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부흥의 길(復興之路)5부 자막 대사 녹취문
제5부 世纪跨越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의 첫 발을 내딛다
새천년의 시작을 알리는 21세기의 카운트다운.
세계는 정보혁명의 물결에 휩싸였다. 과학은 눈부시게 발전했으며 중국 또한 빠르게 변해갔다.
1986년 6월, 강택민(江澤民)은 중국 공산당 제13차 4중전회의에서 총서기로 당선된다. 그는 개혁 개방화 물결 속에 중국을 새천년으로 이끌 주인공이었다.
그 후 13년, 중국의 발전을 지켜보던 세계는 이들의 눈부신 발전에 놀라게 된다. 그들이 선택한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가 중국을 놀랍게 변화시킨 것이다. 인류역사상 최초로 시도된 이 경제 구상은 1992년 중국 공산당 제 14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주창된 것이었다.
➡강택민 (연설)
“중국의 경제체제 개혁을 위한 목표를 수립하는 것은 사회주의 현대화와 직결되는 매우 중대한 문제이며 그 핵심은 계획과 시장의 관계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입니다. 경제 개혁 목표로 경제 실천과 정확한 인식이 요구됩니다. 그 목표가 바로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입니다.”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는 시장경제와 사회주의 제도를 유기적으로 결합한 것이다. 다시 말해 시장경제의 장점을 흡수하면서 사회주의의 이점은 유지하는 제도이다. 이 새로운 경제체제는 어떻게 완성될 수 있었을까? 민족의 부흥을 위해 새로운 목표를 세우게 된 중국은 또 어떤 여정을 시작하게 될 것인가?
➡상해의 포동(浦東 황포강의 동쪽).
이곳은 중국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국제무역금융지구다. 포동을 선두로 한 양자강 유역의 여러 지역은 중국 경제성장의 황금시대를 이끌어 왔다.
17년 전, 국가급 개발구로 지정될 당시만 해도 이곳은 척박한 농촌이었다. 1992년, 제14차 공산당 보고서에 포동 개발에 대한 전략 목표가 기록된다. 당 대회 사상 처음으로 특정 도시의 경제건설을 구체화한 것이었다. 중국 최대이자 세계 최대의 이 개발지구는 중국의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주요 엔진으로 떠오른다. 포동 개발은 1992년에 일어난 다른 경제개발계획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건설하기 위한 야심찬 목표를 향하고 있었다.
같은 해인 1992년, 상해 바오산(寶山) 철강그룹은 투자생산 확대를 통해 중국 최고의 철강기업으로 거듭난다.
왕진야오는 절강성에 중국 최초로 전세기(專貰機) 회사를 설립했다.
류용하오는 심천에 시왕(希望) 그룹을 설립했는데, 이것은 중국정부가 최초로 설립을 인가한 사기업(私企業)이었다.
왕쉬한은 세계 최초로 중문 컬러 사진 식자(植字) 시스템을 개발했고, 그의 베이따팡정(北大方正) 그룹은 중국 정보화의 선구자로 떠올랐다.
바로 이때부터 중국의 수출은 고속으로 증가했고 ‘메이드 인 차이나’가 주목받기 시작한다. 또한 여러 다국적기업이 중국 투자의 새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1993년, 세계 5백대 기업 중 하나인 모토롤라는 글로벌 사장단 회의를 미국이 아닌 중국에서 개최한다. 사장단들은 중국이 곧 모토롤라의 최대 시장이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정용니엔 (노팅엄대학 중국정책 연구소)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로의 계획은 주목해 볼만한 구상이었습니다. 중국 건설과 경제 개혁에 뚜렷한 방향을 제시한 것이니까요.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건설하기 위한 중국의 열정은 국가발전의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다. 정부는 국가 발전을 위해 새로운 정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3억이란 거대한 인구가 참여한 이 엄청난 변혁의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992년 8월 1일. 18킬로그램 상당의 소포가 광동성 심천(深圳) 시로 배달되었다. 내용물은 2천 8백여 장의 신분증. 5일, 150만 주주들이 각 경로로 구매한 2천만 장의 신분증을 들고 새로 발행된 주식을 사기 위해 심천으로 몰려들었다. 이것이 중국 주식사(株式史)에 대사건으로 기록된 8·10 사건이다. 이 극단적인 주식구매사건의 뒤에는 1992년 당시의 독특한 경제 분위기가 있었다.
시장경제에 대한 국민들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1992년 하반기부터는 인플레이션 문제가 심각해졌다. 철강, 시멘트, 목재 가격은 전년 대비 50퍼센트 이상 상승했고 전국 소비품 가격도 평균 13퍼센트나 올랐다. 어떻게 해야 과열된 경기를 안정시키고 발전의 활력을 이어나갈 수 있을까?
➡린자오무 (전국인민대표대회 재정경제위원회)
중앙에서는 거시경제 조정을 위한 16조 조치를 발표했습니다.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의 건설 계획에 나타난 새로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것이었죠. 주로 경제적, 법률적 수단을 이용한 조치로 과거의 조정 조치와 크게 차별화되는 점입니다.
정부는 새로운 경제관리 방식을 내놓았다.
24퍼센트에 달하던 통화 팽창은 3년 후인 1996년, 8퍼센트로 하락한다. 경제는 여전히 9.8퍼센트의 고성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시장 규율을 이용한 거시경제의 조정을 ‘연착륙’이라 불렀다.
➡야부키 수수무 (요코하마 시립대학 명예교수)
이때부터 정부의 역할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습니다. 시장경제의 순조로운 발전을 위해 관련 정책을 수립한 것입니다. 경제 발전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미리 제거해야만 했기 때문이죠.
계획경제체제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
이것은 중국 역사에서 중대한 혁명이었으며 중국의 경제, 정치 그리고 문화 발전에 새로운 국면을 연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중국은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의 기초를 수립한다.
개혁의 시초는 바로 이 구조의 조정이었다.
하지만 그 동안 계획경제를 지탱하고 중국의 새로운 발전에 공헌을 했던 국유기업들이 시장경쟁 속에서 도태되기 시작한다. 동시에 수천만 국유기업의 노동자들도 고통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천칭타이 (국무원 발전연구센터 부주임)
시장경제로 진입한 후, 품질 우선의 자본주의적 경쟁 메커니즘이 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문에 국유기업의 저효율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70퍼센트의 적자를 기록한 국유기업이 나타날 정도였으니까요. 많은 노동자들이 해고를 당했고 기업들이 도산에 직면했습니다.
‘해고’라는 단어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노동부의 조사에 따르면 1993년 전국 각지에서 해고된 직원은 3백여 만 명이다. 그 숫자는 점차 늘어나 1997년에는 천만 명을 돌파했다. 가장 경제가 발달했던 도시 중 하나인 상해애서도 약 1백만 명의 노동자가 해고당했고 그 중 방직 노동자만 27만 명이었다.
➡존 켈치 (하버드 경영대학)
모두가 원하는 방향으로 경제체제를 개혁하려면 도전은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국민들이 새 경제체제를 마음으로 받아들이느냐가 관건이죠.
경제체제를 전환하는 과정 속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희생되었다.
이것은 경제개혁을 이뤄내기 위한 일종의 공황이었다. 순식간에 직장을 잃은 천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 정부는 이들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한다. 재취업을 위한 대안 교육을 실시했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국유기업의 개혁은 더욱 빨라졌다. 산업의 구조조정, 현대 기업제도의 수립, 경영인의 메커니즘도 빠르게 전환되었고 기업의 관리 또한 강화되었다. 국유기업의 역할이 더욱 강력해진 것이다.
10여 년 전의 중국은 매우 특수한 상황이었다. 신체제가 수립 중이었고 구체제는 여전히 가동 중이었다.
1990년 초 강소성(江蘇省)의 장시페이라는 젊은이가 의흥(宜興, 이싱)에 전선공장을 설립한다. 그 해 5백만 위안, 이듬해엔 1천 8백만 위안이란 소득을 올렸지만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는 데는 문제가 있었다.
➡장시페이 (원동 지주그룹 회장)
더 큰 발전을 이루기에는 제약이 아주 많았습니다. 대출을 하기는 힘들고 세금은 더 많이 내야 했으니까요.
1992년 장시페이는 회사를 향판기업(鄕辨企業, 향 정부가 경영하는 집체 기업)으로 전환했고 국유기업이 가지는 이점을 활용해서 발전의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당시 중국에서 사기업(私企業)이 공유경제에 부속되는 일은 흔한 현상이었다.
➡리이닝 (북경대학 교수)
당시 민영 기업가들은 고민이 많았습니다. 안정을 위해서는 정부의 편에 서기도 해야 했으니까요. 행정관리가 훨씬 수월한 점도 중요한 이유가 됐습니다. 당시에는 제도의 미약으로 힘든 부분이 많았죠.
정부 정책에 의한 많은 제약에도 불구하고 민영기업들은 눈부신 성장을 이뤄냈다. 민영기업이 중국 산업 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크게 늘어났다.
➡류수청 (사회과학원 경제연구소 소장)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는 국유기업에 생기를 불어 넣었습니다. 국민의 경제와 직결되는 핵심 산업을 좌우할 힘이 생겼다는 뜻도 되는 거죠. 민영기업들도 전례 없이 많은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 결과 민영기업은 중국 경제의 핵심 세력으로 급부상했죠.
1990년대 중반, 중국의 국유기업 개혁과 민영기업의 발전은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의 건립 과정에서 이뤄낸 큰 성과였다.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에 대한 중국 국민들의 믿음은 더욱 깊어져갔다.
1997년 6월 7일. 중국개혁개방의 선구자 등소평이 서거한다. 유엔도 이 작은 노인을 위해 조기(弔旗)를 걸었다. 국민들은 거리로 뛰어나와 중국을 이끌어왔던 등소평의 노고에 대해 깊은 감사를 표했다. [다시 한 번 외칩니다. “샤오핑 니하오?” 小平悠好 소평 동지 안녕하십니까?]
그 해 중국은 전 세계에 목소리를 높인다. 앞으로 등소평의 사회주의 노선을 이어나가겠다는 다짐을 발표한 것이다.
➡강택민 (중국공산당 제15차 전국대표대회 연설)
이 대회의 핵심은 등소평 이론의 위대한 가치를 드높이는 것입니다. 제15차 회의는 이 이론을 역사에 기록할 것입니다. 등소평 이론을 견지하고 창조적인 발전을 이룩하는 것은 당 지도자들과 모든 공산당원의 엄중한 역사적 사명입니다.
중국공산당 제15차 전국대표대회는 등소평 이론을 마르크스주의, 모택동사상과 함께 공산당의 지도이념으로 확립하고 중국 공산당 장정(章程)에 삽입한다. 경제체제의 개혁 외에도 여러 주요 사상들이 제시되었다.
➡장줘위안(사회과학원 경제연구소)
제15차 전국대표대회는 공유제(共有制)와 소유제(所有制) 경제의 공동 번영이 사회주의 초급 단계의 기본 경제제도라고 천명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본 경제제도란 경제제도를 구성하는 근원, 또 소유제 경제를 이루는 근간을 의미합니다. 과거와 다른 혁신적인 변화를 꼽는다면 민영, 개체 등 비공유제(非共有制) 경제를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일부로 인정했다는 점입니다.
중국공산당 제15차 전국대표대회는 사회주의 초급단계의 강령과 중국의 발전전략을 제시하는 대회였다. 법률에 의거한 사회주의 법치국가의 건설, 그리고 사회주의 민주정치의 발전 등에 새로운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1997년 길림성 이수현(梨樹縣)은 전 세계 언론의 관심을 받게 된다. 바로 촌민위원회의 직선제인 하이쉔(海選, 바다처럼 넓은 곳에서 인재를 뽑는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입후보자의 정견 발표
“자기 일처럼 발 벗고 나설 인물이 필요합니다.”
이수현 평안촌에서 치러지던 하이쉔은 중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도시 거주민 위원회의 직선제도 보편화되었다.
기본 민주주의의 건설은 큰 발전을 보였고, 인권보호체제도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백년대계! 나라의 흥망을 좌우한다고 하는 교육 문제에 있어서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중국 정부는 교육 부국 전략을 통해 사상과 도덕 수양, 과학과 문화의 수준을 높였다. 교육을 통해 과학을 발전시키고 노동자의 자질을 향상시켜 경제건설을 실현하려는 노력이었던 것이다. 부흥을 향한 중국의 원대한 전략이었다.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완수하기 위한 5년간의 노력, 이후 다가온 1997년은 중국인들에겐 결코 잊을 수 없는 한 해가 되었다. 이 해에 중국은 국내총생산 7조 5천 위안, 외환보유고 1천 4백억 달러로 세계 10대 무역강국으로 부상하게 된다. 그들이 수천 년간 갈망해왔던 샤오캉 사회(小康社會, 사회 전 구성원이 중산층 이상의 생활을 누리는 사회)로 진입한 것이다.
이 해 홍콩은 중국으로 반환된다. 백 년 전 영국에 할양되었던 국토를 되찾은 것이다.
2년 후 마카오 역시 중국으로 반환된다.
중국은 가장 빠른 성장률을 기록하며 국제무대에서 자신만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국제사회의 위기 속에서 그 역할 또한 빛을 발하게 된다.
1997년 7월 2일 아침. 잠에서 깨어난 태국 국민들은 놀라운 사실에 접하게 된다. 하루아침에 태국의 국제 구매력이 20퍼센트나 사라진 것이다. 국제투기꾼들은 태국에서 무려 40억 달러를 유출시켰다.
➡다이샹롱 (당시 중국인민은행 은행장)
당시의 국제투기꾼들은 악의적인 수단을 이용해서 한국, 태국, 일본의 화폐를 대량 구매한 뒤에 갑작스럽게 매도해 가치를 떨어뜨렸습니다. 그리고 염가로 다시 구매해 그 안에서 이익을 챙겼죠. 아시아 시장에 엄청난 타격을 준 사건이었습니다.
금융위기는 동남아 각국과 일본, 한국으로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각국은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화폐 평가절하를 실시했다. 그 결과 중국의 대외무역은 위협을 받게 된다.
➡피터 놀란 (케임브리지대학 교수)
금융위기 당시 중국이 받은 타격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홍콩에 상장된 중국 기업과 그 자회사들에 어마어마한 채무가 발생했기 때문이죠. 결국 중국도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국도 경쟁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인민폐를 평가절하 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아시아 금융위기는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은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1997년 12월, 강택민 국가주석이 아세안 정상들과의 비공식회의에 모습을 드러낸다. 처음으로 중국의 입장을 표명하는 순간이었다.
“인민폐를 안정시키겠다.”
그는 중국의 의지를 밝혔고 금융위기에 타격을 받았던 아시아 국가들은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와스키 랜스키 (모스크바 국제관계학원 교수)
중국은 인민폐를 평가절하 할 수 있었지만 끝까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금융위기에 처한 각 국가들에 금융적 지원을 해준 셈이라고 할 수 있죠.
➡팀 라이트 (셰필드대학 동아시아연구원)
중국은 인민폐 안정 정책을 통해 아시아 국가들의 화폐 절하를 용인하고, 그들이 국제경쟁력을 높여,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협조한 것입니다. 당시 중국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죠.
아시아 금융위기의 먹구름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다른 재앙이 몰려왔다.
1998년 여름, 중국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바로 대자연에서 온 재앙이었다.
양자강의 모든 유역에서 홍수가 났고 눈강(嫩江), 송화강은 3백 년 만의 대홍수로 범람했다. 양자강은 무려 여덟 번이나 최고 수위를 기록하며, 장안 평원지역과 양자강 중하류 지역의 수천만 명의 목숨을 위협했다.
8월 13일 양자강의 다섯 번 째 범람이 형강(荊江, 진장강) 유역을 위협할 때 강택민 국가주석이 재해대책 최전선인 형강 댐에 모습을 나타냈다.
➡강택민의 연설
“여러분 계속 분투합시다! 힘내십시오! 최후의 승리는 분명 우리 것입니다!”
중국인은 이 끔찍한 자연의 대재앙에 맞서 싸워 나갔다.
어느 국가의 국민이든 나라에 심각한 재앙이 닥쳤을 때 더욱 강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자연의 재앙이란 거센 파도는 중국 국민의 의지를 더욱 뜨겁게 했다. 그리고 이것은 발전을 향해 나아가는 중국의 여정에 든든한 정신적 힘이 되었다.
‘길이 멀어야 말의 힘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심각한 경제 위기, 대자연의 재앙, 중국은 위기 속에서도 국가 부흥을 향한 고삐를 놓지 않았다. 발전을 향해 끝없이 노력한 것이다.
20세기 말, 인터넷 시대가 도래하면서 세계경제는 더욱 빠르게 하나가 되어갔다. 세계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작아졌고, 세계시장은 거대해졌으며, 그 속에서 경쟁은 어느 때보다 치열해졌다.
무한경쟁의 글로벌화 시대. 신속히 체제를 정비하고 앞서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선줴런 (대외경제무역합자부 부부장)
중국은 WTO 가입을 신청했습니다. 국내 경제의 메커니즘에 도움이 될 거라 믿었기 때문이죠. 공평 경쟁 시스템이 가장 대표적인 예입니다. 물론 시장개방, 법규, 법률, 정책 투명도 시스템, 정부의 개혁 등도 빼놓을 수 없죠.
1986년부터 중국은 가트(GATT) 재가입을 위해 노력했다. 10여 년 후 가트는 WTO로 대체되었고 중국은 WTO 가입 협상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게 세계무역기구의 가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린총겅 (중국 주재 세계은행 초대 대표)
WTO 회원국들이 중국에 제시한 요구 조건들은 다른 국가들의 협상 조건보다 훨씬 까다로운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중국의 시장경제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었겠지요. 그때까지도 많은 국가들이 중국을 계획경제체제로 생각했으니까요.
WTO 가입 협상이 어려워지자 중국 각계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에 강택민 주석은
“국제시장이라는 바다에서 헤엄치다 보면 물을 마실 수도, 익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국제시장이라는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다면, 중국 경제와 현대화의 건설은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다.”
라는 말을 했다.
1997년 10월 26일. 강택민 주석은 미국을 방문한다.
국제시장에서 헤엄치는 중국의 염원을 담은 방문이었다. 사람들은 이번 만남이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예상했다. 당시 클린턴 대통령이 발행한 환영만찬 초청장의 가치는 대단한 것이었다.
이 방문을 통해 양국은 21세기를 향한 건설적인 전략을 논하며 우호관계를 맺게 된다. 또한 중국이 원하고 있던 WTO 가입에도 가속도가 붙는다.
➡장한린 (대외경제무역대학 중국 WTO 연구원)
중국의 수출은 78년 33위에서 97년 10위로 뛰어오릅니다. 수입도 12위를 기록하죠. 중국이 거대 시장이라는 사실을 입증한 겁니다. 국내 총생산도 78년 3천억 위안에서 97년에는 7조 위안으로 늘어났고 외환보유고도 1400억 달러에 이르죠. 종합 국력과 국제 지위가 모두 상승했다는 반증입니다. 이 사실이 WTO 가입에도 유리한 조건을 제공한 것이죠.
북경 시각으로 2001년 11월 10일 23시 38분.
큰 박수소리와 함께 중국은 드디어 WTO 회원국이 된다. 가트 재가입 신청을 한 지 15년만이었다. 사람들은 1978년 개혁 개방을 시작한 중국이 WTO 가입을 통해 역사적 도약을 실현했다고 평가한다.
➡스광성 (대외 경제무역 합작부 부장)
경제 글로벌화 시대에 국력이 증강함에 따라 중국은 세계 경제시장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 역할 또한 더욱 굳건해질 것입니다. 이는 중국의 자랑이자 막중한 책임이기도 합니다.
➡제프리 하우 (전 영국 외상)
1983년 제가 외상으로 있을 때 중국은 이미 UN 상임 이사국이었지만 그때의 중국은 UN에서 절제하고 침묵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UN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활약하고 있죠.
➡블라디미르 마우 (러시아 국민경제 연구원 원장)
중국이 겪어 온 모든 경험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중국이 밟아온 20여 년은 성공의 역사라 할 수 있죠. 비교적 낙후된 국가였지만 많은 발전을 이루어냈죠. 그것이 바로 중국의 특색이겠죠.
중국은 변했다. 자심감과 여유가 생겼다.
또한 중국은 변하지 않았다. 시장경제의 위기를 겪은 후 선진기업제도를 보유한 국유기업을 건설했다.
국내시장에서도 여전히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국제사회에서도 중국만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사오닝 (국무원 국유재산감독관리위원회)
국유경제는 국가 경제 안정과 국민경제의 핵심을 좌우하는 대기업에 집중돼 있었습니다. 때문에 이 구조를 조정하려면 국유경제의 현대화, 경영구조 개선이 선행되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위해서는 법제를 보완하고 선진화시켜야만 한다. 시장경제를 법치경제라고도 한다. 1992년부터 2002년까지 십년 간 중국의 법제 건설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수정한 167건의 법률 중 시장경제와 관련된 법률만 61건에 달한다.
➡안졘 (전국인민대표대회 법제 공작위원회)
시장주체, 교역, 규칙, 대외 개방, 거시경제 조정 관련 법제의 수립은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경제 건립이 점차 완전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천년을 맞은 중국은 시장경제의 흥망 속에서 힘을 키워갔다. 책임감 있는 개발도상국의 이미지를 수립하고 창조적 일국양제(一國兩制 한 국가 안에 자본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체제를 공존시키는 것)를 성공적으로 실현했다. 그리고 세계 최고의 스포츠 대회를 개최하는 영광도 갖게 되었다.
2002년 가을, 중국 공산당은 ‘시대와 함께 발전해 나가는 마르크스주의’를 주창했다.
➡강택민 연설
당은 일관되게 중국의 선진 생산력을 대표하고 선진 문화의 발전을 대표하며 광대한 인민의 근본 이익을 대표한다.(생문이) ‘3개 대표’ 이론의 견지는 우리 당의 뿌리이자 정치 기초, 힘의 원동력입니다.
‘3개 대표론’은 사회주의가 무엇이고 어떻게 건설해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또 어떤 당을 건설할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 되기도 했다.
➡호수동 (국방대학 부교장)
중국 공산당 제16차 전국대표대회의 핵심은 3개 대표 이론입니다. 공산당 보고서의 주요 내용이기도 하죠. 3개 대표의 주요 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 모택동 사상, 등소평 이론을 계승하고 승화시킨 것입니다. 당의 지도사상은 시대에 맞게 개선되었죠. 이것은 민족의 이상 실현에 중대한 의미를 갖습니다.
중국 공산당 제1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3개 대표론의 주요 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 모택동 사상, 둥소평 이론과 함께 중국 공산당이 견지해야 할 지도사상으로 확립되었고 중국공산당 장정에 삽입되었다.
➡리쥔루(중앙당학교 부교장)
3개 대표론은 국내외 정세의 변화를 반영하면서 당과 국가에 제시한 새로운 요구입니다. 등소평 이론의 과학적 성과를 견지하면서 새로운 환경 속에서 등소평 이론을 발전시킨 것이죠. 발전을 특히 강조하는 것은 3개 대표의 경험을 모두 반영했기 때문입니다.
중국 공산당 제16차 전국대표대회에서는 중국만이 가진 사회주의 건설의 경험을 집대성했을 뿐만 아니라 사요캉(小康) 사회를 향한 목표도 수립하게 된다, 새천년의 찬란한 태양 속에서 1세기 동안 부흥의 꿈을 키워온 중국은 견고한 기초와 명확한 목표를 얻게 된 것이다.
백 년 전, 연합군이 북경을 침략했을 때 무력한 청 왕조는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수천만의 중국 국민이 이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이 낡은 사진 속에 당시의 비극이 담겨 있다 [외국 군인이 중국인의 목을 치는 사진]
그리고 백 년 후. 뉴욕. 세계 각국에서 모인 정상회담이 역사상 최대 규모로 열린 그때. UN의 5개 상임이사국의 정상들은 함께 악수를 하며 사진을 찍었다. 이것은 중국은 물론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백 년,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한 그 시간.
인류가 격동의 지난 세기를 뒤로 할 때 중국도 고난의 20세기와 작별했다.
백 년 간의 탐색과 노력을 통해 중국은 새로운 모습으로 세계를 향해 뛰어들었고 세계는 중국을 다시 보게 되었다.
새천년. 단지 시간만이 새로운 세계로 도약한 것은 아니다.
중화민족의 부흥 그 꿈 역시 중국민족과 함께 21세기로 도약한 것이다.
지난 백여 년간 중국은 개혁과 개방, 사회주의의 현대화 건설을 위해 노력해왔다. 미래를 향한 새로운 목표를 수립했으며 세계무대에서 당당하고 떳떳한 경쟁자, 중국의 모습으로 새천년의 출발점에 섰다.
발전을 향한 개혁.
부흥을 향한 노력.
그 놀라운 힘을 보여준 중국의 백 년.
새로운 도약을 향한 중국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덩중한 (중성마이크로 유한공사 사장)
중요한 것은 진정한 자체 기술을 보유하고 있느냐입니다. 내 기술이 기술 혁신을 촉진하고 시장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을 때, 비로소 세계를 재패할 수 있습니다.
15년 만에 세계 최대 생산국으로 부상한 중국. 중국은 선진국을 향한 새로운 혁신을 준비하고 있다.
2천 년 동안 이 만리장성은 중국의 고난과 애환, 노력과 분투를 지켜보아 왔다. 오늘날 만리장성은 중국의 새로운 자신감을 지켜보고 있다. 중국의 운명은 더 이상 이 성곽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중국의 힘은 국민들의 마음속에 있으며, 미래는 국민들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 민족의 진정한 힘은 그 영혼에서 비롯된다. 참된 영혼이 없는 민족은 영원히 똑바로 일어설 수가 없다.
➡두웨이밍 (하버드· 옌칭연구소 소장)
경제대국, 정치대국 실현은 문화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문화의 힘은 전통문화를 근간으로 할 때 비로소 발휘되죠.
중국이 그려가고 있는 사회주의 체제의 건설 또한 마찬가지다. 문화의 힘과 핵심 가치를 무시할 때, 중국 민족 또한 그들이 원하는 사회를 건설할 수 없을 것이다. 사회주의의 핵심 가치는 5천년 중국의 문화와 명맥을 함께 하며 중국 민족의 정신에 달려 있다.
➡지센린 (북경대학 교수)
민족의 부흥을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느냐? 물론 문화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위안구이런 (교육부 부부장)
사회주의 핵심가치 건설은 문화 건설을 기초로 삼았습니다. 문화는 사상의 도약, 화합의 시대에 어떤 지도사상, 어떤 신념, 어떤 도덕규범으로 사회진보와 민족 단결을 추진할 것인지에 대해 명확한 해답이 되었습니다.
“문화체제의 개혁을 심화하고, 문화사업을 번영시키며, 문화산업의 발전을 촉진한다.”
<국가 11·5 문화발전 규획강요(規劃綱要)>가 반포 실시된 것은 문화건설의 새로운 청사진을 제시한 것이다.
중국의 문화 건설에 대단결, 대번영, 대발전이라는 목표가 생긴 것이다.
어떤 민족이든 평화와 화목, 화합을 지켜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발전을 꿈꾸고 있는 중국과 세계와의 화합을 이뤄가야만 한다. 평화가 없이는 발전도 없다. 중국 역시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이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06년 10월, 중국과 수교를 맺은 48개국 아프리카 정상과 대표단이 북경에 모였다. 이 해는 중국과 아프리카의 외교 수립 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이렇게 많은 국가의 지도자가 한 자리에 모였다. 남아공 움베티 대통령은 <중·아 협력 포럼>이 아프리카 대륙에 희망을 불어넣을 것이라고 말하고, ‘북경 천안문에 싹튼 희망’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엘살바도르의 한 기자는 북경에서 열린 이번 <중·아 협력 포럼>이 세계 화합을 위한 역사적 회의라고 평가했다.
➡우젠민(외교학원 원장)
물론 서로 차이가 있겠지만 공통점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 공통점을 바탕으로 협력하면 서로 ‘윈·윈’을 이룰 수 있습니다.
➡다나카 아키히코 (동경대학 교수)
그간의 중국의 외교 정책은 모두 국가 이익에 부합하는 현명한 외교였습니다. 다변화된 국제 사회의 틀 속에서 적극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죠.
➡조셉 나이 (하버드대학 교수)
경제 성장으로 중국의 소프트 파워는 크게 증강됐습니다. 경제력 없이도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죠. 그 분야에서 중국은 큰 성공을 거둔 것입니다.
민족의 부흥은 정치의 발전과 문명의 발전, 문화의 발전과 떼어놓을 수 없다. 중국의 역사도 이를 증명하고 있다.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 민주정치를 이룩하려면 당 지도부와 인민 대표, 법치국가를 유기적으로 통일시켜야 한다. 인민대표대회 제도, 정치협상 제도, 민주자치 제도 등 각각의 정치 제도들도 본연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도록 점검해야 한다. 중국 공산당이 꿈꿔온 사회주의 정치제도와 민주주의의 완성은 단지 경제의 발전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은 평화를 수호할 수 있는 힘과 흔들리지 않는 국방력을 가져야 한다. 중국 역시 자국의 안전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 인민군대의 정비를 이어가고 있다.
중국 공산당의 꿈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중국화된 마르크스주의는 아직 진행형이다. 무력했던 청나라의 황제, 국민을 약탈했던 국민당의 부패는 중국 역사의 치욕이다. 과거의 치욕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중국 정부의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007년 7월 1일. 홍콩. 중국의 근대사 그 격동의 역사를 온몸으로 겪은 장소. 중국 반환 10주년을 맞이한 오늘날의 홍콩은 이렇게 말한다.
“중국 역사의 함선은 1840년의 굴욕의 바다를 벗어났다!”
고 말이다.
2009년 마카오 역시 중국 반환 10주면을 맞이하게 된다.
민족부흥의 여정에서 [2005년 렌잔 타이완 국민당 주석 중국 본토 방문] 일국양제(一國兩制)를 통해 통일을 완성하는 것은 모든 중국인의 염원이자 사명이었다.
2008년이 밝아왔다. 중국은 이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올림픽을 맞이하기 위해 중국은 세계를 향해 두 팔을 활짝 열었다. 중국은 문을 활짝 열고, 한 걸음 한 걸음씩 민족부흥의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어느 나라든 민족의 부흥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공통된 이상과 신념이 있어야 한다. 중국은 지난 백년간의 고된 탐색을 거쳐 자신들만의 사회주의 노선을 만들어냈다.
오늘 중국의 발전은 역사의 새로운 출발선에 놓여 있다.
중국, 이들이 꿈꾸는 부흥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2007년 10월 15일. 중국 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린다. 중국의 개혁과 발전에 있어 가장 중대한 시점이었다. 중국의 모든 이들을 새로운 사회주의 사업의 길로 인도하겠다는 포부가 발표되었다.
➡호금도 국가주석 연설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 기치 아래, 등소평 이론과 3개 대표론을 지침으로, 과학발전관을 실천하고 사상의 해방과 개혁개방을 견지하고 과학발전, 사회화합을 추진해 샤오캉 사회 전면 건설을 위해 노력하고 분투합시다!
중국, 그들은 오늘 부흥을 꿈꾸고 있다.
역사의 풍랑 속에 고난을 겪었던 그들은 부흥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지난 백 년 동안 역사는 다양한 격동의 시기를 거쳐 새로운 궤도에 들어섰다. 그 동안의 경험을 통해 중국은 마르크스주의와 중국 공산당, 사회주의를 선택했다. 그리고 지금 부흥을 꿈꾸고 있다.
제17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와 17기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를 통해 새로운 지도부가 탄생했다. 중국의 국민들은 새로운 역사의 출발을 기대하고 있다. 모두가 바라고 있는 샤오캉 사회의 건설과 중국이 꿈꾸고 있는 사회주의 건설은 이뤄질 수 있을까?
새롭게 떠오른 태양은 새로운 희망을 꿈꾸게 한다. 중국의 국민들은 민족의 부흥이라는 위대한 목표를 바라보고 있다.
중국은 2010년까지 GDP를 2000년의 두 배로 끌어올릴 예정이다.
2020년, 공산당 수립 백 주년이 되는 해에는 전 국민의 샤오캉 생활을 실현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21세기 중엽, 신중국 수립 백 주년에 맞추어 중등 선진국 수준의 GNP와 사회 제반시설의 기본적인 현대화를 달성한다!
이것이 중국이 꿈꾸고 있는 미래다.
오늘 중국 공산당의 강력한 리더십 아래 중국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들은 성장하고 있다.
중국은 서방 열강의 침입을 받았던 지난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었다.
정치체제와 사상에 대한 신념, 그 힘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그들은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라는 이념을 지켜나가려 하고 있다.
중국은 이제 사회주의의 초급단계에 도착했을 뿐이다. 지난 날 중국 공산당을 선택했던 중국 국민들의 판단을 평가하기에는 아직은 이르다.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시작된 역사.
민족 부흥을 향해 노를 젓고 있는 중국 민족의 함선.
세계라는 바다 속으로 항해하고 있다.