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김춘추의 계보
박혁거세로부터 시작해서 경애왕까지 신라는 총 55명의 왕을 배출했다.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비교적 뒤쳐졌던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룰 수 있도록 그 기반을 닦은 사람을 들라고 하면 단연 24대 진흥왕(534~576년)이 다. 그는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한 약소국 신라를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해서 강원도와 함경도에 이르는 큰 나라로 성장시킨 인물이었다. 백제의 성왕을 죽인 사람도 그였다.
진흥왕의 장남이 태자 동륜이다. 신라는 이 시기에 장자 상속제가 정착되어 있었다. 그러나 태자가 그만 개에 물려 죽는 사고를 당한다. 장자 상속이기 때문에 태자의 아들이 왕위를 이어야 하지만 왕위는 태자의 동생인 금륜으로 넘어간다. 25대 진지왕이 탄생한 것이다. 조카를 제치고 그가 왕이 된 배경에는 조카가 어린 탓도 있었지만 당시 실권자인 거칠부가 그를 밀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576년에 즉위한 그는 4년째인 579년에 폐위되고 만다.
정치는 도외시하고 황음에 빠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쫓아냈다고 한다. 아마 화백회의의 결과였을 것이다. 화랑세기에서는 진흥왕의 후궁이었던 미실이 그를 밀어내는데 한몫 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화랑세기의 진위여부에 대한 논란이 많다. 따라서 미실이 왕을 내몰았다는 이야기도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어쨌든 신라가 아직 강력한 왕권 체제를 갖추지 못했음을 읽어낼 수 있는 대목이다.
다시 개에게 물려 죽은 태자 동륜으로 돌아가자. 진지왕이 쫓겨난 후 동륜의 아들이 26대 왕에 즉위하니 바로 진평왕이다. 고려 초기 왕실의 근친혼은 신라의 것을 물려받았다. 여기서부터 족보에 헷갈리지 말도록 하자. 진지왕에게도 아들이 하나 있었다. 용춘이라고도 하고 용수라고도 하는데 진평왕의 사촌 동생이 된다. 용춘이라는 이름을 잘 기억해두자.
579년, 진평왕이 즉위했을 때 그의 나이는 열세 살이었다. 조선의 숙종이 열네 살 때 왕위에 올랐으니 서로 비슷하다. 또한 진평왕은 54년간을, 숙종은 46년간을 통치했으니 이것 역시 비슷하다. 다만 숙종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바로 친정을 시작했지만 진평왕은 할머니인 사도부인이 처음에 수렴첨정을 했다. 수렴첨정? 어디에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조선의 왕들이 나이가 어릴 경우 궁중에서 제일 높은 대비가 수렴첨정을 하지 않았던가! 신라와 조선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신라 궁중의 여러 제도와 용어를 조선이 그대로 답습했다. 신라의 왕실을 고려가 그대로 모방했고, 고려의 왕실을 조선이 그대로 인수했으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흥왕이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고, 그 대업을 이룬 사람은 태종 무열왕 김춘추이다. 하지만 가운데서 54년간이나 흔들리지 않고 튼튼하게 다리를 놓은 사람은 진평왕이었다. 이는 조선 후기에 거의 46년간이나 통치하면서 영·정조의 태평시대를 탄생시킨 숙종과 비교된다. 또한 신라에서 제일 오랫동안 통치한 왕은 박혁거세(61년)였고 그다음이 진평왕이었는데 비해, 조선에서는 영조(51년) 다음으로 숙종이었으니 이 또한 묘하게 대비된다.
진평왕의 가족 관계를 조금 더 살펴보자. 즉위 초에 할머니인 사도부인이 수렴청정을 했다고 했는데, 그녀의 남편 즉 진평왕의 할아버지가 진흥왕이다. 진흥왕과 사도부인 사이에 동륜과 금륜외에도 구륜이라는 아들과 4명의 딸이 있었다. 이 딸들 중 한 명의 이름이 아양으로 바로 김유신의 할머니가 된다.
진평왕은 오래 살았으므로 여자들도 많았다. 그런데 근친혼이라 촌수 관계가 굉장히 복잡하게 꼬인다. 진평왕에게 여러 부인이 있었고 또 자식들도 있었으나 공식적으로는 마야가 첫 황후가 되고, 여기에서 천명과 덕만 두 딸이 나온다. 위에서 용춘이라는 이름을 기억해 두어라고 말했다. 진평왕의 사촌 동생이다. 용춘이 천명공주와 결혼한다. 즉 조카딸과 결혼한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나오는 아들이 나중에 왕이 되는 김춘추인 것이다.
진평왕은 아들이 없었다. 여러 부인들 사이에서 아들이 나온 경우도 있었으나 혈통을 의심 받는 등으로 해서 성골 적자를 못 보았다. 그런데 승만황후가 아들을 낳았다. 이 아들은 제대로 자랐으면 왕이 될 수도 있었는데 일찍 죽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승만황후의 가계는 불명확해서 촌수를 가늠할 수 없다고 한다. 아들이 없게 되자 진평왕은 왕위를 덕만 공주에게 넘긴다. 성골로서 왕위를 잇게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덕만 공주가 신라 27대 왕인 선덕여왕이 된다.
신라에는 갈문왕이라고 있었다. 이는 실제 왕을 말함이 아니라 왕이 되지 못한 왕의 아버지를 이르는 명칭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의 대원군 같은 존재인 것이다. 진평왕의 동생이 있었는데 이름이 국반이다. 이 사람이 나중에 갈문왕이 된다. 국반은 월명부인과 결혼하여 승만이라는 딸을 낳았다. 참고로 월명부인은 박씨이기 때문에 근친혼은 아니다.
아무튼 승만과 선덕여왕은 사촌자매 사이가 된다. 선덕여왕은 죽을 때 사촌동생인 승만에게 왕위를 잇도록 유언을 남긴다. 28대 진덕여왕이 탄생한 것이다. 딸이 왕이 되었기 때문에 국반이 갈문왕의 칭호를 받게 된 것이다. 국반 갈문왕과 월명부인의 생몰년 기록은 없다.
신라에서는 진덕여왕까지를 성골로 본다. 진덕여왕이 죽고 나서 화백회의에서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하니 이가 곧 태종 무열왕이다. 묘한 것은 김춘추의 할아버지가 쫓겨난 진지왕이다. 즉 할아버지를 쫓아낸 화백회의가 나중에 그 손자를 왕으로 추대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