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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32
창세기 8:1-14
방주가 머문 산
오늘 본문도 단순히 홍수가 멎고 물이 줄어들어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그제야 노아와 그 가족이 방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는 그런 일이 오래전에 있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정도가 아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 복음을 드러내고 그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자 하신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1절). 우리 성경에 “모든 들짐승”이라고 번역되었는데 직역하면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라는 말이다. “가축”이라고 번역된 ‘베헤마’는 ‘네발 가진 짐승’을 뜻한다. 그리고 중요한 표현이 나오는데 “기억하사”라는 말씀이다. 히브리어로 ‘자카르’인데 우리말에서는 수식하는 표현들이 먼저 사용되지만 히브리어는 동사가 먼저 나온다. 그래서 8:1 첫 단어가 ‘자카르’이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동물들을 방주 안에 방치해 놓고 잊어버리셨다가 갑자기 기억이 나서 어떤 조치를 이제야 취하셨다는 표현이 아니라 언약 용어이다. 일차독자의 입장에서 출애굽을 이루신 하나님을 생각나게 한다.
24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25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출 2:24-25)
이스라엘이 애굽의 압제에서 고통의 소리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니까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자신의 언약이 기억나서 애굽에서 건져주신 것처럼 보이는 말씀이다. 만약 문자대로 본다면 우리가 부르짖고 구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대로 일하실 것을 알도록 고통 중에 부르짖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을 이스라엘이 기억하고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대로 일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2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4 가나안 땅 곧 그들이 거류하는 땅을 그들에게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5 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출 6:2-5)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것은 조상들에게 언약하시고 그 언약대로 일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자카르’하셨다는 것은 언약을 완전하게 이행하시는 분이라는 뜻이고 그 언약은 생명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에스겔 선지자가 이렇게 말씀하였다.
25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5-27)
여기서 “맑은 물”(히, ‘타호르 마임’)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을 주시는 방식을 하나님의 영을 마음에 주시는 것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영을 마음에 주시면 말씀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된다.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 바뀐 상태가 구원이다. 이것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새 언약”이라고 하였다(렘 31:31). 새 언약으로 성취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눅 22:20). ‘자카르’(H2142)에서 유래한 단어가 ‘남자’, 즉 ‘씨 가진 존재’로서 ‘자카르’(H2145)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는 것을 통해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자카르’를 헬라어로 번역하면 ‘므네모뉴오’이다. 우리 성경에서 ‘기억하라, 생각하라’라고 번역하였다 디모데후서 2:8에서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라고 말씀한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품으라”(헬, ‘프로네오’)라는 말은 ‘생각하다’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를 입혀주시는 성령님께서 이루시는 일이다. 성령께서 찾아오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16)라고 하였다.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백오십 일 후에 줄어들고 일곱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물이 점점 줄어들어 열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2-5절).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라고 하였는데 “깊음”이란 히브리어로 ‘테홈’인데 하나님의 진노, 심판을 의미한다. “샘들”이란 어떤 근거와 뿌리가 되는 근원을 뜻한다. “하늘의 창문”이라고 표현한 ‘샤마임 아룹바’란 ‘하늘 문’이다. 말라기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7:11에서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라고 말씀하였는데 이때 “터지며”라는 말씀은 ‘쪼개거나 부순다’라는 뜻이다. 홍수로 하늘의 근원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땅의 것을 쪼개고 부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었었다.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라는 말은 ‘샤마임 아룹바 파타흐’이다. 같은 표현이 말라기 3:10에서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라는 말씀이다. 하늘 문이 열려서 주어지는 하늘의 복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 복은 언약의 복이고 궁극적으로 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런데 홍수 심판 이후 이제 하늘이 닫혔다. 죄인은 접근할 수 없는 하늘이기 때문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은혜를 입었고 그 은혜에 의해 이제 새로운 땅에 살게 되었다. 그 완전한 안식을 보여주시기까지 하늘은 닫혔다. 닫힌 하늘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열렸음을 이렇게 말씀한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계 4:1)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라고 할 때의 ‘물러가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슈브’인데 ‘회복시키다’라는 뜻이다. 3:19에서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혹은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라는 말씀과 같은 표현이다. 시편 23:3에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슈브)”라는 말씀이나 시 35:17에서 “내 영혼을 저 멸망자에게서 구원하시며(슈브)”, 나훔 2:2에서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슈브)”라는 말씀에서 보여주듯이 회복시키신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 본문은 단순히 땅에서 물이 줄어들고 물러갔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말씀이 땅을 회복시키신다’라는 의미로 나타내고 있다.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라고 하였는데 히브리어 ‘누아흐’는 단순히 방주가 산에 정박했다는 표현이 아니라 방주가 아라랏 산에 ‘안식’하였다는 뜻이다. 여기서 “산”이란 지리적으로 어디에 있는 산으로 이해하고 찾을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를 나타내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기억하심으로 이루실 언약을 보여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죄를 덮어주시고 속죄를 이루시는 고페르 나무의 상자가 최종적으로 어디에서 안식을 이루시는가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죄를 덮으시고 속전을 이루시는 십자가는 골고다라는 산에 세워진다.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요 19:17)
헬라어 ‘크라니온’은 히브리어 ‘굴골레트’인데 ‘머리, 머리 수, 해골’이라는 뜻이다(민 1:2, 삿 9:53, 대상 10:10). 예수님의 죽음이 골고다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언약의 기둥이 세워짐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를 두신 곳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 언약의 완성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드러난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몸된 교회이다.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 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6-7절). “사십 일”은 고난이 동반되는 심판의 기간임을 다시 상기시켜 준다. 여기에 “창문”은 하늘의 문(히, ‘아룹바’)과는 다른 ‘할론’이다. “까마귀”는 히브리어로 ‘오레브’인데 ‘빛을 잃다, 어두워지다, 밤이 되다’라는 동사 ‘아라브’에서 온 단어이다. 이런 점에서 까마귀는 어둠을 상징하는 새다. 그래서 율법에서 부정한 동물로 말씀한다(레 11:15, 신 14:14).
우리 성경에 “날아”라고 번역한 히브리어는 ‘야차’인데 이 단어는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4:16)와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12:4)라는 말씀과 같은 단어로 ‘완전히 벗어난다’라는 뜻이다. 까마귀를 내어보내 물이 줄어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한 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데 사실 그런 의미와 전혀 상관이 없다. 그리고 7절은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완전히 독립된 하나의 문장으로 기록하였다. 즉 까마귀를 내어보내 물이 줄어들었는지 확인할 수 없어서 다음에 비둘기를 내보냈다는 말씀과 연결되는 구절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심판으로 말미암아 언약의 은혜를 입은 노아가 어둠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의미하는 말씀이다. 이렇게 보자면 비둘기는 그 반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으매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8-12절). “비둘기”는 히브리어로 ‘요나’이다.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비둘기가 물어왔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이 주어져 살 수 있는 땅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노아와 그 식구가 살 수 있는 땅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새로운 생명으로 살게 된 땅이 되었다는 뜻이다. 말씀이 임하였으나 이스라엘의 원수의 땅 니느웨에 말씀을 선포하는 것을 거부한 요나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반추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마 12:39-41)
노아가 방주에서 비둘기를 내어보냄으로 새로운 생명의 세계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은혜로 주어진 것을 비둘기를 통해 보여주신 것이었고, 요나 선지자를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악하고 음란 세대에 속한 자기 백성들을 은혜로 구하실 것을 나타내셨다. 결국 비둘기는 요나의 표적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여주신 것이었다(20230312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