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좋아하는 영화를 꼽으라고 하면 기생충을 꼽을 것이다. 하나하나 씹을 것들이 있고, 볼 거리들이 있으며 특유의 미장센과 박진감 넘칠 때 등장하는 클래식 음악 등등이 압권이라서 그렇다. 봉감독이 보는 구조적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명쾌한 통찰과 계층을 어떠한 가치판단 없이 묘사하고, 배우들의 대사를 통해 봉준호 감독의 따뜻한 시선을 투영한다. 그렇게 자본주의 속 인간이 사물화되고, 기계화되는 모습을 합리화하는 가치관을 직시시켜 '자본주의를 넘어 타인을 대하자'라는 일종의 메시지를 깔아 놓고 있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연출과 색채 디자인에 대해 유심히 살폈다. 상류층의 박사장은 전반적으로 로우앵글로 찍고 중류층, 서민층의 기택네는 사이드샷을, 하층은 하이앵글에서 찍는다. 각각의 앵글 위치는 그 인물의 위계를 나타내기도 하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긴장을 유발시킨다.난 이 앵글의 프레임 마저도 자본주의의 한 구조 속에 갖힌 사람을 묘사한다고 보았다. 기택네는 청록색, 회색같은 저채도색을 썼고, 박사장네는 우드톤의 양식과 화이트 색체를 주로 써 색체에서도 보이지 않는 문화 자본을 투영해 삽입하고 있다. 기택의 엄마 충숙의 스포츠인 핸드볼과 박사장 아내의 필라테스 또한 확연한 문화자본의 대비를 보여준다. 더 많은 디테일이 있지만 여기까지 하도록 하자. 이제 자본주의로 돌아가 볼까?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실현시켜주는 자본주의를 수용한다. 즉, 동의한다. 이기심을 표출해도 상관없고, 타인을 경쟁자로 다루어 무참히 밟아 수단시 대하는 것에 동의한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결과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과를 중시여기고 타인을 그저 상품으로 대하는 태도는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만 성립한다. 이러한 타자의 기계화를 수용한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시대 정신을 수용한다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인간은 상품일까? 스스로 대답해보길 바란다.
파티 장면에 기정이가 칼을 맞고 쓰러질 때 박사장은 그 모습을 보고도 기정의 아빠 기택의 심정을 고려해 '기정이도 같이 병원을 가자'라고 말하지 않고 자신의 아들 다송을 병원에 이송할 '차키'를 달라고 호통을 친다. 구급차를 부르지 않고 끝까지 고급 승용차를 타겠다는 모습은 마치 자신의 아들을 멋진 곳에 태워 가는 자신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느낌을 준다. 마치 상품처럼. 또, 겉만 중시하는 허례허식의 모습을 보인다. 다송이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미지용도일 뿐인 것이다. 물론 부성애는 있겠지만.
만약 그 고급 세단에 아들 다송이를 태웠다면? 병세가 더 악화됐을 것이다. 이처럼, 자본주의의 허상 속 우리는 스스로를 곪아가게 하는 박사장같은 선택을 하고있지는 않나? 그냥 119를 눌러 서로 의지하고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가 낫지 않나? 마지막 파티 장면은 나에게 이런 의문감을 남겼다.
이번에는 더 나아가 타 철학자인 에리히 프롬과 자본주의를 연관을 시켜보자. 자본주의 사회에서 꿈, 파티 등은 우리 욕망을 실현할 창고가 된다. 동시에 타인과 소통하고 나누고 희생하며 선을 행하는 창구가 되기도 한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보면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렇게 욕망을 실현시키기 쉬운 사회에 살고 있다보니 스스로를 수단인 소유로 취급해버린다라고 말한다. 즉, 자본주의 내로 자신의 몸을 욱여넣는다는 말이다. 상품처럼 자신을 보이길 원하고, 타인 또한 변화하는 실체가 아닌 그저 매몰된 자신의 관념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도구로서 여긴다는 말이다. 이제는 수단으로서의 우리가 아닌 존재로서의 우리로 다시 탈바꿈해 세상과 소통해야 할 때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 타인이 수단시 될 수밖에 없지만 타인을 대하는 모습까지 자본주의적이진 말자.
첫댓글 따뜻한 시선이라는 주장에 대해선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기우는 경제적 성공을 통해 아버지가 갇혀있는 집을 구입하여 재회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반지하에서 꾸는 꿈일 뿐입니다.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결과적으로 기택은 지하실에 갇혔고, 기우는 바보가 되었고, 기정은 칼에 찔려 사망했으며, 충숙은 집행유예긴 하나 범죄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방식은 전혀 정의롭거나 따뜻하지 않았고 참혹한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사태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따뜻하다기보다는 스스로 신분상승 할 수 없고 어디까지나 기생충에 불과한 저소득층의 잔인한 현실과 그 계층이 공유하는 정서를 서늘하게 비추었다고 보는 편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저도 그러한 시각을 통해 본 일부 비평에 대해 동의합니다. 더욱 이 현실을 뼈져리게 느낄 수 있게 하는 현실적 시각이 차갑고 매섭지만 현실을 바라본 이후의 우리들에게 주는 의문점들은 깊이감 있게 다가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감독은 등장인물들을 비웃거나 희화화하는 듯한 연출을 하지 않고 그저 관찰자적 시선으로 이들을 보았습니다. 이는 현실의 참혹함을 알려주는 기능도 있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어떠한 시선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바라보아야 하는지 알려주는 기능도 있겠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봄으로써 어떠한 입장도 취하지 않은 것과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저는 감독의 따뜻한 시선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보이는 계층 간의 투쟁 속에서 결국 누군가는 인간다움을 잊지 않고, 잃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예를들면 지하실의 남자가 늘 머리로 불을 키며 박사장에게 보이지 않는 인사를 하는 장면 등 말이죠. 이를 통해 우리들은 타자를 대할 때 어떠한 태도로 대해야하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며 한 층 더 깊이 성찰하게끔 해주는 거 같습니다.
@강다현(조대23) 본문에 앵글과 색채에 따른 문화자본 대비를 언급하셨습니다. 관찰자적 시선은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중립적인 시선을 의미합니다. 이 점이 상반되어 연결되지 않습니다
비웃거나 희화화하지 않았다는 말씀 역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폭우로 박사장이 일찍 집에 돌아오자 기택 가족은 술상을 황급히 치우고 마치 방에 불을 키면 가구 틈으로 몸을 숨기는 바퀴벌레처럼 소파와 탁자 밑으로 기어들어갑니다. 지하실 남자가 과장된 목소리로 리스펙을 외치고 머리를 조아리는(등 스위치에 갖다 박는) 모습은 인간다움을 잊지 않은 예시라기보다는, 철저히 인간성을 잃어버리고 박사장(저택)에 빌붙어 의식주를 해결하는 기생충의 모습입니다. 이는 자기 합리화이자 착취자에 대한 맹목적 순응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기생충은 타자를 대할 때의 태도를 논하는 영화가 아닌 듯 합니다. 오히려 계층 간극이 매우 큰 탓에 상호 이해가 어렵다는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상류층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만 나는 맡을 수 없는 특유의 냄새가 날 뿐이겠지요. 그들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이는 철저히 구조적이라 섣부른 이해는 자칫 자기기만이 될 수 있다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강철(조대21) 3번 질문)저는 기생충이라는 영화가 최대한 중립의 시선을 취해 우리에게 여러 의문점들을 남겨주고 크레딧을 마무리했다는 점을 말한 것 뿐이지 타자를 대할 때의 태도를 논하는 영화라고 확정짓지는 않았습니다. '타자를 대할 때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스스로의 질문을 던졌을 뿐이죠. 섣부른 이해가 자기기만이 된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르겠으나 혹여 알려주신다면 자기기만의 정의와 섣부른 이해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해주시기 바랍니다.!!
2번 질문) 강철 학우분의 해석을 존중합니다. 비웃거나 희화화하지 않았다는 말 역시 저의 생각일 뿐이니 해석은 자유겠지요. 오히려 저렇게 바퀴벌레처럼 묘사한 것이 저에게는 하나의 희화화보다 객관적 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묘사라는 단어는 개개인의 해석을 전제로한 단어기에 이 말과 객관은 서로 상충됩니다.
1번질문)대비를 통해 계층 간 간극을 여실히 보여준 작품이라 생각했습니다. '대비랑 중립' 이 두 단어는 각각 '해석'과 '관찰'이라는 단어의 고유 특성이 상충되었기에 학우분께서 그렇게 느끼시는거겠죠? 이 부분은 저의 맹점이자 오류입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강다현(조대23) 1번, 2번 질문)
제가 이해한 기생충은 박사장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영화적 사건을 통해 자본주의의 차가움과 잔인한 현실을 말하는 영화입니다.
영화를 공부하면서 이해한 관찰자적 시점은 사태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여주기에 영화가 가치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다큐멘터리처럼 최대한 중립적으로 사태를 건조하게 바라봅니다.
기생충이 다루는 사건은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말씀하셨듯 대비를 통해 계층 간 간극을 엥글과 색감, 과장된 연기와 영화적 사건을 동원하여 연출한 것입니다.
또한 영화는감독이 "관찰"한 결과를 바탕으로 만든 작품입니다. 여기서의 관찰은 가치판단을 의미합니다.
봉준호 감독은 연세대 사회학과 출신입니다. 사회에 대한 본인의 관점을 영화로써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시선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철저히 감독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로 보는게 자연스럽습니다.
또한 여기서의 의도가 따뜻한 시선이라고도 보기 어렵습니다. 여기에 대해선 저의 첫 댓글을 참고 하시면 좋겠습니다.
@강다현(조대23) 박사장과 기택, 그들이 사는 세계는 너무도 차이가 큽니다.
박사장에게 기택가족은 언제든 교체할 수 있는 인적자원입니다.
기택가족에게 박사장은 부자라서 착하고 훌륭한 분들입니다.
박사장은 기택이 자꾸만 선을 넘는다고 불평합니다.
그리고 지하철 냄새를 말하며 편견어린 시선을 드러냅니다.
기택은 박사장과 결혼이라는 공통점을 들어 "그래도 사랑하시죠?"라고 말합니다.
이 역시 공통점만으로 섣불리 내린 판단입니다.
두 인물 모두 섣부른 이해를 통해 대상을 이해했다고 자기를 기만합니다.
그들은 영화 내내 단 한번도 소통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놓고 서로를 판단합니다.
이는 지하실에 살고있던 충숙 남편도 마찬가지 입니다.
한번도 대화한 적 없으면서 리스팩을 말합니다.
이는 구조적으로 서로 이해할 기회도, 방법도 찾기(만들기) 어려운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점을 드러냅니다.
자본주의적 계층은 서로가 서로에게 보이는 이미지, 냄새로 그들을 섣불리 이해했다고 착각하게 합니다
본문에서 말씀하신 자본주의적으로 타인을 대한다, 자본주의의 허상 역시 섣부른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우린 구조적인 이유로 살아온 환경이 다른 이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기만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