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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암사108다라니기도순례 스크랩 제12차 다라니순례사찰 속리산 법주사(1)
유정 추천 0 조회 22 11.12.28 22:4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법주사

   일시:2011년 9월18일   

순례사찰:속리산 법주사/상주 북장사  /상주 남장사                                                 
법주사 창건
   법주사(法住寺)는 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209번지 속리산(俗離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다.
   우리나라에 많은 고찰과 대찰이 있지만 그 가운데 법주사는 팔상전과 미륵대불로 상징되는 미륵신앙 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법주사는 신라 이래 금산사(金山寺)·동화사(桐華寺)와 함께 3대 법상종(法相宗) 사찰로 자리매김 해왔다.
   속리산은 해발 1,058m로 골짜기마다 기암절벽이 늘어서 있고 높이 솟은 봉우리가 서로서로 웅장함을 뽐내고 있다. 백두산에서 발원한 산줄기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으로 뻗어 나가고 그 중간에 속리산이 자리 잡았다.
   일찍이 신라의 대문장가 최치원(崔致遠)은,
“도는 사람을 멀리 하지 않는데, 사람은 진리를 멀리 하려 하는구나. 산은

법주사 - 능인전
속세를 떠나지 않는데 속(俗)이 산을 떠나려 하는구나(道不遠人人遠道 山非離俗俗離山).” 라며 산 이름의 뜻을 시로 풀었다.
   예로부터 조선팔경 가운데 속리산이 빠지지 않았던 것은 단지 산세의 아름다움 때문만이 아니라 그 속에 법주사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553년(신라 진흥왕 14)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창건 과정은 조선시대에 편차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근대에 완성된 {조선불교통사} 등에 설화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553년 무렵 신라에 의신(義信) 스님이 있었는데, 불법을 구하고자 머나먼 천축국(天竺國, 인도)에 유학의 길을 떠났다. 공부를 마친 후 신라로 돌아오면서 흰 노새 한 마리에 불경을 싣고 돌아 왔다.
   그 뒤 스님은 절을 지을 만한 터를 찾아 이리 저리 순방하던 중, 흰 노새가 지금의 법주사 터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추고 우는 것을 보았다. 노새의 기이한 행적에 깨달은 바가 있어 걸음을 멈추고 산세를 둘러보니 아름다운 절경에 비범한 기운이 서려있었다.
   마침내 이곳에 절을 짓고 절 이름을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 즉 부처님의 법(法)이 이곳에 머물렀다(住)는 뜻에서 법주사라 지었다."
   이와 같은 의신 조사의 창건 설화는 실제의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고 보기도 한다.
   우선 절을 창건하였다는 553년은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때이다. 이후 신라의 고승들이 가까운 중국 유학 길에 떠나는 것도 7세기 이후부터 비롯되는데 머나먼 인도까지의 험난한 역정을 통해 불경을 가져왔다는 말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법주사 - 금강문
  절에 관한 이러한 설화적 창건담은 절 이름인 법주사의 뜻풀이에서 비롯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정황이 부족하다고 해서 절의 창건 설화를 전적으로 부정해서도 안 된다. 현재로서는 더 이상의 자료가 전하지 않고 또 역사 속에는 얼마든지 설화적 진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뒤 760년(경덕왕 20) 무렵 진표율사(眞表律師)와 그 제자 영심(永深) 등에 의해 새롭게 태어났다. {삼국유사} [진표전간(眞表傳簡)]조와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조에 법주사와 진표 율사, 그리고 영심 대사의 이야기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자세히 전한다.
   "진표 율사는 전주 벽골군 출신으로 12세에 금산사 숭제법사(崇濟法師)에게 출가하였다. 이후 변산(邊山)에 있는 부사의방(不思議房)에 거처를 정한 스님은 각고의 수행에 몰입하였다. 3년 여에 걸친 수행 끝에 어느 날 밤 지장 보살과 미륵 보살을 친견하였다.
   지장 보살은 스님께 가사·발우와 함께 공양차제비법(供養次第秘法) 1권과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 2권을 전하였고, 미륵 보살은 점찰경 두 권과 증과간자(證果簡子) 189개를 주었다."
   두 보살에게서 교법을 전수받은 스님은 이내 산에서 내려와 766년(혜공왕 2)에 현재의 금산사를 새롭게 중창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속에서 ‘속리산에 찾아가 미륵불을 세우라.’는 미륵보살의 계시를 받은 스님은 금산사를 떠나 속리산으로 향한다.
   금산사를 나와 속리산으로 향하는 도중 소달구지를 타고 가는 한 사람을 만났다. 그 때 수레를 끌던 소가 스님 앞에 이르러 무릎 꿇고 한없이 울어대는 것이었다. 이때 수레에 타고 있던 사람이 스님에게 물었다.
   “이 소들이 어찌하여 스님을 보고 우는 것입니까 스님께서는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스님은,
   “나는 금산사의 진표라 불리는 사람이오. 내 일찍이 미륵·지장의 양대 성인께 친히 법을 받아 절을 짓고 오래 수도할 곳을 찾는 길이오. 이 소들은 겉으로는 어리석으나 속으로는 현명하여, 내가 계법(戒法)을 받은 것을 알고 불법을 중히 여기는 까닭에 이렇게 우는 것이오.”
   하였다. 그 사람이 듣고 다시 말하였다.
“축생도 이러한 신념이 있거늘, 나는 사람으로서 어찌 무심하겠습니까?”
   하고, 곧 손으로 낫을 쥐고 스스로 머리를 잘랐다. 이에 스님은 자비로운 마음으로 다시 머리를 깎아 주고 계를 주었다.
   스님은 산으로 들어가 길상초(吉祥草)가 핀 곳을 점지해 두고 다시 금강산 발연사(鉢淵寺)를 창건하였다.
   진표 율사는 7년 간의 발연사 생활을 마치고 다시 부사의방으로 돌아왔다. 이때 속리산에서 수행하고 있던 영심과 융종(融宗), 불타(佛陀) 세 사람이 찾아와 치열한 수행으로 스님에게서 법을 전해 받는다.
   진표 스님은 영심에게 지장보살과 미륵보살로부터 전해 받은 법과 유품을 주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제8간자는 법이요, 제9간자는 새로 훈성한 불종자다. 내가 이미 너희에게 주었으니, 가지고 속리산으로 돌아가라. 그 산에 길상초가 난 곳이 있으니 거기에 정사[寺]를 세우고 이 교법에 의하여 널리 세상을 건지고 후세에 유포하라.”
   영심 스님은 지체하지 않고 속리산에 돌아가 길상사(吉祥寺)라는 절을 창건하고 점찰법회를 열었다.
   이러한 기록에 나오는 길상사와 법주사가 동일한 사찰인가는 정확하지 않다. 이후 길상사라는 이름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법주사가 속리산의 대표적 사찰로 지속되었음을 감안할 때 길상사는 법주사의 전신이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한다.
   앞서 인용한 기록의 내용으로 볼 때 법주사의 실제적 창건주는 진표 율사와 영심 대사로 볼 수 있다.
   비록 의신 조사의 창건설이 설화적으로 전하지만 진표 율사의 가르침에 따라 영심 대사가 길상사를 창건하고, 이곳이 오늘날 법주사의 터전이 되었다는 사실은 정확한 기록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후 법주사는 금산사, 동화사와 함께 신라의 대표적 미륵 신앙 도량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자료제공 : 사찰문화연구원, 현대불교미디어센터]

사적 제503호.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의 본사이다. 553년(진흥왕 14)에 의신(義信) 조사가 창건했으며, 법주사라는 절 이름은 의신이 서역으로부터 불경을 나귀에 싣고 돌아와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된 것이다. 776년(혜공왕 12)에 금산사를 창건한 진표(眞表)가 이 절을 중창했고 그의 제자 영심(永深) 등에 의해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그후 법주사는 왕실의 비호 아래 8차례의 중수를 거쳐 60여 개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갖춘 대찰이 되었다. 고려 숙종이 1101년 그의 아우 대각국사를 위해 인왕경회(仁王經會)를 베풀었을 때 모인 승려의 수가 3만이었다고 하므로 당시 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 태조와 세조도 이곳에서 법회를 열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된 것을 1624년(인조 2)에 벽암(碧巖)이 중창한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은 1624년에 중건된 대웅전, 1605년에 재건된 국내 유일의 5층 목탑인 팔상전, 1624년에 중창된 능인전(能仁殿)과 원통보전(圓通寶殿)이 있고 이밖에 일주문·금강문·천왕문·조사각·사리각, 선원(禪院)에 부속된 대향각·염화실·응향각이 있다. 또한 법주사의 중심법당이었으며 장육상(丈六像)을 안치했었다는 용화보전(龍華寶殿)은 그 터만 남아 있고, 이곳에 근대조각가인 김복진이 조성 도중 요절했다는 시멘트로 된 미륵불상이 1964년에 세워졌다.

1986년 이를 다시 헐고 1989년 초파일에 높이 33m의 청동미륵불상이 점안(點眼)되었다. 이밖에 국가지정문화재인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석련지(石蓮池:국보 제64호)·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신법천문도병풍(新法天文圖屛風:보물 제848호)·괘불탱(보물 제1259호)과 지방지정문화재인 세존사리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8호)·석조(石槽: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벽암대사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9호)·괘불(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9호)·철확(鐵?: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3호) 등이 있다.

 

 

법주사 입구에 25대의 성암사 차량에 얽여 버스가 못올라가

신도님들 걸어서 올라갑니다

 

힘차게 앞으로 전진하는 성암사 기수

 

부처님께 올릴 마지공양을 메고가는 처사님

부처님께 올릴 공양이라 께끗하고 청결 해야 되기 때문에 힌장갑과 마스크를하고

더운날씨인데도 불구하고 비지 땀을 흘리며 법주사 부처님께 가고 있습니다

 

 

 

 

 

 

 

 

 

청동 미륵대불 1989년 초파일에 높이33m의 불상이 점안됐다

 

 

 

 

 

 

 

 

 

 

 

 

 

 

쌍사자 석등: 국보 제5호 높이330cm

팔상전 ;국보제55호

 

 

석연지; 국보 제64호

 

 

희견보살상 보물제1417호

 

 

 

마애 여래상 :보물제216호

 

 

 

 

 

 

 

 

 

 

 

무심 - 신묘장구 대다라니 | 음악을 들으려면 원본보기를 클릭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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