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 지역 항일독립운동가.
함경도 북청에서 무관 가문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김장군의 본명은 김현충, 김광서이며, 후에 지청천 등과 함께 별명으로 ‘하늘 천(天)’자를 넣어 김경천을 사용하게 되었다.그는 1911년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도쿄에서 기병장교로 근무하다가 1919년 기미 독립선언 직후 지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청년단에 가입해 활동했고,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했다. 1919년에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의용군을 모집하여 창해청년단 총사령관으로 시베리아 일대에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1921년에는 수청의병대의 지도가가 되었고 러시아 혁명세력과 연합하여 연해주 지역의 조선인 지도자로 소련의 인정도 받게 되었다.
1922년 수청의병대는 대한혁명단으로 개칭하고 김경천이 사령관을 맡았으며, 그해 고려혁명군이 조직되어 김경천은 동부사령관을 맡았다. 1922년 블라디보스톡 극동고려사범대학에서 강의를 하였고 국경경비대의 장교로 일하다가 1937년 스탈린 정권하에서 강제이주 정책에 반발하였다고 간첩죄의 누명을 쓰고 1939까지 두 차례나 감옥살이를 하는 등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두 번째 복역 중에 유배된 뒤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사망 시기나 경위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시베리아 일대에서 유명해진 그는, 흰 말을 타고 만주와 시베리아를 누비는 전설적인 항일 영웅으로서의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어 별칭으로 “조선의 나폴레옹”이라 불렸으며, 특히 1920년부터 1925년까지 틈틈이 일기를 써왔는데 그것이 바로 이 <경천아일록>擎天兒日錄이다. 특히 1888년 그가 태어난 때부터 1919년 만주와 노령으로 망명한 시점까지는 회고록 형식으로, 그 이후부터 1925년 말까지는 일기형식으로 각종 사건과 체험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업적을 인정하여 김경천은 1998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받았다. 그러나 김경천 장군의 훌륭한 업적을 자신의 업적인 양 도용한 사람도 많았고, 항간에는 ‘진짜 김일성’설의 주인공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당시 일제는 김경천 장군에게 현상금 20만 엔을 걸었고 다른 독립운동가에 비해서 월등히 높은 금액이었다.
김경천 장군에게는 외아들인 김기범 선생의 두 딸과 그 자녀들, 즉 손녀 2명과 외증손자 4명, 외증손녀 1명이 있다. 이 7명의 후손들이 러시아 국적을 갖고 있었고, 21일에 한국귀화 신청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러시아 국적을 갖고 있는 헤이그만국평화회의 밀사 이위종 선생의 후손 3명도 귀화신청을 했다. 러시아 출신 독립유공자 후손 10여명이 한꺼번에 귀화신청을 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 했다. 법무부 관계자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은 두 독립유공자의 업적을 기려 후손들의 한국 국적을 허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번 김 장군 후손들의 한국 귀화로 저평가되었던 김 장군에 대한 본격적인 조명작업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김일성 가짜론, 진짜론 등 근현대사의 오래된 역사적 논쟁거리가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인지 새로운 의문을 낳고 있다. 문화일보 보도에 따르면 양명호 전남대 세계한상문화연구단 연구원이 “김경천은 만주 망명 후 일본군 추적과 신분 노출을 방지하기 위해 김일성을 포함한 7개의 별칭을 사용했다”고 밝혔다. 한편 김경천 장군의 외증손녀인 김올가(40)씨는 현재 전남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으며, 지난 5월 동평이 주관한 독도 평화의 섬 행사에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초청받아 함께 해 더욱 뜻 깊은 행사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한편 러시아는 이중국적을 허용하고 있다. 귀화신청을 한 김 장군의 후손들은 오늘 8월 3~15일 국가 보훈처의 초청으로 광복 70주년 행사 참여를 위해 방한하며 영구 귀국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