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세계선수권 4강에서 발목 부상까지 당한 천위페이에게 힘 한 번 제대로 못 써보고 완패한 후 안세영은 자신이 패배를 두려워하며 바보처럼 경기를 했다, 이기기 위해 충분한 준비를 했는데 너무 아쉽다는 소회를 밝혔었다. 이에 대해 필자는 천위페이와 야마구치가 안세영에 비해 열세였던 체력을 보강하여 수비력과 지구력에 있어서 이제 그녀와 대등한 레벨에 올라선 상황에서, 스매시 파워에서 밀리는 안세영으로서는 이 업그레이드된 두 베테랑을 상대로 앞으로 매우 힘든 싸움을 하게 되리라 우려하는 글을 본 게시판에 여러 번 썼었다. 항상 실력으로 모든 걸 말해 왔고, 빈말을 하는 안세영이 아님을 잘 알면서도 천위페이와 야마구치의 컨디션과 기세가 워낙 매서웠기에 안세영 역시 대대적으로 스매시 파워를 끌어올리지 않으면 승산이 희박하다고 본 것이다.
최근 몇 달간 안세영과 대결할 기회가 없었던 야마구치는 한 수 아래인 왕즈이에게 패하는 등 시행착오의 시간을 거치면서도 꾸준히 컨디션을 끌어올렸고, 마침내 최근에 있었던 파리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가공할 공격과 안세영 못지않은 수비 실력을 선보이며 자신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선포한 바 있었다. 안세영만 없었다면 야마구치는(그리고 천위페이도) 굳이 지금과 같은 체력을 기르기 위해 늦은 나이에 와신상담할 필요가 없었기에 오늘 모처럼만의 안세영과의 대결에 그녀 역시 필승의 각오로 임했을 것은 뻔한 일이었다. 자신의 컨디션이 지금 최상이란 걸 야마구치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이 정도 경기력이라면 틀림없이 안세영을 압도하리라 기대했으리라.
상황이 이러했기에, 비록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 결승전만큼 세간의 주목을 끌진 못했지만 오늘 야마구치와의 대결은 안세영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시합이었다. 오늘 야마구치를 이기고 그녀의 기세를 꺾어 놓지 못할 경우, 이제부터 제2의 전성기를 열어가려 하는 (올림픽 금메달에 굶주린) 이 무서운 베테랑을 상대로 앞으로 더욱 힘겨운 대결을 펼칠 수밖에 없을 것이기에 말이다.
다행히 경기 결과는 아래 영상들에서 보듯 21-10, 21-14로 안세영의 압승이었다. 그러나 경기 내용은 스코어 상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치열한 대접전이었다.
부상도 없고 자신감으로 충만한 야마구치의 스매시는 어지간한 남자 선수들 이상의 레벨로 강력했고, 안세영이 조금이라도 어설픈 높이로 띄워주었다간 인정사정 없이 안세영의 코트 구석구석을 유린할 참이었다. 제1게임 초반, 안세영은 실제로 그런 실수를 몇 차례 범했고 리드당할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녀를 위기에서 구한 건 강력한 스매시로 맞불을 놓으며 야마구치의 경기 리듬을 흐트렸다는 점, 그리고 구석으로 꽂히려는 야마구치의 강력한 스매시를 놀라운 반사 신경으로 몇 차례 수비해 냄으로써 야마구치의 자신감에 균열을 낸 순간들이었다. 결국 제1게임 중반부터 자신이 계산했던 경기 리듬을 완전히 잃어버린 야마구치는 최근 범하지 않던 그녀답지 않은 실수들까지 더하면서 무너져갔다. 그러나 이것은 안세영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 야마구치가 약하거나 컨디션이 나빴기 때문이 아님을 알아야 하리라.
제2게임 들어서도 완벽한 구석이 아니면 득점할 수 없다는 부담감에 짓눌린 야마구치의 실수가 늘어가는 가운데, 그녀에게 강력한 스매시를 구사할 기회 자체를 주지 않기 위한 안세영의 놀랍도록 정확한 스트로크의 향연이 펼쳐졌다. 이것은 파워에서 밀리는 안세영이 야마구치를 요리하기 위해서 반드시 엄수해야만 하는 철칙이었는데, 모든 선수들이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실제 경기력으로 연출해 내기엔 불가능에 가까운 그것을 안세영은 오늘 완벽하게 수행해 냈다.
최고로 강한 상대가, 최고의 컨디션으로 맹공을 퍼부었음에도 안세영은 침착하게,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완벽하게 제압한 것이기에 오늘의 승리는 매우 각별하다. 이제 상대 전적도 동률이 되었고, 안 그래도 최근 전적에서 안세영에게 열세였던 야마구치로서는 오늘 벼르고 별렀을 경기에서 완패한 충격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야마구치는 강인한 전사다. 이대로 좌절하고 주저앉지는 않을 것이다. 업그레이드된 자신을 업그레이드된 안세영이 뛰어넘었다면, 자신도 다시 업그레이드하면 그만이라 생각할 것이다. 오늘 다시 한 번 확인된 것은 야마구치의 체력(순발력과 지구력 모두)과 수비력이 놀랍도록 향상되어 이제는 안세영에 비해 절대 뒤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배드민턴을 보는 눈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안세영이 오늘 날린 샷들이 5cm씩만 어긋났어도 야마구치의 강력한 공격으로 인해 경기 스코어는 정반대가 될 수도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의 무기는 전매특허인 강력한 스매시만이 아니다. 스트로크와 헤어핀 구사력에 있어서도 절대 안세영에 뒤지지 않는 실력자인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을 다른 누구보다도 안세영 본인이 가장 잘 알 것이다. 오늘 경기에서 입증되었듯, 스매시 파워를 끌어올리려는 그녀의 변화는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있다. 이제는 좀 더 자신감을 갖고 계속 같은 방향으로 정진하길 기대한다. 야마구치를 제압할 수 있다면, 천위페이는 더욱 쉽다는 것도 함께 기억하길 바란다. 공격력과 수비력 모두 야마구치가 천위페이보다는 한 수 위다. 어려운 상대라는 선입견을 지우고 경기한다면 천위페이도 보다 쉽게 요리할 수 있을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Hs0YduiTLm
https://www.youtube.com/watch?v=7upjzSbylH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