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 낮은 집들이 송이버섯처럼 엎드려 있는 작은 마을 앞 바다에 방파제가 두 팔 벌려 마을을 넘보는 거센 파도 막아 줍니다. 근심 끝에 파수병 하나 하얀 총 들고 서 있습니다.
멀리 부레옥잠처럼 떠 있는 형제 섬들 너머로 아침나절 조업나간 배들이 돌아오고, 서녘 하늘 피조개 속살 같은 노을이 만선한 어부들 얼굴에 단풍으로 피어났습니다.
이윽고 밤이 되면 보초선 이등병이 아직 귀환하지 않은 전우들을 위해 반딧불처럼 기별을 보내고, 육지에선 촛불이 활화산 마그마처럼 흘러 바다까지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마을 초입에 서서 어두워진 바다를 바라보며 소매 끝 눈으로 가져가는 노모와 먼저 간 아내를 위해 우리들의 아버지는 작은 촛불 켜고 착착착 잘도 돌아옵니다.
아침에야 걱정 거두고 잠이 든 등대 안쪽 부두엔 옆구리 맞대고 늘어선 배들이 잠시 낮잠을 잡니다. 수협 앞에서 파시가 펼쳐지고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 등 푸른 지갑을 엽니다. 돈 좀 챙긴 아버지들 소주 몇 잔 나누며 서울 간 자식 걱정에 한숨 자다가 또 바다로 나갑니다.
위문편지처럼 마지막 여객선이 부두로 들어오면 도시로 가는 마분지 박스마다 바글바글 병아리 사랑이 실립니다. 수협 뒤 여관 창에 불빛이 들어오고 홀로 된 숙모가 파도가 들려주는 자장가에 잠을 잡니다. 등대 너머 하얀 부표들 밑으로 김이 자라고 미역이 자라고 전복이 자랍니다.
[당선소감]
시 부문 당선자 유하문 씨
그 겨울 촛불들의 염원처럼…
격정의 80년대 초반,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시인이 되겠다고 다시 국문과에 진학해 겨우 졸업했으나, 공부하는 시간보다 밖으로 나가 민주화 투쟁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꿈이던 시인은 되지 못하고 자비 출판으로 소설집을 먼저 몇 권 냈다. 내 나이 올해 60, 시인의 꿈을 찾아 응모했는데, 덜컥 당선 소식이 왔다. 섬을 지키며 길 잃은 배들을 인도하는 등대의 모습에서 문득 그 겨울 광화문 광장을 떠올리고 쓴 시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광장에 등대처럼 불을 밝힌 촛불들…. 그 촛불들의 염원대로 정의롭고 공정한 나라가 되길 바란다. 내 아들, 딸들이 희망을 갖고 노인들이 외롭지 않은 나라가 되길 간절하게 빈다. 그동안 모아둔 시가 백여 편 되니 이제 첫 시집을 내야겠다. 나이 60에 내는 첫 시집이라니! 그런데 누가 이 무명 시인의 시집을 내줄지 걱정이다. 소설집도 그러했지만 또 형제간, 친인척, 동문, 친구들에게 강매(?)라도 해야지, 하고 생각하니 늦은 나이에 문학을 버리지 못한 내 운명이 조금 가소롭다.
도대체 무얼 위해 이 나이에 불멸의 밤을 보내야 했던가. 글쓰기란 실패한 삶의 서정적 미화하기란 말에 동의한다. 못난 작품 선해 주신 심사위원님과 경남신문에 감사드린다. 앞으로 좋은 작품으로 보답하겠다.
★ 유하문 씨 약력 △1958년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한국해양문학상, 여수해양문학상 수상 △대전 재수종합반 학원 국어 및 논술 강의
[심사평]
상징화된 등대의 의미 집요하게 잘 살려
이광석 배한봉
올해 시 부문에는 경남신문 신춘문예의 역사를 대변하듯 응모작품의 양이 많았다. 서정적·전원적 상상력을 보여주거나 삶을 성찰하는 작품이 많았고, 사회적 문제나 문명 비판적 의식을 담은 작품, 실험적 경향을 보여주는 작품은 적었다. 풍성한 응모작품의 양에 비해 작품 수준은 기대에 미치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신인의 시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개성과 패기가 있는 참신한 상상력이다. 자기만의 언어로 고유한 자기 세계를 힘차게 밀고나갈 때 다소 거칠고 모자라는 점이 있을지라도 그 가능성에 큰 신뢰를 보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응모작의 상당수가 신인다운 참신한 특징을 보여주지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관념과 감정의 과잉이었다. 묘사가 산만하고, 시적 긴장감이 느슨한 시, 주제 의식이 치밀하지 못해 완성도가 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가운데 본심에 오른 작품은 ‘소슬 모란’ 외, ‘옷핀, 먼 길을 꿰어 오다’ 외, ‘태풍의 눈’ 외, ‘가새’ 외, ‘등대’ 외, 5명의 시였다. 이 시들을 다시 정독하고 심사숙고한 끝에 배종영씨(경기)의 ‘가새’ 외 3편, 유하문씨(경북)의 ‘등대’ 외 8편을 최종 논의하기로 했다. 배종영씨의 ‘가새’는 ‘가위’의 지역말인 ‘가새’를 모티브로 상상력을 차분하게 전개하고 있었다. 말놀이와 의미의 적절한 거리가 호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마무리가 성급해 아쉬움을 남겼다. 단절과 봉합의 상상력 역시 조금 더 활달하게 전개됐으면 좋았을 것이다. 유하문씨의 ‘등대’는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은 사람들의 일상을 ‘등대’라는 상징을 통해 보여주었다. 부분적으로 이미지의 낯익음이 지적되기도 했지만, 상상력의 전개가 자연스럽고, 체험에서 우러나온 듯한 언어로 시종일관하고 있어 신뢰감을 주었다. 무엇보다 상징화된 ‘등대’의 의미를 집요하게 실재적이고 객관적인 세계에 진입시키려는 노력이 시적 긴장을 유발시켜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마지막까지 붙잡았다. 유하문씨의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을 축하하며 대성을 바란다. 아울러 당선에 들지 못한 분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전해 드린다. (심사위원 이광석·배한봉)
[2018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한순간 해변
이명선
검은 얼굴의 아이가 있어 조류를 타고 해변까지 밀려온 대륙의 아이가 있어 뿔뿔이 흘러가는 하늘에 흰 수리는 원을 그리며 비행하고 있어
거듭 얼굴이 풀어져 뭍으로 오르려는 눈꺼풀이 흩어져
반복의 역사는 번복되는 아이들로 가득해 창창한 것은 꿈의 세계야 검은 눈물로 적셔지는 땅도 있어
우리에게 바다는 수평선 너머에도 있지만 아이에겐 수평선 너머의 바다엔 해변이 없어
불시에 버리고 온 대륙처럼 감은 눈 속에서 모래 언덕이 푹푹 꺼지고 있어
반신반의 하는 얼굴이 있어 간절함은 체험이 아니야 찢기는 세계에 발을 담그면 붉은빛의 인내가 필요해
국경을 물고 가는 새야 하늘을 균일하게 나누면 새들로부터 망명한 낙원이 있을까
한참을 뛰어가도 숨이 차지 않는 해변이 있어 검은 얼굴의 아이가 부르던 난민의 노래가 밀려나가는
[당선소감]
"홀로 서기를 마무리하며"
이명선
며칠째 계속되던 한파주의보가 해제되었습니다. 당분간 한랭전선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전선이 사라진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안도합니다. 사라지지 않았는데 보이지 않을 때 저는 안도합니다. 베란다 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올겨울 들어 처음 올려다봅니다. 시립니다. 시린데 온몸으로 퍼지지 않습니다. 지금 제가 뜨겁기 때문입니다. 눈이라도 펑펑 내린다면 더 시린 하늘을 찾아서 밖으로 나가려는 충동이 일 것입니다. 듣고 있던 노래의 볼륨을 더 줄입니다. 아예 들리지 않는다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제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혼자 생활하는 것이 편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걷다 보면 물 위거나 구름 위였습니다. 빠지거나 떨어질 수 있는 불편에 대한 직감으로 자주 붉거나 창백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낀다는 것이 평범이라는 걸 알지만 타고나길 그렇게 타고났나 봅니다. 그래서 늘 혼자 지냈습니다. 외출할 때마다 자주 모자를 썼습니다. 모자를 푹 눌러쓰면 타인의 시선뿐만 아니라 제가 보고자 하는 것들에서 가려질 것 같았습니다. 어떤 욕망도 제 것이 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사라지지 않았는데 보이지 않을 때 저는 안도합니다. 저의 하루는 단순했습니다. 온종일 음악을 들으며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 유일한 일이었습니다. 중얼거리다 보면 모든 중얼거림은 저에게로 다시 되돌아오곤 하였습니다. 되돌아오는 중얼거림을 언제부턴가 받아 적었습니다. 혼자 지내는 일치곤 매력적인 일이었습니다.
당선 소식을 받았습니다. 순간 혼자 중얼거릴 수가 없었습니다. 무작정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여전히 없었습니다. 이제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걸어가야겠습니다. 그 길을 내주신 경인일보사와 저의 중얼거림을 받아주신 심사위원님께 큰절 올립니다. 저에게 최초로 시를 보여주고 시의 길을 내준 이돈형 시인과 시의 날개를 펼치게 한 김지명 시인께 거듭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쓰겠습니다. 이 말이면 될 것 같습니다. 늘 애틋하게 지켜봐 주는 이종영, 이영선, 이영예, 김병찬 그리고 끝끝내 사랑인 재인이에게도 깊은 마음 전합니다. 하늘에서 지켜보고 계실 엄마, 아버지 곧 사진 가지고 찾아뵙겠습니다.
- 1969년 충남 광천 출생
[심사평]
김명인·김윤배 시인,
"비극적 상황을 절제와 인내로 직시한 작품"
이명선 당선자의 '한순간 해변'은 지난 2015년 9월 시리아 난민 아이의 죽음을 소재로 인류의 비극을 그린 작품이다.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이 인류가 저지르고 있는 비극을 그리면서도 인내와 절제가 미덕인 시 세계를 펼쳤다고 평가했다. 총 1천158편이 접수된 '2018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서 본심 심사위원들은 18편의 시를 골라 평가했다. 이 가운데 4편이 당선작 후보에 오르며, 심사위원의 매서운 심사대에 올랐다. '한순간 해변'과 '익투스' '수수께끼 나라의 첫 인사법' '미역국을 삼킨다는 것', 등이 당선 경쟁을 벌였다. 우선 '미역국을 삼킨다는 것'은 의미가 함축되도록 말을 활용하는 솜씨가 두드러진 작품이라는 평을 받으며 심사위원을 사로잡았다. 시상을 단단하게 다뤄본 느낌을 준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심사위원들은 섬세하게 형상화하는 작업이 아쉬웠다고 평했다. 종교적인 느낌이 강한 '익투스'는 시를 조여내는 실력, 한 편의 작품을 완성시키려는 의지가 읽히는 작품으로 잘 조정된 시적 발화를 보여줬다는 평을 이끌어냈다. '수수께끼 나라의 첫 인사법'은 시문이 유려하고 상상력이 돋보인 작품으로 마지막까지 당선작과 자웅을 겨뤘다. 본심 심사위원들은 '한순간 해변'의 이명선 당선자가 당선작 외에도 응모한 시가 고루 상당한 실력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줬다. 좋은 시인을 발굴했다고 입을 모았다. 반면 심사위원들은 응모자들이 실험적인 작품쓰기에 주저한 것에 대해선 아쉬움을 표했다.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시에서 사유의 날카로움이 드러나지만, 대체로 서정적인 작품이 많았다고 지적했다.
심사위원들은 가족과 개인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 좁아진 것이 각박한 현실 속을 살아가는 이들의 생존법을 반영한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표했다. 마지막으로 시인을 꿈꾸는 응모자들에게 시를 통해 가보지 않은 낯선 곳에 가려는 노력을 당부했다. /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
[2018 매일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박쥐
윤여진
있잖아 이 붉은 지퍼를 올리면 그녀의 방이 있어 내가 구르기도 전에 발등을 내쳤던 신음, 그녀의 손가락을 잡으면 구슬을 고르듯 둥근 호흡이 미끄러져 들어왔지 켜켜이 나를 쌓던 그녀는 더는 미룰 수 없는 걸 알았는지, 나는 그녀의 배를 뚫고 나왔어 처음으로 말똥하게 울었는데 날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이 선명해, 입 다물었지
노을을 오래 눈에 담으면 모든 결심이 번지고 마는 거, 아니? 나는 거꾸로 앉아 바깥을 노려봤어 배꼽 언저리를 돌리면 꿈속에서 잠드는 그녀의 집이 있어, 내가 모를 남자와 나만 한 아이가 있다는 그 집, 문지방을 넘기도 전에 접질리는 호흡. 쌓아둔 라면이 떨어질 때마다 잘 살고 있었네? 그녀는 내게 돌아와 물었지 발가락 사이엔 어설프게 부러뜨린 빛이 한가득이었어
난 그녀가 쏟아낸 그림자를 받아먹고 하루가 다르게 자랐어 뒤통수에 부러진 그녀의 날개를 밀어놓고, 기껏 고른 어둠을 양발 가득 쥐고 매달렸지 그럴 때마다 그녀는 말해 이젠 멀리 못 날아가겠네, 힘껏 닳은 발톱을 내밀다 조용히 멀어지는 그녀의 남은 날개를 내려다봐, 떨어진 돌조각을 씹어 삼키며 불현듯 나는 놀라곤 해 다시 멀어진 저 지퍼, 똑 닮은 저 곡선이 내 배에도 들어차 있었거든 흉터를 밝히는 건 촘촘히 밀려가는 증오, 잘 보이도록 내가 나온 자국을 저무는 해에게 붙여두지
귀소본능은 박쥐의 지긋지긋한 버릇, 몸살처럼 돌아올 그림자를 향해 긴 잠을 자둬야지 나는 늘 거꾸로 앉아 말해 어서 와 엄마
◆당선 소감
"시는 나를 짓는 일…도움 준 분들께 감사"
당선 전화를 받고 오래 얼떨떨했습니다. 단단히 옷을 챙겨 입고 같은 길을 돌다, 거리 곳곳에서 엇나간 표정과 몇 가지의 울음을 주웠습니다. 오래된 방에 앉아 하나씩 풀어놓으며 그제야 잃어버린 몸이 내게 걸어오고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아직도 저는 시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내가 누운 자국을 끈질기게 응시하는 일, 가끔 오래된 방을 두드려보며 나의 안부를 묻는 일이라 추측해볼 뿐입니다. 분명한 건 순간의 나를 믿으며, 주위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에게 눈을 맞추며 잊히는 것에 이름 붙여줘야 하는 일을 계속해서 해야만 한다는 생각뿐입니다. 불안의 끝에서 오는 사랑을 이제야 믿습니다. 저는 이제 꿈속에서 잠드는 집을 아주 천천히, 견고하게 쌓아 올리려 합니다. 부끄러움과 겸손함을 힘으로, 내가 나를 짓는 이 일을 오래 하고 싶습니다.
늘 시의 처음에 서서 지지하고 응원해주시는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께 가장 먼저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나보다 더 기뻐하며 언제나 내 편인 내 동생 미진, 수진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시는 무엇이 될 수 있으며 그 가능성을 알려주신 안도현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문장을 읽을 때마다 울먹였던 습관을 잊지 않고 시를 쓰겠습니다. 내가 만든 인물이 내게 말을 걸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신 곽병창 교수님과 송준호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계속해서 읽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되뇌게 해주신 유강희 교수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방학마다 시집 여러 권을 들고 도서관과 바다로, 독한 공부를 떠났던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학우들, 안부와 일상을 물을 때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단 욕심과, 다정함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시륜 학우들, 집에 가는 길에 늘 온기를 쥐여주셨던 대학원 선생님들, 모두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저의 중얼거림에 귀 기울여주신 심사위원님들과 매일신문에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약력
1995년 충북 음성 출생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심사평
모성의 신화에 대한 시적인 뒤집기 인상적
예심을 통해 올라온 것은 20여 명의 작품이었다. 투고작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시적인 것’에 다가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다가감’이 아직 실현되지 않는 시적인 것에 육박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시가 될 수 없는 것과의 긴장 속에서만 시적인 것은 생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심사위원은 작품들을 추려나가면서 최종적으로 추일범, 이린아, 윤여진의 작품을 남겨두게 되었다. 이 시들은 각기 다른 측면에서의 선명한 장단점을 갖고 있었고 그 나름의 시적 잠재성을 보유하고 있었다.
추일범의 「구름의 실족사」는 장례식장을 배경으로 그 공간을 다른 차원으로 확장시키는 공감각이 뛰어났다. 죽은 사람과 조문객 사이를 은유의 힘으로 연결시키는 능력이 설득력 있는 감성을 전달했다. 다만 그 차분한 감동은 강렬한 매혹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린아의 「편집증」은 호치키스라는 오브제에 대한 시적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한다. “열두 명의 이모와 방문을 잠근 다섯 명의 언니”의 예기치 않은 등장은 시적인 언어의 절묘한 돌발성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시와 투고된 다른 작품들과 편차가 있는 것은 아쉬움이었다.
윤여진의 시들에서는 정교한 언어들과 강렬한 이미지들이 엮어내는 인상적인 성취를 확인할 수 있었다. 투고작 가운데 「박쥐」와 「구름 수리공」 모두 수작이었다. 상대적으로 「박쥐」가 더욱 특별한 발화법과 상상력을 보여주었다. 가족과 모성을 둘러싼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을 서사로 끌고 가지 않고 점묘법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부분마다 집중해서 전체를 보여주는 기법은 자신이 생성하는 이미지에 대한 확신에 근거한 것처럼 보인다. 모성을 ‘박쥐’라는 이미지로 상상적으로 재구성한 점도 매력적이지만, 집을 떠났다 돌아오는 존재가 모성이라는 설정 역시 익숙한 모성의 신화를 뒤집는다. 이 시적인 뒤집기를 통해 모성을 둘러싼 상징질서에 날카로운 균열을 낸다. 섬세한 재능에 대해 신뢰할 수 있었고, 미지의 폭발력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송재학 시인, 이광호 서울 예술대 교수)
[농민신문 신춘문예-시 당선작]
[당선 소감]
“구순 아버지 칭찬처럼 ‘장한 시’ 쓰고 싶어”
소실점 끝 불안감 걷어준 낭보 시 곁에 두고 끝까지 견뎌갈 것
당선통보를 받았다. 동시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구순을 향해 구부러진 목소리가 전화기 저편에서 카랑카랑 들려왔다. 오래전 <농민신문>을 애독하셨던, 농부인 아버지가 짧게 한마디 하셨다. “장하다!” 장한 시를 쓰고 싶다. 아주 골똘하게 장한 궁리를 해보지만 장한 시 쓰기는 언제나 불안하다. 뻔히 보이는 가설을 붙들고 한밤을 보낸다. 애착이란 사랑하는 사람의 유품 같은 것, 나는 시를 애착한다. 내 허물을 간단하게 들키는 때가 허다하지만 시를 곁에 두고 끝까지 견디겠다. 새벽과 어둠을 함께 겪은 남편과 평생 팔 걷을 준비가 되어 있는 정화, 준혁, 준호에게 사랑을 전한다.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으로 인연을 맺은 조재학, 백성, 노수옥, 김순자, 이수니, 김영한, 이인, 강스텔라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매달 만나 합평하고 수다 떠는 일은 그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소실점 끝에 몰려 있던 불안을 순식간에 걷어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감정의 진폭이 잔뜩 묻어 있는 맨발의 체온이 따뜻해진다. 특효약 같은 시의 세상을 꿈꾼다.
고은희 ▲1967년 전남 무안 출생 ▲현 방송작가(KBS ‘6시 내고향’ 등)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심사평]
밀풀, 고전적이고 담백한 작품…감칠맛 나는 언어 돋보여
‘잘 풀어줘야 잘 붙는 힘’ 발휘…‘앙큼한 맛’ 담긴 시 써주길
모두 276명의 응모자 중 예심을 통과한 20명의 작품을 받았다. 20명의 작품은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접수번호 외에는 아무런 정보도 없는 임시 묶음 책 형태였다. 다산 선생이 ‘문장은 사람의 꽃이다’라고 했던가. 꽃밭에서 단점을 찾아보려고 며칠 혼났다. 다들 나름 빛났다. 두 심사위원은 각자 다섯편을 추려 최종 합평회서 만났다. 세편이 일치했고 다른 두편도 눈여겨봤던 작품이라는 점에서 미소를 나눌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남은 작품은 ‘대설주의보’ ‘달팽이’ ‘밀풀’ ‘만가’ ‘해당화’였다. 시대의 아픔을 노래한 ‘만가’는 동봉한 다른 작품에서 설명적인 시 구절이 더러 드러나, ‘꽃잎을 까보면 충혈된 눈동자’ 같은 감각적인 이미지가 살아 있는 ‘해당화’는 앞부분의 긴 나열이 긴장감을 떨어뜨리고 있어, 먼저 미련을 접었다. 남은 세편을 올려놓고 한편을 결정하려고 하자, 단점은 가려지고 장점들만 부각됐다. ‘대설주의보’는 언어의 절제미를 보여준 산뜻하고 정갈한 작품이었으나 당선작으로 선하기에는 좀 소품이 아닌가 싶어 망설여졌다. 마지막까지 남은 ‘달팽이’는 함께 응모한 작품들 전체가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더 애착이 갔다. 공사장 절벽에 매달린 노동자와 달팽이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노동자의 삶을 잘 그려내고 있으나 과연 이 시가 새로운가를 문제 삼아 볼 수밖에 없었다. 당선작으로 결정한 ‘밀풀’은 고전적이고 담백한 작품이다. 작품을 형상화하는 능력과 언어를 감칠맛 나게 다루는 솜씨를 높이 봤다. 앞으로 ‘잘 풀어줘야 잘 붙는 힘’을 언어의 세계에서도 발휘해 ‘앙큼한 맛’ 나는 시 많이 써주길 바란다. 당선자를 축하하며 당선을 잠시 미뤘을 뿐인 응모자님들에게도 위로의 말을 전한다.
[문화일보 신춘문예-시 당선작]
발코니의 시간
박은영
필리핀의 한 마을에선 암벽에 철심을 박아 관을 올려놓는 장례법이 있다 고인은 두 다리를 뻗고 허공의 난간에 몸을 맡긴다 이까짓 두려움쯤이야 살아있을 당시 이미 겪어낸 일이므로 무서워 떠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암벽을 오르던 바람이 관 뚜껑을 발로 차거나 철심을 휘어도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그저 웃는다 평온한 경직, 아버지는 정년퇴직 후 발코니에서 화초를 키웠다 생은 난간에 기대어 서는 일 허공과 공허 사이 무수한 추락 앞에 내성이 생기는 일이라고 당신은 통유리 너머에서 그저 웃는다 암벽 같은 등으로 봄이 아슬아슬 이울고 있을 때 붉은 시클라멘이 피었다 막다른 향기가 서녘의 난간을 오래 붙잡고 서있었다 발아래 아득한 소실점 더 이상 천적으로부터 훼손당하는 일은 없겠다 하얀 유골 한 구가 바람의 멍든 발을 매만져준다 해 저무는 발코니, 세상이 한눈에 보인다
[당선소감]
5년 前 쓴 詩… 이별 통보한 애인이 내 발목 잡은 기분
박은영
허기가 졌다. 국거리용 소고기를 구워 먹고 책상에 앉아 끼적거리고 있는 사이 당선 연락을 받았다. 예고 없이 찾아온 전화였다. 멍하니 하루를 보냈다. 나보다 지인들이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당선작은 5년 전에 써놓고 묵혀두었던 시다. 그토록 간절하게 원했던 겨울은 그때였었다. 우리, 이제 헤어져. 애인에게 이별 통보를 하고 돌아서는데 ‘나쁜 남자’였던 그가 발목을 붙잡은 기분이다. 사는 일이 이렇다. 내 뜻대로 되는 게 어디 있던가. 시 쓰는 거 힘드니까 그만두라는 말로 매년 위로하던 가족들, 이종섶·조수일·김형미 시인님, 이건수·한철희 목사님… 내가 나로 살아갈 수 있는 건 전적으로 이분들의 존재 덕분이다. 특히, 나의 아들아! 창문 없는 고시원을 거쳐 이민 가방을 끌고 그 먼 길을 가는 동안 얼마나 막막했니. 비록 웅크리고 꿈을 꾸지만 볕 들 날이 너에게 오리라 믿는다. 너와 나는 약하지만 언제나 강했다. 황동규, 정호승 선생님께 머리 숙여 깊이 감사를 드린다. 아무튼 이건 기적이다. 겨자씨만 한 믿음이 나에게 있었던가. 돌이켜보면 나의 반석, 나의 구원, 나의 산성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부끄러울 따름이다. 또, 겨울이 가고 그 길로 다시 추운 겨울이 오겠지만 이제 나는 시편 같은 봄을 기다릴 것이다.
△1977년 전남 강진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심사평]
風葬문화라는 구체성 통해 삶과 죽음의 동일성 깨닫게 해
시는 말과 언어를 다루는 기술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인간 삶의 내면을 응시하는 깊은 사고와 이해에서 나온다는 점을 투고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듯해서 안타깝다. 우리 삶과 유리된 채 공연히 초현실적으로 매끄럽게 톡톡 튀는 느낌을 주는 작품이 많다는 것은 시를 쓰는 기술이 앞선 작품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본심 최종심까지 오른 작품은 이창원의 ‘금요일기’, 홍경나의 ‘먼우물’, 최민주의 ‘그림자 동물원’, 이영란의 ‘짚’, 박은영의 ‘발코니의 시간’ 5편이었다. 이 중에서 피상적이고 관념적이며 감상적인 작품을 먼저 배제하고 나자 ‘짚’과 ‘발코니의 시간’ 2편이 남게 됐다. ‘짚’은 ‘집’이라는 말의 유사성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한 시다. 짚을 감아줌으로써 감나무는 혹한의 겨울을 견딜 수 있고, 그 짚 속에 기어든 벌레들 또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내용이 시의 전체를 이루고 있으나 평이함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나무에 짚을 감아주는 의미가 모성적 차원으로까지 승화됐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나무들도 영혼이 있다면/ 저 짚에 조용히 은거하고 있을 것이다’와 같은 결구 또한 평이하고 안이하다고 판단돼 결국 ‘발코니의 시간’이 당선작으로 결정됐다.
‘발코니의 시간’은 삶의 고통에 대한 견딤이 죽음의 고통 또한 견디게 해준다는 중의적 의미가 내포된 시다. 정년퇴직한 뒤 발코니에서 화초를 키우는 아버지의 현재적 삶과 암벽에서 풍장의 과정을 겪고 있는 죽음의 삶을 발코니의 통유리를 경계로 대비함으로써 삶과 죽음의 동일성을 깨닫게 해준다. 자연적인 해체의 과정을 견디는 풍장 그 자체가 바로 오늘의 삶에서도 가장 요구되는 인내의 덕목이라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관념성을 풍장 문화라는 구체성을 통해 나타내고 있는 점이 이 시의 힘이자 장점이다. 신춘문예에 당선된다는 것은 마치 하나의 새로운 우주를 만난 듯한 기쁨일 것이다. 진심으로 당선을 축하한다. 심사위원 황동규·정호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