동남쪽으로 약 1km떨어진 골짜기에 있었는데, 그 곳에 있는 약수가 유명하여 약수터라고도 불린다.
이 약수는 100일간 기도를 올리고 부정, 육식, 다툼 등 금기사항을 엄수해야만 효험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어기고 약수를 마신 사람은 피를 토하고 급사한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